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퇘지 ㅣ 블루 컬렉션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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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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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바욘에서 출생한 1969년생 작가. 바욘이 어디냐 하면, 스페인과 무지하게 붙어있는 대서양 인접 지역. 그곳의 농가 출신이다. 파리의 바칼로레아를 마친 후에 파리3대학, 파리7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는데, 지금은 전설이 된 유대인 작가 조르주 페렉을 연구했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근데 이건 조금 과장. 7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비극적 아이러니와 오토픽션”이었고, 이를 위한 작가들의 실례 가운데 한 명이 조르주 페렉이었다고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나와 있다. 뭐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는 <암퇘지>를 읽기만 하면 되지.

  <암퇘지>는 다리외세크가 스물일곱 살 때 발표한 작품으로 이이를 “단숨에 화제의 작가로 만든 이 작품은 55만 부 이상 팔렸고, 34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었다”고 책 앞날개에 밝혔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은 “40개 언어로 1백만 부 이상” 팔렸다는데, 이것 역시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는 <암퇘지>만 읽으면 되지.


  근데 문제는, 이 <암퇘지>를 마음 편하게 읽기가 쉽지 않다는 거.

  지금 독후감을 쓰려고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니, 아이쿠, <가시내>가 있다. 이이가 바로 <가시내>를 쓴 작가구먼. 미리 알았으면 생각 좀 해볼 것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는데, <가시내>가 나왔을 때 장안의 독자들이 말하기를, 지하철에서 읽기 곤란한 책, 그래서 읽으려면 책 껍데기를 하다못해 신문지로 싸서 읽어야 할 수준이라고 하는 조언을 받아들였던 거다. 10대 아이들, 특히 소녀들의 섹스에 관해 썼다고 해서, 내가 지금 나이가 몇 갠데 십대 아이들의 탐구생활에 관심을 둘쏘냐, 싶어 관뒀다. 그 책의 작가를 단번에 스타로 만들어준 책을 당시부터 15년의 세월이 더 흐른 후에 읽는다니, 내가 알았으면 정말 이 책을 읽었겠느냐고.

  책은 도발적이다. 변신metamorphosen은 변신이건만, 외판원 그레고리 잠자가 한 마리 딱정벌레 과의 곤충으로 변한다면 문학 역사상 기념비적인 부조리 소설이 되겠건만, 향수 판매 체인 회사의 판매원이 점점 돼지로 변하는 건 이건 부조리도 아니고, 차라리 영화 <엑스맨>에 나오는 무수한 돌연변이 가운데 불쾌/불량한 쪽의 한 명을 빙자한 무차별 은유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도무지 정신을 잡도리할 방법이 없었다.

  여성 육체의 과잉과 과장, 임신과 임신중단, 여성성을 보여주는 페미니즘 작품으로 보였다가, 천만의 말씀, 뭘 주장하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페미니즘 작품은 아니고,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성 화자 ‘나’의 육체적 과잉과 그로 말미암은 소멸을 그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여튼 뭔가 이야기하려는 거 같기는 한데 끝내 모르겠다. 그렇다고 부조리 소설도 아니고 말이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때 ‘나’는 실직상태였으나, ‘나’의 몸은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다니까 아마 20대 초반이었을 듯. ‘나’가 스스로 하는 말이, 모든 남자에게 기가 막히게 탄력적인 여인으로 취급받기 시작할 때였다고.

  이때 ‘나’가 인터뷰한 회사가 바로 향수 판매 체인회사. 입사 면접을 할 때부터 지배인의 한쪽 손은 ‘나’의 몸에, 다른 한 손은 이력서와 입사 계약서에 가 있었으며, 최종 합격을 했지만 최저임금 반을 받는 조건으로 한 파트타임 직원이었단다. 그래도 집의 월세와 치마 한두 벌을 사 입을 수 있어서 만족한 수준. 여기에 재고조사가 끝나면 화장품 장기 재고를 그냥 얻어갈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나’의 진짜 직업을 말해보자. 이때 ‘나’에게는 ‘드 발자크’는 아니지만 오노레라는 이름의 중학교 교사 애인이 생겨서, 오노레가 ‘나’에게 옷을 한 벌 사주었을 때, 옷 갈아입는 박스에서 처음으로 섹스를 했듯이, ‘나’의 직장인 향수 가게에도 향수를 뿌려보는 방이 있었는데, ‘나’의 진짜 업무는 이 방 안에서 고객들에게 마사지를 해주고, 향수도 뿌려주어 구매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근데 ‘나’의 몸이 점점 포동포동해지며 ‘나’의 육체에 손님들이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 가운데 특히 남자 손님들이 대거 밀려들어 여자 손님들은 오히려 질투에 휩싸였나 어쨌나 모르지만 점점 떨어져 나갔다. 남자 손님은 향수방에 들어와 마사지를 받고, 정신없이 향수 폭탄을 투하하면 거금이 들더라도 ‘나’가 권하는 향수를 다 구입했다나? 물론 맨입에 비싼 돈을 들여 향수를 사준 건 아니었다. 그들이 바란 건 특별 마사지. 대강 짐작하시겠지?

