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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 3-1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햄릿 :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느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이 같은 망설임이 있기에 비참한 인생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채찍과 조롱을, 무도한 폭군의 거동을, 우쭐대는 꼴불견들의 치욕을,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을, 재판의 지연을, 관리들의 불손을, 선의의 인간들이 불한당들로부터 받고 견디는 수많은 모욕을 어찌 참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한 자루의 단검으로 찌르기만 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일진대, 어찌 참아나가야 한단 말인가. 생활의 고통에 시달리며 땀범벅이 되어 신음하면서도, 사후의 한 가닥 불안 때문에,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돌아온 이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들의 결심은 흐려지고, 이 세상을 떠나 또다른 미지의 고통을 받기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려 한다. 사리분별이 우리들을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타고난 결단력이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진 탓으로 마냥 녹슬어버린다. 의미심장한 대사업도 이 때문에 샛길로 잘못 들고 실천의 힘을 잃게 된다. 가만, 저게 누군가. 오, 아름다운 오필리어! 기도하는 미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나의 죄도 용서를 받게 하라. (「햄릿」, 62쪽)
셰익스피어를 처음으로 읽었다. 이제는 동화로서 각색되거나 영화, 만화라는 새 옷을 입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희곡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것이 아닌, '희곡'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내 의지에 따라 읽었다. 물론, 순전한 내 의지라고도 할 수 없다. 영미문학에서 갖는 셰익스피어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군말이 되겠다. 그러나 문학사에서의 위상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독서하는 나에게는 다른 독서의 이유가 있었다. 문학비평이론을 읽는데 자주 접하는 방법론의 실제 적용의 예시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지겹게도 만나왔기 때문이다. 문학이론, 비평이론이 영미 쪽에서 발전되고 정리되어 온 이유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셰익스피어를 읽어보지 않은 내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이 갖는 두 가지 의미는 내 독서史에서 차지하는 것이겠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그와 상관없이 새로운 감동을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이라는 장르와 형식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절규와 광기를 거침없이 보여주는데 취기 가득한 시적 문체를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비극의 인물 성격, 플롯, 사랑과 배신과 복수와 죽음의 주제라는 인간 성찰을 모두 주시하지 않더라도 그 문체 미학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문학 독서는 우선 충분히 잘 즐길 수 있어야 다른 의미에서의 독서로의 이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