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대부분을 친정에서 공수해다 먹는데도 모처럼 당면한 전업주부의 일상이란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밥을 차렸다 치웠다 하며 꼬박꼬박 반복되는 나날. 하도 움직이니 발뒤꿈치가 갈라질 정도로 발바닥에선 후끈후끈 열이 나고 손가락과 손등도 거칠거칠. 한편으론 싱그런 숲처럼 자라나는 영달이를 온종일 바라보는 덕분에 안면 근육 하나하나가 화알짝 펴질 만큼 웃음도 끊이지 않는다. 영달이는 요즘 흘러나오는 동요를 따라부르며 깜찍한 율동도 하고 자신만의 옛날 이야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지어내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어제는 친정엄마와 내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둘이 오랜만에 만났나 보네."라고 심상히 말해 가족 모두 빵 터졌다. 영달이의 엄마로서 영달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정성들여 대답하는 스스로를 보며 학교 선생으로서의 모습도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질러 자르거나 핀잔과 비판을 일삼던 순간들. 다 듣고 있기가 귀찮아 사실확인서 따위나 내밀며 또박또박 알아볼 수 있게 쓰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시간들. 새해에는 무엇보다 '잘 들어주는 엄마,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 한 줄 공들여 읽는 일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사느라 바빠 못 만났던 친구들도 하나 둘 만났다. 벌써 두 아이의 엄마인 K는 첫눈에도 많이 지쳐 보였다. 둘째 이야기를 하길래 손사래를 쳤고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무리라고 말했다.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기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본인의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고 둘째를 낳아 씩씩하게 키워내고 있는 K를 보니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E는 여전히 싱글인데 못 보던 사이 더 예뻐지고 화려해졌다. 그녀는 결혼을 하기엔 본인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양심적인 선택일 수 있다고 호응했다. 나 역시 이럴줄 모르고 한 결혼이었지만 막상 가정을 이루고 보니 그간의 소소한 선택들 마냥 관두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뭔가 지엄하고 강력한 힘이 있어서 계속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던 네가 참 많이 변하긴 했지, 라며 E는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계속 싱글로 남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갖가지 장단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녀의 바른 성정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1년 더 있기로 했다. 5년을 꽉 채우는 것이다. 이동 시기마다 머리 굴리는 사람들이 하도 많고 내 머리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구조물일 뿐이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가 싫어 순리에 맡기기로. 운명이 이끄는대로 살리라. 마음을 정하니 편하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 나하기 나름이란 생각을 하다보니 주변의 웅성거림이 아스라할 뿐. 그저 내년에도 집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 배정되길 바랄 뿐이다. 영달이가 내년이면 지금보다 조금 더 커 있을 테고 내후년이면 그보다 더 많이 자라날 테고.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 친정엄마도 조금 편해지시겠지. 첩첩산중의 육아에 마치 환한 여명이라고 비칠 것처럼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노긋해진다.
며칠 전엔 남편의 없는 숱에서 흰머리 몇 가닥을 솎아냈다. 그는 나에게 벽두부터 영달이 다 키우면 산으로 들어가서 책이나 읽으며 자유롭게 살라는 거의 체념 조의 이야기를 했다. 마치 미약한 너에게 자유를 허하노라, 는 선지자의 어투로. 정말? 진짜? 반색을 하며 반기는 척 했지만 다 키운다는 게 대관절 언제이며 저 사람이 평소에 나를 뭘로 보길래 저런 말을 하고 앉았나, 의아했다. 소개팅을 하고나서 거의 회한조로 "자꾸 그 사람 단점이 눈에 거슬리는데 그 사람이라고 내 단점이 안 보이겠어. 전화받는 말투라든가. 게을러서 약속시간에 늑장 부리는 거라든가..." 중얼거리던 E의 말처럼 이 남자라고 왜 나에 대한 불만이 없겠는가. 더욱이 그도 나도 인간이란 절체절명의 역경을 겪어내더라도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하간 영달이가 태어난 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우리는 부부애라기 보다는 거의 전우애적 결탁으로 살고 있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고 짬 나면 바로 드러누워 눈을 붙이고... 남편의 비유처럼 마치 1박 2일을 찍는 것처럼.
2013년 새해 첫 독서. 남편이 선택한 책. 난독증도 아니련만 이 남자는 이 책을 읽어내는 데 무려 한달을 소모했다. 소파 위, 선반 위, 식탁 위, 텔레비전 옆에 소리소문 없이 옮겨다니는 책을 내가 제자리에 꽂고 다시 또 제자리에 꽂기를 여러 번. 다 읽었다는 말과 함께 책발이 먹혀서인지 요즘 나의 어명에 유치하게 토 다는 일이 줄었다. 책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잠깐 변화시키기는 한다. 책이 주는 효용 중 분명한 사실 중 하나임. 오은영 선생님의 말씀은 방송으로 볼 때나 책으로 읽을 때나 마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만약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면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은 책은? 이 질문에 영달이가 고른 책이다. 토끼를 좋아하는 영달이는 토끼 담요를 항상 갖고 다니고 마트에 가서도 하양 토끼, 까망 토끼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책도 토끼를 좋아하는 영달이를 위해 사준 책인데 토끼가 아무나 앉으라고 만든 의자에 여러 동물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나귀가 가져온 도토리가 왜 밤으로 변했을까? 도토리는 밤의 아가였던 걸까? 요즘은 책을 읽고 나서 질문을 하거나 퀴즈를 내면 곧잘 똘똘하게 대답하는 영달이 덕분에 유아도서 읽기가 참 재미난다.
학기 중에 밤에 졸면서 한번 슬렁슬렁 읽고 방학이 되자 다시 꺼내든 책. <안나 카레니나>와 <괴테의 말>을 읽고 천재들의 생활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물론 책에는 톨스토이나 괴테마냥 천재라고 명명할 수 밖에 없는 작가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작가 군상이 등장한다. 뗄레야 뗄 수 없는 읽기와 쓰기의 구도를 균형 있게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근무조로 학교에 나와 있다 보니 간만에 긴 글을 쓴다.
이제 점심 먹어야겠다. 아이들이 오는 오후엔 바빠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