  이 손님들은 당연히 ‘나’의 몸 상태에 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과, ‘나’는 갈수록 몸이 더 불면서 점점 더 배가 고파지고, 배도 불룩해지는 것이, 아차차, 생리가 끊긴 지 좀 된 거다. 손님 가운데 아주 단골손님이 하나 있어 다행히 양심이 좀 있는 편이라 중절수술 비용을 몽땅 지불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임신한 것도 아닌데 괜히 돈을 쓴 거 같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더 있었고,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불임. 그런데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원래 불임이었을 수도 있고, 수술 후에 불임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거 함부로 써 놓으면 확실하게 욕을 먹을 수 있어서 유심히 읽어봤는데 마찬가지다. 다리외세크는 절대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여간 불임이다.


  이후 ‘나’는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살이 찌고, 유방도 두 가슴 위에 하나가 새로 생기고, 어어 하는 사이에 세 개가 더 생겨 모두 여섯 개의 유방과 열두 개의 젖꼭지를 달게 된다. 귀는 위로 뾰족하게 나오고, 코는 뭉툭하고 두툼해졌다. 근데 늘 돼지 상태로 있는 건 아니라서, 기분이나 몸의 상태가 이상한 단계가 되면 암퇘지로, 뭐하고 비교하는지는 몰라도, 정상 상태가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데, 정말 영화 <엑스맨>의 돌연변이들 가운데 한 명 같다니까?

  막판 가면 돌연변이들은 서로 만나듯이,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늑대인간을 만나 둘이 서로 의지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딱 보니까 다리외세크의 작품에서 해피엔드를 바라면 짱구 같다. 즉 <암퇘지>도 비극으로 끝맺는데 당연히 종장은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이 책도 권하지 않을 터.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하시라는 건데, 출판사 열린책들은 어쩌자고 이 책을 중쇄도 아니고 중판까지 찍었을까? 내가 읽은 책이 중판. 그리고 품절이라서 후진 독후감을 써도 그나마 좀 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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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10-13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이거 구판으로 읽었는데…. 읽고 제가 미련 없이 버린 책 중 하나입니다…. 제겐 참 드문 일이죠. 🤣

Falstaff 2026-10-13 16:47   좋아요 1 | URL
이걸 중판 찍는 출판사는 또 뭡니까? ㅎㅎㅎ 그저 웃음만....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56
김경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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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에 서울에서 나서 이대 독문과와 대학원 독어교육과를 거쳐 명지대에서 문예창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데, 내 가방끈이 짧아 이게 박사학위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1998년, 스물일곱 살에 시인 등단해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한 중견 시인. 반성하자. 그런 시인의 시집을 왜 이제야 처음 읽는지. 이 시집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는 2021년, 시인이 쉰 살 부근에 냈는데 여전히 그립고, 뒤를 돌아보고, 때로는 고독하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시인이 펜을 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화두, 시란 무엇일까, 시인은 또 무엇일까, 하는 결코 풀리지 않는 매듭도 또다른 시의 주제로 놓여 있다.


  먼저 그리움 또는 뒤돌아봄에 관하여.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는 제목 자체가 <뒤>이다.



  한밤의 택시 안, 어디쯤일까, 핸드폰을 본다, 우주정거장이 방금 내 머리 위를 지나고 있다, 이건 너무 큰 그림, 어디지, 거기가 바로 여기네, 이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의 그림자 사진, 핸드폰을 본다, 이번엔 너무 지난 그림, 그는 그늘, 여기는, 신호 없음, 연결 상태를 확인해주세요, 빨간 신호마다 과속으로 지나친 여기, 어디지,


  해 질 녘마다, 거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나는 그의 그림자를 담요처럼 끌고 갔다, 끌려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저기를 여기처럼, 그늘을 그림처럼, 저 멀리 그네처럼,


  우주정거장은 밤의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 그는 그늘, 다시, 우주정거장은 돌고, 어떤 사랑이 지구에 있었는지, 보이지 않고,


  한밤의 택시, 내린 후, 여기일까, 뒤돌아본다,   (전문.  p.9)



  나는 이 시가 생전 처음 읽는 김경후였다. 아후, 근사한 걸? 한밤중에 택시 타서 핸드폰을 보는데, 핸드폰이라는 게 위성으로 너와 내가 통신하는 거라서 내 머리 위를 지나는 우주정거장을 연상하는 거부터, 후,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이랬다. 휴대폰 속의 많은 사진과 통신 기록, 그리고 연결상태. 별의 별 정보,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무수하게 넘치는 정보. 이미 지나버린 것들, 그래서 휴대폰을 보는 시인은 결국 뒤돌아볼 수 밖에.

