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이라고 엄마가 닭을 삶았는데 나는 보신탕이 먹고 싶었다. 작년까지는 시장에서 고기를 사와 엄마가 직접 손질해서 끓여주셨지만, 올해는 영달이도 있고 왠지 께름칙했다. 남편한테 말했더니 괜찮게 하는 집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하얀집'이라는 간판을 건 가정집 겸 식당이었는데 초복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탕을 먹을까 하다가 좀더 푸짐하게 먹고 싶어 보신전골을 시켰다. 먼저 고기를 부추와 곁들여 남김없이 먹은 다음, 나중에는 밥까지 볶아먹었다. 남편 말대로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집에서 먹는 것만큼 깔끔하거나 넉넉하지는 않았다.
연애 시절, 데이트를 할 때도 우리는 삼계탕, 보신탕 등 탕을 참 많이 먹었다. 한여름, 한낮에 만나면 보충수업으로 지쳐 있는 그와 여름만 되면 이따금씩 어지럼증이 도지던 나는 탕을 먹자는 데에 의기투합했다. 교육청 근처의 허름한 식당, 콩국물을 넣고 끓여낸 삼계탕이 고소하니 맛있었고, 여고 골목의 뚝배기 위에 접시 올린 보신탕집도 괜찮았다. 터미널 맞은 편의 추어탕집은 우거지와 깍두기가 맛있었다. 그렇게 뜨끈한 탕을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이나 아이스커피 한잔이면 눈이 반짝, 팔다리가 번쩍, 옹골찬 기운이 다시금 샘솟는 느낌이었다.
비실대던 여름, 한의원에 갔더니 내게 권해주는 음식들이 또 탕이었다. 대개 혐오식품으로 인식되는 것들이라서 왜 난 하필이면 이런게 먹고 싶지, 했는데 몸에서 먼저 알고 내가 먹어주기를 기다렸다니, 다소 비약인지는 몰라도 참 신기했다. 한의사는 많은 근력을 요하는 운동은 삼가하고 꾸준히 그 음식들을 챙겨 먹으라 했다. 탕이라는 것이 영양만큼이나 열량도 높아 그것만 꾸준히 먹다가는 건강 챙기려다 건강 해치는 꼴이 되겠지만, 요즘도 기력이 달리면 인삼 넣고 푹 고아낸 닭, 훈제 오리, 얼큰한 보신탕부터 생각난다. 그런 것들을 원없이 먹고 나면 영달이도 거뜬히 안아줄 수 있고 잠을 조금 덜 자도 갤갤대지 않는다. 당분간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삼계탕도 아니고 보신탕에 대한 호의를 공공의 장소에서 드러낸다는 것은 아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작년 어느 날, 막 여름이 시작될 무렵, 부장 선생님이 나에게 조만간 남자들끼리 철엽을 할 계획인데 먹을 줄 알면 끼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끼워달라고 그랬더니 옆의 연세 지긋한 선생님이 눈을 내리깐 채 말하기를, "여자가 무슨... 혹시 먹을 줄 알아도 그걸 입밖에 내는 게 아니지." 순간 여자, 라는 말이 귀에 탁, 걸려 "먹는 음식 앞에서 여자, 남자가 어딨나요. 너무 옛날 생각 아녀요?" 라고 대꾸했다. 부장 선생님도 오늘 아침 인성지도 주제가 양성평등이었다면서 우스갯소리 섞어 핀잔을 주자, 선생님은 입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내가 미혼이었다면 "더군다나 처녀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말을 아끼는 동시에, 남녀가 유별하고 신구 역할이 확연히 구분된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기로 했다. 짜증스럽고 권태로웠지만 어쩌랴. 사람은, 더욱이 나이 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여하간 올해 여름도 내 몸은 내 마음보다 먼저 원하고 있다. 이 지치는 여름을 무사히 나려면 먹어야 산다. 어제 보신을 했으니 오늘 저녁엔 차가운 냉면을 먹을까. 이럴 땐 아직 분유밖에 못 먹는 영달이가 안쓰럽다. 좀더 크면 세상의 모든 맛과 멋을 가득가득 보여주고 싶다. 정의 앞에 평등하듯 음식 앞에 평등하다는 것도. 몹쓸 비유에 갸웃거리겠지만 엄마의 심정이 그렇듯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