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평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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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여 전에 룰포의 다른 책 <페드로 파라모>, 아니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상쾌하고 뒤통수 때리는 작품”이라고 간략한 느낌을 끼적였다. 그래 여태까지 룰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쓴 다른 책 <불타는 평원>을 읽어보자고 차일피일 했다가 이제야 읽었다. 다른 거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룰포가 쓴 또 한 권의 책이란 것 때문에 골랐다. 룰포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보다 10년을 앞서 태어났는데 그의 <뻬드로 빠라모>가 <백년의 고독>에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뻬드로....> 독후감에서 슬쩍 비치기만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문학이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도 있다는 뜻.
 <불타는 평원>에선 이런 환상문학 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물론 세밀하게 읽는다면 환상문학이 등장하기 바로 앞선 전조현상 정도는 발견할 수 있겠지만. 룰포는 전 생애를 걸쳐서 <뻬드로 빠라모>와 열일곱 편의 단편을 모은 <불타는 평원>, 이렇게 딱 두 권만 출간했다고 한다. 룰포가 쓴 두 권의 책의 공통점은 멕시코의 황야지대, 산악지역 등을 무대로 한다는 것.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0년대와 20년대의 멕시코 혁명에 관해 선행학습을 좀 하는 편이 좋다는 것. 그러나 나처럼 게으른 인종이 소설 한 권을 읽자고 남의 나라의 역사를 뒤져볼 턱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정부군이 우리 편인지, 반란군 또는 농민군이 우리 편인지 도통 알 도리가 없다는 것. 이런 것들이 애로사항이다.
 하긴 뭐 혁명도 어차피 사람 사는 일 아닌가. 우리 편인지 너네 편인지 굳이 알지 못해도 충분히 재미있다. 작중 등장인물은 언제나 정부군에 쫓기는 농민군 또는 반란군이며, 전쟁/전투 중에 새우등 터지는 멕시코 시골 촌사람들이며, 그중에서도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는 무지렁이들이기 때문에. 이게 말이 쉬운 것이지 사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내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작가가 혁명의 황폐화와 황무지에서의 삶, 그리하여 보다 본능에 가까운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장을 그린 것은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도.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의 내용을 다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본문만 191쪽이니까 한 편당 평균 11쪽에 불과한 손바닥 소설, 장편掌篇 모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표제작인 <불타는 평원>과 마지막 작품 <아나끌레또 모로레스>를 제외하면 작품의 평균 길이가 훨씬 줄어들기도 하고. 20세기 초반, 멕시코 고원의 황무지 지역에서 벌어지는 혁명전쟁, 말이 혁명전쟁이지 사실상 정부군에 의한 소탕작전과 피해자들, 와중에 거친 삶을 살아내느라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데 모든 힘을 쏟는 군상들에 관한 객관적인 묘사, 그리고 이 세 유형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어차피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소설, 또는 아몰랑주의 소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후안 룰포를 경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거 같은데, 아직 룰포를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뻬드로 빠라모>를 먼저 읽어보심이 어떨까 싶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93번으로 이 책보다 먼저 번역해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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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2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남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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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12월의 스페인 마드리드. 세계적으로 극심한 물자부족을 겪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때는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아메리카를 제외한 전 유럽의 산업은 완전히 거덜이 난 상태였다. 이때 참전하지 않고 그냥 마음속으로 같은 파시즘의 나라 독일이 승전하기를 은근히 기원하던 스페인은 전시 특수를 즐길 황금 찬스였으나, 아뿔싸,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프랑코 개자식에 의해 벌써 내전이 발생, 일찌감치 나라를 말아먹은 상태라 전시 특수를 향유할 산업기반이 없었던 거였다. 프랑코 시대에,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젊은 작가 지망생이 하나 있어, 나도 처음 들은 바, 공화진영이 아니라 반란군인 프랑코 파시즘 진영에 자진 입대해서 용감하게 싸우다 부상까지 당한 이가 있었으니 이 인간이 바로 카밀로 호세 셀라. 프랑코 진영에 가담했을 때 나이가 스무 살. 스무 살이라면 성년이기는 하지만 평생을 책임질 뚜렷한 확신을 갖기엔 조금 미숙한 상태. 하여간 이런 이력은 내전 후 자신의 소설작업을 다른 작가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 또는 이런 비슷한 것들을 다 모아, 독재정권은 스페인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 똑같아서 한때 파시즘에 동조했다고 해 작품의 주제나 표현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 셀라가 쓴 리얼리즘 작품 <파스쿠알 두아트레 가족>은 금서로 찍히고,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벌집>은 끝내 출판 허가가 나지 않아 몇 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출간하기에 이른다고 작품 해설에 나온다. <파스쿠알 두아트레 가족>도 읽어보려고 서점 보관함에 들어 있는데 엉뚱하게도 더 나중에 출간한 <벌집>을 먼저 읽게 됐다.
