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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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을 놓는 사람

ㅡ 문태준



이 불길, 크고 작게 번지는 불길의 간격은

폐허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군복바지가 두렁에 침목처럼 서서

긴 부지깽이를 내두르는데,

나는 풀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겨울 아침, 동력경운기에 시동 거는 그 소릴

듣는다 가르릉거리다 픽 꺼지는

고집 센 이 두렁의 폐허, 옮겨붙다 사그라드는

불길, 불은 풀의 폐허를 건드리지 못한다

제때 시동 걸리는 것은 生이 아니라는 듯





먼저, 문태준의 이 시가 그려내는 그림은 이렇다 :


ⅰ) 겨울 아침, 나는 논이나 밭의 두렁 앞에 서 있다. ⅱ) 늙은 남자(“늙은 군복바지”의 이미지는 ‘낡은 군복바지’를 작업복으로 입은 초로의 남자를 불러낸다)가 두렁에 쥐불을 놓는다. ⅲ) 남자가 놓은 쥐불은 풀이 돋지 못한 폐허의 땅에 맞딱드리게 된다. ⅳ) 그 폐허의 땅에는 쥐불이 옮겨 붙을 풀이 없으므로, 불은 그곳에서 사그라든다. ⅴ) 나는 그 광경을 동력경운기에 시동을 걸다가 픽 꺼지는 소리로 겹쳐 듣게 된다. ⅵ) 나는 폐허 앞에서 멈춰 서버린 쥐불의 불길을 제때 시동 걸리지 않는 生으로까지 읽는다.


농촌에서 쥐불놀이의 풍속은, 농사가 다 끝난 겨울 논밭두렁에 불을 놓아 그 불로 쥐와 해충을 죽이며 동시에 그 재를 거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일은, 농사가 끝난 한적한 철에 농사의 시동을 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논밭두렁에 땀을 적실 것을 예비하는 이 풍속은 불꽃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열렬한 활기와 희망에 차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쥐불놀이는 조금 쓸쓸하다. 불길의 열렬함도 폐허의 땅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삶의 열정도 한 시절이 지나가면 언제까지나 쌩쌩하게 시동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일까.


어둡지만 곧 밝아오는 겨울의 아침. 절망과 희망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그 시간. 시골의 늙은 사내는 자신과 한 몸을 이루는 낡은 군복바지를 꿰어 입고 두렁에 선다. 그리고서는 삶의 시동을 켜듯 쥐불을 놓아본다. 동력경운기의 시동을 걸듯. 털 털 털 털, 경운기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팔을 거칠게 휘둘러야 하듯 긴 부지깽이를 내둘러본다. 겨울의 희망을 내두른다. 이제 작은 불꽃은 풀 위로 떨구어져 큰 힘을 이루어 두렁 위를 달린다. 허나, 곧 폐허의 땅을 만나 숨을 거두고 만다. 낡은 군복바지는 더 이상 젊은 군인들의 씩씩한 패기와 탄탄한 근육을 담지 못하며, 풀이 돋지 않는 폐허의 땅에서는 불의 온기마저 거두어드리지 못한다. 불에 타 죽지 못하는 두렁의 땅은 이듬 해 봄에도 다시 새로운 거름을 얻지 못해 新生하지 못하리라. 차라리 내가 늙은 군복바지의 사내가 되어서 그 폐허의 땅 위로 쥐불 대신 굴러보고 싶으다.


내 어린 시절 어둠을 틈타, 부모와 형 몰래 빠져나와 동네 악동들과 논밭을 쏘다니며 불을 놓던 그 쥐불놀이에는 유희의 추억이 쌩쌩한 즐거움과 함께 담겨 있었다. 무언가 앞날의 노동을 앞 둔 일꾼의 자세가 아니라 야밤에 깡통 돌리는 불장난에 불과했으나, 우리는 즐거웠고, 그 즐거움은 내 추억 속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다. 이 시는 나의 행복했던 쥐불놀이 추억을 배반했으며 그 배반은 쓸쓸함을 안겨다 준다. 그러나 제때 제때 불붙지도 않으며 제때 제때 불끄지도 못하는 게 生이란 걸 이제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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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내가 쓴 글로 책 만들기....

http://www.iolive.co.kr

아이올리브란 사이트입니다.
품질이나 비용이 적당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이용해본 적이 없어서...
혹시 자신만의 책 한 권 갖고 싶은 분은 이곳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어 100권-500권 한정본 시집을 묶을 필요는 없는데...
친구들과 한 서너 권에서 10권 정도의 개인 문집을 내고 싶은 분들은...
이용해볼 만하단 생각입니다.

