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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일류밴드를 꿈꾸는 세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더니 이번엔 금메달을 염원하는 세 아줌마들의 사연으로 돌아왔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진짜' 우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주었다. 오랜만에 군더더기 없이 정공법으로 밀고나간 정직한 영화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뽀글머리와 사투리로도 숨길 수 없는 미모의 복길이 김지영, 옴팡진 깡다구 아줌마로 열연한 문소리, 빤히 뚫어보는 표정 안에 인간미를 가득 머금고 있던 김정은. 누가 더 좋았다, 라고 감히 말하기 힘들 정도로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는 세 배우의 연기에 흠뻑 반한 두 시간이었다. 그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좔좔 간지 나는 이미테이션 아줌마들이 아니었다. 버스보다 빠르다는 대한민국 진짜배기 아줌마들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땀은 피보다 더 진하더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살 부대끼며 쌓아온 뚝심 어린 우정은 족히 금메달감이었다. 임순례 감독은 관객 이전에 배우부터 감동시킬 줄 아는 탁월한 감독이란 느낌. 꿈을 향한 고집으로 서글픈 하류 밴드, 국가에 메달을 바치고도 올림픽이 끝나면 갈 곳 없는 선수들. 그녀의 시선이 변함없이 낮은 곳을 바라본다는 점이 내내 듬직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삶의 구석진 단층을 예리하게 잘라낸 후 자칫 싸구려 청승으로 하락할지도 모를 스토리 안에 삶의 짙은 페이소스를 감춰놓을 줄 아는, 임순례식 휴머니즘이 참으로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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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SOS 신호를 보내왔는데도 특별히 해줄 것이 없었다. 졸음을 참아가며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는데 듣다보니 내 하소연까지 범벅이 되어 상담자와 내담자의 경계는 점차 무너졌다. 나는 지나온 시간에 대해 쓸쓸히 안도했고 상대는 대개 그렇듯 털어놓았다는 데에 다소 홀가분함을 느끼는 듯 했다.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이상, 그저 잠시잠깐의 위안밖에 되지 못함을 알기에 무기력함으로 찝찝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세월 지나고 나이 먹어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과거에 내가 가장 별루라고 생각했던 충고를 나 스스로 번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허무했다. 아무리 그게 맞는 말일지라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이란 말처럼 알쏭달쏭 회색분자스러운 조언이 어디 있을까. 때로는 얄짤없는 정답보다 배려하는 오답이 나을 때도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얼마나 인간적인 고사성어인가. 내가 누군가를 생각함으로써 나의 애정 어린 활기가 상대방을 향해 오롯이 옮겨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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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논문을 써야 하는 작가보다 다른 작가들이 더 좋아서 조금 우울하다. 겨울이 되면 이상하게 일본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어디선가 흐벅지게 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읽고 생각해야 할 미국 작가는 따로 있는데, 그는 너무 말이 많고 무더워서 읽다가 중지 곧 하곤 한다. 아니 읽느니만 못하게도. 독서에 있어서도 이열치열, 이한치한을 고수하는 걸까. 자꾸 이러시면 안 되는데. 지독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집중력을 갖고 내면을 응시하는 다자이 오사무나 나쓰메 소세키 같은 작가들의 읊조림이 좋아서, 읽었던 책을 또 읽기도 하고 서점에 들러서도 '사양'이나 '마음' 근처에서 기웃대곤 한다. '도련님'의 표지가 하도 다양해서 오늘은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도련님들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는. 그러고보니 나는 좋지 않은 기후의 나라, 그 나라의 기분 좋지 않은 작가들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그 나라의 시트콤 주연스러운 인간이면서. 일전에 S양이 문득 "언니가 단순해 보이는 건 언니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떨 때 보면 진짜 단순한 것 같기두 해서 정말로 헷갈려."라는 말을 해서 나를 놀래킨 적이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의 말이, "그래서 지금 내가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것만 말해." 였기 때문에 언니는 진짜 단순한 게 맞다는 결론이 났지만 어린이의 눈은 솔직하고 적확하기에 혼자 속으로 뜨끔했었다. 어딘가 삐그덕거리는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의심을 품는 행위도 분주한 생활 속에 매몰되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책을 읽는 인간, 고로 사색 또는 사념이 관성화된 인간은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결론 많고, 정답 없는 물음으로부터. 내면 지향적이라는 면에서는 매우 독보적인 위치의 일본 고전에 내가 이끌려 다니는 까닭도 눈의 냄새가 아니라, 내 마음을 향한 눈의 낌새를 맡아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