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송두율 칼럼] 인간자본과 인재(人材)

 

1991년부터 해마다 독일언어 전문가들의 모임인 ‘언어비판적 행동’은 ‘단어 아닌 단어’를 선정하는데,2004년의 최악의 단어로서 ‘인간자본’(Humancapital)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원래 기업경영에서 직원의 지식, 경험 그리고 능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자본’은 고객과 조직관리를 근간으로 하는 ‘구조적 자본’과 함께 기업의 ‘지적 자본’을 구성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어 이 단어가 최악의 단어로 선정되었는가.

▲ 송두율 교수

인간을 자본증식을 위한 재료나 소재(素材)로서 바라보는 발상은 ‘인간자본’이 물론 처음은 아니다. 산업자본주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의 19세기 중엽의 노동자의 생활참상을 런던에서 한때 기자로 일하면서 목격한 독일의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도 ‘인간소재’(Menschenmaterial)라는 단어를 이미 사용했다.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그의 동시대인 칼 마르크스도 역시 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 단어를 구사했다.

이 ‘인간소재’라는 단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인재’(人材)가 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등치(等値)시킬 수 없는 어떤 의미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인재등용’이니 ‘인재양성’처럼 ‘인재’는 다분히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데 대하여 ‘인간자본’이나 이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인간소재’는 주로 경제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지구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강조되고 있는 ‘인재’의 경제적 의의는 한국사회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에서 ‘인재’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기업들도 이제는 ‘인재’의 국적조차도 문제삼지 않고 ‘인재사냥’(war for talents)에 나서고 있다.

막스 베버는 동양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을 발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요인중의 하나를 동양사회의 인문적인 ‘문화인’에서 찾은 적이 있다.‘선비’가 아마도 이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양의 기능적인 ‘전문인’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인재’의 이념형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이러한 ‘인재’는 대학사회에서조차 발붙일 틈이 없는 것 같다. 교육은 경제발전에 종속되어야 하고, 대학도 기업체처럼 운영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관철되고 있는 조건에서 위에 말한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인재’의 개념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인간자본’을 최악의 단어로 선정한 배경에는 분명히 사회전체를 곧 시장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 깔려있다. 이에 대해서 ‘인간자본’을 옹호하는 측은 자본과 인간을 결합시킨 이 새로운 개념이야말로 소재라는 물질적 개념에 의거해서 ‘인간착취’나 ‘인간소외’를 연상시켰던 과거의 ‘인간소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지식’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의 경제사회에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반박한다. 비물질적인 정보가 주도하는 탈현대적(postmodern)인 사회의 자본과 인간관계를 기존산업사회의 그것처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자본’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우리의 ‘인재’가 담고있는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재’는 단지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인재’(人才)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사람이라는 재목’을 키운다는 뜻의 ‘인재’(人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이 단순히 경제의 종속변수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꼬리를 물고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물론, 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준 엽기적인 사건들이 이러한 의미전화(轉化)의 당위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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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5-02-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인적자원"부...
 
 전출처 : 바람구두 >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 중에서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 중에서
 
출처 : http://blog.naver.com/molecula/9219653
 

(.....) 한국에서 정치운동이 살아남듯이 문학도 살아남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학생운동은 쇠퇴해갔습니다만 노동운동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2003년 가을의 노동자 집회에서는 화염병이 날아다녔습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즉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 바로 학생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통 정치 운동, 노동 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이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러한 사정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문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435면)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부담하는 것이 똑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438면)

 

(.....) '문학'이 윤리적 지적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지니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잔영만이 있을 뿐이죠.

그렇지 않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고립을 각오하고 문학을 하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겠군요.(.....) 그러나 지금 문학이 건재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문학잡지가 있어서 매월 신문에 크게 광고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린다고 하더라도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리는 것은 '문학'과는 무관한 화제에 의해서입니다만, 어쨌든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439-440면)

 

그러면 근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으로 이상하게 팽대해진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 소설일까. 그것은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소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소설이라는 매체는 인쇄기술과 같은 테크놀로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설이 다른 장르를 제패한 것은 시각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문자를 묵독한다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소설은 그림이 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소리내어 읽는 것이었습니다. 마에다 아이가 [근대독자의 성립]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했습니다만, 메이지 시대 중반기까지 소설은, 신문소설도 그랬지만, 한 사람이 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언문일치의 문장보다도 운율이 있는 의고체 문장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소설은 묵독에 적합한 것입니다. 근대소설을 읽으면 내면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에게 등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내면적인 소설을 읽기는 어렵습니다. (440-441면)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회화의 리얼리즘을 불러온 것을, 대상과 그것을 파악하는 형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리얼리즘은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주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과 풍경을 주제로 하게 됩니다. 형식(상징형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기하학적 원근법의 채용을 가리키겠지요. 이는 고정된 한 점에서 투시하는 도법(圖法)에 의해 이차원의 공간에 깊이가 있는 형태를 부여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소설의 리얼리즘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443면)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소설, 언문일치의 형성이 근대 네이션의 기반이 되어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20세기 후반에는 문자가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사례는 오히려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는 더 어렵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개발도상국에서 소설이 씌어지거나 그것을 읽는 독자가 늘어나는 현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독자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겠지요.