 지금 같으면 이런 소설의 출판금지 결정을 어처구니없어 하거나 비웃을 수 있겠지만 1948년 인생의 절정기를 맞아 온몸으로 신경질을 뻗어냈을 프랑코를 감안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쉽게 다른 분께 일독을 권하기는 좀 난감한 소설이다. 첫 장면이 끊임없이 “젠장”, “정말 짜증나네!” 같은 험한 단어를 쏟아내며, 마드리드 시내 한 카페의 사장 도냐 로사가 끔찍하게 큰 엉덩이로 손님들을 툭툭 건들면서 탁자 사이를 오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근데 소설의 첫 문장은, 따옴표 안에 묶인 걸로 봐서 누군가의 대사가 확실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이제 이런 말을 하는 데 진력이 나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어쩌겠소.”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 대사의 주인공인지 밝히지 않는다. 누굴까. 내전 이후, 세계대전 말기의 극심한 경기침체기를 맞아 그래도 현상을 유지하게 위해 누군가 먹물 든 이들이 오늘만 참자, 내일이 되도 또, 오늘만 참자, 결코 전망 또는 희망을 잃지 말자고, 소위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것. 대한민국의 2010년대 말에 그대로 차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경구다.
 그리하여 소설 <벌집>은 (내가 1944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이라고 생각하는 세계대전 말기의) 마드리드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시민들, 현재로서는 전혀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남녀 시민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당시 마드리드 시민들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불행했다는 걸 알 수 있고, 201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 국민들도 정말 제각각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만일 위에 인용한 것이 여전히 효용이 있다면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가난한 다수와 작은 성공을 대단한 성공인 것처럼 오해하는 적은 숫자의 중소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주인공을 한 명 고르자면 대학을 졸업하고 한 때는 시를 썼지만 끔찍하게 큰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도냐 로자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먹고 돈이 없어 하마터면 허벅지를 걷어차일 뻔한, 그러나 이미 모욕은 모욕대로 겪은 ‘마르틴’이란 실업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진짜 주인공들은 동시대를 살면서 함께 셀라가 자기 소설에 등장시킨 모든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들고, 병든 애인의 약값을 위해 몸을 팔정도로 아둔하고(남자가 나중에 어떻게 변할 줄 알아!), 1 페세타어치 군밤으로 한 끼니를 때웠으면서도 건강을 위해 저녁 식사는 가볍게 한다고 둘러대야 하는 시민들과, 한 푼의 적선을 위해 하루 열 시간이 넘게 플라멩코 춤을 추며 노래해야 하는 집시 꼬맹이이기도 하고, 전 재산을 겉모습이 번드르르한 사기꾼한테 투자했으면서도 그 사기꾼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인쇄소나, 빵집이나, 카페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가끔은 혹독하고 가끔은 관대하기도 한 모든 군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즉 셀라는 큰 화면에 같은 시대의 마드리드를 사는 중류, 중류 이하 계급의 인간 모습을 판화 찍듯 꾹꾹 눌러 그대로 묘사하기만 한다. 이런 작품에서 소설의 맛을 착 감기게 만드는 역할은, 일종의 악역들의 행위, 바로 조금 부자들. 저녁 식사 때마다 과식을 해 밤새 뱃속이 더부룩하고 가끔은 요동을 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 가난뱅이 앞에서 비싼 시거를 태우며 유쾌하게 어때 자네도 한 대 피워볼래? 번히 권유에 응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작은 인쇄소 사장, 이런 인물들이다. 내전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절대 궁핍에 시달리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 할 수 있는 희망고문자들. 아무리 프랑코가 무식한 깡패 개자식이라고 해도 이 작품 속에 든 시대의 절망에 관해 눈치를 채지 못했을 턱이 없다. 그러니 같은 언어를 쓰지만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초판을 찍을 수밖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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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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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책읽기를 끝내고, 이제 독후감을 쓰려 화면을 열어놓았다. 난감하다.