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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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이제 한 작품만 더 읽으면 파묵의 소설은 올 클리어. 올해 안에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러니 파묵 씨는 조금 더 분발해야 할 듯.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이니만큼 이이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작가나 다른 작품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할 건 없다. 곧바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자.
  이스탄불의 베쉭타시 뒤편, 오스만 제국의 31대 술탄인 압뒬메지드의 명령으로 1848년에 지은 우흘라무르 여름별장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 ‘아큰 첼리크’라는 약사가 아들 젬,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이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은 시절부터 사회주의의 거의 모든 분파와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왔던 운동가로 ‘하야트’, 우리말로 ‘삶’ 또는 ‘인생’이란 이름의 약국을 경영하며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해왔다. 큰 키에 마르고 잘 생긴 외모를 하고 있어서 많은 여자들이 이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느꼈으며, 이 가운데 몇 명은 자신도 사랑하기까지 했단다.
  아주 오래 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밤에 군인들이 아큰을 체포할 당시 젬의 엄마는 무척 상심했으나 아들에게 아버지가 영웅임을 명심하라고 몇 번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7, 8년 전에도 경찰서에 또다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2년 만에 풀려나왔을 때는 엄마가 아빠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1985년, 젬이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세 번째로 사라지자 이번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 엄마는 결코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젬 역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몇 번을 상봉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아들에게 그리 큰 애정을 두지 않았는데, 자신이 수시로 국가기관에 체포를 당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성격상 모든 일을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하는 습관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원래 성격이 자식에게 그리 큰 정을 주지 못하는 남자였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번엔 바람기 때문에 가출한 것이 분명한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비롯해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모자는 198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스탄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게브제’의 변호사 이모부 댁의 별채로, 월세를 내지 않고 살기 위해 이사를 했다.
  그러나 대입을 코앞에 둔 젬과 엄마 입장에선 입시 학원에도 보내야 해서 학원비를 보태기 위해 젬은 이모부의 과수원 경비원 일을 하기로 했다가, ‘얼마 후’ 작년에 아버지가 가출한 다음에 잠깐 일했던 이스탄불 베쉭타시 시장 안에 있는 책방 ‘데니즈’에서 위층 소파에서 자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과수원 경비와 ‘데니즈’, 우리말로 ‘바다’ 책방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 ‘얼마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이모부네 과수원 옆에서 우물 파는 일을 하던 마흐무트라는 나이든 사람이 있었다. 이이의 우물 파는 솜씨가 매우 좋아 사람들은 이름 뒤에 장인Meister라는 의미로 ‘우스타’라는 호칭을 붙여 ‘마흐무트 우스타’라고 했고, 일이 끝나자 우스타는 젬에게 자신을 따라가 넉넉잡고 두 주일만 일하면 일당으로 과수원에서 받는 것의 네 배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해서, 마흐무트 우스타와 변호사 이모부, 엄마가 합의해 우물을 파러 지하에 내려 보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한다.
  그래 군소재지 ‘왼괴렌’의 언덕 위 평원에 자리를 잡고 땅주인이자 고용인인 하이리 씨는 자신의 일꾼 알리를 보내 모두 셋이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알리는 우스타의 고용인이 아니라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고, 우스타와 젬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을 돈독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우스타는 엉뚱하게도 젬에게 마치 아버지같이 (젬의 서술에 의하면)“삶을 결정해버릴 만큼 큰 영향”을 준게된다. 마흐무트 우스타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내주는 이야기를 비롯해, 야곱과 요셉 같은 코란 속 부자관계를 예로 들면서, 아버지란 사람은 공정해야 한다고, 공정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자식의 눈을 멀게 만든다는 등의 일화를 주로 들려준다. 젬이 우스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부정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리라.
  마흐무트가 젬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니 젬은 마흐무트에게 일종의 반항을 하기 위해 전문을 읽은 것은 아니고 발췌나 요약본으로 읽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살을 붙여 풀어놓음으로 해서 성공적으로 마흐무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주요 스토리가 세 가지. 둘은 위에서 이야기했고, 나머지 하나는 왼괴렌 시내에 와 있는 유랑극단에서 공연했던 몇 가지 촌극 가운데 하나. 이 유랑극단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 군사 쿠데타까지 아나톨리아에서 혁명적 민중연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가 이제 군사정권 아래서 내용 속에 세속적 이야기도 많이 삽입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수긍을 한 극단으로, 이 가운데 1,000년 전 페르시아의 시인 페르도우시가 쓴 <왕서>의 한 장면도 포함된다.
  이란에서 견줄 자가 없는 뤼스템이라는 이름의 영웅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적국의 땅인 투란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란에서는 그의 이름이 워낙 널리 알려졌는지라 손님으로 맞이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고 좋은 침실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었단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투란 왕의 딸인 타흐미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잘생긴 영웅 뤼스템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애원한다. 그래 동침을 한 다음 날, 뤼스템은 아이가 태어나면 정표로 항상 몸에 달고 다니라고 자신의 팔찌를 건네주고는 자기나라로 돌아갔고, 공주는 정말로 임신을 해 사내아이를 출산, 이름을 쉬흐랍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쉬흐랍 또한 영웅의 풍모를 지니게 되었을 때, 친부 뤼스템과 투란의 왕을 위해 좋은 뜻으로 이란을 침공하게 됐고 이 와중에 정적들이 농간을 부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전장에서 뤼스템과 쉬흐랍이 맞장을 뜨게 된다. 처음엔 쉬흐랍이 이겼지만, 뤼스템이 기지를 써 이란에서는 두 번 연속으로 싸움에서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로 인정한다고 해, 한 번 더 싸웠으나, 이번에 뤼스템이 쉬흐랍을 눕히고는 곧바로, 서슴지 않고 갑옷 사이의 빈틈에 칼을 쑤셔 넣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 순간 쉬흐랍의 팔뚝에 팔찌가 채워진 것을 보고 뤼스템이 쉬흐랍을 부여안은 채 오열을 하는 장면.
  비록 원본 <왕서>에는 없지만 이것을 연극으로 만든 ‘교훈을 주는 전설 극단’에서는 싸움과 죽음을 지켜보던 아내이자 어머니인 타흐미네 공주가 처절한 통곡과, 자신의 운명과 인간의 팔자에 대하여 장렬한 독백을 하는데, 이때 타흐미네 공주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서른두 살, 우리의 주인공 젬보다 딱 두 배 나이가 든 여인으로 분노, 화 등을 대표하는 빨강머리의 여인이다. 젬은 이 여인, 둥글고 아름다운 입술에, ‘나’한테 뭔가 기이한 것을 감지한 듯한 슬픈 미소를 보내고 마치 예전부터 아는 사람을 보는 눈길을 가지고 있는 ‘귈지한’이란 이름의 여인과, 아무리 파고,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우물 천공 작업에 지쳐가는 젬은 이 여인과, 생전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두려워할 것 없어. 난 네 엄마 또래야.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희곡 <오이디푸스>, 최고의 페르시아 서사시 <왕서>에서 뤼스템과 쉬흐람. 순서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희생시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은 후 어머니와 결혼해 3남1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이야기들. 이것이 터키의 현대사, 아직도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유럽화 된 동서양의 분기점에서 어떻게 구현이 됐을까. 작가가 오르한 파묵. 세 가지 주제가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순환이 되더라도 이의는 없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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