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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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세인트존 페어뱅크스는1979년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머빌 섬에서 캐나다인 사회복지사 엄마와 미국인 배관공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번째 이름 세인트존은 할머니의 성씨 성 요한에서 가져왔다는데, 엄마의 엄마인지 아빠의 엄마인지는 영어로 알아낼 수 없다. 이 사람들이 그런 개념이 별로 없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가족은 역시 작은 섬인 덴먼 섬으로 이사해 청소년기를 홈스쿨링으로 통과한다. 학교도 다녔는지 위키피디아에 18세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유명한 토론토 댄스 시어터 학교에서 현대무용을 공부했지만 잘 안 된 모양이다. 그래 이이의 사진을 보면 작은 얼굴에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체형이 무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졌는지, 기대치를 재능이 받쳐주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무용을 그만두고 소설쓰기를 시작, 2002년부터 작품을 발표해 <스테이션 일레븐>이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내셔널 북어워드, 펜 포크너 소설상, 베일리스 여성 소설상 후보로 지목되었다가 미끈덩, 바나나 껍질을 밟았지만 대신 공상과학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아서 C 클라크상과 토론토 도서상을 받았다고. 받은 문학상의 상금보다 더 대박을 친 것은 HBO Max가 <스테이션 일레븐>을 10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방송했다는 거. 그게 펜데믹 신드롬 중이던 5년 전, 2021년 12월이었다.

  에밀리 세인트존 페어뱅크스는 “Executive Recruiter”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잘 나가는 회사원 케빈 맨델과 결혼해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로 이름이 바꾸고 딸 하나를 두었지만, 2022년 갈라섰다. 이혼 후 뉴욕에 살고 있다는데 2025년에 한 책방에서 로라 바리소지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배우자의 이름만 보면 동성 결혼인 것 같다.


  이 책은 2014년에 출간했다. COVID-19 이전 시절이지만 이미 세상은 SARS를 겪은 후. 인수공통전염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중국 윈난성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를 SARS-CoV-1이라 명명했다. 약 1년간 지속한 펜데믹에 8천4백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치사율은 11%였다. 이후 17년만에 중국 우한에서 두 번째 변종 바이러스 SARS-CoV-2를 확인했으니 이것을 코로나 바이러스라 했다.

  에밀리 맨델은 바이러스로 인한 인간의 소멸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다. 이것을 소재로 비슷한 내용의 소설을 쓴 사람이 맨델 한 명은 아니겠지만 그런 작품들 가운데 돋보이는 수준이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중국과 인근 동남아시아를 제외하고 SARS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가 캐나다였다. 251명의 환자가 발병해 이 가운데 43명이 사망, 평균보다 높은 치사율인 17퍼센트를 기록했으니 이런 작품이 나올 만했을 듯하다.


  작품은 한겨울 밤 <리어왕>을 공연하는 토론토의 엘긴 극장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리어 역을 맡은 배우는 51세의 아서 리앤더. 연극을 하고 있지만 사실 영화배우로 더 명성을 높였다. 한때 잘 나가던 영화배우답게 세 번 결혼했고 지금 세 번째 이혼 소송중이다. 이이가 맨델처럼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속한 작은 가상 섬 델리노 출신으로 (작가처럼)무용이 아니라 연기를 배우러 뉴욕으로 향했다가 젊은 시절엔 사서도 한다는 고생 끝에 단역에서 시작해 한때 스타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찌그러져 이제 뉴욕 브로드웨이도 아니고 토론토에 와서 리어를 공연하고 있는 신세다.

  공연일. 아침부터 아서는 피곤했다. 사흘 동안 불면증이 심했다. 나른하고 탈수증세가 있는 아서. 그럼에도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어 먹고 샤워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극장에 출근했다. 눈보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일기예보가 맞는지 회색빛으로 하늘이 무겁게 내려 앉아있다. 아서는 <리어왕> 공연만 끝나면 캐나다와 미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스라엘로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두번째 처 엘리자베스와 아들 타일러가 살고 있는 곳. 함께 살지는 못하겠지만 자주 타일러를 보고, 함께 여행하고, 캠핑도 가고, 영화 속 행복한 부자관계를 연출할 생각이다. 그러나 아서에게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

  4막, 왕이 실성하는 장면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남루한 넝마를 입은 리어왕, 아서는 대사 없는 배역인 어린 시절의 코딜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글로스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기둥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거리가 맞지 않아 팔이 기둥에 세게 부딪혔다.

  “허리 아래로는 켄타우로스야.” 아서가 엉뚱한 대사를 하고 있는 것을 관객석 제일 앞자리에서 보고 있던 전직 파파라치, 연예담당기자이자 지금은 응급구조사가 되기 위하여 배우고 있는 건장한 남자 지반 차드하리가 알아챈다. 지반의 머리 속에는 생명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차올랐고, 객석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뒷자리에 앉은 관객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망설이지 않고 무대로 뛰어올라가, 아서를 똑바로 눕히고 맥이 없음을 확인하더니, 기도를 확보한 다음 심폐소생술, CPR을 시작한다. 곧이어 객석 중에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무대에 올라 지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심정전문의 월터 지코비요.”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얼마 없다. “지반 차드하리입니다.”

  조금 후 응급구조대가 도착해 두 시민을 뒷자리로 밀려가고 아서는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그 전에 지코비 박사는 선고했다. “밤 9시 14분. 사망했습니다.”

