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었을 거다. 비 그치고, 무지개 아래에서 나는 걷고 있었다. 아니다. 태양이 작렬하는 날이었을 거다. 들판에서 먼지가 일고, 주인 없는 동네 개새끼들은 권태롭게 홀레 붙고…… 지겨운 풍경이 이어졌다. 어쨌든 나는 걷고 있었다. 차가 지나지 않는 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찻길 가에는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건 털이 고운 짐승이었다. 족제비 같았다. 등을 구부리고 거기 죽어 있었다. 아, 가엾어라…불쌍한 것. 다시 보니 이번에는 가죽이 어지러운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징그러운 놈. 징그러운, 예쁜 놈. 나는 놈을 뒤집어 보았다.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 놈은, 뜯기고 있었다. 놈의 뱃가죽이 벗겨진 늪 속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허연 쌀밥들이 거기서 기어다녔다. 나는 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정절의 순간에 작은 스프링처럼 뒤로 튕겨졌을 뿐이었다.

 

                                             그토록 따스한 이 아름다움 아침에
                                      우리가 본 물건이 생각나는가, 귀여운 그대여,
                                             오솔길 구비 조약돌 섞인
                                      강 벌 위에 더러운 썩은 짐승 시체가.

                                             음탕한 계집처럼 공중에
                                      가랑이를 벌리고, 지글지글 타며 독액 흘리며,
                                             데면데면하고 뻔뻔스럽게
                                      발산물로 꽉찬 배때기 열어제치고 있었지.

                                             태양은 그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리쪼이며,
                                             그것이 한데 맺어 지닌 일체를
                                      골백배로 불려 <대자연>에게 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그 희한한 잔해를
                                      꽃이 피어오르듯이 굽어보고 있었지.
                                             하도 악취가 진동하여
                                      너는 풀밭에 실신하여 쓰러질 듯했지.

    - 「썩은 짐승 시체」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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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이것이 도대체, 사상일까요? 나는 이 신기한 말을 발명한 사람은 종교인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주막에서 솟아난 말입니다. 구더기가 끓듯이 어느 틈엔가, 누가 먼저 말했다 할 것도 없이 꿈틀꿈틀 솟구쳐 전세계를 뒤덮고 세계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신기한 말은 민주주의와도, 또한 맑시즘과도 무관합니다. 그건 틀림없이 주막에서 못생긴 남자가 미남자를 향해 내뱉은 말입니다. 단순한 초조감입니다. 질투입니다. 사상이고 뭐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막에서의 질투어린 고함이 묘하게 사상다운 표정을 띠고 민중 속을 누비고 다녀, 민주주의와도 맑시즘과도 전혀 무관한 말인데도 어느 틈엔가 정치 사상이며 경제 사상에 얽혀 들어 엉뚱하게 떳떳치 못한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메피스토인들, 이런 터무니없는 발언을 사상으로 탈바꿈시키는 묘기는, 차마 양.심.에. 부.끄.러.워.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입니까. 남을 업신여기는 동시에 자신마저 업신여기고, 아무런 자부심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말. 맑시즘은 노동하는 자의 우위를 주장합니다. 다 똑같다, 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존엄을 주장합니다. 다 똑같다, 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오직 유곽의 호객꾼만이 그렇게 말합니다. "헤헤헤, 아무리 잘난 척 해 봤자, 다 똑같은 인간 아닌감?" (186-187쪽)

 

 ⇒ 이런 블랙유머는 질펀한 술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아주 진귀한 것으로, "시는 알콜의 대체"라는 평소의 생각을 좀더 건설적으로, 좀더 논리적으로 확장시켜서 "독서는 술자리의 대체"로 바꾸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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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립간 > 수맹의 비애

알라딘 서재가 생기기전 제가 자주 방문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궁리(www.kungree.com) 이었습니다. 궁리의 눈이라는 곳에 실린 글입니다.

