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헌책방에 들렀고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비아트릭스 포터의 그림 이야기책 시리즈를 발견했다. 동행했던 열두살배기 외사촌은 눈을 반짝이더니 푸른 자켓을 입은 토끼가 그려진 <진저와 피클 이야기>를 집어들었다. 영화에 나왔던 그림책 속의 귀여운 주인공들이 첫번째 속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플롭시 버니즈, 피터 래비트, 제미마 푸들 덕... 동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며 기쁨에 겨워하던 포터(르네 젤위거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1900년대 초, 칙칙하고도 점잖은 의상 속에 가까스로 우겨넣은 듯한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는 어쩐지 불편하고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고스란히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옮겨오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면서도 깜찍한 그림 속 주인공들, 앙증맞게 꿈틀대는 동화적 상상력이 알맞게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 노만 워른(이완 맥그리거 분)의 죽음 이후부터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던 후반부와 바로 뒷줄에서 거의 에로영화를 찍고 있던 커플의 소음이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상상력과 그림에 대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 케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출판하려 하지만 1902년의 영국 사회는 그녀를 결혼하지 않고 책만 쓰는 독특한 노처녀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만 워른이라는 편집자가 포터의 재능과 그림의 매력을 알아보고 그녀의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책이 나오기까지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장사치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포터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포터의 부모는 포터에게 여름 동안 런던을 떠나 있을 것을 제안하고 포터는 노만과의 사랑을 믿고 훗날을 기약한 후 잠시 헤어져 있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있던 사이, 노만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고 그 충격으로 포터는 잠시 방황하지만 노만을 통해 친구가 되었던 밀리(에밀리 왓슨 분)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포터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 한적한 시골 농장에 머무르기로 하고 자신이 그림책을 팔아 벌어들인 인지세로 개발 위기에 놓여있던 땅을 사들이며, 그 과정 중에 만난 윌리엄 힐리스(로이드 오웬 분)와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는 후일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삼십대 노처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넘치도록 보여주었던 르네 젤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사랑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그 때 그 시절에 놓아두기엔 너무 아깝다 싶은, 매력적인 동화작가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살짝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수더분한 미소는 여전하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토끼나 개구리와 넉살 좋게 대화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르네 젤위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영원한 <영 아담>일 줄 알았던 이완 맥그리거의 출현에는 왜 이런 도발을 하는 걸까, 갸우뚱했고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의문이 풀릴 턱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그를 본 것은 반가웠다. 그래도 이완 맥그리거는 조니 뎁처럼 점점 더 다양한 얼굴로 등장하여 관객을 놀래키거나 즐겁게 하지 말고 계속 눈과 허리와 다리에 힘주고 살았으면 좋겠다. <트레인스포팅>에서처럼 늘상 혈기왕성할 순 없더라도 토끼 그림을 보면서 눈에 별까지 띄우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한다든지, 반들반들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왠말이며 그마저 비에 다 젖은 채로 나타나서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1902년의 영국이나 지금이나 가정주부 이상, 또는 그 이외의 꿈을 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남성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어느만치 현실이라고 인정해 오던 바였는데 밀리와 포터의 신실한 우정은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팽배한 자존심이 아니라 넉넉한 자의식을 지닌 두 여성의 대화와 우정은 따스하고도 멋스러웠다. 우연처럼, 서점에서는 보봐르와 샤르트르를, 헌책방에서는 브레히트와 루트 베를라우의 이야기를 읽었다. 연인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도 동지로서, 친구로서, 우정의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걸까. 일시적인 냉소일까. 넘칠 듯 아슬아슬한 열정은 어쩐지 불안해서 더 흥미로운 장난같다. 동지애에서 싹튼 듬직한 우정을 포터와 밀리, 포터와 노만, 포터와 힐리스에게서 읽었고 성장을 위한 자양분과도 같은 그 사랑들이, 예전에는 다소 싱겁게만 보였던 그 관계들이, 이상향이라도 된 듯 벅차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