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 2018년 공쿠르상 수상작
니콜라 마티외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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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소설가. Wikipedia에서 검색해보니, 1978년 6월생, 2014년 데뷔작인 미스터리 범죄소설 <짐승에겐 전쟁뿐 Aux animaux la guerre>으로 히트를 쳐 프랑스 3채널에서 6부작 시리즈로도 만들었으며, 두 번째 작품인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로 2018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단다. 그 외에는 별로 특기할 사항이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작품 발표의 간격을 감안하면 올해 쯤 혹시 새 작품 하나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내 희망사항이다. 나는 이이의 데뷔작을 읽어보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아직 번역본도 나오지 않았다.


  1992년 7월에 열다섯 살. 1977년 5월생인 소년 ‘앙토니 카사티’가 주인공이다. 모두 네 부로 되어 있다. 1992년부터 2년 간격으로 1998년까지, 네 번의 여름을 그렸다. 각 부의 표제로 대중음악의 제목을 달아놓았다. 1부가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2부는 건스앤로지스의 "You Could Be Mine", 3부는 프랑스 힙합 그룹 쉬프렘 NTM의 곡인 "La Fièvre:열병", 월드컵에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의 레블뢰 군단이 우승을 하는 4부가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인데, 아쉽게도 내가 서양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어진 이후에 발표한 곡들이라 왜 이런 노래들을 표제로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을 읽어가면서 뭐 그러려니, 어떤 의미이겠거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마티외가 프랑스 북구 보주 주 에피날에서 태어나 인근 소도시에서 성장해 그런지 소설은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 가상의 소도시 에일랑주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진행된다. 먼저 에일랑주 시에 관해 약간의 소개가 필요하다. 오랜 동안 사실상 에일랑주를 먹여 살려온 프랑스 최고의 철강업체 “메탈로르”가 세계적인 불황을 맞아 드디어 용광로의 불을 끔으로 해서 급기야 에일랑주는 깊고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한 시절에는 전 프랑스를 통틀어도 이 유서 깊은 회사에서 직공으로 일할 사람이 없어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의 옛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 공장을 운영해도 모자랄 판국이었지만 이제 이민자들은 흑인과 더불어 프랑스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계급으로 전락해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에일랑주에서도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토종 프랑스인이라고 하더라도 회사가 극도로 침체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을 선택하고 정부나 전 회사가 제공해주는 기술교육을 받은 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저임금을 받는 단순기능직에 재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취업 희망자는 많은 대신 일자리가 워낙 없어서 재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사소한 말썽에라도 휘말리면 당장 해고당해 매일의 호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렇게 퇴직 후 직업교육을 받고 지게차 운전기사로 재취업을 했다가 해고당한 인물 가운데 파트릭 카사티 씨가 있었으니, 이이가 우리의 주인공 앙토니 카사티의 친아버지다. 작중 상당히 중요한 조연이다. 지금, 그러니까 책의 1부에서의 직업은 각종 집수리를 해주고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인데, 책 속의 첫 번째 여름인 1992년 7월 역시 집수리 업계의 성수기인지라 잔디 깎기나 수영장 청소 정도는 외아들 앙토니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다.
  이때 앙토니의 나이 열다섯. 땅딸한 몸집, 꾀죄죄한 행색, 265 사이즈 발과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도 모자라 눈이 극심한 짝짝이라서 마치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눈길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저 그런 아이. 학교에서는 꼴찌에 뚜벅이,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조차 버거워 보이지만, 열다섯이란 나이의 소년은 이제 가정에서 어머니의 영원한 웬수 사이로 접어들었고, 틈만 나면 아버지의 권력 밖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그러나 무엇보다 여성에 관해서, 특별히 해부학적 관점에서 펄펄 끓는 리비도를 다스리기 힘들 때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여성분 계시다면 이순원의 <19세>, 적극 추천한다. 그리하여 이 여름에도 호수 건너편에 있다고 말만 들었던 누드 비치를 엿보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근육도 탄탄하며 얼른 보면 스물두세 살처럼 보이는 사촌 형을 꼬드기는 것으로 무려 670쪽의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그래 둘은 수상 클럽 레오라그랑주에 몰래 들어가 보트를 무단으로 꺼내 타고 호수, 1년 전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에 롤랭 씨의 아들이 빠져죽은 호수를, 도중에 들켜 클럽 직원들의 추적을 받으며 죽자고 건너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드디어, 아무도 없는 텅 빈 누드 비치에 도착한다. 