  이런 느낌이 하나였고, 다음은 쉼표의 연속. 시인이 시 속에 쉼표를 썼으면, 독자는 쉼표가 마치 악보의 지시표인 듯, 쉼표가 나올 때마다 한 박자씩 한숨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고 좋다. 비단 시뿐 만 아니라 산문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시의 경우,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낭송하거나 속으로 암송하거나를 막론하고 탁탁 박자, 리듬감을 훨씬 더 얻을 수 있다. 김경후의 시에서 이런 쉼표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착한 독자. 시인이 쉬라고 콤마를 탁, 찍어줄 때마다 나는 헛, 꼬박꼬박 한 박자씩 쉬면서 읽었다. 이 정도면 착한 독자, 맞지?

  이렇게 ‘뒤돌아봄’의 주제와 많은 쉼표를 사용하는 재미있는 시가 또 하나 있다. 물론 여러 수가 있지만 특히 이 시를 재미있게 읽었다.



  넙치



  그래, 나 바닥이다, 울툭불툭, 넙치, 시장 바닥에 누워 있다, 뭘 보고 있나, 그것, 진창 바닥보다 넓적하게, 바닥의 바닥이 되면서, 대체 뭘 보고 있나, 가끔, 이게 아냐, 울컥, 찌끄레기를 게운다, 뒤척인다, 하지만 다시, 눌어붙어, 바닥이 되지, 바닥, 뭘 볼 수 있나, 게슴츠레, 흰 눈자위로, 울컥, 찢어진 노을, 키득대든 웃음, 흐르고, 슬리퍼 끄는 소리, 지날 때마다, 울컥, 소리친다, 그래, 나, 바닥이다, 그것, 더욱 맹렬히 바닥이 되기로 맹세한다, 끌로도 끝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바닥, 더 바닥, 더, 더 바닥이 되기로, 울컥,


  지금 넙치가 나올 철인가, 뭐, 그렇지, 이 바닥이나, 저 바닥이나, 다 그렇지, 사내 둘, 바닥 끝 지나 골목 끝, 횟집 문을 연다,   (전문.  p.13)



  독후감의 초두에서 김경후의 시는 그리워 뒤돌아보거나, 여전히 고독하다고 했다. 이번엔 고독에 관하여 한 방 꽝. 고독. 우리말로 외로움. 먹고 사는데 가장 외로운 장소 가운데 하나가 어디? 화장실? 거기 말고. 비슷하지 않지만 화장실에 버금가게 고독한 곳. 나는 거기 살아본 적 없어서 사실 잘 모르지만, 원룸. 그것도 혼자 사는 원룸. 김경후는 <원룸 전사>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시를 올렸다. 이 가운데 앞에 나온 <원룸 전사>. 원룸에 사는 전사warrior인지, 원룸에서 전쟁처럼 살다가 죽는 전사fall in battle인지 궁금하시지? 일행 시이긴 한데 읽어보자.



  밤마다 막차다, 아무도 없어도, 나는 몰고 돌아가는, 밤, 막차다, 배차 간격, 없음, 인센티브, 없음, 유급휴가, 없음, 직업, 없음, 내가 탈 차, 없음, 기다릴 차, 없음, 막차에서 막차 사이는, 폐터널이지, 밤마다, 막차다, 출가하지 않아도, 밤새 흐르는 수도, 물방울 독경 소리, 면벽으로, 먼 산 먼 숲 조망 가능, 이러다 심안으로 동쪽에 창을 낼, 내가, 막차다,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밤마다, 창 없이 창살 없이, 막차, 필요 없는 거, 없음, 둘 데 없음, 아무도, 울 수, 없는 밤마다, 나는, 막차다,  (전문.  p.18)



  쉼표가 휘날린다. 쉽표가 찍힌 곳마다 따박따박 쉬어 주기만 하면 훨씬 공감이 가는 시. 설마 밤마다 막차일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인센티브와 유급휴가가 없는 무직자. 설마 무직자겠어? 하다못해 시라도 (넙치처럼) “찌끄리겠지.” 창문이 있어 그나마 창문을 열면 다른 원룸 건물의 벽을 맞바라보는 면벽. 그것도 시인의 눈으로 보면 심안으로 동쪽으로 창을 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먼 산과 먼 숲을 조망할 수 있다니, 거 참, 시인이 아니라 신선이로세. 진짜로 신선이겠어, 그렇게 알고 지내는 것이겠지.

