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wasulemono > 잭슨 vs 흄
환상과 미메시스 - 서구문학에 잠재된 환상성의 재발견
캐스린 흄 지음, 한창엽 옮김 / 푸른나무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서구 문학에 내재된 환상 충동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겠다는 취지에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환상적 요소를 내포한 문학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문학 속에 미메시스 충동과 환상 충동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존재해 있다는 가정 하에서 서구문학에서 환상적 요소가 어떻게 개입되고 왜 환상적 요소가 사용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로즈마리 잭슨의 책이 다소 제한된 영역을 중심으로 환상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주제적 차원을 논하고 있다면, 캐서린 흄의 이 책은 전통적으로 문학 분석의 토대로 사용되어 온 기호론적이고 유형론적인 관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분류에 치중하고 있다. 따라서 잭슨의 책은 환상문학의 의미론적인 차원에 관심을 가진 대중 독자의 관심에 적당하다면, 흄의 이 책은 작가-작품-독자라는 관계나 노스롭 프라이의 희극, 비극, 로망스, 아이러니, 4개의 신화체계로부터 환상성을 양식화하고자 하는 전문 독자에게 적당한 책이 아닌가 싶다.

잭슨의 문체가 엄격하고 명석한 비판에 기반한 다소 건조한 문체라면, 흄의 문체는 다소 산만하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부드러운 문체라고 하겠다. 문체의 차이가 독서 과정에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할 때, 흄의 문체는 학문적 엄격성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다소 산만해 보일 것이 분명하다.

또 잭슨이 주로 근대 이후의 환상 작품에 주 관심을 두고 있다면, 흄은 중세 전공자답게 주로 중세 이전의 작품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면 당연히 잭슨의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흄은 잭슨과는 달리 환상문학만이 아니라 문학 전반을 4가지 양식으로 분류하고 그 속에 개입된 환상적 요소와 그 기능을 밝히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성이라는 기본 테마에 대한 밀도 있는 서술은 아니지만 문학을 폭넓게 바라보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두 권의 책 모두 최근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환상성을 재평가하는 데는 좋은 참고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다만 이 두 권 모두 80년대의 성과이므로 이후 새롭게 진전된 논의 성과를 파악하는 것은 새로운 과제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책은 환상성에 대한 개관이나 총론의 성격이 짙고, 수많은 작품들이나 유형을 일별하고 있을 뿐, 세밀한 각론을 전개하거나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데 주안점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점도 염두에 둬야 할 듯하다.

그리고 이들 책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문학, 영화, tv 등 각종 매체 텍스트에서 환상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긴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 우리에게는 왜 환상이 저급한 장르나 기법으로 이해되며, 환상 장르가 우리에게는 빈곤한지 등의 문제를 우리의 근대적 경험 속에서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테마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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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통증혁명

“목, 어깨, 허리의 통증을 일으키는 마음의 메커니즘.
통증의 주범은 무의식 속 억압된 분노다!”


KBS 1TV 특집 다큐 <마음>에 소개된
TMS 이론의 창시자 존 사노 박사의 대표작.
수백만 독자들을 통증에서 해방시킨 읽는 약(reading pill)!

* 큰 병 없이도 늘 어딘가가 아픈 사람들

‘인생은 고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큰 병이 없어도 살면서 갖가지 통증을 경험한다. 어쩌면 통증은 삶의 일부라며 체념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지만,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으면 혹시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불안하고 심지어 우울해지기도 한다. 검진을 받아봐도 병원에선 뚜렷한 이상은 없다고 하고, 그런데도 통증은 여전하고... 특히 주부들이 흔히 앓는 어깨결림, 요통, 두통, 우울증, 소화불량, 뼈마디가 욱신욱신하는 등의 증세는 ‘주부병’, ‘명절 증후군’등의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시름시름 앓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뭉뚱그려 ‘심인성 질환’이라 불리는 이 통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 TMS: 원인 모를 통증에 대한 새로운 진단과 처방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초한 혁명적 통증이론을 내놓은 사람이 뉴욕의대 재활의학과의 존 사노(John E. Sarno) 박사다. 그는 1970년대 미국에서 30년 이상 목, 어깨, 허리, 팔,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수만 명의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해 오면서 자신의 독특한 TMS 개념을 정립시켜온 장본인이다. TMS란, ‘긴장성 근육통 증후군Tension Myositis Syndrome’으로 풀 수 있으며 정신적 긴장으로 인한 근골격계의 갖가지 통증을 아우르는 용어다.
사노 박사는 신체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통증(물론 종양 등 심각한 신체질환의 경우는 제외해야 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의의 검진을 우선적으로 받는 것이 필수)은 자신도 모르게 생긴 화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화가 통증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여기서 사노는 프로이트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원용하여 설명한다. 즉, 무의식 속에 쌓인 화는 우리가 대면하기 꺼리는 감정이다. 특히 착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에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따라서 몸에 통증을 일으킴으로써 감정(정서)이 아닌 신체로 자신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TMS는 스트레스를 너무 잘 처리해서 생기는 통증이다. 몸을 아프게 함으로써 분노와 걱정을 덜하게 하는 뇌의 신비인 셈이다.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열등감이 남들보다 강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사회는 혼자 힘으로 해내는 사람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사회는 정서적 어려움보다 통증을 비롯한 신체적 증상에 동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보다 차라리 몸에 문제가 있는 쪽이 훨씬 떳떳한 것이다. 이것이 불쾌한 정서 현상에 직면했을 때 감정적 증상보다는 육체적 증상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이다.