인생이 원래부터 다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할 나이니까. 문제의 사촌. 4부까지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조연으로, 현재 직업은 학생, 부업은 마리화나 판매지만 사실 뭐가 직업이고 뭐가 부업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헷갈린다. 왜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누드 비치에서 누드 여성은 한 명도 만나지 못하는 반면 에밀랑주 시의 최고 계급의 자제들과 마리화나를 매개로 친분을 맺게 되고, 급기야 당일 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청을 받는다. 마리화나를 듬뿍 가져온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경찰당국에 의하여 마리화나 집중 단속이 불과 얼마 전에 벌어져 지금 대마 풀 한 포기 보기도 어려웠던 실정이니 그럴 만하기도 했다.
  둘은 흔쾌히 초대를 수락했는데, 특히 잘 사는 애들 가운데 ‘스테파니 죠수아’라고 하는 여자애를 보고 앙토니가 홀딱 반해버렸다. 2부에서 보면 죠슈아 씨는 시장 자리를 염두에 두고 현재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시의 법관, 검사, 변호사, 은행가, 고위경찰 등등 중요한 모든 사람들이 회원으로 있는 수상클럽을 관리하는 협회의 회장으로 있는 사람이니 만일 극심한 마리화나 공급부족 현상이 없었다면 앙토니는 바라보지도 못할 계급간 차이가 있었을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스테파니는 비슷한 부류의 알렉스와 해 볼 거 다 해 본 사이. 그러나 수시로 헤어지고 다시 화해하고 그런 사이. 문제는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이 너무 멀리 있어 자신들의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는 턱도 없어, 앙토니의 아버지가 아끼고 아끼는,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탈까 말까 하는 오토바이 야마하 YZ의 신세를 져야한다는 것에 있다. 하여튼 중간과정 생략하고 말하자면 야마하를 타고 파티에 끼어서 마리화나 피우고, 술 퍼마시고, 심지어 혈관확장제 흡입까지 해서 홀랑 까무러쳤다가 아침에 깨보니 아랍인 출신 깡패 두목 비슷한 하신이 야마하를 훔쳐간 것. 이제 앙토니의 앞날엔 아버지한테 얻어터져 인생의 종막을 고하는 일만 남았다.
  여기까지 읽으면 늦게야, 그것도 별 임팩트 없이 등장하는 모로코 출신 이민자의 아들이자 믿음 없는 무슬림인 하신 부알리 역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집 밖에서는 잔인한 폭력배요 그들의 두목이긴 하지만 집 안에선 늙고 허약한 아버지의 명령에 거역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휘두르는 정의의 채찍, 곡괭이 자루에 머리통이 터져도 깩 소리 한 번 않으며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형적인 아랍인 아들이다. 비록 아버지 말렉 부알리 씨가 일자리를 찾아 모로코에서 프랑스 시골 촌 도시까지 흘러든 별 볼 일 없는 남자인 것을 아들이 충분히 알더라도 말이지. 이 아이는 세계 최고급이라고 자부하는 모로코 마리화나를 전 유럽에 유통시켜 그 웬수놈의 돈을 왕창 벌 생각을 가득 품고 있는 야심가. 그러던 어느 날, 훔친 오토바이를 팔아넘길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앙토니의 말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프랑스 주부인 엄마 엘렌이 억지로 앙토니를 끌고 말렉 씨를 찾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당신은 나를 모욕했소, 라고 말렉 씨가 엘렌에게 반응한 다음인 것을 당연히 모르는 상태로 현관문을 연 순간, 비쩍 마르고 늙은 아버지한테 작신,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얻어터진 후, 앙토니 집 앞에 문제의 오토바이, 이미 엉망으로 찌그러진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확 불태워버린다. 훤한 대낮에. 이렇게 시작한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과거에는 화려했으나 이제 형편없이 몰락한 도시의 전체적인 음울한 분위기와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들. 또 하나는 이 속에서 사춘기를 맞고 성장해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열아홉 살이 되어 군대에 가고 서로 성적 교섭을 맺고 어느 새 사용하는 언어에서 욕설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스물한 살이 된다. 그들의 절절했던 소원, 에일랑주를 뜨고 말거야, 라는 각오가 그리 만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장면들을 담담하게 써놓은 마티외. 이 가벼운 비극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물론 돈 많고 어여쁘고, 처음엔 어찌됐건 간에 나중엔 공부도 잘하게 되는 부잣집 따님들은 결국 대학생이 되고 많은 급여를 받는 안정된 직장인이 되어 에일랑주를 떠서 파리로, 캘리포니아로, 캐나다로 뜨는 데 성공을 하지만, 결코 세상엔 예외라는 것이 흔하지 않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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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8-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 작품이 별 다섯 개군요?! 저는 초반 조금 읽다가 좀 시시한 거 같아서 일단 덮었는데. ㅎㅎㅎ 다시 잘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8-03 10:27   좋아요 0 | URL
그냥 평범합니다. 쇼킹한 것도 없고 시시하다는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10대 아이들이 흔히 쓰는 욕설이 초반에 많이 나와서 그건 좀 거슬리는데요, 우울한 도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더라고요. ㅎㅎㅎㅎ 근데 제가 뭘 알아야지요.

