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죄악사 -상
조찬선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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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제목처럼 기독교의 수치스러운 죄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또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해서는 종교다원화를 인정해야한다고 하는 등, 기존의 기독교 서적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띤다. 나 또한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라는 사실'(상권, p.84)을 선교 이전에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은퇴한 신학대학 교수이며 목회자이기도 했다. 다른 생각으로는, '혹시 이 책.. 위작이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해봤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목회자로서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은 하나의 자기고백이며,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진실 된 애정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죄악사를 썼다. 중요하게 다룬 것으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등이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봐도 가장 큰 기독교의 죄악이므로 크게 다룰 필요가 있다. (너무나 크게 다루다 보니 계속 중복된 내용도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것들 이외의 국내의 기독교 죄악사는 그다지 넓고 깊게 다루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인이자 목회자'인 저자의 한계일 수도 있다. 국내 기독교 역사가 그래도 아직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사악한 짓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뒷 표지의 (국내) 개신교의 죄악 3가지를 소개한 '1. 일제 때의 신사 참배 / 2. 유신 정권지지 / 3. 5·6공 정권에 대한 협조'가 상당히 궁금했는데, 왠지 속이 빈 중국 호빵을 먹은 기분. 국내 기독교 죄악에 관한 책도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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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의 초상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93
최승자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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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정일을 통해서 최승자를 알게 되었다.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에서 주인공이 언급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경림과 같이 (교과서에서나 다른 여러 지면에서...) 자주 들어 귀에 익숙한 시인들도 있었지만 최승자와 같은 낯선 이름의 시인이야말로 호기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후에 읽어본 장정일의 시와 최승자의 시는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둘의 유사성은 환멸, 언어유희, 절망, 탄식, 실험적인 그리고 전위적인 시-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선집을 읽고는 정말이지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장정일이 이 시선집의 해설을 쓴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 부쩍이나 좋아진 장정일의 시 [지하인간]과 유사함을 넘어선 흡사한-아니, 동일한(?)- 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최승자의 [삼십 세]. [지하인간]에서의의 화자가 '내 이름은 스물 두 살'이라고 했고 최승자의 [삼십 세]에서는 제목 그대로 삼십 세라는 자의식 속에서의 절망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시들은 분위기뿐만 아니라 시적 구성마저도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장정일의 [지하인간]이 더 빼어난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진다고 본다.

최승자의 시 세계를 한 권으로 맛볼 수 있는 시선집으로 장정일의 시선집인 <지하인간>과 더불어 추천한다. (* 미래사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은 괜찮은 시선집 기획이다. 이 선집들만 훑어 봐도 한국대표시인들의 시 세계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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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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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의 두 주인공이 이 소설에 매혹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기 위한 독서였는데, 나 스스로가 이 소설 속으로 깊숙히 빠져들지 못했기에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조금은 산만한 독서를 한 것도 그 원인 중에 하나였겠지만, 정독으로 한번에 읽어내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에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여인을 잊지 못하는 부유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기대만큼 나를 매혹시키지는 못했다.

다른 번역판의 같은 소설보다 이 책에 끌린 이유는 정현종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독자들의 평에 따르자면 이 책의 번역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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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시선집 창비시선 68
백낙청 엮음 / 창비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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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서 김수영을 읽는다. 시, 지하철, 김수영. 이런 생각이 든다. 전에 장정일이 했던 말. 시를 읽는 것은 나르시시즘이라고. 그렇다. 시는 나르시시즘이다. 시 읽기는 나르시시즘의 정점이다. 나는 시를 그냥 받아들이려 한다. 시에 대한 문학적 지식이 별로 없다는 때때로 자유로운, 그래서 즐거운 시 읽기를 허락하게 한다. 누구나 음악도나 음악평론가처럼 지식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귀에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이 좋은 음악이란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음악 감상의 하나일 뿐이다. 시가 노래라면, 그리고 문학이 음악이라면, 시 읽기도 부담스런 지식의 배경 아래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시에는 녹여진 형태로, 형태 없는 형태로 역사와 논리와 철학이 담겨지지만 그것의 원상태로의 복원과 추출만이 시 읽기의 전부는 아니다. 형태 없는 형태의 오롯한 감상이야말로 시 읽기의 가장 살 떨리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 느낌의 감상법을 주장하다보니 그 감상법의 한계를 보고만 나의 고백이 있어야겠다. 시를 읽어보자고 그리고 되도록 치열한 김수영의 시를 읽어보자고 했건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접하고, 또 인터넷 사이트에서 몇몇을 접한 때보다 느낌이 덜했다. 느낌에만 시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김수영은 역시 김수영. <거대한 뿌리>나 <폭포>, <풀>, <눈>, <性> 등의 충격적 감동은 여전했다. 모두들 김수영의 시집을 읽기 전에 접했던 시들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절망하기는 했지만. 백낙청이 엮었다는 이 시선집의 미덕은 첫째로 한자를 줄였다는 점이다.

김수영 시 전집을 사두고 1년여를 넘도록 한자의 장벽에 막혀서 썩힐 수밖에 없었던 기억. 한자의 벽 너머의 김수영을 만나게 해준 시선집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김수영 시의 특질인 속도감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란 백낙청의 말은 신뢰감이 있다. 백낙청의 이름과 해설은 시선집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 시선집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전집을 읽으라는 백낙청 말마따나 다음 번에 김수영을 전집을 통해 만날 것이다. 그때는 지금의 시의 불감증을 극복할 수 있을까? 김수영을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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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 Kim 2011-12-2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막힌 영감이로소이다
 
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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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상, 하권을 읽었다. 나는 베르나르의 인기 있는 소설들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뇌>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읽었다고 그의 소설 세계의 전부를 탐험한 것은 아니지만 베르나르 소설의 인기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뇌>를 전부 다 읽고 나서, 아니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계속 이 소설의 영화적인 발상과 전개방식, 그리고 빠른 속도감이라든가, 오락적이면서도 소설적인 깊이를 잃지 않는 그의 글 솜씨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문학 전공자마저도 소설책보다는 영화를 더 즐겨 보는 시대이다. 베르나르 소설의 영화적 전개는 영화에 친숙한 독자들을 소설로 붙들게 하는 자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문학을 뿌리로 삼던 시대는 옛말인 듯 하다. 영화는 이제 문학에게 새로운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뇌>의 경우, 이 소설의 끝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은,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모두 관람하고 엔딩 크레딧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로 물든다.

핀처 박사와 마르탱이 뇌의 '최후의 비밀'을 밝히고자 벌인 실험 이야기와, 그리고 핀처 박사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두 기자 - 이지도르와 뤼크레스의 이야기를 적당한 길이로 교차하면서 제시한 것은 확실히 영화적인 작법이다. 이 소설의 몇 군데만 적절히 수정하기만 하면 그대로 영화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상상까지 해봤다. '과학소설'로서 소설의 종결 때까지 지적인 정보를 계속적으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베르나르의 소설은 정보나 지식이 없는 다른 소설들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독자들에게 확실히 무언가 읽었다라는 독후감까지 획득할 것이다. 뇌에 대한 극한에 가까운 상상력과 발상으로, 또 여기에 더해 인간의 근원과 미래에 대한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유쾌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적절한 웃음과 긴장과 혐오감, 그리고 지적 포만의 복잡한 만족감을 준다. 우리나라에도 베르나르 정도의, 혹은 그를 넘어서는 작가가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작가들에게는 어떤 '동기'가 필요할까? 그것이 우리 문학의 '최후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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