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 가고 싶었다. 전에 보관증을 끊어두었던 가게에 들러 엄마의 겨울 슬리퍼를 하나 샀고 조그만 리본장식이 달린 구두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냥 나왔다. 키가 작고 인상이 좋은 점원은 매우 친절했고 그런 몸에 밴 친절마저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상냥해졌다. 점원은 엄마에게 따님을 너무 알뜰하게 키우시는 것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엄마는 그럼 알뜰하게 키워야지, 안 알뜰하게 키우면 쓰겠냐고 되받아쳤다. 아치 모양의 곡선이 들어간 숙녀화를 신어본지가 무척 오래되었고 요즘은 어쩐 일인지 그런 구두에 눈길이 많이 가는데 엄마는 그 곳에 있는 구두들이 별로였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가끔 내 욕구가 묵살당할 때마다 나에게도 주관과 안목이란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슈는 스탠리의 폭력에는 겁을 먹고 도망치지만 의사의 친절에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순종한다.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는 강아지 같은 사람일까.
시장에 가면 내가 살만한 것들은 많지 않다. 엄마가 반찬거리를 흥정하는 모습을 흥미있게 지켜보거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줄 뿐. 지저분한 앞치마를 두르고 떡볶이나 순대를 파는 아줌마를 보면 몸은 고되어도 쓸데없는 허영에 시달리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것마저 부러워하는 스스로의 허영심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수많은 상인들은 오늘도 북적대는 시장통에서 목청을 높이고 추위에 몸을 웅크려가며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휴일에 이 곳은 더 바빠지겠지. 문득 내가 참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대학에 가고, 스무살이 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연애를 하면 아주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 행복을 믿고 많은 욕구들을 외면하거나 참아왔다. 물리적인 조건과 환경이 변하면 내 의식도 변할거라는, 다분히 유물론적 가치관을 고수했다.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구상해오던 궤도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은 채 지금껏 지내오고 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해졌는가, 행복한가, 라고 물으면 그렇다, 고 대답하기 어렵다. 크게 불행하지도, 크게 행복하지도 않다. so-so. 한편 마음은 잿빛인 상태. 쨍, 하고 볕이 드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 때로는 태생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이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그 어떤 변화에도 이렇게 되어버리는.
법정 스님의 책을 한 권 읽고 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간 부지런히 채워오기만 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이력서의 공란을 메우기 위해 시험을 보고, 자격을 얻고, 토익 문제를 풀고, 대학원에 오고... 정작 마음이 허해지는 것은 돌보지 못한 채 고작 A4 한장의 이력을 채우기 위한 삶. 이젠 그렇게 쫓기듯 초조해가며 살지 않기를. 성실해야겠지만 마음은 비우겠다. 쉽게 비워지지 않을테지만 그러한 노력도 습관이 되면 분명히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다. 물리적 행복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이젠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 다시 노력해야 할 때. 무엇보다 집착하지 말 것. 나의 모든 번뇌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