잠자냥 2020-08-03 10:37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것처럼 비속어가 너무 많이 나와서 ㅎㅎㅎ 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한데.... 공쿠르상에 낚인 것인가... 하면서 일단 책을 덮었습죠. ㅎㅎㅎ

Falstaff 2020-08-03 10: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본문에 썼다시피, 아이들이 나이 먹어가면서 욕설 비속어의 빈도가 낮아집니다. 지들도 대가리가 커가는 것이겠지요. ㅎㅎㅎㅎㅎ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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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동화작가 마해송, 어머니는 마산고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한 무용가 박외선. 1939년 도쿄 태생. 시를 읽어보면 어쨌든 전쟁 이전부터 한국에 와서 살다가 전쟁도 겪고 서울고등학교와 세브란스 의학교와 서울의대 대학원을 마치고 공군 의무관으로 입대한다. 그러다가 1965년, 공군 장교임에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해 모처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66년에 제대한다. 이러니 내 나라에 정이 있겠는가. 제대하고 얼마 있지 않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의사생활을 하는 한편 활발하게 시를 써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다른 시리즈도 아니고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두 번째 자리를 얻는다. 이이는 본인이 의사로 미국에 가서 의사를 지냈고, 한 살 아래 소설가 박상륭은 1969년 캐나다로 건너가 병원 안치실의 청소부를 했다. 둘의 공통점은, 박정희 정권하고는 같은 하늘을 이고 지내기 힘들어 했다는 것. 대표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는 것.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은, 만일 당신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라면 권하지 않겠다.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1975년 말부터 1980년 중순까지 약 4년간의 작품이며, 2부는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펴낸 《평균율 1》(1968)과 《평균율 2》(1972)를 중심으로 실었다. 특히 2부를 열면 많은 시어들이 한문으로 씌어 있다. 당시엔 독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보다 정확한 뜻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한문으로 쓰고는 해서 오히려 이런 표현이 당연했겠지만 요즘 세대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해독 불가능의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 독후감에서는 그런 분들을 위해 한자를 전부 우리말로 바꿔 옮기려 한다. 원문과 달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마종기는 세브란스 재학 중에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다. 혜산은 또한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니, 정지용-박두진-마종기, 한국 서정시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그러나 마종기는 모더니즘적 애매함과 개인적 사유에 함몰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래이되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공통의 감정을, ①자신의 직업인 의료업, 그리고 ②지리적으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의 생활이란 두 가닥의 주된 줄기에서,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의 말대로 쉬운 언어를 사용해 그리고 있다. 사실 말이 직업은 의사요, 사는 곳은 미국이라, 이지 의사라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깊은 성찰을 해야 하며,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시인에게 언제나 아스라한 그리움을 갖게 만드는 지리적으로 적대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증례 2>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옆집 브레이셔 할머니는 여름밤 등의자에 앉아 미국이민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뉴욕시의 교육으로 아직 안경 속에 온정이 있어도 보이는 쓸쓸한 발음, 자식은 성공을 해 옆에 없고 혼자 사는 2층방에 빛나는 과거의 사진틀.


  병원에서 위독을 알려도 그랬지. 색감 있는 카드와 항공편 꽃다발이 석양에 밝아도 방문객 없는 할머니 ㅡ 당신은 외국의사의 내 환자. 대국의 외로움은 내 눈에 보인다. 차가운 철판부검대에서 골(骨:뼈)을 자르고 얼굴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뜯어내어도, 조용하게 입 다문 당신의 외로움, 내 눈에 보인다.


  (중략)


  사람이여, 그리웁고 사랑스런 사람이여. 망자의 사지에 힘주던 핏물로써 네 몸을 이제 기억할 수는 없다. 어느날 우리의 복강에서도 이름모를 산꽃이 피고 변형된 생애가 다시 자라면, 그때 이 현세의 산란한 바람을 다스려 우리는 서로 보리라.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 사람이여.  (띄어쓰기와 오기는 전부 원시를 따랐습니다. 이하 인용도 마찬가지.)



  위의 인용을 보면 미국에서 의사의 직업을 하며 평소 알던 다른 나라 출신의 할머니가 죽어, 할머니를 해부하고, 삶과 죽음이 우화의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종기의 시는 어렵지 않다. 마지막 연 ‘우리는 서로 보리라’ 하는 것에서 과연 이들은 어디서 보게 되기를 기대할까. ‘산골짜기 냇물 속에서 만나리라’를 미국의 어느 곳이라고 읽는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 믿는다. 만나고자 하는 대상이 뉴욕에 살던 브레이셔 할머니일지언정 시인이자 의사와 할머니가 만나는 곳은 극동 아시아의 작은 산골짜기가 아닌가 싶다.
  <미스터 제임스 밀러에게> 라는 시에서는, 한국의 영등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제임스 밀러, 혹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시각을 갖고 있는 미국인들을 대표해서 소환한 제임스 밀러를 향해 시인은 쓰게 얘기한다.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네 묘한 조소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가 아니다.
  영자도 순자도 봉순이도 있겠지만
  맘마상 어쩌구로 끝나 버리는
  영등포는 아니다.


  피난을 가서 장바닥을 싸돌고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워 보면 안다.
  토마토가 고기덩어리가 휴지 조각이 함께
  부글부글 오장이 끓던 꿀꿀이죽,
  그 맛을 음미해 봐서 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명랑한 가발 공장도 섰겠고
  입체교차로가 드라이브에 좋다지만
  내 군대 3년의 영등포에는
  막걸리와 한기만이 있었다.


  (중략)


  영등포를 안다고 하지 마라.
  고국을 떠난 지 벌써 수 년,
  모든 미스터 제임스 밀러여
  내 상기되고 떨리는 목소리는
  스무살의 네 혈기 앞에서 중심을 잃는다.