  무대 위 응급상황을 알아차리고 심폐소생술을 한 용감한 시민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고, 급성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아서 리앤더는 모스크바에서 도착한 여객기 안에서 조지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2백여 명의 치명적 호흡기 전염병 보균자가 득실거리는 종합병원으로 실려갔고, 북미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펜데믹이 시작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다.


  이야기는 대부분 이날의 공연에 직간접으로 관련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일이다. 문명의 몰락은 그렇게 왔다. 조지아 바이러스. 인간의 문명을 모두 파괴해버릴 공포의 바이러스가 왜 하필 조지아에서 시발했을까? 이오지프 스탈린의 고향이라서?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순식간에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잠복기간이 겨우 몇 시간.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나흘, 보통 사람이라면 이삼일 안으로 몸에서 생명을 뽑아가는 바이러스가 토론토를 덮쳤다. 이건 뉴욕과 LA를 비롯해 모든 미국의 대도시도 마찬가지라는 말과 같다. 토론토 사람들은 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고속도로를 메웠고, 이미 가득 찬 공항 행 고속도로 위에서 추운 겨울 폭풍을 차 안에서 견디다 몇몇은 행복하게도 가스 질식으로 죽었으며 몇몇은 가솔린이 다 떨어진 다음에 얼어 죽었다. 대부분은 걸어서 공항까지 도착했지만, 공항에는 “바이러스 감염지로 출입을 금함”, 이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을 뿐이라 기력이 다해 그냥 길 위에 쓰러져 유행병 증상으로 체온이 올라 죽었거나, 얼어 죽었거나, 하도 하가 치밀어 열 받아 죽어버렸다.

  화가 지망생 시절에 아서와 결혼한 첫번째 아내 미란다 캐롤은 이혼 후 선박회사에 입사해 맹활약한 끝에 중요한 경영진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평생 그림 대신 그래픽 노블을 만들었으니 <스테이션 일레븐> 이 책의 제목이다. 작품을 최고급 종이와 잉크로 자비 출판해 2권 열 세트 한정으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두 세트를 전남편 아서에게 선물했다. 아서는 이 중 한 세트를 이스라엘에 사는 아들에게 보냈고, 한 부는 가지고 있다가 무대에서 심장질환으로 죽은 후, 대사 없는 어린 시절의 코딜리아 역을 하던 아역배우 커스틴 레이먼드의 손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등장한 주요 인물. 바이러스에 의한 인간문명의 몰락 이후에 삶을 이어갈 사람이, 이스라엘에 살다가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려고 토론토행 비행기를 탔다가 현지 공항의 바이러스 오염 때문에 아이오와 공항에 내려 목숨을 구한 아서의 아들 타일러. 코딜리아 역을 했던 아역배우 커스틴. 그리고 바텐더를 하면서 응급구조대원이 되기 위하여 생명연장기술을 배우고 있는 지반 차드하리.

  여기에 한 사람을 더 보태야 한다. 아서의 가장 친한 친구 클라크 톰슨. 한 시절 아서와 함께 연기를 공부했지만 도중에 길을 바꾸어 잘 나가는 경영 컨설턴트가 된 현명한 남자. 문명 몰락 이후에는 바이러스가 침공하지 않은 새번시티 공항에서 지난 문명을 위한 박물관을 만들고 책이 끝나는 문명 후 19년, 일흔 살이 될 때까지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지낸다.


  바이러스로 인한 문명의 몰락. 인구의 대부분이 한 번에 사라지면 제일 먼저 닥칠 것은 약탈과 싸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살인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행위 모두 각자가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며, 자기 DNA의 연속을 위한 본능이다. 세상은 또다시 남자가 지배할 것이다. 최선의 미덕은 힘과 무기가 되리라는 건 자명한 상식이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은 이런 야만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터. 이이가 만든 것이 유랑극단. 문명은 이미 사라졌을지언정 아직 예술을 기억하는 사람은 셰익스피어를 전문으로 공연하고,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아 소규모 단위로 모여 사는 씨족과 부족 수준의 커뮤니트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한다.

  물론 이들도 다른 인간들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무기를 들고 보초도 서고 경계도 하며 유랑의 길을 떠돌며 산다. 그래도 작가 맨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문명 몰락 이후에도 누군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대표적인 문명이라고 하면 그것은 “빛”. 아서의 아들인 것이 확실한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찾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빛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구하려 하는 빛은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진정한 빛, 전기였다. 그걸 누가 만들어내는지는 직접 확인하시옵고.

  문명 몰락. 은근히 재미있다. <스테이션 일레븐>도 그렇고, 좀비에 의한 문명 몰락을 그린 콜슨 화이트헤드의 <제1구역>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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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6-05-23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정말 순한 맛의 서정적인 peri & post-apocalyptic novel 이지만
<Station Eleven> 을 나름 재미있게 읽고나서
Emily St. John Mandel 의 책 몇 권은 종이책으로
몇 권의 초기작은 Kindle 로 구입했는데
Ponzi scheme 을 다룬 <The Glass Hotel>이 제일 흥미로왔답니다.

