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시티
테주 콜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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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에 미국 미시간주에서 나이지리아 부모의 네 자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아마도 테주 콜이요루바족인 거 같은데,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가운데 이보족이 아닌 종족은 테주 콜이 처음이다. 치누아 아체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치고지에 오비오마, 전부 이보족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종족간 분쟁에 따른 피해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나이지리아 작가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의 있는 집 사람들은 대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귀국해 고급관리 등 지배계층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테주 콜의 부모도 미국으로 가서 대학에 다니다가 테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 엄마와 어린 테주만 먼저 나이지리아에 돌아온다. 아빠는 MBA를 딴 뒤에 귀국해 가족과 합류했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테주 콜은 17세가 되자 자기 출생지인 미시간 칼라마주로 돌아가 칼라마주 칼리지에서 학사, 이후 미시간 주립대인 것 같은데 거기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가 중도작파하고 런던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으로 가서 미술사 석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이가 쓴 첫 장편소설 <오픈 시티>의 주인공 줄리어스도 (컬럼비아 대학이 있는)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전임의 과정을 수료 중인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설정했다. 요루바족이기는 한데, 아빠가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엄마는 금발의 독일 여자로 설정했다. 유럽-아프리카 혼혈로 한 이유는, 작품 속에 줄리어스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가서 3주 정도 산책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무려 1년 가까이 도서관 관심도서로 올려놓았던 건 또 왜?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지금을 잊었지만.

  하여간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장편소설일 경우에 메모할 준비를 딱 마친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데, <오픈 시티>는 애초에 메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도시를 산책하면서 세상 오만 것에 대하여 사색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산책? 색깔과 방향은 다르지만 로베르트 발저나 W.G. 제발트의 문법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그래서 지금 이틀 전에 읽은 책의 독후감 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읽을 때는 좀 더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뭐 다 좋을 수 있나, 어디.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주인공 줄리어스가 참 나쁜 의사새끼라는 거였다. 학부 3학년 시절 은사였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사이토 교수를 찾아가 “그에게 최근의 상담 사례 중 하나를 들려주었다.” 오순절교회파라는 보수적인 기독교들로 “그들의 하나뿐인 열세살짜리 아들이 나중에 심각한 불임 위험을 야기하는 백혈병 치료를 곧 받을 예정이었다. 소아과 의사가 그 가족에게 건넨 조언은 소년의 정액을 냉동 보관했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했을 때 아내와 인공수정을 하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였다.”

  이걸 지난 시절의 은사한테 이야기해준다고? 의사의 비밀준수 의무는 내다 버렸어? 세상에 둘도 없는 지성으로 묘사하는 은사 사이토는 그걸 듣고 자빠졌어? 뭐 좀 이상하다.

  저 뒤에 가면 정신의학과 의사들도 환자에게 “미쳤다”라는 말을 환자에게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있으면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면서, 사실 정신의학과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이 남들한테 인상깊게 해 줄 수 있는 스토리가 무척 많다고 지껄이기도 하는데, 이런 걸 듣는 초기 우울증 예비환자가 될랑말랑한 인간은 더럽게 기분이 나쁘더라는 거, 나빠지더라는 거. 가뜩이나 (특히 우리나라 또는 내 경우) 상담의 진입장벽이 높은 진료과목이 정신의학과인데, 거기 전임의 과정에 있는 새끼 의사이자 불과 1년 후에 개인병원을 동업해 개업할 작자가 이런 수준이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지.

  그렇다. 저 위에 말한 오순절교회파 가족의 열세살짜리 소년 이야기 하나가 아니라 몇 개가 더 나온다. 그러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나는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내 환자들에 관해, 외계인의 방문과 정부의 감시, 벽 속의 목소리, 가족의 음모에 대한 의심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신질환, 특히 편집증 환자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언제나 많았다.” (p.396~397)


  딱 위의 생각을 먼저 해서 그렇지 사실 이 책에는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특히 이스라엘과 유대인, 그리고 미국에 의하여 자행되는 폭력이 그렇다. 이 독후감을 업로드할 때는 전쟁이 끝났는지 아직 진행중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벌인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지역 점령 여부를 보고 있자면, 작중 브뤼셀에서 줄리어스한테 아프리카인 철학자이자 PC방 점원인 파루크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뭐라 했느냐 하면:

  “미국이 알카에다야.” 이어서 “미국은 일종의 알카에다야.”