이러한 사태에 의해 내셔널리즘이 소멸할 일은 없습니다. 단지 문학이 내셔널리즘을 뒷받침하는 일은 더이상 어렵겠다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편이 빠르겠지요. 아니면 만화가 더 좋겠지요. 요컨대 활자문화가 아닌, 시청작으로 하는 편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쪽이 대중에게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따라서 세계사적으로 근대문학 또는 소설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거나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뛰어넘어버리는 일은 크게 문제가 되겠지요. 그 과정을 '뛰어넘는'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치르게 되리라고 봅니다.(445-446면)

 

타인지향형은 전통지향형과 달리 일정한 객관적 규범을 지니지 않습니다. 타인지향이란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타인의 욕망, 즉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타인'이란 저마다 서로를 의식하면서 만들어낸 상상물입니다. 의사사건이나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나타난 것은, 이와 같이 전통적 규범으로부터 떨어져서 주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주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떠다니는 사람들(대중)인 것입니다.(447면)

 

따라서 나는 미국에서 타인지향이 진행된 것은, '내부지향' 자체에 이미 타인지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부지향은 전통지향이 강한 곳에서 전통지향에 대항해서 출현하는 내적 자율성입니다. 그러나 전통지향이 없는 미국에서 저마다 제멋대로 자신의 원리로 살아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서로가 타인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그 기준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전통지향을 대신합니다. 일찍이 미국에는 소련과 같은 국가적 강제는 없지만 대신에 강력한 컨포미즘(conformism)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대중사회, 소비사회가 가장 먼저, 저항도 없이 실현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448면)

 

그런 의미에서 일본적 스노비즘이란 역사적 이념도 지적 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생활양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통지향도 내부지향도 아닌, 타인지향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만 있습니다. 예컨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강한 자의식이 있는데도 마치 내면성이 없는 듯한 타입의 인간이 많습니다. 최근의 젊은 평론가들은 그런 사람들뿐입니다.(449면)

 

입신출세주의는 근대 일본인의 정신적인 원동력이지요.(.....) 메이지 이후의 일본에는 학력에 의해 새로운 계급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많은 일본인이 자녀도 부모도 입신출세를 위해 필사적으로 근면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수험경쟁으로서 최근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일본의 근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입신출세주의가 곧장 근대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근대문학은 도리어 입신출세가 뜻대로 되지 않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현상이 메이 20년(1887년)경에 나타났습니다. 모리 오가이의 [무희]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도 그러한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

(.....) 기독교를 따른 사람 가운데 옛 바쿠후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은 출세의 가망이 없는, 또 그때까지 충성의 대상이었던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것은 입신출세주의라는 시대배경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성이 입신출세라는 강제력 아래서 생겨났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들은 입신출세를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서 자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프로테스탄티즘)와 만났습니다.

(.....) 입신출세는 부모의 뒤를 이으라는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지향이 아니라 타인지향이지요. 타인의 인정을 얻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한편 근대적인 자기라는 것은 전통이나 타인을 넘어서 자율적인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문학에서 발견합니다. 또는 기독교에서 발견합니다.

(.....) 오랜 수험경쟁을 거쳐 겨우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도 깨끗이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프리터가 됩니다. 그들은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입신출세 코스에서 탈락, 또는 배제되서 생겨나는 근대문학의 내면성, 르상티망(resentiment)은 없습니다.(451-453면)
 

가라타니 고진, 구인모 역, '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2004 겨울호. 
 

* 이 글을 읽고나니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은 무얼 하고들 계시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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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부후사 > <인물과 사상> 종간

 

 

 

 

<인물과 사상>이 이번 33호를 끝으로 종간했다. 강준만은 서문에서 “인터넷이 활자매체의 목을 조르고 있다.”며 “모든 면에서 책은 인터넷의 경쟁상대가 되질 않는다. 지난 몇년간 그 이전과는 달리 시사적인 이슈를 다루는 책이 대중의 호응을 얻은 건 거의 없다.‘인물과 사상’은 그런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기로 했다.”는 말로 종간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당 분당사태 이후 겪었던 마음가짐의 변화때문인 것 같다. 강준만은 서문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게 이른바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절대 다수의 생각과 충돌할 땐 나의 퇴출만이 유일한 해법일 것”

