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노트북을 샀다. 실은 얼마 전부터 벼르던 것인데 꼭 갖고 싶었다기 보다는 종종 인터넷 바둑에 심취하는 아버지를 위한 양보의 차원이다. 어차피 결혼을 하게 되면 원래 쓰던 컴퓨터는 아버지께 드리고 나는 노트북을 사가야지, 했었는데 올해 시집을 못 간 관계로 애초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그래서 '결혼하면'이라는 전제를 '필요하면'이라는 전제로 급수정. 신제품만 나왔다 하면 눈을 반짝이며 사들이는 오빠에게 자문을 구한 뒤 몇몇 후보 상품들을 제치고 가장 무난해 뵈는 것으로 구입했다. 엄마는 마트를 나서며 노트북을 샀다는 사실보다 증정품으로 받은 탁상용 달력에 더 기뻐하는 나를 보면서 역시나 어딘가 좀 모자란 게 틀림없다는 특유의 표정을 지어보이셨다.
사실 나는 전부터 기계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그다지 매력도 못 느낀다. 디카는 오빠가 사줬는데 빅마마도 아니면서 주로 음식 사진을 찍는다. 내 컴퓨터 안에는 '음식'이라는 폴더가 따로 있다. 심심하거나 우울할 때 먹었던 것, 먹고싶은 것, 먹어봐야 할 것들을 사진으로 훑어보며 혼자 흐뭇해 한다니깐. 물론 디카로 항상 음식 사진만 찍는 것은 아니고 행사가 있을 때나 여행 중에는 꽤 쓸모가 있는데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아서 주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나 풍경을 많이 찍게 된다. 그런데 요즘의 디카는 어쩐지 사람들의 장난감 같아서 옛날과 같은 운치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카메라를 솜씨 좋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부럽지만. 때로는 그들이 남겨온 근사한 사진들이 내 안의 추억보다 더 나아 보일 때도 있다.
그리고 그 흔하다는 MP3. 없다. 앞으로 살 계획? 물론 없다. 음악을 좋아하는데다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할 때나 웹서핑을 할 때도 어떤 음악이든 항상 켜 두곤 하는데, 어딘가로 이동을 하면서까지 이어폰을 꼽고 다니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큰 것 같다. 원래 한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못하는 나는 휴대폰을 받다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적도 종종 있다. 길을 걷다가도 전화가 오면 자동인형마냥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큰 소리로 말한다. "여보세요? 어, 나 지금 걷고 있거든. 어디 가는 중이니깐 빨리 말해."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걸으면서 전화 받기를 힘들어한단 사실을 이미 숙지하고 있기에 알아서 통화를 간단히 끝마쳐 주신다. 결국 사고방지, 신변안전 차원에서랄까. 더군다나 몇년 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CD플레이어가 고이고이 모셔져 있는데 그것을 놔두고 음악을 듣기 위해서 새 기계를 산다는 것이 영 마뜩찮다.
지난 달에는 전자사전을 하나 샀다. 디스플레이 되었던 상품을 사면 30% 할인이라는 정보를 듣곤, 상품을 미리 찜해두었다가 일주일을 기다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명색이 영어선생이 전자사전 하나 없어야 되겠냐고들 하던데 나는 지금도 시간적, 공간적 여유만 되면 종이사전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랜 습관에 길들여져서 고집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곁에 두고 찾아보아야 할 사전 같은 경우 오래 써서 내 손에 익은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대학원에 다니다보니 나 빼고는 다들 포켓 크기의 가뿐한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더라는. 바짝 예습을 해 갈 정도로 부지런하거나 치밀하지 못할 바에야 비스무레하게 박자를 맞춰가려면 별 뾰족한 도리가 없었다. 우리의 S양, 새로 산 전자사전을 보여줬더니 한 마디 한다. 음. 이쁘다. 근데 음성지원이 안 되는 거네? 언닌 발음도 안 좋으면서 이런 걸 샀대.-_-;; 무슨 좋은 소릴 듣자고 그건 보여줬는지.
그런데 요즘들어 내가 욕심을 내는 기계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묘하게도 주방가전 코너에 자꾸 시선이 간다. 어느 날은 밥솥을 새로 사러 엄마와 마트에 갔다가 서랍형 김치냉장고의 장점에 대해 한참 설명을 듣고 오기도 했다. 나중에 티비에서 서랍형 냉장고는 성에가 많이 끼어서 김치를 오래 저장해둘 경우 김치가 얼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지만. 매장직원은 엄마와 함께 와 이것저것을 구경하는 내가 대량으로 혼수살림이라도 마련하려는 츠자로 보였는지 졸졸 따라붙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더라는. 얼마 전에는 혼자 집 근처 대리점에 가서 전기주전자를 사들고 오기도 했고, 믹서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다는 엄마의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대리점으로 날아가 새 믹서를 주문했다. 엄마는 네 옷이나 사 입지 젊은 애가 뭐하러 이런 걸 사들고 다니느냐고 하시는데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주방가전을 하나씩 들여놓고 그것을 사용하는 재미가 무척이나 쏠쏠하다. 아빠는 쓸만한 머스마라곤 한 놈도 못 데려오면서 가전제품은 가지가지 사들인다고 안타까워 하시지만 그나마 가전제품만큼 제값어치를 하는 머스마도 없더구만 뭘. 그런데 요번에 노트북을 사느라 조금 무리를 해서 당분간은 구매유예기간이다. 생각 같아선 붕어빵 굽는 기계도 사고 싶은데 말이지. (아! 여기서 칭찬 한 마디. 우리 동네 붕어빵 아저씨 진짜 좋으시다. 붕어빵 사러 가면 꼭 하나씩 더 주신다. 내가 먹는 거에 감동받는 건 어떻게 아셔가지고.^^)
그나저나 글을 쓰다 문득 거울을 보니 이론이론! 애교살 부근에 주름이 두 개나 잡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고 나면 펴지던 주름이 이제는 얼굴에 무늬로 남는다는 것. 알라딘의 웬모양이 할머니로부터 학생 소리를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것도 이해가 간다. 다리미처럼 뜨겁진 않으면서 부작용은 없는 걸로 주름 펴는 휴대용 기계나 하나 나왔으면 좋겠군. 아줌마들이 주름 생길까봐 눈 잡아당기고 입 오므려가며 웃을 땐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얼굴에 세월의 밭고랑들이 패이기 시작하니 마음자리가 달라지는 것 같긴 하다. 나보다 더 앳되 보이는 아가씨스러운 아줌마가 훈훈해 뵈는 남편을 대동한 채 주방가전 코너를 돌 때는 참 부럽더라구. 한창 때로 보이는구만 우째 결혼은 그렇게 후다닥 해갖구... 좋으세염? 어쨌든 그네들은 그네들이요, 나는 나일테니 새로 산 노트북으로 논문 쓸 준비나 열심히 해야겠다. 참, 얼른 축시도 써야 하는구나. 사실 이런 건 한창 연애모드인 애들한테 시켜야 맞는 건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다 시가 되어버리는 두근두근 츠자들 말이다. 예전에 살짝 미쳤을 때 써둔 게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