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근처에 놀러갔다가 알록달록 북적대는 사람들을 보았고 저수지와 논을 얼린 토종아이스링크를 발견! 이게 웬 기회냐 싶어 당장 썰매를 빌려 빙판으로 나갔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복장이 문제였다. 긴 코트에 리본까지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썰매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철푸덕~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상쾌도 하더라. S양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종종 조그만 썰매 위에 육중한 몸을 구겨 실은 4, 50대 아저씨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만 끌어주기 심심했는지 어느새 엄마, 아빠들까지 썰매를 빌려 빙판 위를 씽씽 돌고 있었다.

 나 어릴 적 겨울엔 눈도 많이 오고 고드름도 많이 열리고 무척 추웠던 것 같다. 덕분에 저수지와 논으로 썰매도 많이 타러 다녔고 비탈진 언덕에서 지푸라기 넣은 비료 포대도 많이 탔다. 솜씨가 좋은 동네 오빠들은 대나무를 깎아 스키도 탔다. 정신없이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양말 속까지 젖어 동상에 걸리는 일도 있었지만 겨울이 다 가도록 털모자를 쓰고 털장화를 신고 볼이 빨갛게 언 채로 빙판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놀다가는 삭정이를 모아 불을 피워 고구마도 구워먹고 가래떡도 구워먹곤 했다. 볼은 시뻘겋게 얼고 입 주위는 새카매서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지청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네 오빠들과 어울려 열심히 썰매를 탔다. 가끔 순해터진 우리 오빠를 괴롭히는 동네 오빠들을 할퀴고 꼬집고 욕설을 퍼부어 주기도 하면서. 오빠는 다섯 살이나 어린 나를 귀찮아했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나름 오빠의 보디가드였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비록 오래 타진 못했지만 빙판을 빙빙 돌며 오랜만에 추억에 젖었다. 옛날에 비하면 썰매는 고급스러운 편이었다. 나 어릴 때는 칼날 대신 철사를 대기도 했고 오빠가 손재주가 없는 바람에 내 썰매 손잡이는 항상 짝짝이였다. 그 때는 지금보다 조그맣고 날렵해서 썰매 위에 서서 타기도 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타기도 했는데 이제는 양반 다리를 하고도 힘에 부쳤다. 그래도 못이 박힌 손잡이로 속도를 조절해가며 빙판 위를 제대로 회전하는 아가씨는 나 밖에 안 보였다.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면서 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왜 그리도 뿌듯하던지. 내 안에 유치원 있다? 이런 시골 얼음판에서는 썰매를 타본 적이 없는 S양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언 몸을 녹여주는 것이 모닥불 속 군고구마가 아니라 미지근한 캔커피여서 조금 아쉬웠지만 모처럼 옛날 생각을 하며 즐거웠다. 썰매 타다가 울 일이라도 생기면 볼이 되게 쓰리고 아팠는데 그때는 무슨 일 때문인지 하여간 참 자주 울었던 것 같다. 대개는 오빠를 대신해서 동네 오빠들이랑 싸우다가 제 성질을 못 이겨 울어 재끼던 기억들인데 빙판 위의 알록달록 아이들을 보니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자연히 떠올랐다. 나의 막무가내 변덕 때문에 썰매를 둘러맨 채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앞서 걸어가던 오빠의 모습도. 썰매 타고 노는 사람들의 눈빛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똑같았다. 모처럼 맞닥뜨린 그 천편일률적인 설렘과 흥분은 참 보기에 좋았다.


댓글(2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웽스북스 2008-02-1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나는 그러고보니 썰매를 한번도 못타봤어요 ㅜㅜ 대나무스키라니, 스키도 못타는 나로서는 휘둥글이에요 흐흐

깐따삐야 2008-02-11 21:36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을 델고와서 같이 놀았으면 진짜 재밌었을텐데! 썰매에 끈도 달려서 내가 줄 잡고 앞에서 달리면 아주 신난다고 했을텐데.^^
대나무 스키는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철사를 박아 만든 스키에요. 운동신경과 균형감각이 발달한 날렵한 오빠들만 탈 수 있었던. 아, 그때로 돌아가서 놀고파요.

웽스북스 2008-02-11 21:39   좋아요 0 | URL
그러기엔 제가 좀 무게가 ...ㅋㅋ

깐따삐야 2008-02-11 22:36   좋아요 0 | URL
빙판이라서 괜찮고 내가 힘이 좋아서 괜찮고 나의 웬디양님은 결코 무겁지 않으니 괜찮아요. 흐흐.^^

BRINY 2008-02-11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에는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고 눈 치우고~~ 여러번 할만큼 펑펑 함박눈이 많이 내렸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교통대란 같은 거 모르고 그저 즐겁기만 했었네요.