Falstaff 2026-05-24 05:18   좋아요 0 | URL
음. 그렇군요. 맨델의 작품을 좀 더 들춰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coolcat329 2026-05-23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어왕 연기 중 배우가 쓰러지고 곧 전세계로 바이러스가 확산된다는 설정이 참 문학적이네요. 믿고 보는 HBO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니 섬 출신 작가의 대성공입니다. ㅎㅎ

Falstaff 2026-05-24 05:19   좋아요 1 | URL
영화가 아니고 드라마로 만들어졌군요. 궁금한데 HBO를 볼 수 없어서 ㅎㅎㅎ

건수하 2026-05-23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코로나 퍼지기 전 읽어서 코로나 때 이 소솔 생각했었는데, 드라마로도 나왔었군요. 셰익스피어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로 끝나는게 인상적이었어요 :)

Falstaff 2026-05-24 05:21   좋아요 2 | URL
셰익스피어는 파고 파도 늘 달리 볼 것이 무궁무진한 모양입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고전 작가라서 말입죠. ^^
 
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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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니스 헤일 존슨. 미국 국무부와 미국 정보부, CIA 등에서 일한 아버지 때문인지 1949년에 서독 뮌헨에서 출생해 필리핀, 일본, 미국 워싱턴 DC 교외에서 살았다. 아이오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인 아아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레이먼드 카버를 사사하며 예술석사 MFA를 취득했다. 그러나 20대 시절 존슨은 약물과 알코올에 흠뻑 젖어 살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창작마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약물과 알코올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중독자들도 그걸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 그러나 존슨은 스물아홉 살 때인 1978년에 완전 금주를 시작해 성공했고, 83년엔 기타 약물도 끊어버렸다. 여간한 독종이 아니다. 시, 소설, 단편소설, 희곡, 에세이 등을 남겼다. 이름난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 번 퓰리처 상 최종심까지 올라갔다. <기차의 꿈>도 두 권 가운데 하나.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세 번 장가들었고, 좋아했던 술이 나중에 심통을 부렸던지 2017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간암으로 죽었다. 죽고 나서야 미국 의회도서관 소설상을 받았다. 출판사 다산책방은 당연히 판매 목적이겠지만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문학상.” 믿거나 말거나.


  <기차의 꿈>은 장편소설이라 주장하지만 노벨라, 중편 정도로 봐야 옳을 듯하다. 주인공은 로버트 그레이니어라는 남자. 막이 올라갈 시점은 1927년 여름. 아이다호 팬핸들 스포켄 국제철도 공사장. 흑인 노동력을 대신해 철도 가설을 위하여 대거 수입한 인력이 중국인. 이 현장에서도 중국인 노동자가 회사 창고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을 받아 그를 죽여버리려는 백인 노동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세 명, 철도회사 간부 시어스와 노동자 젤루이스 그리고 그레이니어는 모이강에 건설중인 50피트 높이의 다리를 중국인을 끌고 올라가 다리 아래 흐르는 급류에 던져 버리려 했다. 다리 꼭대기까지 끌고 가기는 했는데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에 중국인이 잽싸게 철골 빔을 타고 내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어스 씨가 권총을 네 발 발사했지만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레이니어는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가 중국인을 직접 처형하려고 해서? 천만의 말씀. 그레이니어가 가책을 느낄 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도망치면서 자기한테 강력한 저주를 내렸을까봐 그게 걱정이 될 뿐이다. 그 다음에야 자신이 괜히 광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을 알아차렸다. 아내 글래디스가 갓난 딸 케이트를 넉 달 전에 낳았다. 애 키우는 젊은 남자가 옳고 바른 일만 해도 아차 하는 사이에 부정탈 게 많고 많은데 함부로 처형 팀에 합류하다니. 이거 뭐가 잘못된 건 확실하다.

  아니나 다를까, 큰 산불이 나고, 그게 자기가 힘들여 번 돈으로 마련한 1에이커의 땅에 지은 오두막과 밭까지 번져 아내와 딸은 흔적도 없이 타 재가 되어버렸다. 그건 좀 나중 일이지만.


  1917년 여름이면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레이니어가 일하는 철도 공사현장에는 전쟁 이야기도, 참전하자는 동요도 없이 지나갔다. 그런 세월이 아니라 그런 장소였다. 중국인 처형 미수가 있고 41일이 지나 이들이 만든 다리를 기관차가 빽빽거리며 달려 지나갔다. 깊이 60피트 협곡 위 112피트 길이의 허공을. 이 다리를 건설해서 철로를 11마일 단축할 수 있었다. 그레이니어는 일이 끝나 한편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동료들처럼 환호와 환성을 질렀다.

  이어서 1920년에 워싱턴주 북서부 로빈슨협곡 다리 보수공사를 거쳐 심슨 컴퍼니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 목재 운반일을 했다. 이때가 35세. 여름 일이 끝날 무렵 그간 받은 돈을 모두 집으로 보냈는데도 성실한 그레이니어가 받을 돈이 무려 4백달러에 달했다. 때마침 오한 환자가 급증해 1897년 독감유행처럼 번질까봐 산꾼대장이 보너스 4달러를 주며 산꾼들을 집으로 보냈다. 집에 가보니 이미 아내와 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


  유타 아니면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레이니어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모두 죽어 혼자가 되었다. 1886년에 그레이트 노턴 철도를 타고 새로운 가족이 될 아이다호 프라이 마을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들어온 소년은 고모부의 성 그레이니어를 따랐고, 이름도 고모부와 같이 로버트 그레이니어로 정했다. 프라이 마을에는 철도 공사를 위하여 백명 너머 중국인들이 살았다. 1893년에 철도가 완공되자 프라이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마을에서 추방해 이들은 서쪽 30마일 떨어진 몬태나로 가 훗날 차이나베이슨이란 동네를 이루었다. 로버트의 고모와 고모부는 이미 세상을 뜬 1899년에 프라이는 이턴빌과 합병해서 보너스페리로 불렸다. 로버트는 보너스페리 학교에서 글과 셈하는 법을 배웠으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이 소년이 살아온 이야기. 작가 정여울은 그걸 파노라마라고 평했다. 고독한 남자가 살아온 파노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 20세기 초반에 그런 사람이 한 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뭐 그런가 보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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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5-22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더라고요 영화 먼저 보고 소설을 읽어서 책이 좀 밋밋하게 느껴졌어요😆

Falstaff 2026-05-22 15:13   좋아요 1 | URL
이게 영화로도 나왔군요. 그럼 영화가 더 좋다, 저도 한 표 던집니다!
 
