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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통에 무언가를 자꾸 삶고 있다. 내의, 양말, 행주 등. 이불 빨래를 하고 베갯잇을 벗겨 세탁하고 베란다 수납장도 정리하고. 알라딘의 K님은 남편으로부터 죽으러 가느냐는 말을 들었다는데 나 역시 마지막 신변정리를 하는 사람마냥 세탁하고, 정리하고, 치우고, 버린다. 남편의 겨울옷들을 정리하며 봄 티셔츠를 하나 샀고 붙박이장 손닿는 곳에 새 내의들도 챙겨 놓았다. 없으면 알아서 사 입으련만 혼자 쇼핑하는 남자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 맞을 것 같아 수선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리 쓸고 닦고 환기를 시켜도 일상의 먼지와는 매일 겨뤄야 하고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청소를 해봤자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올 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겨울 코트들이 마치 아동복처럼 작아 보였다. 코트를 몸에 대고 거울 앞에 섰는데 좀 놀라기까지 했다. 과연 다시 입을 수 있을까. 남편은 새 옷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기필코 저 옷들을 다시 입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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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올해도 고3 담임을 맡아 정신없이 바쁘다. 그는 밀실 행정이란 말을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을 먹으러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밤늦게 돌아오는 일상.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내 몸 버거운 건 둘째 치고 참 안쓰럽다. 아이들도 해갈이를 한다고 올해 고3 아이들은 작년과는 달리 좀 터프한가 보다. 어떤 임신부는 허리와 골반 통증으로 아침마다 남편이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주어야만 일어날 수 있다던데 나 역시 막달 증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텔레토비마냥 버둥거리면서도 일어나기는 한다. 부은 얼굴로 국을 데우고 계란프라이를 하고. 그나마 속이라도 든든해야 덜 지칠 것 같아 아침을 차리는데 남편은 황송해 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조리원과 친정에서 산후 조리를 하게 되면 당분간 홀아비 신세를 면할 수 없으니 있을 때만이라도 챙겨 주어야겠다. 그는 아기의 아빠이고 건강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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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는 Y가 이따금 전화를 하는데 요즘 들어 유달리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성향을 알기에 섣부르게 부추길 수도 없는 노릇. Y는 정해진 길을 마다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케이스다. 나와는 사범대 동기이자 동아리 동기인데 어느 날 갑자기 휴학을 하더니 손목을 그었다. 위풍이 찬 자취방에서 꼬물꼬물 애벌레처럼 몸을 말은 채 세상을 내치더니 기어이 자퇴를 하고 타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 이후로 꾸준히 글을 써왔고 지금은 작은 잡지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얌전한 아이들이 무섭다는 말을 Y를 통해 아주 제대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도, 항상 만류하는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역시 말리고 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좋은 친구라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Y가 그냥 나처럼 익숙한 도시에서 평범한 선생으로 살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조그만 몸집에 악다구니 같은 서울에서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써가며 사는 모습을 보면 남 보기에 빤한 삶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Y의 고집과 열정을 사랑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무릅써야 하지나 않을까, 우려가 들기도 한다. 그녀는 나의 이런 잔소리를 재밌어 하는데 우리는 둘 다 엄마 속을 너무 많이 썩힌 딸들이라는 자기반성으로 대화의 끝을 맺곤 한다. 더 확실히 알게 하려면 Y를 기필코 시집 보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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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3-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보고싶었어요..

^^

깐따삐야 2010-03-13 11:07   좋아요 0 | URL
저두요.^^

무스탕 2010-03-1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톱 깍기가 참 어려웠었어요 ^^
날이 많이 따듯해 졌으니 운동다니시긴 좋지요?

깐따삐야 2010-03-13 11:09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래요. 이런 날이 오다니.ㅠ
이제 눈도 다 녹았으니 밖으로 나가볼까요.^^

hnine 2010-03-1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을 차려주는 아내에게 황송해하는 착한 분을 남편으로 두셨네요.
양말도 기꺼이 신겨주실 것 같은데요? ^^
언제가 예정일인지 모르지만 건강한 아기 나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무겁던 몸이, 아이 나아서 키우다 보면 금새 가벼워진답니다.

깐따삐야 2010-03-13 11:1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임신 전에 아침상을 차리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요.
봄 기운을 가득 받아 건강하게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렇게 될까요?

알라딘K 2010-03-13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살, 빠집니다. 모유수유만 했더니 17키로가 빠졌어요! 라고 하는 연예인처럼 매끈하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빠지긴 빠집니다. 아동복 같은 옷도 다시 입을 수 있답니다. 그러니, 그런 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째를 낳으러 갈때는 남편에게,
'당신이 다 청소해놔!' 이러고 홀연히 떠났다 왔다는--v )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반갑네요^^



깐따삐야 2010-03-13 11:20   좋아요 0 | URL
엄마가 몸무게 스트레스나 받고 말이죠. 아기한테 미안하게스리.
하핫! 둘째 때는 훨씬 여유로워지셨군요. 하기사 내가 안 해도 다 할텐데 말이죠.
이런저런 걱정이 많지만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해서 노력 중이에요.^^

세실 2010-03-1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좋을듯. 외로울수록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죠.
님 와 막달이시군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화이팅!

깐따삐야 2010-03-13 11:22   좋아요 0 | URL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 워낙에 한 고집하는 친구라서 결혼했다가 갑자기 안 산다고 할까봐 염려스럽기도 해요.
고맙습니다. 지루한 열 달도 다 채워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