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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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을 넘으며 '아리랑'을 부르던 조정래는 다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돌아왔다. 이로써 일제 수난기로부터 80년 광주에 이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이 완결된 것이다. 중학 시절 <태백산맥>을 읽으며 세상과 역사를 보는 눈을 길렀던 추억이 있는 내게, 조정래의 <한강>은 언제쯤 꼭 한번쯤은 건너야 할 대하였다. 백여 년에 걸친 민족의 삶과 역사를 등장인물 1200여명의 얼굴을 통해서 그 세밀한 잔주름을 역사의 거친 물결처럼 그려낸 소설들과 그 소설의 아버지, 조정래. 기어코 나는 한강을 건너고 말았다.

소설 속의 유일표가 형 유일민에게 '(…)어쨌든 <전환시대의 논리>는 대단한 책이야. 책이 지식을 주고, 스승 노릇을 한다는 거야 상식이지만 사람의 의식을 그렇게 바꾸는 힘을 발휘한다는 건 처음 느낀 체험이었어.'(9권 212쪽)라고 말할 때, 여기서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 대신에 <태백산맥>을 대입해 놓았다. 물론, 리영희의 이 역작도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과문한 나도 여기저기의 글 모퉁이에서 주워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직 읽지 않아서인지, 내게는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이 가져온 인식의 충격이 소설 속의 유일표의 고백과 유사하다. <태백산맥>은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세계는 조정래의 세계이기도 했고, 한반도 땅의 뒤틀린 역사와 삶의 세계의 진정한 국면이기도 했다. 내 사고와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다준 <태백산맥>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수한 등장인물들의 파란한 생의 얽힘이 이 땅의 고난한 삶의 역사에 스며들 때, 그들의 생을 대신해서 살고 이 땅의 역사의 환부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것이 조정래 소설의 비밀이 아닐는지.

권성우는 <태백산맥>의 지식인 인물들의 가르침에 가까운 말들이 80년대의 사회과학적 성과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는 이번에 <한강>을 읽으면서 '소설'이란 양식에 대한 조정래의 의식적, 무의식적 정의 부분을 발견했는데, 그로 인해서 그의 소설 세계에 대해 좀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연좌제로 인해서 신산스런 삶을 살게 되는 유일민은 '어깨'가 되려는 고향친구인 서동철에게 한자 습득과 신문 읽기, 그리고 무협소설 읽기를 권한다. 무협소설은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와 힘의 논리를 서동철에게 학습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교양소설의 기능인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런 태도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지식인이 아니고서도 일정한 정보와 지식, 삶의 지혜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소설이란 논조이다. 이것이 조정래가 원하는 소설의 모습 중 하나라면, 그는 이것만큼은 행복하게 성공하고 있다. ― 나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 '한강을 마치며'에서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대학 새내기가 된 아들에게 필사시키도록 했다는데, 그 이유도 문장과 역사 등의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란 것이었다.

마지막 장인, ‘광주를 향하여’에서는 80년 광주로 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아직도 생채기의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우리 역사를 되묻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분단과 독재의 그늘 속에서 전라도의 환부가 선연하게,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 물음의 답변은 물론, 독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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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 3-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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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느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이 같은 망설임이 있기에 비참한 인생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채찍과 조롱을, 무도한 폭군의 거동을, 우쭐대는 꼴불견들의 치욕을,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을, 재판의 지연을, 관리들의 불손을, 선의의 인간들이 불한당들로부터 받고 견디는 수많은 모욕을 어찌 참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한 자루의 단검으로 찌르기만 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일진대, 어찌 참아나가야 한단 말인가. 생활의 고통에 시달리며 땀범벅이 되어 신음하면서도, 사후의 한 가닥 불안 때문에,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돌아온 이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들의 결심은 흐려지고, 이 세상을 떠나 또다른 미지의 고통을 받기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려 한다. 사리분별이 우리들을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타고난 결단력이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진 탓으로 마냥 녹슬어버린다. 의미심장한 대사업도 이 때문에 샛길로 잘못 들고 실천의 힘을 잃게 된다. 가만, 저게 누군가. 오, 아름다운 오필리어! 기도하는 미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나의 죄도 용서를 받게 하라. (「햄릿」, 62쪽)

셰익스피어를 처음으로 읽었다. 이제는 동화로서 각색되거나 영화, 만화라는 새 옷을 입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희곡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것이 아닌, '희곡'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내 의지에 따라 읽었다. 물론, 순전한 내 의지라고도 할 수 없다. 영미문학에서 갖는 셰익스피어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군말이 되겠다. 그러나 문학사에서의 위상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독서하는 나에게는 다른 독서의 이유가 있었다. 문학비평이론을 읽는데 자주 접하는 방법론의 실제 적용의 예시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지겹게도 만나왔기 때문이다. 문학이론, 비평이론이 영미 쪽에서 발전되고 정리되어 온 이유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셰익스피어를 읽어보지 않은 내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이 갖는 두 가지 의미는 내 독서史에서 차지하는 것이겠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그와 상관없이 새로운 감동을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이라는 장르와 형식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절규와 광기를 거침없이 보여주는데 취기 가득한 시적 문체를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비극의 인물 성격, 플롯, 사랑과 배신과 복수와 죽음의 주제라는 인간 성찰을 모두 주시하지 않더라도 그 문체 미학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문학 독서는 우선 충분히 잘 즐길 수 있어야 다른 의미에서의 독서로의 이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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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팀 버튼 지음, 윤태영 옮김 / 새터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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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은 소녀」

어느 날 공원에서 우연히 소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소녀의 눈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정말 예뻤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찾아냈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꽃에 대해, 그녀의 시 쓰기 수업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안경을 썼다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 그렇게 많은 눈을 가진 소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저앉아 통곡할 때에는 나도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고 얇은 책의 모든 에피소드들은 다 이러하다. 기괴한 신체를 가진 소년, 소녀들의 탄생과 그들의 우울한 삶,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것도 친절한 팀 버튼 제 삽화와 함께 함으로써 그 그로테스크함에 한층 강도를 더해주고 있다.

