혹시 추울까봐 장갑까지 끼고 나섰는데 절기는 못 속인다더니 몰라보게 포근해졌다. 하기는, 계절이 무색하리만치 따듯한 겨울이었다. 어제 만났던 택시기사 아저씨는 겨울이 따듯하고 날이 좋으면 벌이는 시원찮다며 쓸쓸히 웃었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안 와서 운전하시기는 덜 힘드시겠느니 어쩌느니 철딱서니 같은 소리를 내뱉은 다음이었다. 내 손에는 추어탕과 생선국수를 끓일 미꾸라지와 여름에 먹을 묵은지를 담글 배추들이 들려 있었다. 입으로 들입다 먹을 줄만 알았지 뱉어대는 말 하고는.

  집 부근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그다지 높지 않으니 그냥 뒷산이라고 불러야 하나. 산은 산이고 등산로도 있으니 이름이 있긴 있을텐데 별로 신경쓰지 않고 습관적으로 오르기만 한다. 코끝이 시원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좋아서 한 시간 코스 정도 되는 그 길을 매일 오가고 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대중없이 오르는데 마주치는 연령층이 참 다양도 하다. 잘 깎은 지팡이를 쥔 채 찬찬히 숨을 고르는 노인, 배둘레햄을 염려하는 듯한 중년 부부, 날씬한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젊은 부부,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칭얼대며 한 걸음씩 떼고 있는 분홍색 꼬마... 오늘은 우연히 곁을 스치는 부자의 대화 한 토막을 듣게 되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아들의 자태가 그다지 신통해 보이진 않았더랬다.

  "너는 그 동안 집안 사정을 잘 몰라서 돈 걱정 같은 건 안했지만... 이제는..."

  호리호리한 아들에 비해 듬직하고 훤칠한 체격의 아버지였다. 뒷짐을 진 채 산을 내려오며 아버지는 차분차분 아들을 타이르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아무 말이 없던 아들은 아버지를 어느 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직은 굽어지지 않은 단단한 어깨를 가진 아버지가 돈 걱정은 말고... 라는 말 대신 위와 같은 말을 꺼내기가 사실은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머잖아 이해하게 될지, 나중에 아버지가 되고나서야 뒤늦게 깨달을런지. 나도 가끔 아이들에게 백기를 들 때가 있다. 자존심이 상하고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혹은 습관이 될까봐 몇 번을 그냥 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힘줄도, 핏줄도 사라진 인간의 얼굴을 홀딱 드러낼 때가 있다. 망연히 기대어 보는 측은지심.  

  데친 봄동을 된장에 버무려 끓인 추어탕은 먹어본 것들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달착지근한 봄동 맛과 고소한 추어의 맛이 어우러져 묵은 씨래기를 넣고 끓인 추어탕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담백했다. 얕은 감기에 걸려 며칠을 기분이 애매했는데 이제야 똘망거리며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다. 봄이 오면 한 번 쯤 심한 감기를 앓거나 우울증 비스무레한 것이라도 꼭 겪고 넘어가는 나는 미리 수양과 함께 보신도 겸해야 한다. 그래도 예년보다 따듯했기 때문인지 겨울에서 봄으로 열리는 이 시기가 전처럼 당황실색하진 않다. 겨울답지 않은 기후 때문에 벌이가 좋지 않았던 택시 기사 아저씨나 아버지의 타이름에 아마 잠시라도 가슴이 먹먹했을 그 아이를 떠올리면 입춘이 너무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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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4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7-02-0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저는 늘 메일을 보내면 잘 갔는지 안 갔는지를 염려한다죠. 끙~

Mephistopheles 2007-02-0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꾸리지..갈으셨나요.아님 동째로 탕에 넣으셨나요..?? ^^

레와 2007-02-0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항.. 배고파요.. 깐따삐야님..ㅡㅜ


어제와 오늘, 걷기 참 좋은 날씨더군요.
포근한것이.. 이대로 봄이 올까요???

개츠비 2007-02-0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봄,.........~ ! 천국의 기운 같습니다. 저도 며칠전 저녁에 그 기운을 느꼈답니다. ^^

이게다예요 2007-02-05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제가 입춘인 줄도 모르고... 감기 때문에 방에 보일러 잔뜩 올려놓고 이불 뒤집어 쓰고 보냈는데 말이죠..

깐따삐야 2007-02-0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일단 미꾸라지를 잘 으깨지도록 푹 고아서 엄마손으로 조물조물~ 했습니다. 추어탕 좋아하시나 봐요. ^^

레와님, 이대로 포근한 봄이면 좋은데 아마도 긴긴 여름이 일찍 올 것 같아요. 작년처럼 지루한 더위가 계속되겠지요. 으휴...

sretre7님, 천국의 기운이라... 며칠 전 저녁에 무슨 일이?!

