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은가. 결혼식이 많네."

영달이와 어린이랜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예식장 입구의 갓길이 주차해놓은 차, 주차하려는 차들로 붐볐다. 완연히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 결혼기념일이 지나버렸구나. 나의 말에 남편은 정신없이 살아서 챙길 새도 없어, 바로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하긴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도 조금 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영달이 생일과 이틀 사이로 붙어 있어 사라져버린 내 생일과 정신없이 사느라 기억 저편으로 건너가버린 결혼기념일. 영달이라는 엄청난 존재감 앞에서는 그까짓 날들, 뭐가 중요한가 싶으면서도 굳이 합리화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쓸쓸하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에 나는 무엇을 했더라. 평소처럼 수업을 했고 사이버연수가 완료되었는지 체크했고 간간히 오가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했고 목소리를 쥐어짜며 방과후수업을 했고 퇴근해서는 영달이와 공원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자기 전에는 책을 읽었고 허리가 아파서 근육통 약을 먹었다.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마쳤다, 싶은 하루. 착한 하루였다. 남편은 갑자기 생각났다는듯 외쳤다. 그래도 당신 운동화 사신었잖아. 운동화! 아, 맞다. 나는 새 운동화를 샀다. 겉모양새는 멀쩡한데도 품이 늘어나 앞꿈치가 자꾸 앞으로 쏠리는 탓에 탄탄하게 모양이 잡힌 새 것을 샀다. 그런데 운동화는 언제라도 구입하는 품목 아닌가. 결혼기념일과 운동화는 별로 안 어울리지 않나. 물론 속생각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영달이가 한창 인형뽑기에 꽂힌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 가르텐 비어 옆에 두 개의 인형뽑기 기계가 놓여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다람쥐, 토끼, 비버 등을 뽑았다. 남편은 감각이 중요하다고 하고 나는 집중력을 강조하는 편인데 뽑기 실력은 남편이 좀더 우월하다. 하지만 영달이는 뽑은 인형 자체보다 인형을 골라잡는 과정, 뽑았을 때의 환호성, 놓쳤을 때의 안타까운 제스처 등을 더 좋아하고 엄마인 나는 그 모든 것을 과장되게 보여준다. 가르텐 비어는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곳이다. 약 4년 후, 그와 그녀는 가르텐 비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를 안은 채 인형을 뽑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복사실 철문에 손가락이 끼어 손톱의 상처가 채 낫지 않았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자는 인형을 향해 제대로 조준을 못한 여자를 탓하고 있고 그 남자의 눈빛에 마냥 부끄러워하던 여자는 곧 죽일 듯 남자를 쏘아보며 시끄러워요, 집중을 못하겠잖아! 괴성을 지르고 있다. 차마 상상도 못했던 장관이다.

 

 

 

 

 

 

 

 

 

 

 

 

 

 

그 와중에 읽게 된 책. 요즘 우리 학교 도서관에 신간이 잔뜩 도착해서 행복에 겨워하는 중인데 이 책을 발견하고 사서 선생님이 더 좋아졌다. 아름다운 책. 아직 다 읽지 않았는데도 이 책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임영태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이 떠오르기도 하고 옛날 주말의 명화로 보았던 <마리안의 허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내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깨달음. 이야기의 골자는 평범한데 오감에 호소하는 사실적인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안목과 솜씨가 상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전 나얼의 '바람기억'이 너무 슬퍼서 더 이상 듣지 못하듯 이 소설 역시 더 이상 진도를 나가기에 너무 슬프다는 것이 슬프다.

 

지금은 이런 단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았다. 그런 습성들이 짜증스러웠던 이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짜증스럽다면 도로시를 그만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 p.76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의 단점과 함께 사는 일이 그의 부재를 견디는 일보다 좋았다고. 우리가 정신없이 살던 지금보다 옛날, 서로를 향한 정신이 좀 있던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인내하는 일이 참 힘들었다. 쿨하게 인정하면 좋은데 쿨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서, 짜증짜증한 갈등과 끈적끈적한 인내로 서로를, 하루를 버텼다. 지금은 영달이라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와 상대하느라 대적할 시간은 커녕 두세 마디 이상의 대화조차 힘들고, 어쩌면 인생의 또다른 단계로 접어든 셈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서로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많았는지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야 하지 않는가, 반문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그가 없는 나를 상상한다. 세차는 누가 하지? 영달이 담요의 토끼 날개는 누가 꿰매 주지? 쓰레기 분리수거는 누가 하지? 매트하고 이불은 누가 털지? 어항 청소는? 영달이 장난감도 조립해야 하고 운동화 끈도 그 사람이 더 잘 매는데... 몹시 간악하게도 그가 부재함으로써 불편해질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더불어 허구언날 널브러져 있는 것만 좋아한다고,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다고 구박했는데 그가 널브러지기 직전 바쁘게 움직이던 모습과 머리를 써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싹둑싹둑 편집되고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상실과 부재를 묘사함으로써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왜, 어떻게 중요한지 통찰하는 소설. 한 치 앞을 모르기에 막 살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모르기에 잘 살아야 된다고 격려하는 소설. 시종일관 덤덤하고 잔잔함에도 교묘하게 상처를 주었다가는 그것을 다시 치유하는 소설. 결혼기념일 즈음, 나는 운동화만 산 것이 아니라 앤 타일러의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을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책이 내게로 와서.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소설을 계속 읽기 힘들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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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 타일러는 언제나 일상을 돌아보게 하죠. 일상을, 일상의 디테일하고 사소한 부분을 가장 잘 짚어내요. 페이퍼를 읽으면서, 앤 타일러는 깐따삐야님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깐따삐야 2012-10-17 11:37   좋아요 0 | URL
언젠가도 말했듯 다락방님의 추천도서는 대부분 다 재미있고(발췌, 인용하신 문장들을 보면 책욕이 마구 일어요!) 이제는 그 책들 중에서 저와 코드가 맞는 책을 고르는 재주까지 생겼습니다. 앤 타일러의 <종이시계>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치니 2012-10-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 님, 요새 몰래 뭐 좋은 거 먹어요? 글이 다 예술입니다. :)

깐따삐야 2012-10-17 11:38   좋아요 0 | URL
요며칠 오징어회무침이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데 어제 엄마가 해주셨어요. 그런 음식을 먹으면 마구 솔직해지나 봅니다.^^

조선인 2012-10-1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댓글에 한표. 뭘 먹으면 이런 글을 쓰시나요?

깐따삐야 2012-10-17 11: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징어회무침 입니다.^^

조선인 2012-10-18 08:25   좋아요 0 | URL
좋았어요. 저도 오징어를 먹겠어요. 불끈!

레와 2012-10-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는 참 고운데, 내용은 슬픈가봐요? 그래도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깐따삐야 2012-10-17 11:42   좋아요 0 | URL
책표지가 자물쇠 달린 옛날 다이어리마냥 아주 곱고 약간 촌스럽고 좋아요. 따듯한 감성의 레와님도 이 책을 싫어하진 않으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