* 통증의 진짜 원인은 억압된 분노

사노 박사는 이런 상처들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 해서는 절대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토록 두려워하던 분노나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라고 한다. 눈을 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무의식에 억압된 부정적 감정들이 금세 이해될 리가 없다. 뇌의 회피전략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탓이다. 그 익숙한 사고습관을 바꾸는 것이 사노 박사의 치료의 핵심이다.

그래서 박사의 주된 치료 수단은 강의와 토론이다. 강의와 토론을 통해 통증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환자들이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치료법을 ‘지식요법 knowledge therapy"이라 하고, 그의 책을 ‘읽는 약reading pill"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뇌와 대화를 나누라’고 했다. 그리고 뇌에게 ‘이제 너의 속임수를 알고 있으니 더 이상 통증은 쓸모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한번 이해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장기간에 걸쳐 생각의 ’습관‘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했다. 박사의 치료의 대부분은 이 지점에 집중된다.


* 몸과 마음의 화해 : 울화병에서 벗어나라

우리는 몸에 통증이 있으면 의사가 고쳐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노 박사는 통증은 상당 부분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의 영역에 걸쳐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신비하고 모호한 교설이 아니라 근골격계의 통증 문제에 집중하여 과학적인 설명(어차피 마음의 영역에 대해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식의 설명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 것이다)과 진단을 통해 수백만 통증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치료 성공률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치료법이 누구에게나 100%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평소 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 즉, 환자는 신체의 통증이 상당 부분 나의 감정과 관련된 문제임을 인식하는 기회를 갖고, 의학계는 몸에 영향을 주는 마음의 역할을 의학의 영역 안으로 조화롭게 포섭하는 지혜를 갖는다면 현대에 만연한 통증 증후군에 하나의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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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이닷컴 > 한국일보 > 문화·과학

[강정의 나쁜 취향] <40> 나만의, 오로지 나만의 장정일에 대해서
눈 뜨기 전의 아담 모습 내겐 시인 장정일일뿐…
젊은 한때 詩鬼에 들려 썼다던 시집 두권, 치열한 작가정신·빳빳한 감각 고스란히
친해지지 않는 '너에게…' 등 출세작, 어쩌랴 그건 소설 팬 '단신'들의 몫인 걸…


‘장정일 문학선집’ 발간을 기념하여 ‘장정일 원작 영화제’가 27일 낮 12시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씨어터 2.0’에서 열린다. 영화화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수준이 처지는 ‘아담이 눈뜰 때’와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제외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 ‘301 302’등 세 편 연속 상영 뒤 작가와 독자 간의 대화시간도 마련된다.


1990년대 이후 흔히 ‘신세대 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장정일이지만, 내게 장정일은 여전히 시인으로만 남아있다. 나는 ‘아담이 눈뜰 때’ 이후 출간된 그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다(그럼에도,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대표작들은 전부 다 봤다).

그의 전업(轉業)이 시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던 게 아니라, 습작 시절,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를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난 어느 시점 이후로 그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뿐이다.