축 생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62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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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 1970년생, 하다가! 70년 개띠가 벌써 쉰여섯 살이야? 아이쿠. 여태 나 혼자 늙어가는 줄 알았구나 싶었다. 김선우. 강릉에서 나 춘천에 있는 국립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지만 아마 교사 생활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어디선가 그렇다고 읽은 거 같다. 정확한 것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 20대 시절에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해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소설도 썼지 아마? 이이의 인터뷰를 보니 소설도 출간했단다. 시집 앞날개에 소설 출간을 경력으로 소개하지 않은 걸 보니까 만족스럽지는 못했나 보다.


  《축 생일》 초판이 2025년 9월에 나왔다. 쉰다섯 살의 시인. 나는 이 시집이 처음 읽는 김선우이다. 그래 전에는 어떤 시를 썼는지 전혀 모른다. 한 편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요즘 인터넷 좀 돌아다니면 넘쳐나는 것이 시들이니 뭐 한 두 편은 읽어봤을 수도 있겠지. 시들을 제대로 옮긴 건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자. 그래서 그렇게 읽은 걸 싹 무시하면, 이 시집이 처음으로 읽는 김선우다.

  처음에는 시들이 통통 튄다. 김선우가 사용하는 다른 말로 하면, 폴짝거린다. 폴짝거려?

  한 생명체가 도약하는 모습을 “폴짝이다”라고 쓰는 건 해당 생명체가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을 때 어울린다. 기린, 코뿔소, 히말라야 야크, 코끼리가 폴짝거리는 모습은 여간해 상상하기 힘든다. 대신 쿵쿵거린다라고 할까? 시집에서 제일 앞에 배치한 시부터 폴짝인다.



  폴짝인입니까?



  나도요 폴짝! 우리는 반가워서 폴짝폴짝 뜁니다


  그쪽 우물은 얼마나 깊었나요? 하늘은 동그랬나요?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이었나요? 희미한 햇빛이 아주 잠깐 우물 바닥을 비추고 사라질 때나 뚝뚝 끊기는 바람이 어깨에 닿을락 말락 머물다 가버릴 때 당신도 두 손 꼭 맞잡고 우물하늘을 올려다보았나요? 우물 속에선 내내 하늘을 쳐다봤죠 햇빛과 바람이 거기서 들어오니까…… 당신도 우물이 모든 걸 보내준다고 믿었나요? 그랬죠 그럴 수밖에요 내가 우물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물이 나를 사랑해서……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햇빛과 바람이……내게로 온다고…… 때로는 특별한 은총이라 느끼기도 했고요 우물하늘 바깥에 무엇이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오른손으로 왼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죠 왼손으로 왼뺨을 철썩철썩 때렸죠 의심하는 자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음…… 글쎄요


  폴짝,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부분. p.9)



  시가 길다. 개구리 한 마리의 우물 탈출 서사. 우물을 사랑하고 우물도 나를 사랑했지만 그래도 우물 밖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바락바락 벽을 기어올라 “제기랄! 하늘이 이토록 드넓은 거였다니!” 눈알이 툭 튀어나온 채 햇빛과 나부끼는 바람 속에서 우물과 우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폴짝폴짝 웃고 또 폴짝폴짝 울며, 이런 젠장! 경탄과 경악을 하는 우물 안 개구락지였던 한 생명체를 시인은 폴짝인人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이 말하는 “폴짝인의 서(序)를 소개하자면:

  『우물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결국 우물에 포섭되고 만다네』

  포섭되지 않기 위하여 개구리는 우물벽을 바락바락 기어올라 우물이라는 구조에서 탈출해야 한다. 새롭지는 않다. 20세기 초부터, ‘헤르만 허세’의 <데미안>에 의하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하여 죽을 똥을 싸왔으니까. 어떻게 하면 우물에서 기어 나올 수 있을까?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있던 2016년, 지금부터 10년 전에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여전히 책만큼 훌륭한 학교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가끔 중고등학생 독자들이 작가님이 우리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거 같아요? 라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해요. ‘보나마나 학교는 때려칠 거고, 도서관에서 죽치며 살겠지. 거기가 제일 근사한 학교니까.’”


  인터뷰 당시 김선우가 46세. 아직 완경기에 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밝혔듯, 남편의 스케쥴, 아이들 대학입시, 아파트 평수, 승용차 차종 등에 겁나게 신경 쓰는 시절이며, 이미 시인으로 이름을 낸 입장에서 팍, 말해버린 것이겠지. 근데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중고등학생 독자들한테 했다니. 왜, 자기 딸 아들 더러 먼저 학교 때려치우라 그러지 않고? 10년 전에는 몰랐겠지. 이런 멋진 말을 하면서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거라는 걸. 물론 이미 시인이 된 자기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지만, 질문을 하는 어린 독자는 자기는 시인이 말하는 것을 왜 따라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음을 깊이 숙고해봐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말든지.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가도 다 좋을 수 없다는 건 시에 나오지 않는다. 우물 밖으로 기어 나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황새, 너구리, 뱀이 우글우글거리는 것도 모른 채 개구리는 폴짝폴짝, 폴짝폴짝, 뜨겁게 서로를 응원하며, 폴짝폴짝, 폴짝폴짝 저마다 갈 길을 가는지, 시인이 그것도 봤대?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걸?



