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명절에 고향의 큰댁에 다녀오시더라도 항상 식구들 음식을 따로 장만하시곤 한다. 이번엔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면서 나한테도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하셨다는데 내가 쿨쿨 낮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그냥 엄마 혼자서 다 해버리셨단다. “왜 알려주려고 했어?” “너도 이젠 이런 거 할 줄 알아야지. 할 줄은 몰라도 관심 갖고 보기라도 해야지.” “나중에 엄마가 해주면 되잖아.” “언제까지 엄마가 해줘! 정말 몰라서 못 하는 거랑, 알지만 안 하는 거랑은 다르다. 쉬우니깐 다음부턴 배워.” “그냥 엄마가 해주면 될 텐데. 중얼중얼...” 그런데 엄마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맛없으면 먹지 않는 나는 엄마 말씀을 빌자면 가장 골치 아픈 경우란다. 할 줄을 모르면 아무거나 잘 먹어야 하는데 먹고 싶은 음식 종류는 많으면서 하나도 할 줄을 모르니 큰 문제라나 모라나.
무생채를 좋아하면서 채썰기는 못하고 멸치조림은 좋아하면서 간장과 설탕과 물엿의 비율이 어찌 되는지는 아예 알아볼 생각을 안 했으니 엄마가 염려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철이 바뀔 때마다 이거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 재잘대곤 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 그런데 올케를 보면 친정과 시댁에서 공수해가는 반찬만으로도 충분해 보이긴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배울 필요가 있나 싶다가도 오빠가 집에 와서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곤 한다. 아무래도 가끔씩 얻어다 먹는 반찬에는 한계가 있듯 올케가 해주는 밥과 엄마가 해주는 밥이 다른 모양인지 오빠는 올해 설에도 교자상 하나를 거의 초토화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밥 한 숟가락에 모든 반찬을 고루고루 올려서 먹는 습관이 있는 오빠는 요즘 건강 관련 서적을 한 권 읽고 있다며 내게 보여주더니 이건 어디에 좋고, 저건 어디에 좋고 해가면서 소복하게 담겨있던 반찬들을 싹쓸이했다. 그뿐인가. 커피를 타러 잠깐 일어선 찰나, 밥 먹자마자 곧장 내갔던 과일 두 접시도 홀라당 비워버렸다. 전에는 맛있거나 몸에 좋은 것만 조금씩 골라먹던 오빠인데 결혼하고 나서는 모든 음식물을 그냥 마셔버리는 강호동이 된 것 같다. “오빠, 건강의 첩경은 소식과 운동이래. 그런 책 읽어도 소용없어. 건강검진은 했어?” “그럼 했지. 저번에 했는데 몸에 나쁜 콜레스테롤보단 좋은 콜레스테롤이 더 많대. 흐흐.” “아휴~ 그게 지금 자랑이야?!” 오빠는 샤프하고 냉정한 이면에 아주 단순하고 다정한 데가 있어서 가끔 우리를 의도치 않게 웃겨주곤 하는데 저 멘트엔 할 말을 잃었다. 오빠와 올케는 다른 듯 닮은 데가 많은데 두 사람 모두 먹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과 움직임이 느리다는 것, 말수가 적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우 먹기는 하면서 잘 움직이지 않고 거기다 말까지 안 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올해 명절에도 우리 집에 와서 오빠가 한 운동이라곤 엄마가 등 떠밀어서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세 바퀴 돌고 온 것이 전부고, 올케가 한 운동이라곤 설거지 한 번. 모든 음식은 엄마가 준비하셨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무수리인 내 몫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께 세배를 하겠다고 잠깐 들른 S양 덕분에 아이스크림도 사먹으러 다녀오고 문구점에도 다녀오면서 잠깐 바람을 쐬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오빠 내외에게 귀추를 주목하고 있어야만 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허벅다리 안쪽이 당겨서 끙~ 소리를 다 냈다면 나의 노고를 알아주려나. 가장 바쁘고 힘든 사람은 엄마였기에 나야 별로 불평할 군번도 안 되는데다 우리 부모님은 오빠 내외를 마냥 좋아라 하시기에 내 노동의 끝은 또 구박이었다는 가슴 아픈 사아실.
