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때가 2002년이었다. 1999. 2000. 2001. 2002... 헤아려보니 복학해서 3학년을 다니고 있었던 시기였다. 학내 영화 동아리에서 해마다 지하 대강의실이나 잔디밭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무료로 영화를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기회를 통해 봤던 영화가 일본 영화, 'Shall we dance?', 그리고 '뷰티풀 마인드'였다.

 'Shall we dance?'는 휴학 전, 친하게 붙어 다녔던 친구의 제안으로 캄캄한 대강의실에 나란히 앉아 함께 보았던 영화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변 사람 챙기는 데 영 서툴고 무심하다보니 이젠 서로 연락하기도 멋쩍어진 사이가 되었지만, (하나도 틀리지 않고) 내가 조금 더 많이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내가 그녀보다 많이 어렸다는 자각과 함께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우리가 공유했던 비밀과 나눠가졌던 추억에 비하면 너무나도 싱겁고 아무렇지도 않게, 별로 길지도 않은 세월은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코믹한 부분이 많은 영화였고 홀홀거리던 웃음소리도 여전히 기억하는데, 그새 2008년하고도 1월이란다.

 2002년도. 영화를 거의 중간까지 봤을 때 스크린 화면이 꺼지면서 죄송하지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다는 안내가 있었고, 이후로 한참 동안 영화를 보았다고도 보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지내왔었다. 못다본 뒷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한 가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리얼한 뷰티풀 마인드를 실감하고도 싶어 이 해묵은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한 두 가지 눈에 띌만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내가 혹시 천재는 아닐까, 라는 환상 또는 망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물론 좀 크면 대개는 그러다 말곤 한다. 나는 교사가 되고 난 다음보다 유치하고 멋모르던 학생 시절에 훨씬 더 거만하고 폐쇄적이었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어찌나 게걸스럽고, 둥글둥글하며, 포기도 쉬워졌는지!

 현실 속에서는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고 남들이 잘 모르는 것을 발견했을 때 희열을 느끼는 견고한 영역이 있는 반면, 상상 속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사소한 일을 넘어서 뭔가 비밀스럽고 중대한 임무를 맡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를 꿈꾸는 존 내쉬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가진 망상은 'real fantasy to be alive'정도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생존하기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생존하기 위해 미래에 집착하는 사람, 뭐든 지나치면 병적이다, 라는 말로 사람 주변에 테두리를 치기도 하지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구가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세대를 건너서 기억해낼만한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까지 저당 잡힐 정도로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가진 정신력을 초월하여 무언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월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초라한 육신을 타고났지만 인간의 정신만큼은 언제나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너무 느슨하게 살고 있는 것 같고 하루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이 무료하고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시기다. 그 동안 묶어두었던 A4 크기의 서류를 활활 태워버리고 밀집모자를 눌러쓰고 커피가 맛있는 동네에 가서 거짓 웃음 짓지 않으며 거만하고, 자폐적으로, 하지만 화기애애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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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1 : 이 영화장면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대학시절 존 내쉬가 술집에서 미녀를 놓고 데이트에 대한 상관관계를 정의 하면서 기막힌 수학이론을 만드는 장면이였어요..ㅋㅋ
태그2 : 러셀 크로우는 3:10 유투마와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만나 볼 수 있답니다. 똘끼는 있어도 연기만큼은 뭐 대단하죠..(검색해보니 취미가...정신적으로 불안한 소 보살피기랍니다.)
태그3 : 제니퍼 코넬리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가장 빛을 발휘한 영화는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라고 생각됩니다. 그나마 최근에 본 그녀의 영화가 "모래와 안개의 집"이였는데 내용은 비극인데 배역은 참 좋았어요.

깐따삐야 2008-01-24 03:04   좋아요 0 | URL
1. ㅋㅋ 맞아요. 러셀 크로우 표정이 떠올라요!
2. 취미가 참 독특하네요. 꽃등심만 찾는 저보다는 휴머니스트네요.
3. 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지난번 백문백답에서도 밝혔지만 어리고 아름다운 제니퍼 코넬리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정말 그 자체로 멋진 영화죠. 시인 기형도가 그 영화를 아주 좋아했단 말을 듣고 되게 반가웠는데 메피님도 기억하시니 더더 반갑구만요. 제니퍼 코넬리는 귀티 나게 예쁘고, 정제된 연기를 해요. 참 좋아요.^^

Mephistopheles 2008-01-24 03:06   좋아요 0 | URL
그녀의 남편도 꽤 분위기 있는 배우랍죠.
"윔블던" 남자 주인공..기사 윌리암에서 사기꾼 시인..