  마종기가 공군 의무장교로 있던 시절의 근무지가 영등포였단다. 당시에 영등포 역전 주변은 서울에서 유명한 사창가 가운데 한 곳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선생으로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아는 어떤 미국인 제임스 밀러가 우연히 한국을 알고, 영등포를 안다고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개발도상국도 되지 못했던 후진국을 고국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위의 중략부분에 있다시피) “초조와 열등감이 빗물처럼 산발하고 / 공연한 내 정신의 무질서를 밤마다 토하”던 곳, “그리고는 창피해서 골방의 이불을 덮던 / 우리들의 참으로 희귀하고 진하던 청춘”의 기억까지 서성거리게 되는 것 아닐까.
  마종기가 고문을 당하던 1965년이 지나고 66년이 되면 아버지 마해송이 별세한다. 부친과 가까웠던지 시인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를 많이 남겼던 것 같다. 이 시집에서도 몇 편을 볼 수 있는데, 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누선을 자극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유독 이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마치고자 하는 것은, ‘마종기’라는 시인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쉬운 단어들만 모아, 쉬운 글을 쓰면서도 공감을 하게 만드는지, 혀를 차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부친을 닮아 동시를 쓴 듯한 기분, 그러면서도 시인의 의사 직업과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도 잘 보여준다.



  선종 이후 · 4  (善終 以後)



  가끔 당신을 만나요.
  먼 나라 낯선 도시에
  나는 지금 살지만
  나를 찾아온 환자 중에서도
  비슷한 윤곽, 안경과 대머리
  당신은 미소하시겠지만
  나는 말없이 반가와서 속으로 울어요.


  가끔 당신을 만나요.
  외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가끔 당신의 살이 더 희어지고
  눈이 파래지더라도
  당신이 환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사이로
  대견하게 나를 보시는 마음을 알아요.


  고통을 끝없이 보는 고통을 아시나요.
  두려움을 지키는 두려움의 계속
  내가 그 안에서 향방 잃은 표정이 되면
  어느 여가에 여기까지 오셔요.
  창밖에서 빗속으로 불러 주시는
  한밤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 들어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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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7-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를 정말 전혀 모릅니다. 근데 이 글을 읽으며 머리가죽이 조여오는 건 왜일까요... 쉬운 단어로 쓴 시라는 폴스타프님의 말씀에 저도 마종기님의 시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시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 안 읽고 가끔 폴스타프님 시집 리뷰 보는걸로 감동받곤 했었거든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0-07-31 12:57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
저도 아주 한정된 시만 좋아할 뿐입니다. 요새 시는, 제 생각에, 과하게 시인 개인의 사유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 같아서 다시 우리나라 근대시를 읽기 시작한 건데, 독후감 읽기에도 좋으셨다니 기분이 좋군요. ^^
 