어쩌다보니 화제는 또 다시 나의 적지 않은 나이와 결혼 문제로 이어졌고 예전 같으면 그냥 몇 마디 중얼거리다가 무마되곤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고 강하게 내 의견을 어필했다가 오빠한테 한 대 맞을 뻔 했다. 오빠는 올케를 가리키며 “네 올케도 처음엔 내 앞에서 얌전하게 이쁜 척 하고 앉아 있었어.”라며 또 다시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뭐라고 큰 소리로 말대꾸를 하자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또 쥐어박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냥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계시고 올케도 이젠 이런 풍경에 익숙해졌는지 놀라지도 않는다. 요즘은 오히려 “아가씨도 이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지요. 우리 학교에도 책 좋아하는 단정한 여선생님이 하나 있는데 이상하게 남자친구는 안 생기더라구요. 요즘은 미모에 과감히 투자하고 깍쟁이 같은 여자들이 결혼도 잘 하는 것 같아요.”라면서 자분자분 거들기까지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대충 세수만 하고 잠이 덜 깬 면상을 한 채 추리닝 차림으로 식탁 앞에 서 있던 꾀죄죄한 나.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급속냉각으로 얼려버리자 잠이 확 달아나서는 얼결에 의자부터 잡았다. 딸기 꼭지까지 곱게 따서 대령했더니만 두 덩치의 부부는 낮은 자세로 찌그러져 있던 나를 아예 확실히 밟아주시더라는. 이어지는 엄마의 맞장구와 나의 맥 빠진 변명들... 모두 나를 위한 말들인 것은 알겠는데 볶아대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인 것 같다. 그전엔 일요일 아침마다 부리나케 깨워서 역사는 일요일에 이뤄지느니 어쩌느니 하더니만 이제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까지 마구 다그쳐댄다. 설마하니 뱃살 구박에 대한 보복인가? 집주소를 몰라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해대는 오빠의 건방진 기억력을 상기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장가 갈 때 잔소리는 두고 갔나 보다.
이럴 땐 그래도 엄마가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신다. 오빠는 오빠로서 염려가 되니깐 한 말이라며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나이 때문에 등 떠밀려 결혼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가꾸는 일에는 소홀하지 말아야겠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름의 취미와 목표가 있는데 굳이 남자나 결혼에 연연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청첩장이 날아올 때마다 지청구를 날리던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이런 모습이 진짜인지 심히 헷갈리던 와중에 “그래도 오빠 말이나 언니 말도 잘 귀담아 들어둬야 한다.”며 앙큼맞지도, 깍쟁이스럽지도 못한 나를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엄마 탓이라고도 하셨다. 엄마가 워낙에 뭐든지 한발 앞서서 생각하는 스타일이라 그 동안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며 살 까닭이 없었다고. 그런데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타고난 본성은 안 바뀌는지 오빠는 안 가르쳤어도 알아서 잘하는데 나는 여러 번 일러줘도 여전히 어리뜩하단다. 어리뜩... 나는 대체 어디가 모자란 걸까? 왜 식구들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설 연휴가 금방 갔다. 오빠와 올케를 오랜만에 봐서 반갑고 좋았지만 가족들은 현재의 내 모습이 영 마뜩치 않나 보다. 물론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지청구들은 지금의 나를 자꾸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그 동안 비교적 순종적으로 지내왔기에 어쩌면 경각심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내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말대꾸한다고 쥐어박으려고 하고 말이지. 뭐라고 종알대면 예전엔 불평 안 하더니 언제부터 불평하는 건 배웠냐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말이지. 결혼하고 나서 더욱 덩치가 커진 오빠는 어째 아빠보다 더 무섭다. 이제는 조용하던 올케까지 합세했다. 엄마는 올케한테도 배울 점이 많다며 나보고 좋은 점은 보고 배우라는데 조금 고지식하고 어리버리한 것 빼곤 서로 너무 다른 스타일이다 보니 글쎄다. 연휴 이틀에 걸쳐 잔뜩 먹여놨더니 노동의 보수는 병 주고 약 주고. 후유증은 자아비판. 아! 오빠와 올케의 공통점이 더 있구나. 안 상냥하다는 것. 고마우신 의도는 잘 알겠는데 왠지 듣기 싫어진단 말이지.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당의정을 입혀줘야 꼴깍 삼키던지 하지 오빠 눈에는 아직도 내가 마구 쥐어박아도 괜찮은 대상으로 보이나 보다. 언제 그렇게 나이를 잔뜩 먹었냐고 하면서도 별로 어른처럼 대우해 주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말했다간 정말 맞을까봐서 기나긴 페이퍼를 쓰며 위안하고 있는 나도 참 딱하긴 하다. 아마도? 가족들이 나를 염려하는 건 나의 이런 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해엔 부디 소리 없이 강한 사람이 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