  근데 왠지 그럴 듯해 보이지? 고독. 또는 외로움. 하지만 너무 감동받지 말 것. 세상에 안 외로운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이름 대봐. 자기 인생 다 저마다 외로운 거다. 다만 우리 같은 종자들은 시인처럼 나 외로운 걸 리듬 타면서 말할 수 없을 뿐. 뭐 그렇게 사는 거지.

  외로움은 뭘 기다리게 만든다. 그걸 시인은 <젓가락 행진곡>이라는 유쾌할 뻔한 시에서 재미있게 노래했는데, 지면상 이 시집의 22~23쪽에 실렸다는 것만 알려드리고, 그것보다 더 치명적인 시 한 수 소개한다. 외롭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혼자 있을 때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 툭. 뭔가 허파 아래 옆으로 횡단하는 막이 하나 분질러지는 듯한 기분이 나는 소리, ‘툭’에 관하여.



  툭



  그건 젖은 나무 문이 주저앉을 때

  그건 가슴뼈를 움츠릴 때

  그건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소리

  툭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도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고무줄 삭아 끊어질 때

  나는 소리

  툭


  툭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툭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툭

  내가 나를 뚫어지게 보라고

  진흙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젖지 않은 나무 문은 내지 못할 소리

  툭   (전문.  p.30~31)



  시인 또는 시는 무엇일까? 숱한 시인들이 고민했고, 고민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고민할 거리. 괜히 고민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안 할 수 없는 천형의 벌 또는 엄살. 김경후도 예외는 아니다. 쉰 살에도 아직 그리움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시인한테 시는 무엇일까?



  말미고개



  말은 연탄 수레를 끌었다, 난 말을 배웠다, 말미고개, 그곳, 절뚝거리며, 난 시인이 되고 싶었다, 뭐가 되고 싶었을까 말은, 끙끙거렸다, 난 받아쓰기 시험, 말은, 연탄 배달, 컴컴했다, 절뚝, 절뚝거렸다, 눈가리개 하고 수레 끌던 말, 시험지 받은 날, 말미고개, 높고 좁은, 끝난 것 같지 않은, 말미, 끝의 끝, 말의 끝, 씩씩거렸다, 뜨겁게 콧김을 뿜던 말,


  시커멓게, 절뚝절뚝,


  말이 미쳤다고 했다, 난 말을 배울수록, 말을 믿지 않았다, 미친 말, 말미고개, 넘고 넘어, 연탄을 날랐다, 어떻게 하면, 끝나나, 가파른, 말미고개, 끝은 어떻게 시작될까, 엎드렸다, 말미고개 끝, 거품 물고, 그러나 말은, 일어나, 절뚝거렸다, 달렸다, 절뚝거리다, 다시, 엎드렸다, 다시, 쓰러졌다, 이제 나는, 술자리에서 말거품만 뱉는 오십대, 그러나 아직, 말미고개, 미치고 싶은, 말들,


  시커멓게, 절뚝거린다, 절뚝,   (전문. p.61)



  이 시에서 연탄 끄는 말이 진짜 말, 영어로 horse라고 믿는 독자는 설마 없겠지. 말미고개가 진짜 지명에서 따왔는지는 몰라도 말미, 말의 꼬랑지일 수도 있고, 일로 말미암아 생긴 시간 틈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시인한테 ‘말미’는 말, 문자 또는 언어의 틈바구니 정도로 감안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시에서 말은 연탄 끄는 견마가 아니라 가파른 고개를 말, 언어나 문자로 넘어가야 하는 시인 자신을 일컫는 것이겠지. 나이 오십을 먹어도 아직 오를 길이 어려워 절뚝거리고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자신의 아픔과 힘듦을 포르테, 너무 심하게 노래한다. 세상에 안 힘든 시인 있어? 아니지. 세상 살이 편하게 사는 사람, 있어? 편한 말미고개, 살림고개 넘는 팔자 좋은 사람, 혹시 있으면 거수 바람. 없지? 그래, 편하면 인생이 아닌 걸.

  시인이 더 젊었을 때 이이의 시집을 안 읽어본 게 아쉽다. 이제는 기다림, 외로움을 조금 벗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시인의 영역이니 독자가 간여할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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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10-13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후의 시집 <열두 겹의 자정>을 정말 좋아해요. 근데 그 이후로는 읽은 시집이 없군요 ㅎ
폴스타프 님의 별점과 리뷰 때문에 이 시집, 읽고 싶네요!