장정일 스스로도 위에 든 시집 두 권이 젊은 한때 ‘시귀(詩鬼)’에 들려 썼던 것들이라고 공언하듯, 내게 장정일은 아직도 이십대 중반의 불온하고도 전복적인 상상력을 재기발랄하게 풀어낸 개성적인 시인으로 기억된다. 이른바 ‘거짓말’ 파문으로 TV 뉴스에까지 등장한 그를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데, 그랬던 만큼 나는 그의 소설에 대해 어떠한 감상이나 평가도 전할 수 없다. 이 글은 ‘시인 장정일’에 대한 일방적인 기억을 호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달 발간된 ‘장정일 문학선집’(전6권, 김영사)에 시선집은 ‘주목을 받다’ 한 권뿐이다. 그런데, 57편이 수록된 이 시선집에 앞서 말한 두 시집의 흔적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삭제되어있다. ‘작가 후기’에서 장정일은 그 의도를 이렇게 자백한다.

“여기 실린 시들이 내 시의 진면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 시집(’상복을 입은 시집‘’서울에서 보낸 3주일‘’천국에 못가는 이유‘- 인용자 주) 가운데서도 일부러 가장 ’내 것’ 다운 것을 빼고 가장 평이한 형식과 친근한 주제를 가진 것들만 골랐다. 그만큼 ‘늙어, 힘이 빠졌다’는 뜻도 되지만, 현대시의 쇄말성과 난해함을 씻어보자는 뜻도 있다.”

대개 자타 공인 ‘진면목’이라 불릴만한 것들로만 묶이는 게 관습화된 ‘선집’의 의도이자 계산으로 여겨지건만, “일부러 가장 ’내 것’ 다운 것을 빼고” 선집을 묶은 장정일의 태도는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과연 ‘장정일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하기도 한다.

장정일은 ‘시귀’에 들려 있던 자신의 특정한 과거를 취사선택 않고 온전히 보호함으로써 다시 찾지 못할 ‘내 것’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쇄말성과 난해함’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당대의 시적 풍토에 나름의 비판적 시선을 던지려는 듯 보인다.

사실, 남다른 주파 능력을 가지고 돌올하게 솟아있던 그의 예전 시들에 비한다면 요즘 시들은 소위 현실길항력이란 측면에서 사뭇 밋밋하고 공허한 게 사실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현실이란 장정일 때만큼 치열하게 삶의 한복판에 엉겨드는 물적 토대로서의 의미가 매우 얕다.

젊은 시절의 장정일이 어수선한 사회상황과 절박한 생존욕구로 빳빳하게 감각을 곤두세웠던 반면, 그보다 십여 년 이상 뒤처진 세대들의 시는 삶과 환상의 중간지대에서 자족적으로 이행되는 유희로서의 기능이 더 강하다. 때문에 ‘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인지 위에 쓴 시’ 말미에 붙은 첨언)는 장정일의 말에 대한 그들의 체감온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장정일에 비하면 비교적 무난하고 고초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문학은 삶의 향신료일지언정, 주식(主食)으로써의 기능은 다소 미약하다. 이건 그들이 문학의 위의(威儀)를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문화 세례와 패셔너블한 감각, 미적ㆍ지적으로 리버럴한 사유체계를 지닌 요즘 시인들에게 향신료와 주식의 차이는 그닥 크지 않다.

이 짧은 글에서 그들의 다종다양한 성향을 한꺼번에 운위하는 건 아전인수가 될 확률이 높지만,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배를 곯아 죽는 걱정은 않을지언정, 오로지 자신만의 향신료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게 요즘 아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마도 장정일의 발언에 이런 대구를 칠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직업이라면, 구역질나서 못할 것이다’라고.

이 말은 현대시의 ‘쇄말성과 난해함’을 꼬집은 장정일에게 절반쯤 반대하면서 편협하게 던져보는 투정이나 진배없다. 시에 관한 한, 장정일은, 그 스스로 고백한 만큼 ‘늙어, 힘이 빠’져 보인다.

그러나 내 나름의 편견은 여전하되, ‘장정일 문학선집’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문학 전반에 관한 한, 장정일은 의외로, 여전히 ‘젊어, 힘이 있’어 보이는데다가 매우 전략적이기까지 해서 놀랍다.

때문에 모든 유추가능한 정황들을 두루 살핀 후 소위 ‘후보선수’들로 구성된 ‘주목을 받다’를 다시 읽어보면 독특한 재미가 있다. 생각건대 그 재미는 한 작가의 문학적 기원을 A급이 아니라 B급으로 훔쳐보는 간텍스트적인 관음욕구에서 출발한다.

