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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티
테주 콜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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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미국 미시간주에서 나이지리아 부모의 네 자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아마도 테주 콜이요루바족인 거 같은데,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가운데 이보족이 아닌 종족은 테주 콜이 처음이다. 치누아 아체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치고지에 오비오마, 전부 이보족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종족간 분쟁에 따른 피해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나이지리아 작가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의 있는 집 사람들은 대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귀국해 고급관리 등 지배계층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테주 콜의 부모도 미국으로 가서 대학에 다니다가 테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 엄마와 어린 테주만 먼저 나이지리아에 돌아온다. 아빠는 MBA를 딴 뒤에 귀국해 가족과 합류했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테주 콜은 17세가 되자 자기 출생지인 미시간 칼라마주로 돌아가 칼라마주 칼리지에서 학사, 이후 미시간 주립대인 것 같은데 거기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가 중도작파하고 런던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으로 가서 미술사 석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이가 쓴 첫 장편소설 <오픈 시티>의 주인공 줄리어스도 (컬럼비아 대학이 있는)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전임의 과정을 수료 중인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설정했다. 요루바족이기는 한데, 아빠가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엄마는 금발의 독일 여자로 설정했다. 유럽-아프리카 혼혈로 한 이유는, 작품 속에 줄리어스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가서 3주 정도 산책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무려 1년 가까이 도서관 관심도서로 올려놓았던 건 또 왜?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지금을 잊었지만.
하여간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장편소설일 경우에 메모할 준비를 딱 마친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데, <오픈 시티>는 애초에 메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도시를 산책하면서 세상 오만 것에 대하여 사색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산책? 색깔과 방향은 다르지만 로베르트 발저나 W.G. 제발트의 문법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그래서 지금 이틀 전에 읽은 책의 독후감 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읽을 때는 좀 더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뭐 다 좋을 수 있나, 어디.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주인공 줄리어스가 참 나쁜 의사새끼라는 거였다. 학부 3학년 시절 은사였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사이토 교수를 찾아가 “그에게 최근의 상담 사례 중 하나를 들려주었다.” 오순절교회파라는 보수적인 기독교들로 “그들의 하나뿐인 열세살짜리 아들이 나중에 심각한 불임 위험을 야기하는 백혈병 치료를 곧 받을 예정이었다. 소아과 의사가 그 가족에게 건넨 조언은 소년의 정액을 냉동 보관했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했을 때 아내와 인공수정을 하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였다.”
이걸 지난 시절의 은사한테 이야기해준다고? 의사의 비밀준수 의무는 내다 버렸어? 세상에 둘도 없는 지성으로 묘사하는 은사 사이토는 그걸 듣고 자빠졌어? 뭐 좀 이상하다.
저 뒤에 가면 정신의학과 의사들도 환자에게 “미쳤다”라는 말을 환자에게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있으면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면서, 사실 정신의학과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이 남들한테 인상깊게 해 줄 수 있는 스토리가 무척 많다고 지껄이기도 하는데, 이런 걸 듣는 초기 우울증 예비환자가 될랑말랑한 인간은 더럽게 기분이 나쁘더라는 거, 나빠지더라는 거. 가뜩이나 (특히 우리나라 또는 내 경우) 상담의 진입장벽이 높은 진료과목이 정신의학과인데, 거기 전임의 과정에 있는 새끼 의사이자 불과 1년 후에 개인병원을 동업해 개업할 작자가 이런 수준이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지.
그렇다. 저 위에 말한 오순절교회파 가족의 열세살짜리 소년 이야기 하나가 아니라 몇 개가 더 나온다. 그러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나는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내 환자들에 관해, 외계인의 방문과 정부의 감시, 벽 속의 목소리, 가족의 음모에 대한 의심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신질환, 특히 편집증 환자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언제나 많았다.” (p.396~397)
딱 위의 생각을 먼저 해서 그렇지 사실 이 책에는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특히 이스라엘과 유대인, 그리고 미국에 의하여 자행되는 폭력이 그렇다. 이 독후감을 업로드할 때는 전쟁이 끝났는지 아직 진행중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벌인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지역 점령 여부를 보고 있자면, 작중 브뤼셀에서 줄리어스한테 아프리카인 철학자이자 PC방 점원인 파루크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뭐라 했느냐 하면:
“미국이 알카에다야.” 이어서 “미국은 일종의 알카에다야.”
911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한 알카에다가 아니라 그들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중동과 아프리카 일부에서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력의 근거는 2차 세계대전 앞뒤로 독일 나치에 의하여 학살당한 유대인 6백만명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 6백만명의 목숨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했고, 땅을 빼앗았고, 그걸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2천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유로. 그럼 우리나라의 조상 가운데 한 국가인 고구려가 중국의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여진인 등을 다 몰아내고 깔고 앉아도 되겠네?
파루크는 계속 말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치 수용소를 지었나?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어떡하고? 유대인이 아니라서 그들의 죽음은 의미가 덜한 건가? 육백만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를 말해줄게. 그건 유대인이 선택된 민족이라서야. 캄보디아인들은 잊어. 미국 흑인들은 잊어. 이게 유일무이한 고통이야 하는 식이지 (중략) 유대인들은 세상을 침묵시키기 위해 그 숫자를 이용해. 난 사실 정확한 숫자가 뭔지 아무 관심 없어. 젠장, 모든 죽음은 고통이야.” (p.248~249)
평소 내가 하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자기 종족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자기들도 다른 종족을 죽여도 된다고 믿는 이스라엘. 나는 현대의 이스라엘이 싫다. 테주 콜도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거 같은데 스스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여차하면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를 주장한다고 몰매를 맞을 수 있단다. 우리나라는 모르겠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당히 근거가 있을 거 같다.
이렇게 테주 콜, 또는 주인공 줄리어스는 뉴욕과 브뤼셀 거리거리를 산책하면서 주로 폭력에 대한 심사숙고를 펼쳐간다. 그러다가 저 뒷부분에 가면 줄리어스도 뉴욕의 거리에서 10대 청소년 세 명에게 얻어 터지고 발로 차여 꿰매거나, 이가 부러지거나 빠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엉망이 되고 손을 밟혀 퉁퉁 붓고, 휴대폰과 지갑을 뺏기는 강도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읽을 분들을 위해 어떤 것인지 지금 밝힐 수 없지만 줄리어스 역시 한 인간을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들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잊고 살았거나, 그것이 피해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폭력이었는지 감을 잡지 못했거나, 잊지도 않았고 감을 못 잡지도 않았지만 굳이 끄집어내어 죄책감에 시달리기 싫었을 수도 있다.
결국 누구나 폭행을 당하고 폭행을 저지르며 산다. 그렇게 살기는 한다. 나는 아니라고? 그걸 누가 알아. 폭력인 줄 모르면서 저지르는 폭력. 그걸 당신은 한 번도 저질러보지 않았다고?
사는 건 복잡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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