망자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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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독일어 문화권에서는 센세이셔널을 일으킨 작가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이의 소설 작품들을 번역 출간했는데 이번엔 을유문화사에서 최신작 <망자들>(2016)을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내놓았다. 좋은 일이다. 나는 <망자들>을 읽자마자 크라흐트의 데뷔작인 <파저란트>와 <제국>을 보관해 두었다. 올해 안에 적어도 한 권은 읽을 듯하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1930년대 초중반의 5월. 비 내리는 도쿄에 어둠이 깔리고,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던 젊고 잘생긴 장교가 일본 특유의 의식인 할복자살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배를 스스로 갈라 죽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 카이샤쿠, 즉 할복하는 사람의 뒤에 서 있다가 큰 칼로 목을 내리침으로써 빨리 죽음에 이르게 도와주는 사람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소설의 일본군 장교는 무릎을 꿇은 채 아주 예리하게 벼린 단도를 자기 복부, 단전부분에 꾹 누르고 엎어진다. 그러나 장을 찌른 것 가지고는 곧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아 (대개 여기가 카이셰쿠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다시 고통을 무릅쓰고 똑바로 앉아 칼을 위쪽으로 북 치켜 올렸고, 그래서 위에 손상을 주었는지 덩이진 피를 입으로 물컹물컹 쏟아내며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순간, 벽 속에 숨어 있던 무비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심지어 필름 돌아가는 소리도 약하지만 여전히 흘러나왔다.
  인화를 마친 필름을 가정용 영사기로 보고 있던 희대의 천재 아마카스 마사히코. 아홉 살이 채 안 되어 일곱 개의 언어를 마스터하고 산스크리스트어를 독학했으며 그랜드 피아노로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하이네를 독어로 읽었던 어린 시절부터 손톱을 물어뜯었고, 손톱에서 피가 나고 너덜너덜해지자 이젠 발톱까지 물어뜯었던 아이는 성장해 정부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에 장교의 배에서부터 양비귀꽃 같은 피가 솟구치는 장면에서 눈길을 거두고 만다. 혐오스러워서. 예전에 중화제국에서 행해지던 능지처참 장면을 사진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나도 있다.), 세상에는 재현하고 복사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동의한다). 아마카스는 이 필름을 자신이 직접 타이프 한 편지와 함께 베를린으로 보낼 생각이다. 진짜 느낌은 언어적 표현이나 슬로건 보다는 사진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모습을 갖춘다는 신념에 따라, 할복 장면을 포함한 영화를 베를린에 보냄으로써 그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정체政體를 지지하려는 생각이었을까? 해석은 독자 마음이다.
  작품 속에선 영화와 편지를 보냄과 함께,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맞설 대안으로 유럽 영화의 대국인 독일의 감독, 아니면 오스트리아나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때 아마카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감독 가운데 한 명이 ‘에밀 네겔리.’ 최근에 그의 영화 <풍차>를 보고 사건의 부재 속에서 신성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감동을 받은 터이었다. 이런 차에 믿기지 않게 정말로 에밀 네겔리가 긴 항해 끝에 일본 고베 항에 발을 딛는다.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에밀 네겔리(그러나 이미 대머리가 상당히 진행된 중년의 사내)는 스위스 사람으로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이동 중이다. 세계상世界像에 대한 확고하고 건강한 회의를 품고 있는 네겔리는 식사 또는 식도락을 즐기지 않는 타입으로 양분섭취 과정은 지겹고 가끔은 심지어 역겹게 생각해 소량의 저녁식사 전까지 커피만 마시기도 하는 인물로 포도당 섭취의 부족은 어쩔 수 없이 주변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짜증을 부리는 일로 나타나기도 하는, 조금쯤 대하기 피곤한 사람에 속한다. 독일인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은 일 때문에 지금 일본에 가 있지만 자신도 몇 달 후 일본으로 가게될 지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다. 영화인 네겔리가 생각하기로 세계 영화 백년 역사상 천재가 딱 다섯 명이 있었다. 차례로 로베르 브레송, 장 비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오스 야스지로, 그리고 자신이란다. 앞의 네 명은 실제 인물이고 주로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이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앞에서 얘기한 아마카스가 보낸 편지와 영화와는 전혀 별개로 독일제국의 문화상 후겐베르크가 거대 프로젝트를 네겔리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화상과 만남의 자리에서 동석하게 된 영화비평가이자 유대인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는 뱀파이어와 유령에 관한 공포영화를 만들 것을 조언해주고, 자신들 역시 뱀파이어와 유령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낳고 자라고 공부하고 사랑했던 독일 땅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하는 말이, 영화 속 귀신은 반드시 잘 생기고 마른 동양인이어야 한단다. 즉 유럽에서는 유효기간이 끝난 브램 스토커 식의 드라큘라 대신 다른 존재의 죽음 같은 것을 찾아 일본으로 떠남으로 해서 처음에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거금 20만 달러의 제작비를 80만 달러까지 올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겔리는 약혼녀가 있는 일본 땅으로 출항하게 된 것.
  어렸을 때 네겔리는 늘 어마어마하게 비싼 와이셔츠에 좁은 커프스, 금으로 만든 얇은 손목시계를 찬 아버지의 가는 손을 동경해왔다. 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서 아버지는 평생 아들을 이름 ‘에밀’ 대신 ‘필립’이라 불렀는데 그게 유머로 서투르게 위장한 잔인함을 아들에게 투사한 행위라고 단정한 것은 먼 훗날 엘펜슈타인의 복음병원 임종실에서 아버지의 가는 손을 다시 붙잡았을 때였다. 일 년 전부터 이를 닦지 않아 공포스런 구취를 풍기며 죽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에밀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고 고개 숙인 그의 귀에 무엇을 속삭이려 했을까. 자신이 들은 것은 분명히 “하”라는 외마디. 독일어 발음으로 ‘H?’ 그건 모르겠지만 에밀은 틀림없이 자신이 단 하나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 평생 단 한 번,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고, 그 저주는 백퍼센트 실현된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래 떨어져 살았던 약혼녀 이다 폰 윅스퀼과 일본의 천재적 영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있는 일본에 도착하니, 그 순간 독자는 네겔리의 특별한 능력이 언제 발현될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스토리 위주로만 읽으면 섭섭한 일이다. 글. ‘글’이라고 하면 ‘문장’의 집합일 터인데, 사실 개별적 문장이 감성에 호소한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다 모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글’을 읽는 일이 대단히 즐겁다는 것. 뭐라 한 마디로 딱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 생각났다, 글이 대단히 유혹적이다. 뭔가 곧 드러날 것 같은 비의를 숨긴 듯한 글, 문장의 연속이 매력적이다. 그리하여 난 이 작품은 스토리가 반, 문장의 조합으로써의 글을 감상하는 것이 또 반이라고 감정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역자가 간섭을 했겠으나,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크라흐트의 미학을 감지하는데 문제가 없다. 이러니 어찌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지 않을 수 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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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7-3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읽어보려고요. 배경이 일본 도쿄라는 점도 흥미롭네요.