 수맹의 비애

 '국민학교'('국민학교'를 입력하니 아래아 한글이 친절하게도(?) '초등학교'로 자동 교정해준다.) 시절에 산수 과목을 배웠다. '초등학교'에서는 수학으로 과목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던가. 산수는 셈하기이니 수학이 과목이름으로 적합하다 하겠다. 셈하기만 배우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산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수학......정말 지지리도 못했었다. 고3 시절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같은 반 친구들과 '수포클럽' 그러니까 수학 포기자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 정도였다. 당시 '수포클럽' 가입 자격은 국어 및 영어 과목 성적과 수학 성적의 수준 차이가 극심한 사람, 요컨대 수학 잘하는 급우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큰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은사 한 분은 당신이 만일 대입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철학과가 아닌 수학과를 지망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고 놀라운 방식이 수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자신이 수학 과목을 사실상 포기하고 고전학에만 몰두한 것을 무척 후회했다. 토인비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무척 중요한 눈 하나를 일찍 포기한 것이 한스럽다는 투로 말한다.

 버트란드 러셀은 자신의 조모로부터 어린 시절에 영국헌정사를 비롯한 인문 교육을 받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10살이 되기도 전에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철저하게 공부한 셈이다.) 그런 그는 조모가 수문(水門)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러셀의 조모는 고전학과 역사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지만, 기본적인 셈하기 이외의 논리적, 수리(數理)적인 분야의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양적인(quantitative) 사고나 공간적인 사고, 기하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것이다.

 여하튼, 대입 수학에 관한 한 본래부터 수학에 소질이 없었다는 핑계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학, 정확히 말하면 대입 수학이라는 것이 수학 영재나 수학자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 과정이 아님은 물론, 기초부터 꾸준히 다지고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 비교적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입 수학은 부지런함과 꾸준함이 관건이지 타고난 수학 재능이 관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정확히 말하면 나는 수학 과목에서 부지런함과 꾸준함을 발휘하지 못한 게으른 학생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학 시절 은사나 토인비처럼, 나도 수학 실력을 쌓지 못한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아쉬워한다. 비교적 복잡한 수식이 자주 등장하는 책을 읽거나, 수학의 주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이해가 훨씬 빨라지는 책을 읽거나 할 때 더욱 그렇다. 천문학 관련 책을 읽다가 하도 답답한 나머지 고등학교 지구과학 참고서를 구입해서 필요한 부분을 공부한 적도 있다. 통계학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역시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를 공부한 적도 있다.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언어, 수학이라는 언어를 일찌감치 포기한 수맹(數盲)의 비애!

 수학 공부에서 유달리 게으름을 피운 나이기에 남의 탓을 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유구무언은 아니다. 문제 풀이 요령이 아니라 기본 원리나 공식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수학 선생님이 계셨던가? 우리가 배우는 수학의 여러 분야들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준 선생님이 계셨던가? 원리, 공식, 기본 개념 등은 주마간산으로 대충 넘어가고, 실전(實戰) 그러니까 입시에 나올만한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을 푸는 테크닉을 습득하도록 내몰렸던 것은 아닐까? 미적분이 왜 중요한지, 집합론이 수학의 기초론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률과 통계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응용되고 왜 중요한지.....이런 저런 중요성과 의미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혹은 그런 것들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수학 교육이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남의 탓도 해보게 된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역설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각광을 받은 바 있다. 생각하기로는 '수학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는 책이 나오면 어떨지 싶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중고교 수학 교과 내용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책.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수학의 기초 개념과 원리, 공식 등을 가능한 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만화, 우화, 일화, 은유, 비유.....) 알기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 나로 하여금 '이런 책이 나의 고교 시절에 나왔더라면 수포클럽을 결성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 자신의 게으름 탓에 구제불능에 가까운 수맹이 되어버린 사람도 심심풀이로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책..... . (2002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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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책을 보며 캠퍼스를 걸어 다녔으므로 어쩌면 나를 공부 깨나 하는 사람으로 착각한 이도 있겠다. 학교 안만이 아니라 거리를 걸을 때도 지하철을 타고도 나의 독서는 그치지 않는다. 식사할 때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읽는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할 때도 뭔가 읽을거리를 갖다 놓고 비눗물이 들어가 잔뜩 찡그린 눈으로 본다. 대화를 나누어야 할 상대를 놓고도 책이나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무례를 범한다.