  911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한 알카에다가 아니라 그들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중동과 아프리카 일부에서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력의 근거는 2차 세계대전 앞뒤로 독일 나치에 의하여 학살당한 유대인 6백만명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 6백만명의 목숨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했고, 땅을 빼앗았고, 그걸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2천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유로. 그럼 우리나라의 조상 가운데 한 국가인 고구려가 중국의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여진인 등을 다 몰아내고 깔고 앉아도 되겠네?

  파루크는 계속 말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치 수용소를 지었나?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어떡하고? 유대인이 아니라서 그들의 죽음은 의미가 덜한 건가? 육백만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를 말해줄게. 그건 유대인이 선택된 민족이라서야. 캄보디아인들은 잊어. 미국 흑인들은 잊어. 이게 유일무이한 고통이야 하는 식이지 (중략) 유대인들은 세상을 침묵시키기 위해 그 숫자를 이용해. 난 사실 정확한 숫자가 뭔지 아무 관심 없어. 젠장, 모든 죽음은 고통이야.” (p.248~249)

  평소 내가 하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자기 종족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자기들도 다른 종족을 죽여도 된다고 믿는 이스라엘. 나는 현대의 이스라엘이 싫다. 테주 콜도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거 같은데 스스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여차하면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를 주장한다고 몰매를 맞을 수 있단다. 우리나라는 모르겠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당히 근거가 있을 거 같다.


  이렇게 테주 콜, 또는 주인공 줄리어스는 뉴욕과 브뤼셀 거리거리를 산책하면서 주로 폭력에 대한 심사숙고를 펼쳐간다. 그러다가 저 뒷부분에 가면 줄리어스도 뉴욕의 거리에서 10대 청소년 세 명에게 얻어 터지고 발로 차여 꿰매거나, 이가 부러지거나 빠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엉망이 되고 손을 밟혀 퉁퉁 붓고, 휴대폰과 지갑을 뺏기는 강도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읽을 분들을 위해 어떤 것인지 지금 밝힐 수 없지만 줄리어스 역시 한 인간을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들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잊고 살았거나, 그것이 피해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폭력이었는지 감을 잡지 못했거나, 잊지도 않았고 감을 못 잡지도 않았지만 굳이 끄집어내어 죄책감에 시달리기 싫었을 수도 있다.

  결국 누구나 폭행을 당하고 폭행을 저지르며 산다. 그렇게 살기는 한다. 나는 아니라고? 그걸 누가 알아. 폭력인 줄 모르면서 저지르는 폭력. 그걸 당신은 한 번도 저질러보지 않았다고?

  사는 건 복잡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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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업 묘보설림 20
왕웨이롄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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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물고기》를 읽고 백일이 지나 다시 왕웨이롄을 읽는다. 인상깊은 작가였나보다. 이이의 이름이 눈에 밟히자마자 서슴지않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언제나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책물고기》가 2015년, 《생활수업》이 2022년. 7년 후의 작품들. 그동안 왕웨이롄은 광저우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직업이 있으면 아무래도 긴 작품을 쓰기 힘들겠지. 전작에는 작품이 제법 긴 분량의 단편을 실은 소설집이었던 반면, 이번 책엔 한 편 정도만 분량이 있고 나머지 일곱은 그렇지 않다. 페이지 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뭐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일 긴 작품 <침묵천사>가 제일 기억에 남고 어제 읽었는데 오늘 새벽에 독후감 쓰려니 <침묵천사> 말고는 기억에 남은 작품이, 아쉽게도, 없다. 다시 뒤적이면 생각이야 나겠지. 하지만 탁, 떠오르는 게 없는 바에 새삼스레 또 뒤적이고 싶지 않다. 그제 읽은 주이현의 소설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미리 페이지 표시를 해둔 인용 빼고 전부 기억이 나 바로 전에, 한 십분 전쯤에 독후감을 썼다. 그러니 왕 선생은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네. 웃자고 하는 얘기다. 열 받지 마시라.