이게 다예요님, 저도 채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요. 목이 칼칼한 것이, 신경 쓰이네요. 어서 쾌차하시길 바래요!
 





  예전에 소풍 가는 날 아침, 엄마가 김밥을 싸시면 김밥 꼬다리를 냉큼냉큼 집어먹던 추억이 있다. 김밥 꼬다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꼬다리 김밥을 싸주셨다. 옛날엔 기차 안에서 이 꼬다리 김밥을 팔았었다고. 기차통학생들의 추억의 김밥이란다. 당시 가격은 여섯 개에 삼백원.

  단무지를 참기름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것 이외에는 오히려 평소에 싸먹던 김밥보다 속재료가 덜 들어갔다. 그냥 집에 남아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둘둘 말면 된다. 물론 대충 거들고 먹는 데에만 열심인 사람은 뭐든지 쉬워보이는 법.

  김밥은 맑게 끓인 된장국이나 콩나물국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라면과 함께 먹어도 좋지만 엄청난 열량을 무시 못하니 되도록 소박하게. 일반 김밥도 맛있지만 충무김밥이나 꼬다리 김밥처럼 간소하고 담백한 김밥도 별미 중에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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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2-0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힘좋게 꽉꽉 말아졌군요. 뭉쳐 있는 밥알을 보니 갑자기 힘이 나는 기분. 헷.
양념 단무지로 싼 김밥. 담엔 그렇게 해봐야겠어요.

깐따삐야 2007-02-0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의 요리페이퍼는 늘 감칠맛이 돕니다. 김밥 페이퍼, 기대할게요. ^^

Mephistopheles 2007-02-0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풍날 아침은 언제나 꼬다리 김밥..!!

깐따삐야 2007-02-0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알라디너들도 언제 다같이 소풍 가요. 김밥 준비하겠습니다!

레와 2007-02-0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ㅠ_ㅠ

이 시간에 요런 사진은 정말 강력한 테러 사진입니다!!
깐따삐야님!!

아.............................. 배고파......ㅡ.ㅜ

이게다예요 2007-02-0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주워먹었는데 결혼하고 김밥 싸니까 저렇게 안 되더라고요. 엄청 실망했어요. ㅋ

깐따삐야 2007-02-0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어쩔까나. 양손에 쥐고 들입다 뛸 수도 없고. ^^

이게 다예요님, 저도 저렇게 안 말아져요. 동그랗게도 안되고 속재료들은 귀퉁이로 쏠리거나 삐져나오기 일쑤라지요. 적어도 김밥 싸는 건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말이지요...
 

  며칠 전에 뉴스에서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들쳐매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느 구청에서인가, 환경미화원을 뽑는 실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계속 꿈에 나온다. 얼굴이 노란 사람들은 제대로 헉헉 소리도 못 내고 체육관의 끝에서 끝을 달리고 또 달린다.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고 헐렁한 바지 속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춘 채 사람들은 계속 달린다. 대신해 줄 것도 아니면서 다리 뻗고 누워서 꿈으로나 꾸고 있다니, 뉴스보다 더 처절한 꿈에 마음이 좀 거시기 했다.

  내 일상은 34%의 잡소리, 10%의 엄살, 56%의 몽상으로 굴러가고 있다. 달지도 쓰지도 않기에 다소 사치스럽다. 낼모레가 그새 입춘이고 개학이 머지 않았다.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별로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 언짢기만 하다.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들쳐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심정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모래주머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걸 들쳐매고 힘겨루기, 속도전만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입춘이 가까워오면 나는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무장해제했던 심신을 일으켜 다시 철갑상어로 둔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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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2-0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49프로의 방치, 35프로의 빈말, 16프로의 엄살로 살아가요.