  산골, 폴짝인들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

  착취하고 싶지도 않아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착취를 묵인하는 소비

  착취를 조장하는 소비를 하고 싶지도 않고요

  꺼림칙해요

  그뿐이에요


  그래서 폴짝, 도시로부터 폴짝폴짝, 산골로 폴짝!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구에 해로운 건

  동물종 가운데 인간밖에 없다고요


  폴짝, 폴짝폴짝, 폴짝폴짝폴짝,


  사는 동안 있는 힘껏 내 삶을 책임지고 싶어요

  그래봤자 완전히 자유로워지긴 어렵지만

  최소한의 폭력

  네, 그 정도라도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폴짝, 도시로부터 폴짝폴짝, 산골로 폴짝!   (전문. p.22~23)



  이것 참. 누군가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착취하고, 누군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삶. 착취를 묵인하고 심지어 착취를 조장하는 소비. 이것이 도시의 삶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고 딱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 더 무섭다. 슬며시 세상살이를 이것과 저것으로 양분하는 행위.

  착취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은 도시인에게 폴짝, 개구락지 뜀박질을 권유한다. 시골로 가라! 자연으로!를 외친 루소 같아? TV에 나오는 자연인 같기도 하고. 산골로 가면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폭력, 참을 수 있는 수준만 행하고 견디면서 살 수 있다는데, 그것 참.

  김선우가 딸 여섯 조르륵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 만든, 우스운 옛 습속의 딸부잣집 중 한 명이어서 그런지, 아마도 지긋지긋했을 것 같은 게마인샤프트에서 벗어나는 로망이 있는 것 같다. 우물을 탈출하는 개구리, 착취 행위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산골행. 지금 김선우는 어디서, 어느 산골에서 살아? 하긴 그건 문제가 아니다. 자기도 산골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시로 쓴 것일 수 있으니.

  산골 생활 우습게 알지 마시라. 이 시는 산골로 폴짝, 한 마디를 위해 사용 수식한 단어들이 너무 컸다. 착취, 조장, 소비, 지구, 인간종, 폭력. 산골에서는 이런 단어들을 그래도 견딜만한 수준이 될 거라고? 정말? 독자들은 조심하시라. 산골. 다른 말로 하면 정글이다. 단어가 아닌 진짜 폭력, 자연에 의한 심각한 폭력이 눈을 크게 뜬 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


  내가 말을 험하게 해서 그렇지 김선우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시에서 읽히는 첫인상, 선한 탈출과 선한 산골행일 것이다. 나도 알면서 일부러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건 아니고, 폴짝 뛰쳐나가는 행위, 자유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라붙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폴짝, 뛰쳐나가면 좋지. 그래서 성공하기만 하면. 학교를 때려치우고 교실 대신 도서관에 가서 진짜 스승이 빼곡 들어찬 책 속을 유영할 수 있으면 더 큰 시인이 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자기 생각을 새파란 고등학생 독자한테 얘기해줄 수도 있지. 도시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진 청년 제위께 산골로! 마치 도시 속 브나로드 운동처럼 외칠 수도 있고.

  좋다. 폴짝 뛰어 도약에 성공해 우물탈출을 했다 하자. 그럼 만날 수 있는 건 평평. 한자어로 쓰면 平平. 21세기 김선우 식 평등이다. 그것을 노래한다.



  평평으로



  平

  어떤 것을 올리든 고르게

  고르게 하려는 의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다른 쪽에 무게를 더하려는 의지


  平平

  고르게

  고르게 될 때까지

  작고 가벼운 쪽으로

  희미한 반짝임 쪽으로

  선한 눈물의 방향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쪽으로

  끊임없이 중심축을

  이동하려는 의지


  平平平

  마침내 저울이 지렛대가 되는 의지


  平平平平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하려는 의지를

  지켜내려는 의지


  그때 비로소

  자유는 자유   (전문. p.29~30)



  폴짝 뛰어서 만든 평평한 세상. 미륵이 도솔천을 건너 환생했다.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라. 김선우가 노래하는 건 세상이 고르게 평평평평, 이런 상태가 된 미래 또는 약속이 아니다. 마음 속에서 세상을 평평평평 고르고 고르며 고르게 하고자 하는 “의지”, 즉 마음만 그렇게 먹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선언이다. 행동은 완전하게 별개다. 시인은 왜 행동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행동, 즉 운동과 운동에 이른 성취까지 해야 혁명이 이루어질 터인데 말이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노? 뭐 사정이 있겠지.

  폴짝폴짝 뜀박질도 그렇고 땅만 열나게 갈고 갈아, 다지고 다져 평평하고 평평하며 평평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시인. 시인의 동지, 동무들이 함빡 모였던 저 어둠의 시절에 이런 시 읊었으면 정말 조리돌림 당했을 텐데. 말과 생각만 혁명이고 그것을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는 전혀 발언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소장을 받기 딱 좋았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건 그저 립 서비스잖아?

  노래하기는 좋지만, 평평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자는 발언은 잃어버린 식어버린 운동시.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 불알 빠진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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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6-05-23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 전혀 시를 읽지 않기에 가끔 폴스타프님이 올려주신 시는 꼭 읽으려고 해요. 이번 리뷰도 재밌게 읽었는데 착취를 조장하는 도시는 나쁘고 산골생활은 착취로부터 자유롭다는 이분법적 시선은 저도 맘에 안드네요. 시골 출신 친구가 도시보다 시골이 더 폭력적이고 무섭다고 한 말도 갑자기 떠오르고요. ㅎㅎㅎ (시골 출신이신 분들 혹시 기분나쁘실까요?)