  <침묵천사>. 대학 다니며 연애를 해, 작가가 말한대로 쓰자면,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더니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한다. 듣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발성 기관에 하자가 있는 거 같다. 너무 젊어서 결혼을 하면, 예전 봉건시대야 의무사항이라 이냥저냥 평생 살 수 있었다고 쳐도, 지금 시대는 한 때의 기분 또는 흥분에 좌지우지된 경우가 많고, 이 커플 역시 젊음 특유의 불길을 감당하지 못해 결혼과 출산까지 이른 전형적인 젊은 부부로, 사는 내내 폭풍 같은 부부싸움으로 일관하다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아들이 나온 것에 결정적으로 실망한 아내가, 자기 인감도장 찍은 이혼서류를 내밀고 그냥 나가버렸다. 이래서 홀아비와 어린 아들 둘만 사는 가족과 아파트가 무대.

  작가가 남자니까 이 홀아비의 직업도 글 쓰는 걸 업으로 하는 착해 빠진 남자. 중국은 대부분 맞벌이 부부. 이 집도 부부가 함께 벌어 아파트 융자금을 갚아 나갔다. 그러다 아내가 나가버려 혼자 벌이로 융자금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아파트를 팔까 했지만, 아들 샤오이한테 엄마의 기억이 담긴 집을 지켜주고 싶어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남는 방 하나를 월세 주기로 했다. 이를 알고 아빠의 절친이 자기 고향 친척 가운데 괜찮은 여성 샤오징을 소개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면 한 집에 열 살 정도 먹은 사내 아이와, 아이 아빠, 그리고 비교적 젊은 여성이 동거하는 입장.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지? 게다가 아빠는 여지없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점잖고, 예의 바르고, 영낙없는 책상물림에, 떠난 아내 이후에 다른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없는 순정파이자, 아이고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 말 못하는 아이야 제목대로 침묵하는 천사니까 착하기 이를 데 없고, 이런 집에 함께 살기로 절친이 보증한 여성이니 또 말 해 뭐할까, 이하 동문이지. 이 정도면 읽으면서 이들이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생각대로, 순서대로, 각본대로 똑바로 간다면 어찌 왕웨이롄일소냐, 하는 심정도 든다. 그렇겠지?


  중국의 저 북서쪽 끝자락 산시성 사람 윌리엄 왕의 솜씨가 좋다. 읽는 맛도 있고 다 그런데, 전작 《책물고기》 만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른다. 저번엔 기대하지 않았고, 이번에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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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인의 노래 2 - 동부의 목소리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8
노먼 메일러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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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 여 페이지. 허, 참. 무지하게 길고 허무하게 지루하기만 한 이 책을 활자 하나 안 빼고 다 읽은 내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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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5-27 20: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안 읽을 거였지먼 왠지 더 뿌듯합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5-27 20:41   좋아요 2 | URL
이 책 ˝처형인의 노래 2˝를 읽고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은 민음사세계문학 시리즈 가운데 제일 두꺼운 벽돌을 격파했다는 것 말고는 없을 듯합니다. ㅋㅋㅋ

건수하 2026-05-27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먼 메일러 궁금하지만 읽고 싶진 않았는데 폴스타프님 후기 보니 역시 넘어가도 되겠습니다 :)

Falstaff 2026-05-27 21:41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책은 민음 세계문학에서 나온 세 권 읽어봤는데요, <밤의 군대들>만 읽어도 괜찮을 듯합니다. 하여간 한 작품 정도는 읽을 만한 좋은.... 작가 말고요, 좋은 기자 혹은 취재인 듯하네요. ㅎㅎㅎ (<죽은 자와 벌거벗은 자>를 쓰기 위하여 장교로 갈 수 있는데도 굳이 졸병으로 자원 입대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니 골통은 골통인 모양입니다. 취미 생활로 자기 아내 두드려 팼다는 건 잠자냥님 포스트에서 읽은 바 있고요.)