깐따삐야 2007-02-0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요. ㅋㅋ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헌책방에 들렀고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비아트릭스 포터의 그림 이야기책 시리즈를 발견했다. 동행했던 열두살배기 외사촌은 눈을 반짝이더니 푸른 자켓을 입은 토끼가 그려진 <진저와 피클 이야기>를 집어들었다. 영화에 나왔던 그림책 속의 귀여운 주인공들이 첫번째 속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플롭시 버니즈, 피터 래비트, 제미마 푸들 덕... 동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며 기쁨에 겨워하던 포터(르네 젤위거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1900년대 초, 칙칙하고도 점잖은 의상 속에 가까스로 우겨넣은 듯한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는 어쩐지 불편하고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고스란히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옮겨오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면서도 깜찍한 그림 속 주인공들, 앙증맞게 꿈틀대는 동화적 상상력이 알맞게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 노만 워른(이완 맥그리거 분)의 죽음 이후부터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던 후반부와 바로 뒷줄에서 거의 에로영화를 찍고 있던 커플의 소음이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상상력과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 케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출판하려 하지만 1902년의 영국 사회는 그녀를 결혼하지 않고 책만 쓰는 독특한 노처녀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만 워른이라는 편집자가 포터의 재능과 그림의 매력을 알아보고 그녀의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책이 나오기까지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장사치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포터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포터의 부모는 포터에게 여름 동안 런던을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고 포터는 노만과의 사랑을 믿고 훗날을 기약한 후 잠시 헤어져 있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있던 사이, 노만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고 그 충격으로 포터는 잠시 방황하지만 노만을 통해 친구가 되었던 밀리(에밀리 왓슨 분)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포터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한적한 시골 농장에 머무르기로 하고 자신이 그림책을 팔아 벌어들인 인지세로 개발 위기에 놓여있던 땅을 사들이며, 그 과정 중에 만난 윌리엄 힐리스(로이드 오웬 분)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는 후일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삼십대 노처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넘치도록 보여주었던 르네 젤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사랑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그 때 그 시절에 놓아두기엔 너무 아깝다 싶은, 매력적인 동화작가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살짝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수더분한 미소는 여전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토끼나 개구리와 넉살 좋게 대화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르네 젤위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영원한 <영 아담>일 줄 알았던 이완 맥그리거의 출현에는 왜 이런 도발을 하는 걸까, 갸우뚱했고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의문이 풀릴 턱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를 본 것은 반가웠다. 그래도 이완 맥그리거는 조니 뎁처럼 점점 더 다양한 얼굴로 등장하여 관객을 놀래키거나 즐겁게 하지 말고 계속 눈과 허리와 다리에 힘주고 살았으면 좋겠다. <트레인스포팅>에서처럼 늘상 혈기왕성할 순 없더라도 토끼 그림을 보면서 눈에 별까지 띄우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한다든지, 반들반들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왠말이며 그마저 비에 다 젖은 채로 나타나서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1902년의 영국이나 지금이나 가정주부 이상, 또는 그 이외의 꿈을 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남성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어느만치 현실이라고 인정해 오던 바였는데 밀리와 포터의 신실한 우정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팽배한 자존심이 아니라 넉넉한 자의식을 지닌 두 여성의 대화와 우정은 따스하고도 멋스러웠다. 우연처럼, 서점에서는 보봐르와 샤르트르를, 헌책방에서는 브레히트와 루트 베를라우의 이야기를 읽었다. 연인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도 동지로서, 친구로서, 우정의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걸까. 일시적인 냉소일까. 넘칠 듯 아슬아슬한 열정은 어쩐지 불안해서 더 흥미로운 장난같다. 동지애에서 싹튼 듬직한 우정을 포터와 밀리, 포터와 노만, 포터와 힐리스에게서 읽었고 성장을 위한 자양분과도 같은 그 사랑들이, 예전에는 다소 싱겁게만 보였던 그 관계들이, 이상향이라도 된 듯 벅차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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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이 이 영화를 보여달라고 하길래 잠깐 검색해봤는데....
생각보다 러닝타임이 짧더라구요...자를 내용의 영화는 아니므로..
워낙 짧게 만들어진 영화이구나 싶었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짧은 영화에요. 스토리도 평범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심심해지는. 그래도 재미있었고 이완 맥그리거를 봐서 좋았답니다. ^^
 

#

  Loving students means giving them the ability to hurt you... it is part of the burden of being a good teacher... When I feel hurt by them that I know I'm suffering for good reasons.

  어찌어찌하여 흘러들어간 블로그에서 발견한 글귀다. 교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오며가며 새겨야 할. 새학기에 난 다른 곳에 있겠지만. 돌아와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아쉬움도 드는.

 

#

  체중이 좀더 줄어서 바지들을 수선했다. 저주받은 하체에도 축복이 오려나.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면 군침은 도는데 식욕이 예전같지 않다. 식욕 뿐인가, 했더니 예전같지 않은 게 한둘이 아니구나. 입체감을 잃은 욕망들. 머리에 웨이브라도 줘야 할까.

 

#  

  진열장 오른쪽에 놓아두었던 동자승이 왼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 다음 날 보니 또 다시 왼쪽으로 옮겨져 있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옆으로 조금 틀어서 오른쪽으로 옮겼는데 오후에 다시 보니 왼쪽으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원인은 소리 없이 강한 아빠의 고집. You Win. 먼지 닦을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는 정리벽만 고집하는 건 아빠를 빼다박았다는 엄마의 지적. 더 정확히 말해보면 쓸데없는 걸 좋아하는 게 닮은거지. 아빠의 휴가와 나의 방학이 겹친 요즘. 엄마는 가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우리 부녀는 효용이니 실용이니 하는 말들과 언제쯤 화해할 수 있을까.