그 가운데 압권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책을 본다는 사실이다. 청주나 천안으로 시간 강의를 다니는 나는 대개 고속버스나 기차를 이용하지만 간혹 시간이 늦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을 때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간다. 그런데 이때도 나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속 1백킬로미터로 달리는 차속에서 책을 본다. 어떤 책은 밑줄을 긋기까지 한다. 달리는 차속에서 문자를 찾아 읽는 스릴이 만점 이상이다. 나도 모르게 이 아슬아슬함을 즐기면서도 너무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맨 바깥 차선으로 나가 80킬로미터 이하 트럭의 속력으로 천천히 달리곤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내가 달리고 있다기보다는 무중력 상태로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것도 좋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내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을 해왔으며 모르는 이들에게 커다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그런 위험한 짓은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읽은 책의 내용을 내가 과연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마도 문자중독증이란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다만 문자를 읽고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정신불안증인 것 같다. 죽음의 속도의 불안을 능가하는 심리적 안정이라니. 이는 아무래도 지독한 직업병 아니면 문명병이다.

중독이란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지켜낼 방도를 자기 내부에서 찾지 못하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만 자기를 존립시킬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같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문자 중독, 섹스 중독 같은 말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리고 이제 인터넷 중독이 생겨났다. 인터넷에 들어와 끝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 특정한 사이트에 매달려 한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말의 '향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 그들은 내 친구다. 문자중독증 환자의 이웃이고 그 최첨단 변이 환자이다. 생각해 보면 문자의 세계나 사이버공간은 그 얼마나 활기 없는 공간인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바로 옆에 환하고 푸른 산야가 펼쳐져 있는데도 죽음의 속도로 문자를 보며 달리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나는 이 에세이를 그것을 읽는 순간에만 탐닉하는 나의 어리석은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지 않다.

문자나 인터넷을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주체적인 자기 삶의 보충물로 간주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을 생기 있게 살아가는 이들일 것이다. 중독을 모르는 그 오전午前의 인간들이 나는 부럽다. (131-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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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3-2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면서 책을 보는 건 정말 심각하네요. 저야 하수구에 다리빠지는 정도의 불상사로 끝났지만, 님은 타인의 목숨까지 걸고 책을 보시는 건 아닌지...

도서관여행자 2004-03-26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핫 ^^; 이 글은 제 글이 아니고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산문집 <명주>에 실린 글이랍니다. 저는 이 정도로 병적으로 책을 읽진 않거든요. 병적으로 몽상하기도 하지만요.
 

해방 이후 가장 뛰어난 번역서는 무엇일까?
각 출판사의 추천을 받은 90명의 현역 번역가들이 설문으로 뽑은 해방 이후 가장 뛰어난 번역서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1992 개정증보판)
2. 가브리엘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백년 동안의 고독』(문학사상사,1973)
3.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카뮈 전집』(책세상,1987~)
4. 니코스 카잔차키스, 안정효 옮김,『영혼의 자서전』(고려원,1981)
5.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염무웅/반성완 공역,『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창작과 비평사,1974~1981)



역시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하나 하나가 정말 쟁쟁한 책들이다.
물론 일률적으로 번역이 잘된 책을 뽑는다는 게 객관적인 자료라고 보긴 어렵지만, 공통적인 추천을 받은 책들에는 처음 출판된 년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대를 뛰어넘어 꾸준히 읽히는 좋은 번역의 표본이면서 현재 한국 번역문학계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지표 구실을 충분히 한다.

(조희봉 씨 글 중에서...)

http://www.8hobook.co.kr/common/pds/pds_list.asp?Data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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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4-28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은 한국어 번역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까뮈 전집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