Falstaff 2026-10-13 16:47   좋아요 0 | URL
워낙 시를 좋아하시잖아요. 저도 열두겹 찾아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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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터 현재 출간중인 세계문학전집을 주 대상으로 책 줄이기를 시작한다.

첫빠따로 펭귄 클래식과 을유 세계문학, 그리고 열린책들 세계문학이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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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펭귄과 을유.



혹시 남은 세월에 한 번이라도 더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욕심이 생기는 책, 내 아이들은 튼 거 같고, 손주들이 딱 한 번 읽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책갈피를 휘리릭 넘길 수 있을 거 같은 책들은 그냥 보관하고 있으니 위의 책들은 상대적으로 나하고 합이 맞지 않거나, 아쉽지만 허한 마음을 뒤로하고 보낼 결심을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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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은 레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피츠제럴드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로르카 <인상과 풍경>이 조금 섭섭하다.

을유는 블레스와프 프루스 <인형>이 기대가 컸었는데 그것보다 실망이 더 컸고, 아무리 안드리치라도 <저주받은 안뜰>은 내쳤다.

특히 펭귄과 을유는, 책을 고르면서, 너무 함부로 책을 샀다는 걸 실감했다. 사실 책만큼 저렴한 문화충족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런 생각으로 사서 읽었는데, 사도 너무 많이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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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Mr.Know 시리즈를 포함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와 저번에 못 버린 책 약간.



징글징글한 거 다 버린다.

헤르만 브로흐 <몽유병자들>, 칼비노의 <우주만화>는 새 버젼으로 읽어서 좀 가뿐한 마음으로 내놓았고,

오닐 <느릅나무 아래>는 다시 서가로 올려 놓아야겠다. 미련이 너무 남는다.

E.M.포스터는 <전망 좋은 방> 딱 한 권만 남을 거 같다. 나머지는 다 버릴 예정.

다니자키 준이치 <세설>은 끝까지 고민하다 앞으로 안 읽을 거 같아서 탈락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번역으로 한 번 더 읽으려 한다.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는 아쉽고 아쉽다. 좋아하는 책인데, 지금이라도 살릴까? 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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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윈 쇼 <젊은 사자들>, 제임스 존스 <지상에서 영원으로>,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앙투안 갈랑판版 <아라비안 나이트>는 벌써 집어 던졌어야 마땅한 후진 책들. 이건 정말 쓰레기 처리 수준이었다.

다른 한 권의 진짜 쓰레기는, 지금은 좋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쓴 세상의 명작이기는 하나, 역자 홍땡땡과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개판 무인지경의 우리말 맞춤법으로 조져버린 <서부전선 이상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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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책장에서 밀린 카렐 차페크의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가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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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버렸다. 일요일과 월요일이 종이류 재활용품 처리하는 날이다. 이 책들과 지낸 시간이 소록소록... 잘 들 갔으면 좋겠다. 지지난 주처럼 누군가의 눈에 띄어 그나마 좋은 곳으로 갔으면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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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10-10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고님한테 집주소 좀 알려주세요 😹

망고 2026-10-10 09: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제가 당장 줍줍하러 가고싶어요 근데 제 인생책 전망 좋은 방은 남기신다니 뭔가 뿌듯한 마음ㅋㅋㅋㅋ

Falstaff 2026-10-10 16:24   좋아요 0 | URL
망고님 댁하고 멀어서 휘발유값, 고속도로 통행료, 차량 감가상각비, 시간 당 일당도 안 나옵니다. ㅎㅎㅎ

자목련 2026-10-10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아름다운 책등이라니요!
근처에 살면 줍줍할 것 같아요, 읽을지 알 수 없지만요 ㅋㅋㅋ

Falstaff 2026-10-10 16:25   좋아요 0 | URL
에휴, 다 짐입니다. 자목련 님도 아시면서 ㅎㅎㅎㅎ

페넬로페 2026-10-1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잇, 콱 버리고 말았다 ㅡ시즌 4를 보고 저도 버려야 할 책 목록이 추가되었습니다. ㅎㅎ

Falstaff 2026-10-10 16:25   좋아요 1 | URL
앗, 어떤 책일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네요. ㅎㅎㅎ

coolcat329 2026-10-10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ㅠㅠ 너무 깨끗한 책들인데 부디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랄 뿐이에요. 5탄은 만들지 마셔요! 아흑😭😭😭

Falstaff 2026-10-10 16:26   좋아요 1 | URL
넵. 저도 책 좋아하는 분이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최하 6탄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_-;;

포스트잇 2026-10-1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리실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역시 치열하게 읽으셨으니, 버리시는 것도 이리 시원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Falstaff 2026-10-11 18:0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뭐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까 막 버리고 보는 것이지요.

