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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 중에서
 
출처 : http://blog.naver.com/molecula/9219653
 

(.....) 한국에서 정치운동이 살아남듯이 문학도 살아남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학생운동은 쇠퇴해갔습니다만 노동운동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2003년 가을의 노동자 집회에서는 화염병이 날아다녔습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즉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 바로 학생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통 정치 운동, 노동 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이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러한 사정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문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435면)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부담하는 것이 똑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438면)

 

(.....) '문학'이 윤리적 지적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지니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잔영만이 있을 뿐이죠.

그렇지 않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고립을 각오하고 문학을 하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겠군요.(.....) 그러나 지금 문학이 건재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문학잡지가 있어서 매월 신문에 크게 광고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린다고 하더라도 참담할 정도의 부수입니다. 그리고 소설이 팔리는 것은 '문학'과는 무관한 화제에 의해서입니다만, 어쨌든 문학은 아직 번영하고 있다는 허위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439-440면)

 

그러면 근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으로 이상하게 팽대해진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 소설일까. 그것은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소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소설이라는 매체는 인쇄기술과 같은 테크놀로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설이 다른 장르를 제패한 것은 시각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문자를 묵독한다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소설은 그림이 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소리내어 읽는 것이었습니다. 마에다 아이가 [근대독자의 성립]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했습니다만, 메이지 시대 중반기까지 소설은, 신문소설도 그랬지만, 한 사람이 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언문일치의 문장보다도 운율이 있는 의고체 문장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소설은 묵독에 적합한 것입니다. 근대소설을 읽으면 내면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에게 등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내면적인 소설을 읽기는 어렵습니다. (440-441면)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회화의 리얼리즘을 불러온 것을, 대상과 그것을 파악하는 형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리얼리즘은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주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과 풍경을 주제로 하게 됩니다. 형식(상징형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기하학적 원근법의 채용을 가리키겠지요. 이는 고정된 한 점에서 투시하는 도법(圖法)에 의해 이차원의 공간에 깊이가 있는 형태를 부여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소설의 리얼리즘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443면)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소설, 언문일치의 형성이 근대 네이션의 기반이 되어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20세기 후반에는 문자가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된 사례는 오히려 적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는 더 어렵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개발도상국에서 소설이 씌어지거나 그것을 읽는 독자가 늘어나는 현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독자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겠지요.

이러한 사태에 의해 내셔널리즘이 소멸할 일은 없습니다. 단지 문학이 내셔널리즘을 뒷받침하는 일은 더이상 어렵겠다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편이 빠르겠지요. 아니면 만화가 더 좋겠지요. 요컨대 활자문화가 아닌, 시청작으로 하는 편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쪽이 대중에게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따라서 세계사적으로 근대문학 또는 소설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거나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뛰어넘어버리는 일은 크게 문제가 되겠지요. 그 과정을 '뛰어넘는'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치르게 되리라고 봅니다.(445-446면)

 

타인지향형은 전통지향형과 달리 일정한 객관적 규범을 지니지 않습니다. 타인지향이란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타인의 욕망, 즉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타인'이란 저마다 서로를 의식하면서 만들어낸 상상물입니다. 의사사건이나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나타난 것은, 이와 같이 전통적 규범으로부터 떨어져서 주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주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떠다니는 사람들(대중)인 것입니다.(447면)

 

따라서 나는 미국에서 타인지향이 진행된 것은, '내부지향' 자체에 이미 타인지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부지향은 전통지향이 강한 곳에서 전통지향에 대항해서 출현하는 내적 자율성입니다. 그러나 전통지향이 없는 미국에서 저마다 제멋대로 자신의 원리로 살아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서로가 타인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그 기준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전통지향을 대신합니다. 일찍이 미국에는 소련과 같은 국가적 강제는 없지만 대신에 강력한 컨포미즘(conformism)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대중사회, 소비사회가 가장 먼저, 저항도 없이 실현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448면)

 

그런 의미에서 일본적 스노비즘이란 역사적 이념도 지적 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생활양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통지향도 내부지향도 아닌, 타인지향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만 있습니다. 예컨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강한 자의식이 있는데도 마치 내면성이 없는 듯한 타입의 인간이 많습니다. 최근의 젊은 평론가들은 그런 사람들뿐입니다.(449면)

 

입신출세주의는 근대 일본인의 정신적인 원동력이지요.(.....) 메이지 이후의 일본에는 학력에 의해 새로운 계급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많은 일본인이 자녀도 부모도 입신출세를 위해 필사적으로 근면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수험경쟁으로서 최근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일본의 근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입신출세주의가 곧장 근대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근대문학은 도리어 입신출세가 뜻대로 되지 않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현상이 메이 20년(1887년)경에 나타났습니다. 모리 오가이의 [무희]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도 그러한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

(.....) 기독교를 따른 사람 가운데 옛 바쿠후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은 출세의 가망이 없는, 또 그때까지 충성의 대상이었던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것은 입신출세주의라는 시대배경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성이 입신출세라는 강제력 아래서 생겨났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들은 입신출세를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서 자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프로테스탄티즘)와 만났습니다.

(.....) 입신출세는 부모의 뒤를 이으라는 신분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지향이 아니라 타인지향이지요. 타인의 인정을 얻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한편 근대적인 자기라는 것은 전통이나 타인을 넘어서 자율적인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문학에서 발견합니다. 또는 기독교에서 발견합니다.

(.....) 오랜 수험경쟁을 거쳐 겨우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도 깨끗이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프리터가 됩니다. 그들은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입신출세 코스에서 탈락, 또는 배제되서 생겨나는 근대문학의 내면성, 르상티망(resentiment)은 없습니다.(451-453면)
 

가라타니 고진, 구인모 역, '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2004 겨울호. 
 

* 이 글을 읽고나니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은 무얼 하고들 계시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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