Falstaff 2020-07-30 09:55   좋아요 0 | URL
옙. 흥미로우실 겁니다. 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이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ㅎㅎㅎ
 
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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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이제 한 작품만 더 읽으면 파묵의 소설은 올 클리어. 올해 안에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러니 파묵 씨는 조금 더 분발해야 할 듯.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이니만큼 이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작가나 다른 작품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할 건 없다. 곧바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자.
  이스탄불의 베쉭타시 뒤편, 오스만 제국의 31대 술탄인 압뒬메지드의 명령으로 1848년에 지은 우흘라무르 여름별장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아큰 첼리크’라는 약사가 아들 젬,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은 시절부터 사회주의의 거의 모든 분파와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왔던 운동가로 ‘하야트’, 우리말로 ‘삶’ 또는 ‘인생’이란 이름의 약국을 경영하며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해왔다. 큰 키에 마르고 잘 생긴 외모를 하고 있어서 많은 여자들이 이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느꼈으며, 이 가운데 몇 명은 자신도 사랑하기까지 했단다.
  아주 오래 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밤에 군인들이 아큰을 체포할 당시 젬의 엄마는 무척 상심했으나 아들에게 아버지가 영웅임을 명심하라고 몇 번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7, 8년 전에도 경찰서에 또다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2년 만에 풀려나왔을 때는 엄마가 아빠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1985년, 젬이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세 번째로 사라지자 이번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 엄마는 결코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젬 역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몇 번을 상봉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아들에게 그리 큰 애정을 두지 않았는데, 자신이 수시로 국가기관에 체포를 당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성격상 모든 일을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하는 습관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원래 성격이 자식에게 그리 큰 정을 주지 못하는 남자였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번엔 바람기 때문에 가출한 것이 분명한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비롯해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모자는 198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스탄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게브제’의 변호사 이모부 댁의 별채로, 월세를 내지 않고 살기 위해 이사를 했다.
  그러나 대입을 코앞에 둔 젬과 엄마 입장에선 입시 학원에도 보내야 해서 학원비를 보태기 위해 젬은 이모부의 과수원 경비원 일을 하기로 했다가, ‘얼마 후’ 작년에 아버지가 가출한 다음에 잠깐 일했던 이스탄불 베쉭타시 시장 안에 있는 책방 ‘데니즈’에서 위층 소파에서 자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과수원 경비와 ‘데니즈’, 우리말로 ‘바다’ 책방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 ‘얼마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이모부네 과수원 옆에서 우물 파는 일을 하던 마흐무트라는 나이든 사람이 있었다. 이이의 우물 파는 솜씨가 매우 좋아 사람들은 이름 뒤에 장인Meister라는 의미로 ‘우스타’라는 호칭을 붙여 ‘마흐무트 우스타’라고 했고, 일이 끝나자 우스타는 젬에게 자신을 따라가 넉넉잡고 두 주일만 일하면 일당으로 과수원에서 받는 것의 네 배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해서, 마흐무트 우스타와 변호사 이모부, 엄마가 합의해 우물을 파러 지하에 내려 보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한다.
  그래 군소재지 ‘왼괴렌’의 언덕 위 평원에 자리를 잡고 땅주인이자 고용인인 하이리 씨는 자신의 일꾼 알리를 보내 모두 셋이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알리는 우스타의 고용인이 아니라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고, 우스타와 젬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을 돈독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우스타는 엉뚱하게도 젬에게 마치 아버지같이 (젬의 서술에 의하면)“삶을 결정해버릴 만큼 큰 영향”을 준게된다. 마흐무트 우스타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내주는 이야기를 비롯해, 야곱과 요셉 같은 코란 속 부자관계를 예로 들면서, 아버지란 사람은 공정해야 한다고, 공정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자식의 눈을 멀게 만든다는 등의 일화를 주로 들려준다. 젬이 우스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부정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리라.