CREBBP 2026-10-1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가게에 가져가보시는 거느 어떠신가요?
서부전선이상없다 저는 열린책들 버전으로 이북으로 읽었는데 없어졌더라구요. 하도 욕먹너서 세트에서 빠졌는지... 그런데 또 당시엔 마땅한 번역본도 없었는데 지금은 나아졌는지 찾아봐야겠네용

Falstaff 2026-10-11 18:07   좋아요 0 | URL
저 사는 곳이 경기도가 아닌 지방이라 참 다양하게 핑계 거리가 많습니다. ㅎㅎ
서부전선이 목록에서 빠졌군요! 아휴, 그건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합니다. 그거 읽으면서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ㅎㅎㅎ 다 지난 이야깁니다.

케이 2026-10-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서부전선 이상없다> 의 번역자가 같은 출판사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번역했는데 그 책도 개판 오분전입니다. ㅜㅜㅜㅜ 불행히도 전 아직도 두 책 다 갖고 있다는 ㅋㅋㅋ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개정판이 안나오네요. 소설은 참 좋은 소설인데 ㅜㅜㅜ

잠자냥 2026-10-13 14:30   좋아요 1 | URL
<번역전선 이상많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케이 2026-10-13 14:3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저 홍모 번역자님 이상 진짜 많아요. 십수년전 읽었는데 아직도 이름 세글자 기억이 날 정도니 저도 어지간히 싫었나봐요 ㅋㅋㅋ

Falstaff 2026-10-13 16:49   좋아요 1 | URL
홍땡땡 이 양반이 그래도 우리나라 토마스 만 협회 회장까지 지낸 인물로 그쪽에선 방귀 깨나 뀌는 모양입니다. <마의 산>은 만족할 만한데 그만 <서부 전선...>에서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베니스...>도 그런가 보군요. 전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어서 ㅎㅎㅎ 다행이긴 한데, 토마스 만 공부해서 학위까지 딴 양반이 왜 그랬을까요? 거 참...

잠자냥 2026-10-13 17:17   좋아요 0 | URL
그 냥반 방귀나 뀌셔야 할 거 같네요…😂

천학비재 2026-10-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 문화사 책은 지질이나 제본 등등 버리기는 너무 아깝네요,

Falstaff 2026-10-15 18:14   좋아요 0 | URL
어쩌겠습니까, 이제 슬슬 정리할 때가 된 것을요.
 
베리에이션 루트 - 2024 제17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마쓰나가 K 산조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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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나가 K 산조, 일본 사람이 자기 이름 가운데 알파벳으로 K를 삽입한 건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냥 궁금할 뿐 알고 싶은 건 아니다. 아, 일본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마쓰나가’는 필명으로 자기 친척의 성씨를 따온 것이고, K는 작가의 중간 이름이면서 친척들이 이 K 이니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냥 넣은 모양이다. 산조는 할아버지, 즉 직계 성이란다. 그러니까 이름만 가지고 이 작가의 생물학적 성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읽으면 더욱 헛갈린다. “데뷔 당시 그녀는 회사 직원이었지만”이라는 정보와 “2025년 4월 1일 그녀는 고향의 홍보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있어서 굳세게 여성인 줄 알았는데, “그의 필명 마츠나가는 운운” “그는 순수문학을 자유롭고 운운”해서 궁금증을 유발했다가, 위키피디아가 아니라 구글 사진을 찾아보면 턱 밑에 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어서 변기 솔 비슷하게 생긴 턱수염을 짧게 기르고 다니는 남성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하여간 1980년에 이바라키현 미토시에서 출생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세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2021년에 부조리 희극 소설을 써 군조 신문학상 우수상을 받아 데뷔해, 2024년에 <베리 산행> 즉 <베리에이션 루트>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상장과 부상으로 회중시계와 현금 백만엔을 받아 작심을 해서 2025년 봄에 비장한 마음으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하여간 위키피디아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 마쓰나가 K 산조는 “독자들이 순수문학의 ‘재미’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순수문학을 홍보하는 운동으로 ’오모로이 순수문학 운동’을 옹호했다”고 한다. 문장의 서술어가 “옹호했다” 과거 시제니까 지금은 마음이 바뀌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은 없지만.

  일본도 고민은 고민이겠다. 독자들이 순수문학의 재미를 알게 만들기 위해서 별의 별 운동, 활동을 해야 할 정도라면. 내가 지금 괜찮은 일본의 현대소설작가를 찾는 일이 무척 힘들 수도 있겠고.


  작품의 주인공은 일인칭 화자 ‘나.’ 이름은 ‘하타.’ 작품은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으나 독후감은 편의를 위하여 삼인칭으로 쓰겠다.