근데 중간에 ‘헤르만 허세‘ 는 오타신가요? 아님...ㅋ

Falstaff 2026-05-24 21:55   좋아요 1 | URL
헤르만 허세가 오타일 턱이 있습니까, ㅋㅋㅋㅋ 눈 밝은 몇 분들만 보실 수 있는데 쿨캣님이 보셨군요!
이 양반 시는 위험해요. 여차하면 현혹당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입죠. 그저 공상 속에서 살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신기루 시편들... 쩝쩝...
 
우주만화 이탈로 칼비노 전집 6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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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전에 읽은 책은 열린책들 Mr. Know 시리즈였는데, 말 그대로 읽느라고 죽을 똥을 쌌다. 얼마나 경악했는지 “지루하고 지루했던 불후의 명작 Top 10” 가운데 한 권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나도 참, 심술이지 이 정도면. 그냥 읽느라고 고생했다 치고 슬쩍 넘어가야지 좀스럽게 그게 뭐야? 이때 Top 10의 거미줄에 걸린 책을 슬슬 읽어본다. 놀랍게도 잉에보르크 바흐만이 쓴 <말리나>도 며칠 전에 읽었다는 거 아냐? 그것도 읽혔다. 아무래도 내가 열반할 때가 된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독후감에 후덜덜 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 지옥편>도 인용했다. 심각하다. 안 하던 짓 자꾸 한다. <말리나>도 그렇고 《우주만화》도 그런데, 십년 전에 워낙 고생을 심하게 해서 오직 책 읽는 일에 집중하느라 독후감을 위한 메모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독후감 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읽은 거다.

  구접스럽게 이런 얘기를 뭐하러 하느냐면, 그냥 간단하게 읽은 소감만 올린다는 말이지 뭐. 쉬운 말로 해서 핑계를 대는 중이다.


  민음사에서 낸 “이탈로 칼비노 전집” 6번 《우주만화》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구판으로 1965년에 소설집 형식으로 출간한 책. 신판은 같은 6번을 달고 나왔지만 신판은 《모든 우주만화》라고 간판을 살짝 바꾸면서 《티 제로》, 《다른 우주만화 이야기》, 《변형된 우주만화》를 포함해 구판보다 갑절 이상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11년 전에 읽은 열린책들 판은 민음사 신판의 순서를 바꾸어 유사한 주제로 구분해 놓은 책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좀 골치 아픈 책이다 싶지?

  이번에는 어떻게 읽었느냐 하면, 제목이 《우주만화》이니까 정말로 만화책 보는 기분으로, 칼비노가 써내려간 대로, 어떤 주장을 펼치고 싶은 지 괜히 작가의 복장 속에 들어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채 그저 글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읽었다. 크. 그랬더니 읽히더라는 것.

  칼비노는 누가 뭐래도 환상 소설 작가이다. 그걸 독자가 해골 써가면서 이게 어떤 의미일까, 무슨 현상을 은유하는 것일까 파봤자 이분 얘기하는 거하고 저놈 생각하는 게, 같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 그러느니 차라리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읽는 편이 좋다.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은 점은, 내가 생각보다 환상소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제일 앞에 놓인 작품이 <달과의 거리>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달과 지구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단다. 아예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고. 달이 가까이 있으니까 달의 중력이 상당히 강해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어마어마했을 터. 사리 때 높은 파도가 치면 배 위에서 키 큰 사람이 손을 쭉 뻗으면 달을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니, 칼비노 구라도 이 정도면 예술 수준이다. 하긴 예술가 맞지.

  지구 사람 가운데 아마 틀림없이 이탈리아 어부들일 텐데, 사리 때만 되면 어김없이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 훌쩍 달에 뛰어오르는 어부들이 있었다. 놀러? 천만의 말씀. 일당 받고 배 타는 사람이 달에 놀러가면 선장이 그걸 내버려 두나? 달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서 식물 수액, 개구리 알, 역청, 제비콩, 벌꿀, 전분 결정체, 철갑상어 알, 곰팡이, 꽃가루, 젤라틴 물질, 벌레, 송진, 후추, 천연 소금, 산화물질 같은 것들이 빨려 올라가 서로 작용해서 달 우유, 문 밀크로 변질되는데, 이게 별미였다. 이게 리코타 치즈처럼 진득하니 그랬다나? 그걸 긁어서 커다란 숟가락 같은 걸로 마치 투석기를 쏘듯 하늘을 향해, 사실은 지구 바다에 떠 있는 배를 향해 팡, 던지면 그걸 제대로 받든지, 바다에 빠져 둥둥 떠 있는 걸 건지든지 그랬단다. 이 일로 돈 좀 만졌다고.

  그러다가 달과의 거리가 조금씩, 아주 세밀하게 조금씩 멀어진 게 아니라, 아마도 눈에 보이게 훌쩍 멀어져 내 사랑, 다이아몬드 같이 빛나는 눈을 가진 브흐드 브흐드 부인은 결국 달에서 탈출을 하지 못하고 지구를 떠났다는 이야기.


  이것만 있는 게 아니고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들이 촘촘히 들어 있다. 빅뱅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아니지, 사람은 무슨. 하여간 생명체들. 만화 주인공들이 빅뱅도 구경하고, 태양이 처음 생길 때 퍼버벙 10의 n제곱 만큼의 수소폭탄이 터질 때도 있었다. 지구가 처음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죽상 상태에서 굳어갈 무렵, 한 여성이 땅 속 깊숙하게 들어가 스스로 지구의 핵이 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나?