1997년 창간 이후 <인물과 사상>이, 그리고 강준만이, 한국사회에 해온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것이 과연 한 잡지와 한 개인이 이뤄낸 성과일까 하는 경외감마저 든다. 한국인들 내면에 들어박힌 '김대중 혐오, 호남 혐오'를, 보수언론 문제를,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성적 소수자 문제를,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서울대 문제를, <인물과 사상>과 강준만은 뒷골목에서 논의의 장으로 끄집어냈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산적해 있는 거의 모든 사회적 현안이었다. 요컨대 <인물과 사상>과 강준만은 97년 이후 쏟어진 거의 모든 담론들을 생산해냈다는 말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을까? 그가 임지현이 말한대로 "인간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즉 상처받을 수 있는 마음이 없는 반파시즘의 기계적 투사"였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지금에야 나아졌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 그는 <인물과 사상>과 관련하여 '자칭 지식인'들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게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두더지의 슬픈 초상"(임지현). 그렇게 반파시즘 운운하는 인간이 이런 인신 공격성 어투를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공간이 한국사회이다. 그리고 강준만은 그곳을 지원군 하나 없는 단기필마로 헤집고 다녔다.  

강준만이 그 기간동안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한글이 문자언어로 뿌리내린 이래 가장 많은 한글 텍스트를 생산한 이 중의 하나로 평가받을 것이다. <대중매체 이론과 사상>이나 <세계의 방송매체> 등 그의 전공분야인 언론과 관련된 저작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 50 여년을 15권에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등에서도 그의 필력은 오롯이 빛난다. 그래, 말의 바른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하나만으로도 강준만은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름을 남길만 하다.

이유야 어찌됐든 강준만이 떠났다. 아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행적을 되돌아 보는 일 뿐일 것이다. 이로써 한 시대가 마감했다.

<인물과 사상>이 종간한 날, <조선일보>는  "보수 진영을 악으로 분류해 강하게 비판해온 그가 이 글에서 '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선악 이분법을 구사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말한 것은 역설적이다."라고 여유있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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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4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신앙과 고통의 상관관계" 규명 착수

"신앙은 과연 인간의 고통을 경감해 주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영국의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인간 모르모트(기니피그)를 대상으로 `가상 고문'을 가하는 생체실험을 실시한다고 더 타임스가 12일 보도했다.

당대 최고의 신경학자, 약리학자, 해부학자, 윤리학자, 신학자들로 구성된 연구진은 옥스퍼드대 정신과학연구소에 마련된 실험실에서 시뮬레이션 장치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가상의 고문을 가한 뒤 종교적, 영적 또는 비합리적 신념체계가 인간 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탐구하게 된다.

미국의 박애주의단체 `존 템플턴 재단'이 제공한 200만달러를 예산으로 약 2년간 진행될 이번 실험의 핵심은 실험실 환경 속에서 지원자들이 실제 고문은 당하는것과 똑같은 `한계를 초월하는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실험대상에게 성모 마리아상이나 십자가 등 종교적 상징들을 보여주고 신경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신념체계가 고통을 인내하는힘을 증폭시키는지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실험의 목표는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새롭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번 실험을 주관하는 해양생물 및 무척추동물 신경체계 전문가 토비 콜린스 박사는 "인간은 고통에 직면하면 종교적 혹은 세속적 신념체계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우리는 신(神)이 실제로 인간의 고통을 경감해 주는지를 밝혀낼 것"이라고말했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벌겋게 달궈진 고문기구가 살을 태울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강도의 고통에 노출된다.

콜린스 박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어떤 정신적 전략을 택하는지를 관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옥스퍼드대 생리학과의 신경과학자 존 스타인 박사는 "통증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연구과제가 돼 왔다"며 "우리는 인간 내면의 믿음과 고통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를 규명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이해를 높여 예방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런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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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진중권 - 김훈의 우익삼락

김훈의 우익삼락(右翼三樂)

: 43 : 4

최근에 소설가 김훈이 재미있는 얘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그 유명한 소설을 아직 안 읽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적인 것으로, 박정희 시절의 이순신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시대착오적 리바이벌에 이미 충분히 질려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것으로, 이순신을 사무라이 삼아버리는 어설픈 일본 우익 미학의 촌스러움이 내 미감을 적잖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김훈은 미시마 유키오와 달리 사무라이 미학으로 비장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사람이다. 어쨌든 김훈은 그 ‘꽈’가 아니다.