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썼으면 그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고, 이게 루틴으로 지켜지던 일상적 취미, 라고 여겼으며,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도 분명히 느낌이란 것이 (그것도 강하게) 있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1부, 1922년에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유폐되는 판결을 받고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니나’라는 열 살 먹은 소녀와 친해지는 장면까지 읽으며, 에이모 토울스,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기에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답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까탈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버터냄새를 맡을 수 있게 유머러스한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 1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봤다. <우아한 연인>이라는 책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이다. 중고책도 인터넷에선 발견할 수 없다. 내친 김에 책을 펴냈던 출판사 홈페이지까지 방문해서, 지금 장안에 <모스크바의 신사>가 절찬리에 읽히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같은 작가가 쓰고 귀사가 찍은 책 <우아한 연인>의 중쇄를 심각하게 고려할 시기라고, 게시판 한 줄에 자국을 내고야 말았다.
 구 러시아의 마지막 귀족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는 않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1부 끝부분에서는 현악사중주단에서 2 바이올린을 연주해 먹고 살다가 결국은 유배형에 처해지는 또 다른 귀족 니콜라이 페트로프 공작이 역시 성탄 전야에 잠깐 등장하기도 하지만 32세 때부터 시작해 64세까지 모스크바의 고급 호텔에 유폐를 당하면서도 귀족 특유의 절제와 적응과 임기응변과 처세와 사교술과, 무엇보다 깊고도 넓은 교양과 지식으로 무장한 백작의 현명하고도 화려한 생존기야말로 책의 백미라 할 것이다. 여기쯤에서 내 양식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콕 집어 작가가 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서 유럽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어쨌든 자본주의 시각에서 본 작가의 과거 귀족 계급에 대한 짙은 향수. 이게 어쩐지 발목을 잡았다. 물론 메트로폴 호텔, 모스크바에 있는 최고급 호텔 안을 무대로 하기 때문에 온갖 고급스러운 먹을 것, 마실 것, 행동 또는 행위, 에티켓을 포함한 복잡한 예절, 유물, 향수와 추억 등의 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럼에도 특정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선정하는 것, 귀족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맞지 않을뿐더러 비싸기만 한 와인을 추천해주는 웨이터를 향한 경멸이라니. 무대가 1922년 부터 54년까지다. 물론 부르주아의 힘이 하도 막강해서 그렇긴 했지만, 이미 서쪽 유럽에선 자신의 귀족적 계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었음에도 (이미 망한 다음이라서 오히려 더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각하’나 ‘백작님’이라 호칭하는 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 어느덧 인생의 황혼이 오면, 여보게 그냥 알렉산드르라고 부르게, 하는 세월이 오긴 하지만. 백작은 결국 옆 테이블의 젊은 커플에게 다가가 웨이터의 권유를 무시하고, 적절한 와인을 추천하고야 만다. 그리하여 나중에 백작이 경멸스럽게 ‘비숍’이라 칭할 웨이터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해 백작만큼 적절한 와인을 추천할 수 없기 때문에 당한 일을 일종의 치욕으로 마음 속 치부책에 적어두게 된다. 난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와 독자는 쓰고 읽으면서 비숍이란 웨이터, 나중에 차례로 부지배인, 수석지배인이 되는 인물을, 속에 든 거 없이 철저하게 규격화된 인간형으로 규정하고 (사실도 그렇지만) 백작과 정 반대의 자리에 터를 정해버린다.
 솔직하게 쓰자면 나도 그랬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음식엔 어느 와인이 어울리는지 정도를 알아두면 참 좋겠다. 조금 더 나가서, 집 앞 ‘홈 플러스’에 가 싸구려 칠레 와인이라도 한 병 사 마셔볼까? 뭐 이런 생각. 그러나 중심을 잡아야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와인은 무슨. 한 20년 전 쯤부터 와인 열풍이 부는 듯했지만, 역시 난 천성이 귀족들하고는 원래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지 무식한 쪽을 택하겠다. 삼겹살 수육에 소주 한 병이면 됐지 뭘 와인까지. 애초에 서양 와인 만드는 포도농사를 짓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와인 선택에 능숙하지 않으면 2류 인생이라고 이해할까봐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대표적으로 와인을 이야기했을 뿐, 여전한 서양 귀족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경계하는 수준으로 이해해주시라. 주인공이자 귀족 떨거지인 알렉산드르가 버틸 수 있는 힘은 할머니가 쓰던, 물려받은 책상 다리 안에 숨은 비밀의 공간에 담겨있던 금화였다. 아무 직업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지역 농장에서 올라오는 소작료도 없이 다른 호텔도 아니고 메트로폴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옆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진 금화. 과거 제정 시대가 남긴 유물로 제정 시대의 인물이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도 여전히 최고의 미각을 달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렉산드르는 고급 식당에서 웨이터 주임으로 일하게 되지만, 그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날을 보내기가 무료해서 그런 거 같다.