건수하 2026-05-27 21:51   좋아요 1 | URL
<성 정치학>에 노먼 메일러의 작품을 분석한 챕터가 있었는데… 여성에 대한 상징이나 묘사 등이 별로더라고요. <죽은 자와 벌거벗은 자> 랑 <An American Dream> 이었네요.

페넬로페 2026-05-27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지하게 길고 허무하지만,
그것을 견디며 읽어내신 팔스타프님!
격파한 그것만으로도
진정한 독서인이십니다!

Falstaff 2026-05-28 04:58   좋아요 1 | URL
아이쿠,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냥 동네 도서관 첨지 정도랄까요. ㅋㅋㅋ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주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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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이현. 드디어 2000년생, 21세기 출생 작가의 책을 읽는다. 아직 동국대 문창과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하더니 벌써 소설집을 냈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에는 데뷔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나는 이 책에서 <보아>를 제일 먼저 읽었다. 네 번째 순서로 실린 작품이다. 2024년 6월 웹진 <비유>에 발표했던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다음 날 아침에 데뷔작이자 표제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부터 순서대로. 일정상 퇴근 시간에 맞추느라 제일 짧은 거 하나만 더 읽고 가자, 싶어서 고른 것이지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보아>를 읽으면서, 앗, 또 한 명의 문제 작가가 나온 건가? 이렇게 생각했다. 강렬한 문장들. 첫 문단부터 그러했다. 두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 너는 이미 기체와 빛으로 존재하기를 그만 둔 뒤였지. 그러는 대신 너는 그늘과 그림자로 존재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너는 나의 눈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너를 절대로 돌아볼 수 없었어. 그래도 나는 네가 나의 뒷면에, 내 시선의 반대편에, 모든 종류의 사각지대에 늘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다.”  (p.256)


  보아?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스타 가수이자 탤런트 보아, 권보아? 그이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해하는 보아는, 화자를 보는 인격이다.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비슷한 것. 예컨대 내가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또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로부터 ‘보임’을 당할 때, 그 보는 행위를 하는 사람 비슷한 것. 어쩌면 또다른 나. 프레임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무한 공간 속의 나.

  사실 나를 관찰하는 무엇에 관한 생각은 누구나 한 번씩 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일단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읽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위 인용문에서 화자 ‘나’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는 정말로 젖먹이가 유아로 성장했을 때를 뜻한다. 저 1950년대 장용학 식으로 말하자면 화자 ‘나’에게 이름이라는 속박이 주어져 ‘나’의 행복이 거덜난 순간과 비슷할 수 있다. 그렇게 화자 ‘나’는 유아가 되고, 소년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다. 이때 ‘나’ 앞에 다시 등장한 보아. 이때는:

  “나는 내 주변의 어떤 아이들을, 어떤 어른들을, 나아가 어떤 행인들을 띄엄띄엄 건너다니는 너를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할 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지,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야 할지 늘 고민스러웠지. 보아, 네가 내게서 떠나 있던 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없다면 당장 시작해봐. 어땠을까? 나는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두려웠을까? 반대로 아주 멀쩡했을 수도 있지만, 전부 아니야. 나는 화가 났다. 늘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렇게 주이현은 자신의 격동하던 학창 시절을 화자 ‘나’와 보아를 통해 이야기한다.


  다음날, 일찌감치 출근한 열람실에서 이이의 데뷔작을 읽는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역시 강렬한 문장들. 예를 들어보자.