노무현과 이순신
소설 ‘칼의 노래’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실 <칼의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2001년에 그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떤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김훈이 그토록 싫어하는 386 세대의 두목이 언젠가 국회에서 탄핵 먹고 잠시 청와대에 들어앉아서 근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직무를 정지당한 그 황건적 두목이 정신수양 차원에서 읽고 있다며 공개한 책의 목록에 우연히 <칼의 노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예수를 닮기를 원하듯, 노짱을 믿는 사람들은 노짱을 닮기를 열망한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미메시스’라 하는데, 내가 전공하는 미학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가 나온 지 2년 후에 갑자기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데에는 황건적들의 이 예술적 습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안다. 덕분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방송에 소개가 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김훈이 “아동극”이라 평한 그 드라마를 낳기도 했다.

우익일락

김훈에게는 이게 한편으로는 반가웠던 모양이다. 김훈의 말대로 “우익에겐 세 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책이 많이 팔리면 인세를 많이 받고, 인세를 많이 받으면 “세금을 왕창” 낼 수 있다. 이로써 우익일락(一樂)이 저절로 해결된다.
有錢而自進納稅면 不亦樂乎아. 돈이 생겨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세금 왕창” 낼 수 있기에 즐거운 것이 우익의 미덕. 거기에 비하면 담배 한 값에 500원 더 받는다고 절필 선언하는 일부 문인들의 좌익적 심성은 얼마나 옹색한가?

다른 한편 이게 부담스럽기도 했을 게다. 우익 김훈이 하필 국가에 “왕창” 공헌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게 바로 황건적 두목, 그 휘하의 386 장수들, 그들을 따르는 노란 졸병들이 아닌가.
김훈이 종종 연출하는 우익 낭만주의적 위악은 그가 가진 모종의 결벽증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훈이 맥락 없이 386 비난을 늘어놓는 것은 그가 수구 꼴통이라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이 불편한 고리를 잘라버리려는 무의식적 기제의 작동이다. 일종의 문학적 알리바이의 마련이라고나 할까?

우익이락

지난해 10월 종교단체와 보수·우익단체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 집회에 10만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윤중기자
우익의 두 번째 즐거움은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우익과 좌익 미학의 차이는 그들이 처한 물질적 상황의 관념적 반영이리라.
대한민국에서 병역은 국민의 4대의무의 하나로 부과된다. 때문에 좌익의 물적 토대에 처한 이들에게 아들을 군대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미학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렇게 즐거움을, 우익이락의 열락을 온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 된 보람이 아니던가.

어떤 이들에게는 아들 군대 보내는 것도 존재를 완성하는 미적 수단이 된다. 여기서 우익은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옵션을 갖고 있다.
하나는 김훈처럼 아들을 군대 보냄으로써 그 즐거움을 긍정하는 우익 에피쿠로스(쾌락주의)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즐거움을 애써 거부하는 우익 스토이시즘(금욕주의)의 길이다.
가령 국가안보를 위해 시청 앞에 수만의 인파를 동원한 모 우익 목사. 그는 자신의 쾌락을 7개월 단기복무로 절제하고, 자식 셋 모두 군대에 보내지 않음으로써 성직에 따르는 금욕의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우익삼락

우익의 세 번째 즐거움은 “질서를 지키고”이다. 먼저 우익일락의 예를 들어 보자.
“세금 왕창” 내는 우익에게는 존재미학인 것이, 그 주제가 못 되는 좌익에게는 “질서”라는 이름의 의무가 된다. 우익이 세금 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안 내도 될 세금을 낸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반면 담배 한 갑 살 때마다 500원씩 전에 안 하던 애국을 덤으로 하면서 좌익들이 기쁨을 못 느끼는 것은 아마 그것이 강요된 것이기 때문일 게다. 우익의 존재미학은 좌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지켜야 할 “질서”가 된다.

우익이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우익 된 쾌락을 자제하는 스토이시즘의 존재미학이나, 좌익의 자식들이 군대에 한번 안 가려면 난리 바가지를 쳐야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니 어쩌구 하며 아무리 변명을 해도, 감히 국가에서 제공한 즐거움을 거부한 죄를 단단히 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익의 마지막 즐거움, 즉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할 “질서”라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짜라투스트라는 귀엽게 놀았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우익들이 삼락(三樂)을 마다하고 저 스스로 불행해지는 금욕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저 홀로 과감하게 쾌락을 긍정하는 소설가는 새 시대의 열림을 알리는 짜라투스트라다.
남들 다 내는 세금 내고, 남들 다 가는 군대 가고, 남들 다 지키는 질서를 지키면서 거기서 남다른 즐거움을 느낀다면, 참으로 귀한 일이다. 내가 우익 미학의 그 처참한 촌스러움을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것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여유 때문이다.

ps.

아, 김훈씨께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순신과 노무현의 동일시는 귀엽지만, 이순신과 박정희의 동일시는 징그럽다.



진중권 /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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