  하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단 작은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이후 곧 대형 리모델링회사에 입사해서 10년 근무하는 동안 남보다 특별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을 정도라고 자평했다. 오히려 실적으로 보면 자기 또래 직원 가운데 우수한 편이었을 텐데, 3년 전에 회사가 조금 어려워지자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 부서 과장이 점심시간에 하타에게 밥을 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회사에서 사람을 고르는 것에는 업무실적보다 상하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사회성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프게 깨닫는 계기가 된다. 하필 정리해고를 당한 시기가 갓 결혼해 아내가 임신 말기에 접어들었을 때라 회사의 조치가 더욱 서운했겠지.

  하타는 아내에게 잘렸다고 얘기도 못하고, 미국에서 사는 사촌형에게 넉두리를 해, 마치 여전히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정식 월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슷하게 몇 달 지원을 받으면서 대기업에 네 번 입사지원서류를 보내 네 번 연속으로 미역국을 먹은 다음, 지금 회사 ‘닛타 테크 건축도장’ 영업과에 입사했다.

  직원이 50명 정도 있는 닛타 테크 건축도장은 옥상 방수공사, 외벽 도장 등 건물 외장 보수 전문회사라고 보면 된다. 작은 규모의 고객으로부터는 직접 주문을 받아 원청 일을 하고, 큰 규모의 고객한테는 주문을 딴 회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을 했다. 하타가 일하는 영업1과는 큰 공사의 수주와 관계되는 업무를 취급하고, 영업2과는 회사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해오던 작은 고객을 위한 업무를 맡았는데, 아무래도 큰 규모의 공사와 자금이 왔다갔다 하는 1과 직원들이 2과 직원들을 좀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우리가 직장에 다니면서 흔하게 부딪힐 수 있는 자잘한 파벌 같은 것이 있다. 초대 사장 시절부터 일을 해온 후자키 상무 쪽. 전임 사장과는 다르게 혁신적으로 사업을 재편해 보다 확실한 기업을 만들려는 조금 허황한 욕망이 가득한 초대 사장의 조카이자 2대 사장. 그가 영입한 간부들 진영. 대강 아시겠지? 이런 건 대기업보다 이 회사처럼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더 심한 법이다. 즉 보수파의 지도자 정도였던 후자키 상무가 회사를 퇴직하기 1년 정도 전에, 정년퇴직한 후에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는 등산경력 20년 이상의 마쓰우라 씨가 꽃피는 봄을 맞아 사내 인트라넷에 “’등’골 빠지는 일상에 ‘산’행으로 힐링을”이라는 하이쿠 비슷한 2행시 메시지를 올려 “봄철 롯코산 등산”을 제안해 등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에 10년 다닌 회사에서 사회성 여부로 정리해고를 당한 경험이 있는 하타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겨 회사의 거의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다. 작 후반에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다시 실직을 당할까봐 회사의 모든 파벌에 한다리를 걸치는 일도 서슴지 않을 예정이니 어찌 등산모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참가하기로 신청하고, 첫 모임 장소에 가보니 자기 혼자 초심자 티를 팍팍 내고 말았다. 입고 온 복장부터 그러했다. 마쓰우라 씨 이하 하타를 뺀 모든 참가자는 보기에도 벌써 비까번쩍한 아웃도어 옷과 등산화와 장비 등 모든 구색을 갖추어 괜히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이후로 일반적으로 산행 도중과 산행 후, 정상 또는 능선에서 본 고베 인근 풍경과 몸의 적당한 피로와 개운함, 몇몇이 모여 들이켠 하산주,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 나열된다.

  그러다 정식 산악회가 회사 동아리로 자리잡고, 산악회 고문인 후자키 상무의 퇴임 기념 산행에서 처음으로 모임에 모습을 보인 전문적인 산꾼이자, 베리에이션 등산을 고수하는 영업2과의 40대 중반 메가 씨가 나타나 작가가 원했던 베리 산행, 정식 등산 코스가 아닌 개척 루트로 산을 탐험하는 일을 독자에게 소개하기에 이른다.

  메가 씨는 특별한 자격증도 없이 공사과에서 다년간 방수 관련 일을 해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일 말고는 도무지 직원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직원간 삼겹살에 쇠주 한 잔은 물론이고 부서 회식에도 참석한 일이 한 번도 없을 정도이다. 직원 단합대회 형식의 행사에도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으니 말 다했을 정도. 올드 스타일로 회사 살림을 꾸려 나가던 후자키 상무의 퇴임 기념 산행이라 그간의 정을 봐서 함께 가기로 한 모양인데, 메가는 여기서도 별 말이 없다. 이후 상무는 일정에 맞춰 회사를 떠나고, 회사는 젊은 사장의 뜻에 맞추어 점점 불안한 환경으로 꼬나 박히거나 그런 것처럼 보인다. 