  “무심코 돌아본 곳에 묽은 액체처럼 엎질러진 자신의 흔적들이 보일 때, 멈추지 않고 한 뼘씩 앞으로, 도 아래로 흘러가는 그것의 궤적을 발견할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 밝고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곤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러나 율은 정작 그런 것들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율이 진정 알고 싶었던 것은, 율에 의해 모서리부터 젖어가고 있는 루와 주안의 입장, 생각, 감상 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는 율의 발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제대로 울려 퍼지고 있는가, 들리고 있는가, 눈치채고 있는가, 대비하고 있는가, 무엇이, 바뀌어가고 있는가, 율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  (p.80~81)


  한 컷을 중첩에 중첩을 보태 묘사하며 긴 문장 속에 담는다. 긴 문장을 읽으면서 즐거울 수 있는 때는 문장 안에 리듬감이 담겨 있을 때일 경우가 많다. 그러면 문장이 길더라도 독자가 알아서 호흡을 유지하며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우스개로 자주 말하는 “소설작법”에 의하면 긴 문장은 지옥이다. 그러나 간혹 사실이 아니다.

  하여간 데뷔작이자 표제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인 P시는, 아마도 작가가 직접 경험해본, 또는 우연히 살던 곳(이나 근처)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는 땅꺼짐, 싱크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껏 내가 매체에서 읽어보지 못한 정도의 대규모 싱크홀이 발생해 P시의 상당한 부분이 꺼진 땅 속에 함몰되는 광경을 담았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시선은 “설탕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에 뭉개져 죽어버”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있지 않고, 성별이 확실하지 않은 등장인물 루, 주안, 그리고 율의 이탈離脫에 있다.


  연달아 읽은 이 두 작품에 국한해 말하자면, 나는 주이현에게 반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책을 더 읽었다. 그래서 좀 허탈했다.

  주이현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학생이라고 면피하려는 생각이 있었을까? 제일 마지막에 실은 <백야의 문은 얼어붙지 않으며>만 이야기해보자. 데뷔 즉 등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단 책을 냈으면, 독자가 그 책을 읽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건 곧 프로페셔널, 즉 프로 작가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이현도 전업작가로 나선 걸로 아는데, 전업작가가 120쪽에 육박하는 짧지 않은 분량의 “습작”을 독자에게 읽어보라고 내놓으면 안 되지. 프로면 프로답게 전에 쓴, ‘쓴’이 아니고 ‘써본’ 습작 정도는 노트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없었을까?

  길게 썼다가 지웠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또 한 독자가 주이현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고, 다른 또 한 명의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런 것도 무겁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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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5-27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딸아이가 2000년생인데
이제 밀레니엄 베이비들이 사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군요.
왠지 팍팍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Falstaff 2026-05-27 15:2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 마음 제가 압니다. 저도 아이들하고 같은 나이의 사람들 보면 괜히 더 반갑고 막 그렇더라고요.
 
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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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스 레싱을 읽으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작품이 해피엔드로 끝나기 바라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레싱이 심술 사나운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고, 사람의 심상과 마음의 변동, 이에 따른 행동의 이중성 같은 것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게 너무 솔직한 바람에 독자는 자기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박아 놓고 절대 꺼내 보고 싶지 않았던 지나간 실수, 잘못, 악의, 행위 같은 것들을 기어이 들춰내게 만든다. 정말 가차없는 칼날이다.

