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중국 속담이라던가.
영달이가 아파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나는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이 넘어가냐. 밥이 넘어가. 가슴은 미어지고 입은 깔깔해도 밥은 넘어가더라. 어쨌거나 밥을 꾸역꾸역 넘겨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내야만 했다. 나는 엄마니까.
병원을 세 군데나 돌았다. 가장 일찍 문을 여는 내과, 단골 소아과, 그리고 입원실이 갖춰진 소아병원. 소아병원에 가서야 정확한 병명을 알았고 소화가 잘 된다는 특수분유와 약을 지어왔다. 다행히 영달이는 물이든 분유든 조금씩이라도 먹으면서 앓았다. 양볼이 석류마냥 시뻘개질 정도로 열이 오르는데 입을 앙 다물고 고통을 참다, 울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는 말에 눈앞이 아찔했는데 시간이 약인지 이제는 속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아침엔 식탁 근처에 다가와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짝짜궁 시늉도 해가며 평소처럼 놀기 시작했다. 네 웃는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나더라. 그간 못 먹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먹이고 싶은 것이 많지만 당분간은 자제하기로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모든 원인을 추측하고 되짚어가며 자책도 하고 공연히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애 키워준 공은 없다더니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이가 아프니 모두가 죄인 같았다.
의사들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고 예민해진 나는 네 자식이 아니니까 그러냐, 싶다가 인터넷도 찾아보고 다른 엄마들의 얘기를 듣고는 이맘때쯤 아기의 면역력이 떨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 차례씩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내 아이만은 아니길, 했던 것이 진심이고 앞으로도 아프지 않고 컸으면, 하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지만 아이 키우다 보면 계속 겪어야 할 일이라고 덤덤히 얘기하는 주변 부모들의 말에 쪼그라드는 심장을 움켜쥐며 끄덕끄덕.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거울에 비친 흰머리 몇 가닥을 발견하곤 아, 내가 속을 썩긴 되게 썩었나 보다, 자각했다. 한 이틀 사이에 이렇게나 허옇게 새다니. 영달이가 흠씬 가벼워졌다며 안타까워하는 내게 남편은 체중계에 혼자 오르고, 다음번에 영달이를 안고 오르면서 우리 영달이가 여전히 짱짱한 소녀라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체중은 많이 안 빠졌어도 살이 이렇게나 물렁거려졌다며 어떻게 도로 찌우지, 동동거렸다. 항상 내 몸무게는 안 빠진다고 툴툴거리지만 자식은 뚱뚱하고 날씬하고 못생기고 예쁘고를 떠나서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것이 부모 마음인가 보다.
오늘 아침엔 미역국에 밥을 말아 익어가는 김장김치와 천천히, 모처럼 맛이 있는 식사를 했다. 못 먹는 아이 앞에서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고역이었는데 영달이의 웃는 얼굴을 보니 밥이 부드럽고 따듯하게 넘어갔다. 영달이는 기운이 좀 생기니 평소처럼 고집도 부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조차도 반갑고 고마워 우리 딸, 다시 살아났네, 하며 좋아라 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침착하고 의연한 엄마가 되기는 글렀다.
오전 TV 프로그램에서 쪽방촌 할아버지를 보았다. 불편한 몸으로 리어카를 끄는데 저 할아버지도 나고 자랄 땐 엄마의 귀한 자식이었을텐데 하는 생각. 아이가 한번 아프고 나니 남이 남이 아니고 남이 남처럼 안 보인다. 그리고 초조해하던 내게 소아병원을 알려준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키 큰 아기 엄마, 예방접종 하러 가서 다시 보게 되면 꼭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시의적절한 조언으로 은혜를 입어 우리 영달이가 조금 덜 아파도 되었다. 통성명도 안 했고 사는 곳도 모르지만 같은 아기 엄마라는 끈만으로도 위안이 되었고 도움을 입었다. 얼굴과 눈빛을 기억하니 꼭 한번 더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