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천국 창비시선 318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 이영광을 예전 철자법에 맞춰 쓰면, ‘이 영광.’ 이름 좋다. 고려대학 영문과 졸업,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직업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래, 교수 정도 돼야 배고프지 않고 시 쓸 수 있다. 시인들은 특히 가방끈을 길게 할 필요가 있으니, 아니면 시인이란 직함 가지고 도무지 번듯한 돈벌이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아예 제목이 <시인들>이다. 이 시를 인용해 시인들의 실루엣을 그려보면 다음 문단과 같다.
 울긋불긋한 선거 현수막이 만장같이 나부낄 때, 얼음장 아래 모인 한 됫박의 마른 물고기들처럼, 오직 시인들끼리(다른 보통 사람들하고는 달리 그래도 시인이란 배고픈 프라이드는 있어서), 시인들이 모여 있다. (이들의 얼굴을 보면) 자리에 앉았는데도 멀리 떠난 얼굴을 한 아픔도 있고, 어디든 너무 깊이 들어앉아 칼끝처럼 자기를 잊은 아픔도 있다. (이들이) 이름 부르면 끌려나가야 할 인질들처럼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직 더 버릴 게 있다는 얼굴들이고, 별로 얻은 게 없는데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표정들을 하고는, 시인들은 영원히 딴 곳을 보고 있다. (시인들의 모습이) 무섭게 아프고 무섭게 태연하다. (그런데 같은 시인이라고)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고, 이상한 것에 정신없이 끌리는 사람이 좋고,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이 좋으며,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 (시인들이 왜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지? 시 말고는, 혹시, 삶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 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바라기를) 마음 가난은 면허 같은 것이니 길이 보전들 하시되, 내년에도 몸이나, 아니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시라고, (같은 시인인 이 시의 작가는) 조등처럼 노랗게 취하며 기원했단다.
 조등. 예전에 죽은 사람이 있는 집, 상갓집에 밤에 등을 달아 놓았는데 그 등을 조등弔燈이라고 한다. 시인은 소주를 잔뜩 마시고도 노란 조등처럼 취하는 거다. 그것도 시인들만 모여 있는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면서 지청구 듣지 않을 수 있는 교수님이나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평소 행동을 보고 좋다고 하고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라고 기원할 수 있는 것이지, 그곳에 모여 있는 아무 시인이나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을 거 같은가? 시인도, 시도 자본 앞에선 벌벌 기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조금 슬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요즘에 특별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긴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시가 길어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여간 별로 마음엔 들지 않는다. 긴 시 속에는 당연히 치명적인 시어들, 딱 마음에 박혀드는 그런 시어들이 있을 확률 또한 많다. 앞 뒤 다 떼버리고 그 부분만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시. <버들집>이란 시에서도 그렇다.


 고향을 미워한 자는 길 위에 거꾸러지지 않고
 돌아와 어느새 그들이 되어 있는데
 수양버들 두 그루는 아득한 옛날에 베어지고 없고
 그 자리, 탯줄 같은 순대를 삶고 있는 국밥집
 삼거리엔 폐업한 삼거리슈퍼
 보행기를 밀고 가는 석양의 늙은 여자는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버들집>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65쪽)이다. 근데 버들집은 고향 원적지의 장터에 있는 ‘니나놋집’이다. 술 따르는 여자들은 다 전원주 같거나 어머니 같고, 혈육이 다 모여 있는 고향 장터라 버들집에서 연애를 하면 그건 다 근친상간이 되는 유서 깊은 술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친상간의 매개가 되는 술 따르는 여자가 어머니 같아? 꼭 그렇게 외갓집 족보를 들먹거려야 하니? (전원주, 혹은 그의 매니저, 가족들이 이 시를 안 읽은 게 확실하다. 확 고소해버릴 위험이 높다. 시절 무서운지 모르는 시인이면 다야? 참 겁 없다.)물론 시의 주제가 나이 들어 찾은 고향의 옛 장터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는 데 있지만, 탤런트 전원주를 닮은 술 따르는 여자들이 니나노를 부르는 ‘버들집’을 제목으로 놓고 결론이 어머니, 아 어머니이면 도대체 이를 어쩌자는 말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인용한 부분만 바라보라. 괜찮은 그림이지?
 역시 나는 간결한 시를 좋아한다. 이 시집 《아픈 천국》을 읽기 시작하자 나온 첫 두 편의 짧은 시가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 맨 첫 번째 시 하나를 소개하려다, 에잇, 짧은 신데 뭐, 하는 생각에 두 편 다 소개하기로 했다.




 반달



 구정물에 뜬 밥알 같은
 하늘의 눈


 하나 남은 눈,
 반쪽 남은 눈을
 마저 지워버리려고


 삼천대천세계의 어둠들이 몰려온다


 몰려왔는데,
 몰려와서는,


 온밤 내 활활 태우고만 있다
 원군처럼




 칼



 시를 쓰면서 사나워졌습니다.
 타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니, 타협으로 숱한 밤을 새워서 그렇습니다


 약한 자는 나날이 악해져 핏발 선 눈을 하고
 더 약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세월이라지요


 날마다 지기 때문에 심장에서 무럭무럭 자라온 한 뼘,
 칼이 무섭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