전번에 모 블로그 사이트에서 책만들어주는 이벤트에 보인 관심을 생각해보면...
뭐 이 사이트를 홍보하는 건 아니고,
책 만드는 과정에 대한 간략하나마 정보도 있고 하니 참고하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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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부후사 > [코멘트]기자

저는 정문태 기자의 말을, 단순한 편가르기로 사태를 바라보자기 보다는 중립이란 자리가 마련되는 자리는 세상에 거의 없다라는 표현으로 읽었는데요. 정문태 기자도 책 속에서 누차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중립이란 서방주류언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책 속에서 인용합니다.  "'중립'이란 말은 백인, 기독교, 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내가 죽기 살기로 남예멘에 기어들어갔던 건 그런 식의 '중립' 따위나 지키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조선일보> 문제는 이와는 다릅니다. '세상에 중립이 마련되는 자리는 없다'라는 정문태 기자의 말대로 어느 신문이든지 간에 당파성은 있기 마련입니다. 당파성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요. 그 당파성이 내가 먹고 사는 데에유용하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른 것이지요.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선이냐 악이냐를 떠나서 <조선일보>가 나의 먹고 사는 위치, 즉 나의 계급성을 대변해 주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조선일보>를 옹호하거나 비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제 상황에 대입해보자면 <조선일보>는 지방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의 자식인 저의 먹고 사는 위치에 견주어 너무나 친재벌적이므로 저는 <조선일보>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나의 먹고 사는 위치와 부합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 더불어 또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조선일보> 문제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일어나기 쉬운 지역인 한반도 남쪽'에 사는 제 목숨을 쥐락 펴락하고 있는 유에스에 상당히 친화적이거니와, 거기에 더하여 남과 북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도발함으로써 제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뿐만 아니라 한번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 중 유에스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 전쟁이 나더라도 안전하게 외국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조선일보>를 비판해야 되는 것이지요. 씁쓸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죽게 될 이들이 <조선일보>를 열혈 구독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흔히 친일을 근거로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이런 주장이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일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말 지주자본가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신문에게 뚜렷한 민족주의적 논조를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조선일보>가 추구하고자 하는 대상은 권력과 돈입니다. 일제 초기에 <조선일보>가 약간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었다면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의 잔뜩 부풀었던 독립열에 기대어 돈 좀 벌어보자는 깜냥때문이었겠지요. 일제의 본격적인 철권통치가 시작되어 부풀었던 독립열이 사그라들자 <조선일보>는 거칠 것 없이 친일의 길로 돌아섭니다. 이것이 <조선일보>가 가진 진짜 힘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보세요. 이 신문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보수성'을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살롱좌파들이 이 신문과 드러내 놓고 성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조선일보>에 대항해서 이길려면, <조선일보>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왔던 방식대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일이 우리의 먹고 사는 일과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일 터이니 그래야 <조선일보>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현재 그 신문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최대한 졸아들게 할 수 있습니다. '친일'이니 '민족'이니 하면서 아무리 <조선일보>를 공격해 대도 보통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열심히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벌어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 옆에두고 '민족'이니 어쩌니 아무리 떠들어 대봤자 쇠 귀에 경 읽기일 뿐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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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 서정주편에서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504/h2005040516554567740.htm

 

시인공화국 풍경들, 이번 주는 서정주다. 서정주 시선집 <국화 옆에서>를 읽으며, 그 언어의 도저한 관능에 깜짝 놀랐던 때가 떠오른다. 고종석의 이 글은, 혐오스런 행적의 시인 서정주에 대한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을 가하면서도 그의 놀라운 언어 능력에 대해서는 침묵을 다무는 이들과, 정치적 행적들을 전혀 무시해버리고 서정주 시에 대해 찬양하는 이들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으면서도 서정주의 시 세계를 잘 안내한 글이다.

"... 이런 평가의 혼돈과 불능을 치유할 길은 없는가? 있다. 문학적 재능 곧 글 쓰는 재주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춤추는 재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이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은 무용가로서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문학이라는 장르에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지만, 문학은 그 정도로 시시한 것이다. 엄중한 것이 삶과 역사라면, 하찮은 것이 문학이다. 미당은 시시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문학을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문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글의 꼬리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그러나 고종석의 문학관 전부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란 말의 춤이고, 말부림의 재주라고 할 수 있지만 서정주는 정치적 행적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부리는 말들의 춤을 통해서도 정치적 간음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의 춤은 춤대로 놓아두고 그의 정치적 삶은 삶대로 놓아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때문에 많은 논자들이 문인으로서의 서정주의 정치적 행적을 심문하는 일을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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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5-04-0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찾아 읽어봐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