팀 버튼의 괴팍스런 상상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책이지만, 워낙에 각 에피소드들의 분량이 너무도 짧아서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주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여백을 통해서 또 다른 상상을 하다보면은 새로운 읽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것만 같다.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이고 환상적이며 어렵지 않은 수준의 문체를 볼 때, 분명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동화가 아닌, '그로테스크 동화'이다. 동화가 인간의 유년기를 담는 이야기이므로 원초적인 공포와 상상의 세계를 많이 그릴 수 있는데, 이 동화는 한 번 더 꼬고 뒤틀려서 만든 동화이다.

'아이'라는 존재는 성인(成人)에 비해서 불충분한 존재이다. 성인이라는 완성된 형태를 가정해 둘 때, 아이는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른이 아니라 소년/소녀가 된다. 모든 이야기에서 신체적 결함과 장애와 이상을 가진 소년, 소녀들은 어른/정상인들에게 타자화되고 핍박받고 상처받고 좌절당한다. 타자화된 인간이나 아직 미숙하다라고 사회적으로 지적 받게 되는 아이들은 자신을 정상/완성된 인간에 비해 병신스러움을 지닌, 자아로 인식한다.(범죄자들처럼) 그러므로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化된 어른일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이들 '기괴한 아이'의 사랑 문제이다. 이들은 홀로 '살아내야' 하며, 홀로 놀아야 한다. 다가서면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들 사이의 사랑마저도 어긋난다. '마른 가지 소년과 성냥 소녀의 사랑'에서 불꽃이 튀자 그 순간 소년의 온몸이 불타고 말았던 것처럼. 그나마 이들 '암울한' 이야기에서 「눈이 많은 소녀」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그러나, 그녀가 주저앉아 통곡할 때에는 나도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는 말에서 서로에게 전염되어지는 슬픔이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소통과 교감의 시작으로, 희망의 시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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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9
황동규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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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영화 [편지]에 나오던 그 시,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가 썼다. 편지를 가장한 이 시는 즐겁다는 표정의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녀석의 탄생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황동규가 고3 시절 연상의 누나를 좋아했었고... 그 때문에 이 시가 탄생했다고 한다. 가지 못한 편지일까. 어쨌든, '그대'에게 주는 편지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대를 부르고(1),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며, 그 사랑도 그칠 것으로 알지만 그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계절은, 시간은 흘러갈 것임을 깨닫고 또 믿는다(2). 사소한 시작의 사랑, 그러나 한없는 기다림, 기다림 끝에 올 그침에 대한 자세, 그러면서 돌고 도는 시간의 연쇄. 젊은 날의 황동규는 그 사소한 사랑으로 실은 삶의 흐름을 다시 읽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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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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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자가 있다. 그 철학자는 <폭력과 상스러움>이란 책 속에 사는데 익살맞게 웃고 있다. 얼굴의 이그러진 정도와 만화주인공을 닮은 눈빛의 각도를 추측해볼 때, 누굴 심하게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의 입에선 끝없이 그 '누굴' 향해서 독설을 내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 이제 보니,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점잖은 철학이 아닌 통 속에서 굴러다니며 똥과 오줌과 정액의 퍼포먼스를 펼쳐내는 디오게네스의 얼굴을 닮았다. 아하!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광대의 철학'이군! 이제 그는 이렇게 점잖게 말하기 시작한다. '엑스 리브리스.' ∼라는 책에서? 어, 어? 또 말하네? '엑스 리브리스.' 이번에 그가 한 말의 의미가 책 속을 빠져 나온다. 책 밖의 세계로 튀어나온 그 의미들은 날선 칼이 된다. 칼은 춤을 춘다. 그 춤의 이름은 코믹살상댄스. 그리고 그 춤바람에 쓰러지는 무수한 헛바람들...

그런데 우리의 인문학은 다분히 자폐증에 걸려 현실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회로 안을 공전하고 있다. 그 결과 학술적 담론은 공허해지고, 대중들 사이를 떠도는 세론은 무지막지한 맹목으로 치닫는다. 담론과 세론은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론이 이데올로기의 중금속에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엑스 리브리스', 이는 잿빛 인문학의 문장들을 뽀얗게 먼지가 앉은 낡은 책 밖으로, 상아탑이라는 도서관 밖으로 끄집어내 생동하는 삶과 맞물리려는 시도이다.
ㅡ 머리말 「엑스 리브리스」에서

이 책의 이름마저도 패러디이다. 이지메를 다룬 첫 번째 글, 「마이너스 1의 평화」에서 이렇게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즉 르네 지라르의 책 이름을 바꿔서 붙인 제목인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글들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 저술의 인용과 현실 세계의 인용, 그리고 그(집단주의, 국가주의, 극우와 파시즘, 남성우월, 동성애 차별, 기득권과 지식인 등등)에 대한 신랄하고 유쾌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중권의 이름을 언제부터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것은 그가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 가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 때였다. '딴지'일보'는 사기다. 매일 안 나오니까.' 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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