  닛타 테크 건축도장의 직원들 사이에서 정리해고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회사 분위기가 극도로 뒤숭숭해졌을 때, 하타는 메가 씨에게 함께 베리 산행을 하게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해서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며칠 후에 메가 씨가 직접 하타에게 산행을 권유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베리에이션 산행을 하면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오히려 메가와 회사에 대한 반감만 키우게 되는데, 물론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굳이 베리 산행과 사람 사는 문제가 적절하게 믹스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겠지?

  그렇다. 그렇게 된다. 어차피 사람들이 모르고 살지만 인생은 베리에이션 산행, 개척 루트를 통해 마지막까지 가는 거니까. 큰 재미는 없지만 자잘하게 사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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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2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3
솔 벨로 지음, 김현우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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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편의 중단편이 실린 현대문학이 발간한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 43번째 책. 솔 벨로를 위하여 현대문학은 두 권의 단편집을 마련했다. 단편집 두 권 발행은 프랜스시 스콧 피츠제럴드하고 밸로, 딱 두 명의 미국인뿐이다. 벨로가 그만큼 미국 현대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작가라는 뜻일 수도 있다.

  벨로는 작품 속에서 철학적인 주제를 선택해 독자들의 골을 뽀개는 수도 있고, <비의 왕 핸더슨>처럼 인류학 전공자답게 자기 전공을 십분 살린 경우도 있지만, 역시 나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을 그의 팬이 되게 만드는 건 유대계 미국인들이 미국 영토 안에서 자기들 커뮤니티가 생존해나가는 것, 유대 공동체의 특성과 이의 해체 과정을 그린 것이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최근에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쓴 750쪽짜리 장편소설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을 읽었고, 일 주일이 채 되지 않은 터울로 《솔 벨로 1》과 또다시 《솔 벨로 2》를 연달아 읽다보니 이젠 유대인 이야기가 지긋지긋해지더란 것. 또 있다. 패트릭 화이트의 두 권짜리 장편소설 <폭풍 한가운데>에도 멸절 수용소 이야기가 나온다. 아오, 진짜, 언제까지 이 거대 비극을 읽어야 하는지. 이 소설집 《솔 벨로 2》가 틀림없이 《솔 벨로 1》보다 읽기 좋았고, 재미있었으며 더욱 공감할 수 있었음에도, 머리 속에서는 자꾸 이스라엘의 테헤란 폭격과 이로 인한 하메네이 폭사로 시작한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학살의 가장 무거운 국제 범죄를 진 나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당연히 전 세계에 분포해 사는 유대인들 대부분은 선한 사람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이 선하다는 건,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중반까지의 독일인 대부분도 선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한 대부분의 유대인과 독일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학살과 전쟁을 시작하고 전개할 수 있는 소수의 특별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있는 독일인과 유대인들. 그들 때문에 연달아 두 권이나 솔 벨로의 작품집을 읽는 동안, (소수의, 특정한,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유대인들이 범하고 있는 범죄를 별개로 하고 책을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그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땅에 체류하고 있다. 울리츠카야는 매해 일정 기간동안 머무르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폭격기가 테헤란을 폭격해 민간인까지 사망하게 만든 전쟁에는 어떤 의견을 피력했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아모스 오즈는 이미 죽어 말을 할 수 없겠지만, 오즈와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의 공생을 주장하던 다비드 그로스만은 2025년에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에 의한 가자기구 집단학살에 관한 비판 소식까지 들었다. 즉 아직까지 나는 유대인이 저지른 대 이란 전쟁에 대한 유대인의 유감표현이나 비판이나 종전요구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연달아 유대인 작가들의 자기들 사는 이야기, 그것도 보스턴과 뉴욕 중산층과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의 사는 모습에 공감하면서 읽어주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특히 이번 단편집 《솔 벨로 2》는 좋은 작품으로 꾸민 괜찮은 책이라는 것을 시비할 이유가 1도 없으나, 행간에 스민 유대인들의 삶과 지난 날의 피학살 같은 피해의식에 이제는 그리 깊게 공감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다.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대부분의 유대인이 선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들의 선함은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 특정의 특별하고, 권력을 잡은, 유대인이 결정하고 시작했으며 여전히 진행중인데다가, 오히려 더 전쟁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전쟁범죄. 그들은 독일의 나치 집단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미국 내 유대인 공동체 이야기가 도무지 귀에 차지 않았다. 과거에 경험한 대규모 피학살을, 그걸 전세계적, 전 역사적인 면죄부로 써먹는 족속. 그게 유대인인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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