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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기자의 영화야 미안해
김혜리 지음 / 강 / 2007년 9월
평점 :
소설보다 평론을, 영화보다 영화평을 더 즐기는 내게 김혜리의 책은 조금씩 아껴 먹어야 할 희귀한 쿠키 같았다. 금방 질리는 단맛이 아니다. 귀찮은 부스러기도 없다. 왼쪽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두 개씩만 꺼내서 묽게 탄 커피 한잔과 함께 먹고픈 담백한 쿠키. 책 속에서 그녀가 소개하고 있는 영화의 1/3이나 다 보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리의 글을 읽고 보려던 영화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는 작가 윤성희의 말처럼 이것으로 충분한 느낌. 건조한 해석에 그치는 따분한 평론이 아니었다. 글쓰기의 재능과 철저한 조탁 과정이 조화를 이룬, 그녀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한 근사한 에세이였다. 이동진의 글이 하얀색 쵸콜릿이라면 김혜리의 글은 다갈색 쿠키다. 고소하면서도 매우 성실한 맛.
'비포 선라이즈'의 시간은 바닥 없는 잔에 찰랑이는 와인과 같았으나 '비포 선셋'의 시간은 일초 일초 우리의 심장 위를 저벅저벅 지나간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연기는 연기 같지도 않아서 어디선가 연기상을 준다면 모욕으로 느껴질 정도다. 5분이 넘는 롱테이크와 잦은 오버랩을 감당하는 대사의 완벽한 구현은 기교를 떠난 집중력과 신뢰의 산물이다. -p.123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잖아. 남의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치며 환희를 느끼는 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의 풍화작용과 함께 사그라드는 영상과, 잦은 리뷰청탁을 감당하는 평론의 완벽한 구현은 기교를 떠난 그녀의 집중력과 신뢰의 산물이리라.
'디 아워스'는 과거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일 수 있는 시간을 질투하는 영화다. 그리고 질투를 통해 삶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은 아주 깊이 가라앉아 기도와 비슷해진 사랑이다. 자기를 버리고 눈을 감아 빛을 버리고 좁은 우물의 바닥 같은 평화를 대가로 얻는. -p.196 '버지니아 울프'의 니콜 키드만, '로라'의 줄리언 무어, '클래리사'의 메릴 스트립은 제각기 뭔가에 사로잡히거나 호소하려는 듯한 독특한 눈빛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서 '여성' 또는 '인생'이라는 두리뭉실한 거대 화두 밖에 캐취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세 여인에게서 구도자의 사랑을 봄으로써 영화를 한 단계 더 승화된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사색의 표정이 고인 여윈 얼굴로 조용히 움직이는 그는 여성의 존경심과 모성애를 동시에 자극했다. ...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는 결코 여자를 울리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온화한 미남자의 이미지를 스크린 안팎에서 체현하면서 1930, 40년대 여성 스타들이 선호하는 '무난한' 상대역으로 상종가를 누렸다. -p.247 게리 쿠퍼와 로버트 테일러에 대한 그녀의 평이다. 헐리웃 꽃미남 스타들의 계보와 변천사를 읊으며 우리가 디카프리오 때문에 '타이타닉'을 두 번 보거나 장동건에게 반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봤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옹호해주는 멋진 그녀. 우리 엄마가 찰슨 브론슨의 시니컬한 콧수염에 여태 열광하는 것도 영화의 가장 마술적인 모멘트에 동참하는 것이라며 이해해주는 미더운 그녀. 아! 용솟음치는 무한공감이여.
리버 피닉스의 생애는 패딩턴의 북극 탐험기에 나오는 아이로니컬한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이글루 안에 갇힌 한 남자가 내쉬는 숨마다 입김이 얼어붙어 결국 점점 다가든 벽에 갇혀 죽었다는 일화. ... 리버 피닉스는 그저 못다 핀 배우였고 착하고 총명했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피하지 못한 젊은이였을 뿐이다. -p.332 '아이다호'의 아름다운 청년, 리버 피닉스를 향한 연민 어린 따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가 변덕스런 반항아에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배우'라는 타이틀에 비추었을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타고난 아우라로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가 있다. 리버 피닉스는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청순한 아우라에, 안타까운 요절이 플러스 됨으로써 못다 핀 청춘으로 영원히 신화화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서 침묵해 버린 그는, 삶의 전후로 경쟁자가 전무한 배우다. 김혜리가 리버 피닉스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반가웠다.
이밖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휴 그랜트의 매력을 '게으름뱅이', '세속적 이기주의자', '회의주의자', '네추럴형의 유혹자'라는 네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페이지도 흥미로웠고 샤를리즈 테론과 제레미 아이언스의 숨은 가치에 대해 짚어주는 대목도 관심있게 읽었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배우들이나 감독들을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의 글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성실해서 이름들의 낯설음을 무마하고도 남더라는. '영화야 미안해'라는 책 제목처럼 친절하고도 겸손한 글이다.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날카로운 예지의 향을 품고 있는 따끈한 쿠키 같은 리뷰를 만날 수 있다. 바삭바삭 음미하며 한번 더 읽어보고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