  물론 아닌 것도 있다. 우주의 무한성. 10만 세기 전이라면 10만 곱하기 100, 1억년. 근데 10만 세기가 아니라 몇 십만 세기 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칼비노. 이 와중에서도 작가라는 직업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예전에 저질렀던 과오나 실수, 돌이켜 생각해보니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들. 이런 거 그냥 말로 “지금 떠올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한 문장이면 끝날 텐데 그걸 몇십억년, 몇 백억년 전의 우주 공간에서 있었던 일로 만들어 하려면, 하루 세끼 먹고 해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간 나는 《우주만화》를 드디어 읽었다. 11년 만에. <말리나>도 읽었다. 다음에는 뭐? <몽유병자들>? 아니, 아니. 그건 아직도 자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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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5-20 1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드디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셨군요🙏 저는 이탈로 칼비노 ˝나무위의 남작˝만 읽었는데 오래전이지만 꽤나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근데 원래 이 작가 책이 잘 읽어지지 않나 봅니다 폴스타프님이 죽을 똥을 싸셨으면 전 아예 시작도 못 할듯🤣

잠자냥 2026-05-20 14:19   좋아요 2 | URL
망고는 그냥 똥 싸면서 읽어라~!!

망고 2026-05-20 14:56   좋아요 2 | URL
화장실에서 읽겠습니다🙄

Falstaff 2026-05-20 15:36   좋아요 2 | URL
경지는요 뭘 ㅎㅎㅎ 칼비노는 읽을 때마다 뼈다구가 노골노골해지기는 하는데 그래도 보이면 일단 읽고 보는 하여간 그런 게 있더라고요.
 
거품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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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2월 도쿄에서 태어난 개띠 남자 마쓰이에 마사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가 연년세세 높은 고과를 받은 모양이다. 해외문학 시리즈를 론칭하고, 계간지 창간에 힘을 보탰으며 여기저기 편집장을 역임하다가 2010년 퇴직했다. 그의 편집 실력을 알아본 게이오 대학은 2009년부터 몇 년 간 초빙교수로 강단에 세우기도 했다. 마쓰이에는 그러나 퇴직과 더불어 창작을 시작해 2012년에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신쵸샤에서 출간하는 잡지 “신초”에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2013년 이 작품으로 일본 최대의 우익 신문 요미우리가 주최하는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았다. 54세에 소설쓰기를 시작했으니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이후 열심히 작품을 쓰고, 쓰는 것마다 일정부수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인기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등극했단다.

  <거품>을 2021년에 발표했으니 마쓰이에가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62세. 뭐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편집 일을 열라 했다니까 글의 흐름, 그러니까 세월에 따른 문법의 변화에 따라갈 수 있기는 했겠지. 그런데 글, 특히 픽션이란 것이 자신이 잡지 또는 작품을 편집할 때와 직접 쓸 때, 이 두 가지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다른 일일 걸? <거품>이 이이의 다섯번째 장편소설인데, 나는 책을 다 읽기 전에 이이의 나이, 출생지, 가방끈 같은 거 하나도 몰랐으니 지금 전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팍, 느낀 것만 이야기하는 바로서, 작품 곳곳에서 저 오래 전부터 유독 일본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게 보인 사소설의 경향성이 문득문득 찾아냈다는 거다. 그러면서, 2021년 작품이면 요즘 작가일 터, 거 독특하네. 이렇게 쑤석거렸다는 거 아냐? 58년 개띠 작가한테 말이지. 70년 개띠도 아니고 원조 개띠.


  막이 올라가면 가정집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은 사람은 십오세 청소년 가오루. 남자 아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욕실만이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는 가오루. 소년은 도쿄에서 나고 자라 지금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다. 재학. 학교에 적을 두긴 했어도 1학기 초부터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 가오루가 다니는, 아니지, 적을 둔 학교가 유별나게 수컷들의 세상인 밀림, 일찍이 모리스 샌닥이 이야기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서 그런 건 아니다. 군복 같이 흰 플라스틱 칼라를 목에 댄 검정색 교복에 흰 플라스틱 칼라를 달고, 똑 같은 모자를 쓴 채, 딱 몇 시까지 등교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유도와 검도를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하는 대학진학 기계들이 모인 곳. 검정 사각형 같이 딱 규격화된 인간들이 규격화된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하여 규격화된 방법으로 애들을 조지는 곳. 이게 너무 싫은 거다.

  이것도 스트레스. 가오루는 습관적으로 공기를 많이 흡수한다. 흡수한 공기가 모두 폐로 들어가면 형관 내 산소농도가 높아져 더 건강하게 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소화기관으로 넘어간다. 공기는 위장과 소장을 거쳐 대장에 집중했다가, 가뜩이나 대장에 모인 섬유질 소화물과 유산균이 발효하여 생긴 가스와 함께 다량의 방귀를 생산한다. 정말 이런 이상 기질/병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 인구 70억 명가운데 뭐 있기는 하겠지. 하여간 가오루는 욕조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배에 힘을 빡, 주면 물 속에서 거품이 뽀그르르 올라온다. 꽤 큰 거품. 그게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폭, 터져 대기의 흐름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가오루의 몸을 형성하는 일부였다니 기분이 새롭겠지? 웃기게도 책에서 가스 거품이 터질 때 폴폴 풍기는 냄새는 1도 묘사하지 않았다.