깐따삐야 2008-01-24 03: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배우가 바로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쉬의 망상 속 친구로 등장했던 '폴 베타니'잖아요.
아마 이 영화 속에서 서로 눈이 반짝, 맞았나 보아요. 쿡쿡.^^

라로 2008-01-24 04:12   좋아요 0 | URL
다빈치코드에서도 나왔었죠!!!ㅎㅎ
그가 지금 준비중인 차기작이 다 급호감이라죠~.ㅎㅎ
특히 완전 제목때문에,,,ㅎㅎ
암튼
러셀크로에서 제니퍼얘기하다가 남편야그로 급전환~.ㅎㅎ
근데 전 러셀크로 비호감이라서 그의 연기는 인정하지만
암튼 그래요~,,,얼굴 보는거도 굉장히 거북해해서리
영화에 몰입이 첨엔 안된다니까요!!ㅜ

Mephistopheles 2008-01-24 09:23   좋아요 0 | URL
러셀 크로우가 감우성의 10%만 닮았어도...

깐따삐야 2008-01-24 16:07   좋아요 0 | URL
나비님- 러셀 크로우 얼굴 보는 게 거북하세요? ㅋㅋ 무대뽀처럼 생겨서 그런가. 하긴 나비님 남편분은 말씀 들어보면 되게 섬세하고 점잖으신 것 같아요. 러셀 크로우와는 전혀 상반되는 타입이랄까. :)

메피님- 저는 그래도 조형기 아저씨가 좋아요. 꽃등심 사주실 게 분명한 메피님은 더 좋구요. 홍홍.^^

미미달 2008-01-2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티풀마인드보고 너무 똑똑해서도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ㅎㅎ

깐따삐야 2008-01-24 16:08   좋아요 0 | URL
미미달님의 댓글은 항상 저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아요. ㅋㅋ

순오기 2008-01-24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티블 마인드에서 난, 그 아내에 감동받았는데도 여전히 현모(?)악처!
저렇게 수학을 잘 하는 인간들의 뇌구조는 뭐가 다를까...궁금했던 영화.^^

깐따삐야 2008-01-24 16:19   좋아요 0 | URL
저희 오빠도 이 영화를 보고나서 제니퍼 코넬리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제니퍼 코넬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올케랑 결혼했다는. 인생은 참 아이러니해요.^^
저도 수학 잘하는 사람들 보면 신기할 따름이에요.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때려주고 싶어요. ㅋㅋ

프레이야 2008-01-24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적-존내쉬'로 나온 애드 해리스 역할이 뚜둥 ~~

깐따삐야 2008-01-24 16:41   좋아요 0 | URL
오! 애드 해리스의 차분한 칼있쑤마도 역시 대단하지요.^^

다락방 2008-01-2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니퍼 코넬리는 그 얼굴과 몸매 때문에 [로켓티어],[백마타고 휘파람불고] 막 이런 영화에만 나왔었는데(그래도 로켓티어는 무쟈게 재밌었어요) 이제 뭔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제가 다 뿌듯했어요. 러셀 크로우는 그 뭣이냐, [LA컨피덴셜]에서만 좋았어요, 전.

[뷰티플 마인드]는 보고나서 약간 실망요. 전 그의 망상이 사실이길 바랐거든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것이 사실은 진실이기를 말이죠.

아, 제니퍼 코넬리를 잊을 수 없는 아주 강한 영화가 생각났어요. [페노미나]. 그 영화에서 그녀는 곤충과 교감을 나누죠.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의 굉장히 인상깊은 영화였어요!!

깐따삐야 2008-01-25 09:36   좋아요 0 | URL
저는 러셀 크로우 좋아요. 어디서 막 야유성이 들리는 듯. ㅋㅋ
그래요. 식스센스의 브루스 윌리스마냥 딱하더군요.

페노미나! 다락방님이 상기시켜 주시네요. 오래전에 주말의 명화로 봤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