 

#

  '직녀에게'란 노래가 있다. 중학생이었을 때, 마방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첫 시간에 마방진이라는 숫자게임을 설명해 주었고 마방진이라는 게임 이름은 선생님의 지루하고 기다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보다보다 너희들처럼 공부 안하는 애들은 처음 봤다며 맞는 말만 하더니 어느 날 수업을 하다 말고 굵다란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저렇게 청승맞은 노래를 저렇게 진지하게 부르다니, 우리는 총각선생님의 갑작스런 도발 앞에서 키득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틈만 나면 조용히 잠을 청하는 내게 특혜받았느냐 어쩌느냐 하면서 상처를 주었던 선생님. 당신도 밤새 라디오 듣고 엽서 쓰느라 고심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는 척 해봐. 안 졸린가, 라고 말하진 못했고 그냥 묵묵히 미워하기만 했었다. 얼굴만 길면 다야, 그까짓 수업 안들어도 백점이다. 그만치 재수없던 여학생이 교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 인과응보란 말을 떠올릴까, 개과천선이란 말을 떠올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직녀에게'란 노래가 가끔 당길 때가 있다. 더욱이 누군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라도 부르는 날이면 잠시나마 마음이 방긋, 웃는 것도 같다.  

 

#

  고향 언니가 결혼을 했다. 어릴적에 헝겁을 오려서 인형 옷을 예쁘게도 만들던 언니는 이젠 옷가게를 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캔디 캔디>라는 책을 좋아했다. 원래는 말랐었는데 보약을 많이 먹어 뚱뚱해졌다고 주장하던 언니의 친구는 언니에게 시리즈로 나온 그 책들을 빌려주기 시작했고 나는 언니에게서 그 책을 다시 빌려보는 식이었다. 드디어 언니가 마지막 권을 빌려온 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언니에게 그 책을 내가 먼저 봐야겠다고 했다. 언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한 마디도 안하고 함께 버스에 올랐고 집으로 오는 내내 침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토라진 채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언니도 동생과 함께 총총 사라졌다.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꽁해 있던 오후, 문득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는 순간 너 먼저 읽어, 라는 말과 함께 급하게 전화가 끊겼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언니네 집으로 달려가서 <캔디 캔디>를 가져와서는 별로 재미없는 캔디의 편지들을 읽으며 먼저 읽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언니는 성씨만 다를 뿐 나와 이름이 같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착했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

  오빠는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는 엄마한테 말하길, 엄마, 나 두부 넣고 끓인 김치국 먹고 싶어...란다. 언니도 옆에 있었을텐데 한 대 맞지나 않았을런지. 흔하다 못해 뻔하기까지 한 두부와 김치라니, 언니는 오빠의 만행에 두부처럼 하얘졌거나 김치국물처럼 붉어졌거나. 아니면 이젠 아예 그러려니 하거나. 결혼한 오빠가 찾는 음식들은 희한하다. 지극히 평범하다는 의미로 희한하다. 김치찜, 고사리나물, 계란말이, 김밥, 깻잎장아찌, 멸치조림... 좀더 나아가봤자 소면이 아닌 당면을 넣은 갈비탕 정도. 회식자리에서, 또는 출장을 다니며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을텐데도 언제나 전화기 너머로 칭얼대는 메뉴들은 간소하기 짝이 없다. 오빠의 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긴 한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입장에서 그런 것일 뿐,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입 짧은 남자는 질색이다.

 

#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물음. 그럼에도 간혹 던질 수 밖에 없는 물음. 책을 읽을 시간에 좀더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을까. 과연 책도 읽고 사람들과 부대꼈던 이들은 똑고른 나이테를 지닌 채 단단하게 성숙해 있을까.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연애를 걸고 더 많이 좌절했다면. 하지만 그렇듯 파란만장했던 이들도 결국엔 재테크와 다이어트와 아이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투적인 생활인이 되고 말텐데.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진부한 이 물음이 꽤 신선하게 들릴 날이 올지도 모르고 이런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다니 겨울밤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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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1-24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깨닫기 위해선 아파야만 할까. 그냥, 아프지 않고, 돌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깐따삐야 2007-01-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개츠비 2007-01-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때까지 깨달아야 하는게 사는건가 봅니다. 그러나 뭐든 많이 해보는게 중요한거같습니다. 연애도 공부도 ...마니마니..그래야 후회가 없는것도 같습니다.

깐따삐야 2007-01-2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retre7님, 저란 인간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많이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후회로 점철된 삶... 에고. 사람은 생긴대로 살고, 성격이 팔자 만든다는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