  마흐무트가 젬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니 젬은 마흐무트에게 일종의 반항을 하기 위해 전문을 읽은 것은 아니고 발췌나 요약본으로 읽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살을 붙여 풀어놓음으로 해서 성공적으로 마흐무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요 스토리가 세 가지. 둘은 위에서 이야기했고, 나머지 하나는 왼괴렌 시내에 와 있는 유랑극단에서 공연했던 몇 가지 촌극 가운데 하나. 이 유랑극단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 군사 쿠데타까지 아나톨리아에서 혁명적 민중연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가 이제 군사정권 아래서 내용 속에 세속적 이야기도 많이 삽입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수긍을 한 극단으로, 이 가운데 1,000년 전 페르시아의 시인 페르도우시가 쓴 <왕서>의 한 장면도 포함된다.
  이란에서 견줄 자가 없는 뤼스템이라는 이름의 영웅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적국의 땅인 투란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란에서는 그의 이름이 워낙 널리 알려졌는지라 손님으로 맞이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고 좋은 침실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었단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투란 왕의 딸인 타흐미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잘생긴 영웅 뤼스템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애원한다. 그래 동침을 한 다음 날, 뤼스템은 아이가 태어나면 정표로 항상 몸에 달고 다니라고 자신의 팔찌를 건네주고는 자기나라로 돌아갔고, 공주는 정말로 임신을 해 사내아이를 출산, 이름을 쉬흐랍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쉬흐랍 또한 영웅의 풍모를 지니게 되었을 때, 친부 뤼스템과 투란의 왕을 위해 좋은 뜻으로 이란을 침공하게 됐고 이 와중에 정적들이 농간을 부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전장에서 뤼스템과 쉬흐랍이 맞장을 뜨게 된다. 처음엔 쉬흐랍이 이겼지만, 뤼스템이 기지를 써 이란에서는 두 번 연속으로 싸움에서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로 인정한다고 해, 한 번 더 싸웠으나, 이번에 뤼스템이 쉬흐랍을 눕히고는 곧바로, 서슴지 않고 갑옷 사이의 빈틈에 칼을 쑤셔 넣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 순간 쉬흐랍의 팔뚝에 팔찌가 채워진 것을 보고 뤼스템이 쉬흐랍을 부여안은 채 오열을 하는 장면.
  비록 원본 <왕서>에는 없지만 이것을 연극으로 만든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에서는 싸움과 죽음을 지켜보던 아내이자 어머니인 타흐미네 공주가 처절한 통곡과, 자신의 운명과 인간의 팔자에 대하여 장렬한 독백을 하는데, 이때 타흐미네 공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서른두 살, 우리의 주인공 젬보다 딱 두 배 나이가 든 여인으로 분노, 화 등을 대표하는 빨강머리의 여인이다. 젬은 이 여인, 둥글고 아름다운 입술에, ‘나’한테 뭔가 기이한 것을 감지한 듯한 슬픈 미소를 보내고 마치 예전부터 아는 사람을 보는 눈길을 가지고 있는 ‘귈지한’이란 이름의 여인과, 아무리 파고,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우물 천공 작업에 지쳐가는 젬은 이 여인과, 생전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두려워할 것 없어. 난 네 엄마 또래야.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희곡 <오이디푸스>, 최고의 페르시아 서사시 <왕서>에서 뤼스템과 쉬흐람. 순서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시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후 어머니와 결혼해 3남1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들. 이것이 터키의 현대사, 아직도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유럽화 된 동서양의 분기점에서 어떻게 구현이 됐을까. 작가가 오르한 파묵. 세 가지 주제가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순환이 되더라도 이의는 없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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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마틴 에이미스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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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유명한 유머 작가를 고르라면 제롬 K. 제롬과 킹슬리 에이미스를 꼽을 듯하다. 훨씬 선배인 제롬은 <보트 위의 세 남자>로, 에이미스는 <럭키 짐>으로 명성을 즐기고 있는데 이 에이미스의 아들이 또 블랙 유머의 펜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런던 필즈>를 비롯해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를 재미있게,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는 책 표지 디자인과 제목이 좀 오버스러워서 영 손이 가지 않아 여태까지 읽기를 미루어왔다가 이번에 ‘해치웠다.’ 원래 제목은 ‘Lionel Asbo’, 주인공 이름인 ‘라이오넬 애즈보’ 그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른 한 명은 데스먼드 또는 데스 혹은 데시 페퍼다인. 라이오넬 애즈보가 외삼촌이다. 이 복잡한 가계를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먼저 그레이스 페퍼다인. 아주 어려서부터 비틀스의 광팬이었다. 근데 매우 조숙한 어린이여서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만 열두 살 때 그만 덜커덕 임신을 해 딸 실라를 낳아버렸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래로 연달아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존, 폴, 조지, 링고, 다섯째에 와서 이제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옛 비틀스 멤버의 이름을 따 스튜어트라고 했고, 여섯 번째 또 아들은 낳으니 더 가져다 붙일 비틀스 멤버가 없어 신경질을 벅벅 내다가 안무가 라이오넬 블레어에서 따온 ‘라이오넬’이라 불렀다. 이 라이오넬의 아버지가 첫째 딸 실라의 아버지와 같을 뿐이고, 나머지 다섯 명의 친아버지는 스칸디나비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어떤 나라 출신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씀.