  나는 레싱을 사십대 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단 한 번도 즐겁게 읽지 못했다. 읽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어딘가 좀 불편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작가. 독자에게 결코 친절을 베풀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작가로 새겨져 있다. 하긴 자신의 일생이 참 다사다난, 다양해서 그럴 수 있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하여간 그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이 소설집 《사랑하는 습관》을 읽으면서, 일곱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중편 소설을 읽으면서, 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작품들이 대개 그랬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변화, 그걸 변심이라 부르던, 질투라고 하던, 그냥 변덕이라고 여기던 간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 결국 생각과 행동의 일관을 깨뜨리는 현상, 전에는 아마 이해하기 힘들었던 변화가 이제는 등장인물이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다고 공감하게 되고, 그래서 슬퍼진 거 같다. 내가 내 마음, 정서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것 같다”라고 하는 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레싱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울해지는 대신 슬퍼지는 건, 기본적으로 작가의 시각이 사람 존재를 긍정하는 쪽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한다. 남자가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워도,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에게 상처를 주어도, 레싱은 딱 한 장면을 강조하여 드러난 것만 비난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의 바꿀 수 없는 성향일 수도 있고, 환경 때문에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며, 또한 많고 많은 사람 사는 일에 그런 것도 생길 수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도리스 레싱을 연상하면 페르시아 출생과 아프리카에서의 성장, 제1,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 결혼, 가정, 모성, 계급, 이데올로기의 진보성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구분 또는 특징지우려 하는데, 이제 나는 이이의 이런 모든 성향을 다 합해 휴머니스트라 말하고 싶다.

  레싱에 대한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뀔 줄 나도 몰랐다. 처음 읽은 이이의 작품이 아마 거의 대부분 독자들과 비슷할 텐데, <다섯째 아이>, 이어서 <런던 스케치> 이런 순서로 읽었다. 하여간 불편한 작품들. 지금 다시 읽어도 불편할 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암울하고, 무겁고, 두렵기도 하고, 내가 레싱의 책이 눈에 띌 때마다 읽게 될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을 만큼 거리감이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레싱에게 휴머니스트라고 하게 됐을까? 여전히 레싱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비극 속에서 슬픔을 발견하고, 가끔 슬픈 비극은 아름다움을 만들기도 한다. 혹시 내가 그걸 본 것일까? 설마. 어떻게 불편한 레싱 안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인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그러나 봤을 것이다.

  이 책은 1957년에 초판 출간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후 1979년에 레싱은 다른 작품들을 추가해 《19호실로 가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내놓았다. 문예출판사는 1979년에 추가한 작품들은 따로 골라 《19호실로 가다》로, 이전 초판본은 원래대로 《사랑하는 습관》으로 냈다. 그래서 《사랑하는 습관》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중이거나 끝나고 얼마되지 않은 1950년대 초반까지가 시간적 공간이다. 런던은 맹렬하게 공습을 받고 있어서 3년간 연애하던 약혼자를 특별한 이유 없이 걷어찬 아가씨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아버지가 산산이 부서져 죽은 이야기도 나오고,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동계 휴양지로 여행간 영국인 연인이 아직 패전의 응결을 해소하지 못한 독일인과의 관계도 이야기한다.

  전후의 불안정한 시대. 뭐든지 다 불안했던 시기. 절정기를 누리기 시작한 아메리카와 달리 전반적으로 가난한 유럽인들, 동쪽에서부터 거침없이 밀려들기 시작한 볼셰비키 물결로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냉전의 시작, 스탈린의 죽음을 애도하는 영국 시민들, 젊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바람에 공급과잉이 되어버린 젊은 아가씨들, 아직도 군데군데 폐허로 남은 옛 시가지, 이 와중에 큰 돈을 번 새로운 부르주아, 아직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옛 귀족 떨거지들. 이런 것들이 모두 레싱의 레이더에 걸린다. 여전히 조금은 암울하고, 무거우며, 전망도 보이지 않지만 삼십대 막바지에 이른 레싱은, 내가 잘못 읽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일찍 달관했는지 조금씩 휴머니스트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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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5-27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폴스타프 님 이 리뷰 읽고 오랫동안 묵혀두기만 했던 이 책 꺼내 읽었습죠… 참 좋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전쟁 후 그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어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요.

Falstaff 2026-05-28 04:57   좋아요 0 | URL
옙. 단편집에 야박한 쇤네도 오랜만에 주저없이 5별 찍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