깐따삐야 2008-02-11 22:37   좋아요 0 | URL
그땐 그랬지~요. 고드름을 따먹어도 배도 안 아팠어요.^^

L.SHIN 2008-02-1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미쳐....ㅡ.,ㅡ...
개 산책시키고 와서 씻어야지~ 라고 말한게 3,40분 전인데 말이죠.
아직도 서재놀이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ㅋㅋㅋ

깐따삐야 2008-02-11 22:39   좋아요 0 | URL
오늘처럼 서로서로 반가운 날은 서재놀이에 풍~덩 하셔도 되는 거여요. 저 또한 서재놀이 때문에 한 가지 계획을 미뤘습니다. 우리가 이렇죠 머. ㅋㅋㅋ

웽스북스 2008-02-11 23:52   좋아요 0 | URL
흐흐 나도 서재놀이 때문에 한가지 계획을 취소시켰어요 ㅋㅋㅋㅋ
실은 오늘 일찍 들어온 이유가 있었는데, 둘러보다가 에라이, 서재놀이나 하자, 하고 들어와버렸어요 ㅋㅋ

L.SHIN 2008-02-12 10:0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아~ 이 행복한 동질감이라니. ㅡ_ㅡ (훗)

Mephistopheles 2008-02-1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츄리틱해요~~ (배경음악은 전원일기 메인테마)

깐따삐야 2008-02-11 22:40   좋아요 0 | URL
메피님은 정말 공감각적 심상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전원일기 메인테마를 떠올리시다니요. 완전 딱이야! ^^

Mephistopheles 2008-02-11 23:47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이 복길이 하세요 그럼...ㅋㅋ (음...너무 이쁜 캐릭터를...)

웽스북스 2008-02-11 23:52   좋아요 0 | URL
그럼 난 복넓이~

Mephistopheles 2008-02-12 00:04   좋아요 0 | URL
아아..갑작스럽게 깐따삐야님이 내달렸던 빙판에는 찬바람이 씽~씽~ 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무럭무럭...

웽스북스 2008-02-12 00:18   좋아요 0 | URL
찬바람이 싸늘하게 불면~
따끈하던 삼립호빵이 몹시도 그리웁죠~ (에헤라디여)

깐따삐야 2008-02-12 10:52   좋아요 0 | URL
잠결에 어째 귀가 간질거린다 했더니 이분들 여기서 전원일기 놀이하고 계셨네!

순오기 2008-02-12 0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억의 썰매놀이! 우리 동네 얘기잖아~~~ ^^
얼음이 깨져 '풍덩' 하는 바람에 모닥불 피워 양말 말리던 풍경도... 그~~립~~다!!

깐따삐야 2008-02-12 10:5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어린 시절엔 정말 썰매 많이 타셨을 것 같아요. 군데군데 얼음이 얇게 언 곳이 있어서 저도 빠져본 적 있는데. 불 피워서 발 녹이고 양말도 말리고. ㅋㅋ 딱딱한 빙판 위에서 뒤로 넘어져서는 막 울어 재끼던 기억도 나요. 쿠쿠!

프레이야 2008-02-1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종아이스링크~ ㅎㅎ
울아부지는 어릴 적 예성강이 꽁꽁 얼면 거기서 스켓 타고 놀았다죠.^^
그말은 들은 게 몇 해전 부산의 어느 실내 아이스링크에서였어요.
아름다운 예성강에서 씽씽~~ 상상만으로도 어찌 신나던지요.
그나저나 그 복장으로 썰매위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 신나하는 삐야님 얼굴
생각하니까 마구 즐거워지려고 해요~

깐따삐야 2008-02-12 11:04   좋아요 0 | URL
아... 눈앞에 막 그려져요. 반짝이는 햇살을 받고 있는 눈부신 예성 아이스링크? ^^
정말 안 그럴려고 했는데 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너무 재밌어서요! ㅋㅋ

세실 2008-02-12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두 아이들과 눈썰매장 갔다가 열심히 탔습니다.
요즘 토종썰매 탈 일이 많았네요. 썰매만 봐도 참 반갑죠.
집 앞 천에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썰매장은 한번도 언 적이 없어서 돈만 낭비하게 되었어요.
그저 논바닥이 최고~~~

깐따삐야 2008-02-12 11:06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저랑 같은 도시에 사시는 거 맞지요? 산성 부근 저수지를 꽝꽝 얼려놨더라구요. 그 위에 논바닥도 얼려놓았구요. 아! 저도 눈썰매장 가서 비료 포대 타고 싶어요. ㅋㅋ

무스탕 2008-02-1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랑이 옛 생각하며 애들에게 만들어준 썰매를 보니 정말 가관이더라구요 ^^;
그래도 자기는 좋다고 하는데 애들은 본체만체.. 지금은 버리진 않았어도 어디 구석에 쳐박혀 있지요..
올해엔 저도 눈썰매도 한 번 안탔어요. 즐거운 시간 보내신것이 부럽사와요 :)

깐따삐야 2008-02-12 11:11   좋아요 0 | URL
아휴~ 무스탕님 신랑님 살짝 상처 받으신 건 아닌지 몰겠네요. 요즘 아이들은 눈썰매장이나 스키장에 길들어 있어서 말이죠. 그래도 막상 저런 논바닥 아이스링크에 데려가면 아주 신이 나서 탈지도 몰라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경주도 하면서 다들 즐거워 보이더라구요.
저도 예정에 없이 우연히 타게 된 거라서 실컷 놀고 오지 못해 좀 아쉬워요.^^

까칠 2008-02-12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옛 아라가야의 왕릉에서 눈썰매를 많이 탔었는데.
비료포대 하나만 있으면 끝~
그라고 가을볕에 잔디가 말라서 반질반질해지면 눈밭에서 타는 것보다 더 속도감이 있었지.


깐따삐야 2008-02-12 23:23   좋아요 0 | URL
누가 왕릉에서 비료 포대 타라고 했니. 응?!
이거이거 포대 타기의 지존이구만. 잔디밭 썰매장을 알고 있다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