  이런 환경에서 나온 아이들이 보통의 영국인처럼 자라기는 매우 힘든 일. 멀리 갈 것 없이 맏이 실라만 보더라도, 문제적 환경과 문제적 인간들의 집합소인 디스턴 타운에 하나밖에 없는 스퀴어스 프리 초중등학교, 영국에서 경찰출동이 제일 많고, 중등학교 자격시험 합격률이 제일 낮고, 무단 결석률이 제일 높으며, 정학, 퇴학, 청소년 범죄 선도회 정도인 PRU 강등 비율이 가장 높아, 자연스럽게 소년원을 거쳐 청소년 감옥의 코스를 따르는 경우도 제일 많은 학교에서 완벽하게 공부도 하지 않는데도 수업시간에 들은 것만 가지고 전 과목 A를 받는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나중에 노숙자로 떨어질 운명을 지닌 자신보다 몇 살 더 먹은 흑인 아이와의 사이에서, 자신의 엄마와 같은 나이인 열두 살 때 그만 또 다른 주인공 데스먼드 페퍼다인을 출산해버렸다. 데스먼드, 데스, 데니는 생전에 딱 한 번 친부를 본 적이 있는 바, 공원의 벤치 위에서 잠을 자던 광경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것이 자기 생전 딱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본 자기 아들의 친아버지 모습이었단다.
  실라와 유일하게 같은 아버지를 둔 우리의 주인공 라이오넬 페퍼다인은,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스퀴어스 프리에서도 눈에 띄는 말썽꾼이라서 PRU를 거쳐 소년원, 청소년 감옥을 밥 먹듯 들락날락 거렸고, 성인이 돼서도 삶의 반 정도의 세월을 주로 폭력과 장물취득의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다. ‘반사회적 행동금지 명령 Anti-Social Behaviour Order’을 하도 많이 받은 라이오넬은 그것도 근사한데, 싶어서 이름 자체를 페퍼다인에서 애즈보Asbo로 바꾼 인간이다. 리오넬 메시와 같은 이름을 쓰는 라이오넬에게 누구보다 빠삭한 세 가지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직업 범죄자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악행과 감옥과 형법이었다. 책을 열면 벌써 로즈 놀스라는 남자를 병원에 입원해 장기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폭행해 고소를 당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결코 고소 같은 걸 당할 인간은 아니지만. 라이오넬은 조와 제프라는 이름의 미친 핏불 테리어를 (엘리베이터가 21층까지만 올라오는, 즉 고장난)아파트 33층에서 사업상 필요 때문에 용맹성 증강을 위해 갖은 학대를 가해가며 키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업은 주로 채권추심이나 경쟁자 협박, 때로는 처치용을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시지?
  근데,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는 불쾌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마틴 에이미스의 코믹한 필설로 인해 경쾌하게 그리고 있으니 너무 그쪽으로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레이스 페퍼다인 할머니에게 새로운 애인이 하나 생긴다. 바로 외손자 데스먼드. 데스먼드는 이제 열다섯 살에 불과하다. 데스는 학교를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 중에 졸지도 않으며, 선생을 공격하거나 화장실에서 마약에 절어 있지도 않는데다가 공부도 엄청 잘 해서 학교 안에서 겉도는 아이로 찍혀 흉포한 괴롭힘을 당할 충분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불과 여섯 살 많은 막내 삼촌의 막강한 영향력의 그늘 아래에 잘 다니고 있는 모범생이다. 모든 과목을 잘 한다. 진짜다. 가끔 이런 재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책 표지에 데스를 일컬어 “르네상스 소년” 즉, 다빈치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뛰어난 소년이라 씌어 있는 거다. 근데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 배수관을 고쳐주러 갔다가 할머니가 슬슬 분위기 잡아가며 만지는 통에 정말로 성적인 접촉까지 간 것인데, 생각만 해도 징그럽지? 열두 살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데스를 또 열두 살에 낳아서 할머니와의 나이차이가 불과 24년, 이제 겨우 서른아홉 살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틀림없는 중범죄인데, 상대적 약자, 이 경우엔 손자인 데스에게 더 깊은 상흔이 남는다. 그는 남은 전 생애에 걸쳐 끔찍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관계가 끝이 나느냐고? 할머니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 학년 아래, 입술에 피어싱을 한 미소년 로이 나이팅게일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할머니도 손자와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일찌감치 정리를 했던 거다. 그러나 아뿔싸, 막내 삼촌 라이오넬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로이를 납치해 모종의 장소에 팔아넘긴다. 쥐어뜯어 뜯긴 입술 살점이 붙은 피어싱을 데스에게 기념으로 준다. 나, 라이오넬의 엄마하고 했다면 이 정도는 각오를 하고 해야지.
  지금 데스는 삼촌하고 함께 산다. 몇 년 전, 슈퍼마켓에서 살짝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지만 금방 일어나 웃음을 지었던 엄마가 다음날 아침에 그만 숟가락을 놔버렸던 거다. 라이오넬도 그렇고 데스도 그렇고, 불과 여섯 살 많은 삼촌이 마치 아버지처럼 데스를 보살폈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준 건 맞는 듯하다. 하여튼 삼촌이 시키고, 권하고, 가끔 강요하는 딱 반대로만 하면 세상사는 정답이 된다는 것을 일찍 깨친 데스먼드에게는.
  그런데, 크고 크고, 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삼촌의 친구이자 사촌인 말론 웰크웨이와 한때 대외적으로 애인사이였던 지나 드래고의 결혼식 때 난리법석, 패싸움을 유도하여 크게 사고를 쳐서 또다시 교도소로 간 라이오넬을 면회 갔을 때였다. 평소 절대 복권 따위는 사지 않는 라이오넬이 단지 늙은 수감자를 괴롭히고 싶어서 복권 교환권을 강탈을 했는데 면회 온 데스먼드에게 로또 번호를 써 우편으로 보내라고 지시를 했었다. 근데, 데스먼드가 찍은 번호의 로또가 그만 무려 1억 4천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300억 원에 당첨이 된 거다. 와우!
  자, 여기까지만.
  이제 짧은 감상. 서양 유머 코드지만 요새 사람이라서 읽으면서 낄낄대는데 문제가 없다. 즐거운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내 경우에, 후반에 들어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고, 비슷한 유머 또는 말장난이 워낙 계속되니 나중엔 좀 질리는 감이 있었다. 그래도 이만한 블랙 유머를 선택하기 위하여는 행운이 필요하니 한 번 읽어봄 직도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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