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립간 > 수맹의 비애
알라딘 서재가 생기기전 제가 자주 방문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궁리(www.kungree.com) 이었습니다. 궁리의 눈이라는 곳에 실린 글입니다.
수맹의 비애
'국민학교'('국민학교'를 입력하니 아래아 한글이 친절하게도(?) '초등학교'로 자동 교정해준다.) 시절에 산수 과목을 배웠다. '초등학교'에서는 수학으로 과목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던가. 산수는 셈하기이니 수학이 과목이름으로 적합하다 하겠다. 셈하기만 배우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산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수학......정말 지지리도 못했었다. 고3 시절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같은 반 친구들과 '수포클럽' 그러니까 수학 포기자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 정도였다. 당시 '수포클럽' 가입 자격은 국어 및 영어 과목 성적과 수학 성적의 수준 차이가 극심한 사람, 요컨대 수학 잘하는 급우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큰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은사 한 분은 당신이 만일 대입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철학과가 아닌 수학과를 지망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고 놀라운 방식이 수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자신이 수학 과목을 사실상 포기하고 고전학에만 몰두한 것을 무척 후회했다. 토인비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무척 중요한 눈 하나를 일찍 포기한 것이 한스럽다는 투로 말한다.
버트란드 러셀은 자신의 조모로부터 어린 시절에 영국헌정사를 비롯한 인문 교육을 받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10살이 되기도 전에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철저하게 공부한 셈이다.) 그런 그는 조모가 수문(水門)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러셀의 조모는 고전학과 역사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지만, 기본적인 셈하기 이외의 논리적, 수리(數理)적인 분야의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양적인(quantitative) 사고나 공간적인 사고, 기하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것이다.
여하튼, 대입 수학에 관한 한 본래부터 수학에 소질이 없었다는 핑계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학, 정확히 말하면 대입 수학이라는 것이 수학 영재나 수학자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 과정이 아님은 물론, 기초부터 꾸준히 다지고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 비교적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입 수학은 부지런함과 꾸준함이 관건이지 타고난 수학 재능이 관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정확히 말하면 나는 수학 과목에서 부지런함과 꾸준함을 발휘하지 못한 게으른 학생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학 시절 은사나 토인비처럼, 나도 수학 실력을 쌓지 못한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아쉬워한다. 비교적 복잡한 수식이 자주 등장하는 책을 읽거나, 수학의 주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이해가 훨씬 빨라지는 책을 읽거나 할 때 더욱 그렇다. 천문학 관련 책을 읽다가 하도 답답한 나머지 고등학교 지구과학 참고서를 구입해서 필요한 부분을 공부한 적도 있다. 통계학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역시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를 공부한 적도 있다.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언어, 수학이라는 언어를 일찌감치 포기한 수맹(數盲)의 비애!
수학 공부에서 유달리 게으름을 피운 나이기에 남의 탓을 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유구무언은 아니다. 문제 풀이 요령이 아니라 기본 원리나 공식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수학 선생님이 계셨던가? 우리가 배우는 수학의 여러 분야들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준 선생님이 계셨던가? 원리, 공식, 기본 개념 등은 주마간산으로 대충 넘어가고, 실전(實戰) 그러니까 입시에 나올만한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을 푸는 테크닉을 습득하도록 내몰렸던 것은 아닐까? 미적분이 왜 중요한지, 집합론이 수학의 기초론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률과 통계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응용되고 왜 중요한지.....이런 저런 중요성과 의미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혹은 그런 것들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수학 교육이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남의 탓도 해보게 된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역설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각광을 받은 바 있다. 생각하기로는 '수학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책이 나오면 어떨지 싶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중고교 수학 교과 내용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책.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수학의 기초 개념과 원리, 공식 등을 가능한 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만화, 우화, 일화, 은유, 비유.....) 알기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 나로 하여금 '이런 책이 나의 고교 시절에 나왔더라면 수포클럽을 결성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 자신의 게으름 탓에 구제불능에 가까운 수맹이 되어버린 사람도 심심풀이로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책..... . (2002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