이런 관음욕구는 일차적으로는 독자를 유혹하지만, 스스로의 숨은 욕망을 ‘실크커튼’ 너머로 은근슬쩍 내비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노출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주목을 받다’의 매 시편마다 짤막한 사족으로 붙어 있는 말들은 그러므로 이 시선집의 진짜 ‘몸통’처럼 읽힌다.

그 숨은 듯 노골적으로 드러난 ‘몸통’은 장정일의 문학적 사견들이 생성되는 지점이자, 그 고집스러운 사견으로 그가 세상과 문학에 대한 그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벼리는 초크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진면목’을 빼고 2군으로 포진시킨 ‘주목을 받다’는 새삼스레 주목할 만하다. 장정일의 소설을 사랑하는 팬들이여, ‘장정일 문학선집’의 포문을 여는 이 건성인 듯 치밀한 시선집을 부디 간과하지 마시라.

시간 순서로 봤을 때 ‘문학선집’의 둘째 권으로 놓이는 건 그의 초기 단편들이 수록된 ‘아담이 눈뜰 때’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봤을 때, ‘아담이 눈뜰 때’는 그 문학적 성과와 가치를 논하기 전에 존재만으로도 장정일을 이 시대의 문제적 작가로 재탄생시킨 범상치 않은 통과의례 작품이다.

통과의례란 건 ‘시귀’를 떠나보내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장정일 개인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라,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을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이후 세대의 문학적 감수성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위의 문장은 이후 ‘신세대 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 암시적인 주술처럼 인용되었다.

지금 아해들이라면 ‘초고속 슬림형 노트북과 나라 요시토모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시디롬과 엠피쓰리 파일을 고음질로 들을 수 있는 다기능 아이리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겠지만, 어쨌거나 ‘아담이 눈뜰 때’는 소위 분단과 정치문제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문학의 유구한 콤플렉스를 ‘개무시’하며 당당히 섹스와 마약을 밝히는 신세대 ‘아담’의 전면적 출현을 예고했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내가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읽은 장정일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건대 표제작보다는 선집에 같이 묶인 ‘아이’나 ‘펠리컨’ 등의 단편에 더 눈이 간다.

장정일이 소위 소설가로 뜨기 전 씌어진 이 단편들은 내가 여전히 그를 시인으로만 여기고 있던 시절에 처음 읽었었다. 그때는 잘 나가는 시인이 ‘그냥 한번’ 써본 소설정도로 치부하곤 ‘꽤 재미있네’하는 촌평으로 감상을 갈무리했던 기억이 있지만, 다시 읽어보니 시인에서 막 ‘턴오버’하려는 작가 장정일의 문학적 역량의 토대가 여실하게 드러난 작품들이라 여겨진다.

‘펠리컨’은 삶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일종의 우화소설이랄 수 있는데, 과문한 내가 보건대 이토록 스피디하게 읽히면서도 목울대에 뭉클하게 감겨 들며 비릿한 여운을 남기는 한국 단편을 읽은 기억이 많지가 않다.

이건 비단 ‘펠리컨’뿐만 아니다. ‘아담이 눈뜰 때’에 같이 묶인 단편들은 일종의 ‘문학적 돌연변이’로서의 장정일의 소설가적 면모를 첨예하게 드러낸 자취들로 가득하다. 이 작품들 이후 본격적인 장편 작가로 입지를 쌓고 급기야 ‘삼국지’에까지 도전하면서 독보적인 문호에의 욕망을 드러낸 장정일이지만, 내게 그는 아직도 ‘눈 뜨기 전의 아담’의 모습으로만 질기게 공명한다.

때문에 말끔한 양장본으로 다시 묶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의 출세작들이 내게는 여전히 난감할 뿐이다. 처음 나온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책들은 술자리에서 수시로 합석하게 되지만 도무지 친해지지는 않는 어떤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예감컨대 나는 이 소설들을 앞으로도 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선집 발간 기념으로 인터뷰를 하려 했다가 도무지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포기한 건 이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의 일부를 전부인 양 착취하면서 그의 특출한 문학적 재능을 약간은 질투하고 약간은 배배꼬면서 내 멋대로 그를 향유할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의 소설에 여전히 열광하는 수많은 ‘당신’들이 하시라.


시인 강정 nietz4@naver.com

입력시간 : 2005/11/21 17:32
수정시간 : 2005/12/0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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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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