 또 다른 것 하나는 혁명 정부. 마르크스가 가장 크게 실수한 것은, 인간본성을 선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 아닐까. 소위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해 새롭게 프롤레타리아를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사실 숱한 작가들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읽고 들었던 내용이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개떡 같은 그림을 그리고 앉았던 피카소가 소비에트 정권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지만, 정작 소비에트에선 피카소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줄리언 반스의 지적. 이 책에서도 알렉산드르의 대학 동창이자 시인인 미하일 표도르비치 민디히가 등장해 아흐마토바, 불가코프, 마야콥스키, 만델시탐 등과 합세해 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을 결성하고도, 협회가 작품에 가위질을 해대는 걸 참지 못해 황폐해지는 모습도 그리고 있다. 작가동맹이 결성된 이후 불가코프는 단 한 줄도 작품을 쓰지 않았고, 아흐마토프 역시 극도로 적은 양의 집필만 유지하고, 심지어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총알을 박아 넣는데 성공해버리고 만다. 에이모 토울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랬겠지만, 레닌과 스탈린 시대를 넘어 이후 흐류쇼프 시대 초기까지 인민들을 질식시키는 고단위의 경찰력으로 소비에트 공화국과 종사자들을 묘사하는데, 심지어 행정국장 오시프라는 작자는 그러면서도 서유럽의 문화와 위에서 얘기한 상류사회의 규범들을 익히기 위해 약 20년 간 백작 알렉산드르에게 과외공부를 받는 것으로 연출했다. 성분 좋은, 다른 말로 하자면, 보르도 와인이라고는 맛은커녕 구경도 하지 못한 농민, 노동자 출신인 ‘혁명 공화국 상류계급’들의 가슴 속에서마저 유럽의 상류사회와 사교에 관한 동경과 모방심리가 있었다는 걸 군불 때듯 은근히 일러주기에 이른 것. 혁명 후 세상은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각하가 메트로폴 호텔의 6층 골방에서 세월을 보는 동안 과거의 빈민, 농노, 노동자들도 고급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시대로 바뀌어버렸다. 불행하게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체(政體)가 비밀경찰 주도의 새로운 파시스트 체제로 변한 게 흠이지만. 공화국에서 KGB의 전신이었던 비밀경찰의 악행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대개 구체제의 상류계급과 지식인들이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인민들은 (1930년대 초기까지의 험난한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이나마 삶의 질을 높여가고 있지 않았겠는가. 비록 빵 한 덩이를 얻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야하는 불편이 계속되긴 했지만. 그래 레닌과 스탈린이 죽었을 때, 방부처리를 한 그들의 시선을 눈으로 확인하고 한 바탕 자기 설움 때문이라도 목 놓아 곡을 하고 싶었던 인민들이 수 킬로미터씩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지 않던가. 우리나라에서도 1979년 박정희 장사 지낼 때 광화문 거리에 쏟아진 한복 입은 시민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숱한 인민들의 눈물바람을 본 ‘사실’이 있다.
 만일 소비에트 혁명 정권이 (아, 지금 25도짜리 진로골드소주 한 병, 맥주 500cc 말아서 마시고 왔다. 빨리 독후감 끝내야 한다. 큰일이다.), 할리우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처럼 서른두 살의 로스토프 백작을 정원 가꾸는 조경사, 또는 일반 노동자로 살게 했다면 어땠을까. 내 생각으로는 백작의 천부적인 사회친화력과 달변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깊고 넓은 지식으로 나름대로 괜찮은(세상에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남은 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까지는 그냥 책을 읽으면서 지극히 작은 부분, 예컨대 한 2% 정도의 이견. 그런데 미안하게도 너무 길게 쓴 거 같다. 이제 진실을 이야기할 차례. 이거, 명작. 내놓고 말하는데, 요즘 시대에 이 <모스크바의 신사>를 능가할 소설문학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좀 거슬리는 부분을 강조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만일 이 독후감을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나머지 98%의 감상, 진짜 무지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란 확신을 믿고 얼른 책 주문을 하시거나, 냅다 도서관으로 달려가셔도, 책값이나 에너지의 소실을 확실하게 능가하는 효용을 얻으시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언필칭,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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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으셨는지 그렇다면 리뷰 쓰셨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다 첫 단락에서, 아니 이 이름이 그 이름이??? 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아, 저도 이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폴스타프 님 별 다섯이라서 너무 행복하네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03 09: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근데 제가 모던 클래식 열 권에 이 작품을 선정하지는 못했답니다. 본문에도 썼다시피 작품 전체에 너무 농밀하게 퍼져있는 버터 냄새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이 책 한 스무 권은 팔아준 거 같아요. 보는 사람마다 재밌다고 떠들고 다녀서요.
 