  가오루의 부모 두 양반 다 학교 교사. 가오루가 집에 가서 나 학교 안 다니고 싶어, 라고 딱 꺠놓고 이야기했다. 잘했다. 확실하게 말을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특히 아빠가 좀 깬 인간이라. 좋아,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래?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는 거 아냐? 대학은 안 가더라도. 그리하여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 친척 가운데 도쿄에서 가장 멀리 사는 사람한테 보내기도 부자간에 합의했다. 엄마의 반대가 좀 있었지만 대가리 다 큰 자식한테 이기는 엄마 봤어?

  아빠가 자신의 막냇삼촌한테 전화를 해 승낙 받았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7백km 이상 떨어진 태평양 연안의 마을, 사리하마. 그러니 가오루의 막내 종조부가 사는데 거기서 재즈 카페를 열고 있다.

  가오루의 할아버지가 아홉 남매 가운데 맏아들이다. 다 합해 아들 여섯, 딸 셋. 가네사다가 막내. 가네사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당연히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 괴뢰국에 주둔했다가 패전과 동시에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 불쌍하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일 불쌍한 처지로 떨어졌던 인종은 소련에 전쟁포로로 잡혔던 패잔병들이었다. 독일군 포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혹은 중앙아시아 벌판에 그냥 떨궈놓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 포로들이 몇 년이 지나 거의 해골바가지 수준이 되어 어떻게 독일에 있는 집으로 갔는지 아시나? 걸어갔다. 일본 패잔병들은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가네사다의 경우에 바이칼 호수 근처로 데려가 벌목 작업을 시켰다고. 소련 병사가 하는 이야기가 기막히다. “너네 나라에서 너네들을 돌려보내라는 말을 하지 않아.” 패전 일본은 자기들 살 방도를 찾기에도 바빠 쉼 없이 눈알을 굴렸을 뿐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의 안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군에 잡힌 병사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소련군에 잡힌 병사들은, 일본 정부에서 생각하기를,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들이 일본으로 복귀하면 일본 적화의 분자로 활동하게 만들기 위해 철저한 빨갱이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돌아와도, 만일 돌아온다고 해도 나라의 정책을 입안하거나 시행하는 직위에는 절대로 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상은 냉정시대였거든.

  1950년대 초에 귀국한 가오루의 막내 종조부 가네사다가 이런 포로 출신이었다. 어디서도 가네사다를 고용하지 않았다. 큰형 구와타로를 비롯해 남매들도 가엽게 생각하지만 색안경을 끼고 막둥이를 바라봤다. 이러니 어디 사람이 살 수 있나. 성격은 살면서 여러 번 바뀐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거. 고쳐 쓰지도 못하는 인간을 위하여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거는 아니잖아?) 가네사다는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곳이 저 남쪽의 해안도시 사리하마.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동네에 가서 선뜻 지원한 곳이 보험회사 외판원. 자기도 말주변이 이렇게 좋았는지 몰랐는데 작은 도시에서 거의 탑 급으로 실적을 올렸다. 기본급 외 성과수당으로 상당한 돈을 벌어, 벌어봤자 외판원 수입이니 큰 돈은 아니었어도 처자식 없이 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한 가네사다는 번 돈을 계속 모아 50대 초에 원래 우유판매점이었던 건물을 사 거기다 재즈 카페 ‘오부브’를 열었다.

  그렇다고 도쿄의 사나이 가문,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그런 게 아니라 일본의 가문 이름이 그렇다, 사나이 가문에 완전히 돌아선 건 아니고 중요한 관혼상제 때는 참석하려 애썼다. 그렇게 살았다.


  ‘구두 くつ’의 러시아 말인 ‘오부브’를 혼자 운영해온 가네사다. 여름에는 해수욕객이 많아 손이 좀 달린다. 말이 재즈 카페이지 점식에 간단한 식사와 커피, 저녁에도 간단한 식사와 주류 같은 걸 파는데 큰 돈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 죽는 비용, 즉 병원비와 숨 넘어갈 때까지의 간병비만 있으면 된다. 그래 세상 살면서 이젠 아무 바라는 거 없이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며 여유작작하게 사는 데, 우울한 표정을 한 30대 정도의 남자가 카페에 들어왔다. 세번째 주인공 오카다.

  오카다는 불쑥 나타난 것처럼 어느 날 불쑥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 그게 5년 전이었다. 5년이 흘렀지만 아직 떠나지 않았다.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하겠지만 마치 카페에 최적으로 맞춤한 솜씨와 부지런함을 갖춘 인물이다. 게다가 잘 생겼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니까. 일 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가네사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카다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이거 뭐야? 독자로 하여금 오카다의 정체가 사람 죽이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아니면 살인범 또는 살인범에 가까운 범죄자인데 지금 몸을 숨기고 있다는 암시야? 끝날 때까지 작가는 이이의 정체를 말해주지 않는다. 카페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가네사다는 자기가 죽으면 카페와 모든 재산을 오카다에게 물려줄 생각도 한다.

  이때 가오루가 막내 종조부에게 몇 달만 신세를 지겠다고 연락을 했고, 기차타고 해변에 도착해 세 남자의 자잘한 살림을 시작한다. 가오루는 당연히 짬짬이 구두 카페에 나가 서빙도 하고, 잔심부름도 하고, 조금씩 오카다에게 음식 만드는 법도 배운다. 15세 사춘기면 이제 이성에 관한 호기심도 지극할 때. 한 여성에 대한 환상도 생길 만하다. 물론 아직 대장에 가득 고인 가스 때문에 방귀가 뿡뿡 나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 소년은 성장하고, 종조부는 늙어가고, 오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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