달팽이가 사랑할 때 1
딩모 지음, 남혜선 옮김 / 현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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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권 114쪽까지 읽었다. 등장인물이 화려하다. 두 명의 여성 신입경찰이 경찰학교를 각각 우등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시 경찰서에 부임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한 명은 미모와 늘씬한 체격에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보유한 매력 넘치는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이 이 책의 주인공인 ‘쉬쉬’인데 경찰학교 수석졸업자이며, 범죄심리학에 도가 튼 것으로 묘사되고, 딱 한 가지 운동능력이 젬병이라 이게 지금 뛰는 건지, 기는 건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달팽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가 이런 연체동물 성 별명을 지어주었느냐 하면 쉬쉬의 사수이자 스승이자 부팀장이자 최근 10년 간 중국의 모든 서남부 경찰서에서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살아있는 전설 지바이. 지바이는 집이 베이징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며, 재벌 2세임에도 불구하고 독립해 혼자 사는 데 만족하고 (홍콩이라는 설명이 책 뒤표지에 나오긴 하지만) 중국 서남부의 가상 도시 린 시市 경찰서에 강력계 같이 보이는 팀의 부팀장으로 근무한다. 잠깐, 아무리 천재 수사관이라도 그렇지, 여자 별명으로 ‘달팽이’가 뭐니. 지나가면서 자기가 남긴 자취를 미끈한 액체로 남기는 연체동물 말이야. 작가가 여자라서 그렇지 남자면 벌써 공개재판 받았다. 쉬쉬는 오빠하고 아빠, 이렇게 남자 둘하고만 살았는데 스물일곱 살 먹은 오빠 쉬쥔은 벌써 자수성가해서 넘쳐넘쳐 흐르는 돈의 유입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한, 회계법인의 설립자로 쉬쉬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책엔 20대 거부들이 왜 이리도 많이 나오는지! 건물 옥상에서 돌 던지면 기막히게 잘 생긴 남녀 20대 부자가 맞는다.) 물론 우리의 꼬맹이 느림보, 그러나 대단한 수재를 가지고 있는 쉬쉬는 결코 오빠의 배경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쉬쉬가 경찰학교 수석, 몸매 빵빵한 야오멍은 우등. 아쉽게도 야오멍이 아무리 노력하고 절차탁마하고 서른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수석. 이런 인간들 정말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또 등장하는 인물이 시내 공원에서 사촌 남동생 예쯔샤오와 담소하다 날이 하도 좋아 잔디밭에 누우려는 찰나, 누군가가 녹색 페인트칠을 한 커터 칼날에 손 동맥이 잘라져 곤경에 처했다가 때마침 달팽이처럼 조깅을 하던 쉬쉬의 눈에 띄어 생명을 구하는 예쯔시. 예쯔샤오는 재벌집 넷째 아들로(근데 당시 중국에서 한 부부가 네 명의 자녀를 낳을 수 있었다, 이거지?), 소위 재벌 2세다. 예쯔시는 또 어마어마한 거부로 등장한다. 거기다가 둘 다 신체 건강하고 그것도 모자라 피트니스에서 근육 키우는데 몰두하고, 재벌 2세만 가는 클럽의 단골에다 미국 유학파다. 커터 칼날을 몇 개 모아 별 모양으로 서로 이은 다음 녹색 페인트칠을 해 풀밭에다 묻어 놓으면 그 칼날에 베어 손목 저 속에 있는 동맥이 결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베는 칼은 대개 칼이 무겁고 휘어져 있다. 삼국지에서 관운장이 쓰는 청룡언월도가 대표적이다. 82근이 나가고 큼지막하게 휘어져 베는 길이가 매우 길다. 관우는 이 도를 이용하여 안량과 문추의 목을 뎅거덩, 잘라버린다. 근데 시멘트에 고정시킨 것도 아니고 그냥 잔디밭에 묻힌, 그것도 페인트 칠을 한 커터 칼에 손목 저 깊은 곳에 있는 동맥이 잘려? 손목과 손을 이어주는 힘줄도 함께 잘렸겠네?
 책을 쓴 ‘딩모丁墨’라는 사람이 누군가 검색해봤다. 이렇게 생겼더라.

 

(작가의 사진은 삭제합니다.)

 

 쉬쉬가 고참 자오한에게 약식 심리검사를 한 내용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14쪽엔 “최근에 왼쪽 어깨를 다치셨고요.” 근데 불과 네 페이지를 건너 18쪽에 이르면 또 이리 나온다. “자오한은 글씨를 오른손으로 쓰는데, 몇 번인가 물건을 들 때 잠깐씩 멈췄다가 왼손을 많이 쓰는 걸 보고 오른쪽 어깨 부상을 알았다.”
 이 책을, 헌책도 아니고 정가에서 10% 깎아주는 새 책을 왜 샀는가, 하면, ‘현암’에서 찍은 소설책이라는 것 하나 때문이었다. 난 열여덟 살때부터 현암사를 많이 좋아했다. 이 회사에서 나온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원래 소설책은 별로 찍지 않는 회사였다. 그래, 고르고 골라서 책을 선정해 번역을 해 출간을 했겠지, 라고 믿어 샀다가, 똥 밟았다. 이 책을 찍은 때가 2014년. 이미 4년 이상 팔아먹었으니까 이젠 솔직하게 이 책이 우라질 거, 개판이라고 말해도 되겠지. 아, 미치겠는 것은, ① 책이 두 권짜리인데 출판사 믿고 두 권을 몽땅 샀다는 거, ② 오늘은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출근해서 마음에 안 들더라도 계속 읽지 않으면 할 일이 멍하게 앉아 있으면서 ‘자리를 빛내주는 것’ 말고는 없다는 거.
 다만 한 마디만 하자.
 유명 드라마 작가 김수현은 초대박 히트 영화 <아바타>를 보고 졸았단다. 이 얘기 했다가 인터넷에서 수없이 두드려 맞았다. 무엇이 인기 대중작가 김수현을 졸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나도 <아바타>를 극장에 가서 봤다. 정말 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김수현이 대단한 건, 그렇게 시끄러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으면서 졸 았다는 사실. 난 하품은 쩍, 쩍 하면서도 잠은 오지 않던데. 어쨌건 완전 서부영화. 서부영화는 서부영화인데 아메리카 인디언의 시각으로 본 서부영화. 굳이 비교할 작품으로는 <늑대와 함께 춤을> 정도. 즉, 아무리 유명하고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는 사람 마음대로라는 뜻. 이 책 <달팽이가 사랑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 서평의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한 명, 다섯 개 두 명. 100점 만점으로 평균 93.3점이다. 그러니 위에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똥 밟았다.’라고 하는 건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라는 것.
 이 책 말고는 오늘 할 일이 없으니, 일단 계속 읽어나가겠다.


 

 1권 286쪽까지 읽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책의 두 주인공, 쉬쉬와 그녀의 부팀장 지바이의 나이는 각 24세와 28세. 근데 지바이가 최근 10년간 범인 검거율이 제일 높아? 경찰학교 졸업하면 나이는 24세, 5년차밖에 안 되는데? 이런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배회했다. 근데 268쪽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지바이는 형사팀에 들어온 뒤에 골초가 되었다. 20대 초반에 시체를 한 구 한 구 볼 때마다,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며 밤잠을 설칠 때마다 담배가 얼마나 보물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는지 모른다.”


 아하, 지바이는 경찰학교 졸업생이 아니라 고졸 출신으로 순경시험에 합격해, 또는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하필이면 경찰에 입문했는데, 그게 좀 찜찜해서 집이 있는 베이징이 아니라 서남부 지역의 작은 도시 린 시에 와 있는 거라고 추리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능력이 있어서 자기 신입 때 사수 역할을 했던 우형사의 상관이 되고, 나이 많은 우형사도 스스럼없이 28세 상사에게 보스라고 부르는, 신공의 보유자였다. 그럼 10년이 맞다. 그게 가능하면 말이지. 또, 재벌급 부모가 가문의 망신을 무릅쓰고 경찰학교를 포함한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면 말이지. (고졸 학력 분들께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 돈 많은 집에서 아이들이 공부 못하면 하다못해 외국으로 유학이라도 보내더라. 중국도 당연히 재벌가의 '고졸' 자제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며 그런 영애, 영식들의 처리방법 역시 한국과 이하동문이다.)
 중간에 살인 현장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보실래?


 “기나긴 복도를 지나니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 말라붙은 핏자국이 끔찍한 꽃처럼 명치에서부터 활짝 피어났다. ...... 오른쪽 다리 옆에는 하얀 코트가 팽개쳐져 있었다. 가장자리가 선홍색 피로 물들어 화려하면서도 기괴해보였다.”  (1권 178쪽)


 와우. 책은 비록 범죄심리학, 소위 프로파일링 기법에 의해 진행되지만, 작가 딩모가 미국 과학 수사 드라마 좀 본 거 같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끔찍한 광경이다. 핏자국이 말라붙으면 그 색깔은? 예, 혈중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해 내는 짙은 갈색입니다. 그게 아무리 하얀 코트 가장자리에서 말라붙어도 하얀 코트는 결코 선홍색 피로 물들어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이것들만도 아니고 무수하게 자잘한 에러들이 속출한다. 불이 붙은 담배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거하며, 매사에 빈틈없는 전설적 두뇌의 수사팀 부팀장이 내일 오겠다고 출장을 갔다가 2박 3일 만에 복귀하는 거 등등. 이 책 더 읽으면 이런 것들 분명 눈에 들어올 텐데, 그것들 여기다 다 쓰면 읽으시는 분들이 나더러, 인간성 안 좋다, 라고 할까봐 겁나 더는 못 읽겠다.
 이게 중국에서는 진짜 드라마로 만들어져 TV 광고비 깨나 벌었다고 하는데, 드라마는 모르겠지만, 책으로 읽기는 참 힘겹다. 그동안 그토록 믿어왔던 현암사는 이거 찍어서 돈 좀 벌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다 좋은 건 없는 법. 대신 충성심 강한 독자 한 명 잃어버린 건 확실하다. 오죽하면 아직 퇴근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읽기를 마치겠느냐고. 그리고, 걱정이다, 걱정. 이 책 두 권, 이거 어떡하나. 띠지만 벗긴 새 책인데. 버리긴 아깝고, 에잇,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이나 해야겠다. 올해도 기증하려고 모아놓은 책들이 꽤 있다. 마음이 좀 아프다. 내 책을 버려서? 아니, 절대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다른 사람 읽으라고 기증하는 심보가 괘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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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천국 창비시선 318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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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영광을 예전 철자법에 맞춰 쓰면, ‘이 영광.’ 이름 좋다. 고려대학 영문과 졸업,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직업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래, 교수 정도 돼야 배고프지 않고 시 쓸 수 있다. 시인들은 특히 가방끈을 길게 할 필요가 있으니, 아니면 시인이란 직함 가지고 도무지 번듯한 돈벌이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아예 제목이 <시인들>이다. 이 시를 인용해 시인들의 실루엣을 그려보면 다음 문단과 같다.
 울긋불긋한 선거 현수막이 만장같이 나부낄 때, 얼음장 아래 모인 한 됫박의 마른 물고기들처럼, 오직 시인들끼리(다른 보통 사람들하고는 달리 그래도 시인이란 배고픈 프라이드는 있어서), 시인들이 모여 있다. (이들의 얼굴을 보면) 자리에 앉았는데도 멀리 떠난 얼굴을 한 아픔도 있고, 어디든 너무 깊이 들어앉아 칼끝처럼 자기를 잊은 아픔도 있다. (이들이) 이름 부르면 끌려나가야 할 인질들처럼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직 더 버릴 게 있다는 얼굴들이고, 별로 얻은 게 없는데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표정들을 하고는, 시인들은 영원히 딴 곳을 보고 있다. (시인들의 모습이) 무섭게 아프고 무섭게 태연하다. (그런데 같은 시인이라고)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고, 이상한 것에 정신없이 끌리는 사람이 좋고,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이 좋으며,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 (시인들이 왜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지? 시 말고는, 혹시, 삶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 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바라기를) 마음 가난은 면허 같은 것이니 길이 보전들 하시되, 내년에도 몸이나, 아니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시라고, (같은 시인인 이 시의 작가는) 조등처럼 노랗게 취하며 기원했단다.
 조등. 예전에 죽은 사람이 있는 집, 상갓집에 밤에 등을 달아 놓았는데 그 등을 조등弔燈이라고 한다. 시인은 소주를 잔뜩 마시고도 노란 조등처럼 취하는 거다. 그것도 시인들만 모여 있는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면서 지청구 듣지 않을 수 있는 교수님이나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평소 행동을 보고 좋다고 하고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라고 기원할 수 있는 것이지, 그곳에 모여 있는 아무 시인이나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을 거 같은가? 시인도, 시도 자본 앞에선 벌벌 기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조금 슬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요즘에 특별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긴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시가 길어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여간 별로 마음엔 들지 않는다. 긴 시 속에는 당연히 치명적인 시어들, 딱 마음에 박혀드는 그런 시어들이 있을 확률 또한 많다. 앞 뒤 다 떼버리고 그 부분만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시. <버들집>이란 시에서도 그렇다.


 고향을 미워한 자는 길 위에 거꾸러지지 않고
 돌아와 어느새 그들이 되어 있는데
 수양버들 두 그루는 아득한 옛날에 베어지고 없고
 그 자리, 탯줄 같은 순대를 삶고 있는 국밥집
 삼거리엔 폐업한 삼거리슈퍼
 보행기를 밀고 가는 석양의 늙은 여자는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버들집>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65쪽)이다. 근데 버들집은 고향 원적지의 장터에 있는 ‘니나놋집’이다. 술 따르는 여자들은 다 전원주 같거나 어머니 같고, 혈육이 다 모여 있는 고향 장터라 버들집에서 연애를 하면 그건 다 근친상간이 되는 유서 깊은 술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친상간의 매개가 되는 술 따르는 여자가 어머니 같아? 꼭 그렇게 외갓집 족보를 들먹거려야 하니? (전원주, 혹은 그의 매니저, 가족들이 이 시를 안 읽은 게 확실하다. 확 고소해버릴 위험이 높다. 시절 무서운지 모르는 시인이면 다야? 참 겁 없다.)물론 시의 주제가 나이 들어 찾은 고향의 옛 장터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는 데 있지만, 탤런트 전원주를 닮은 술 따르는 여자들이 니나노를 부르는 ‘버들집’을 제목으로 놓고 결론이 어머니, 아 어머니이면 도대체 이를 어쩌자는 말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인용한 부분만 바라보라. 괜찮은 그림이지?
 역시 나는 간결한 시를 좋아한다. 이 시집 《아픈 천국》을 읽기 시작하자 나온 첫 두 편의 짧은 시가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 맨 첫 번째 시 하나를 소개하려다, 에잇, 짧은 신데 뭐, 하는 생각에 두 편 다 소개하기로 했다.




 반달



 구정물에 뜬 밥알 같은
 하늘의 눈


 하나 남은 눈,
 반쪽 남은 눈을
 마저 지워버리려고


 삼천대천세계의 어둠들이 몰려온다


 몰려왔는데,
 몰려와서는,


 온밤 내 활활 태우고만 있다
 원군처럼




 칼



 시를 쓰면서 사나워졌습니다.
 타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니, 타협으로 숱한 밤을 새워서 그렇습니다


 약한 자는 나날이 악해져 핏발 선 눈을 하고
 더 약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세월이라지요


 날마다 지기 때문에 심장에서 무럭무럭 자라온 한 뼘,
 칼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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