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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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근사하다. 달빛을 벤다. 여기서 ‘베다’할 때 쓰는 한자가 참斬이다. ‘폭포를 베다’, 하는 느낌과 상당히 유사하다. 중원에 어느 고수가 있어 만월 쏟아지는 밤에 온 몸의 기를 모아 번쩍, 한 번 천하신검을 휘둘러 달빛을 벨 수 있을까. 어려서 본 무협만화에 폭포를 베는 장면이 있었다. 만화니까 가능한 표현, 진짜 폭포가 잠깐 베어지는 그림이 이 단편집을 보면서 떠올랐다. 달빛이나 폭포를 벨 수 있는 중원의 고수가 천하신검으로 인간의 목을 벤다면 어떻게 될까. 모옌의 단편소설 열두 편을 실은 소설선 『달빛을 베다』의 첫 번째 작품 <달빛을 베다>에 나온다. 천하신검을 만드는 대장장이 아버지와 아들 셋도, 베어진 사람의 머리도.
 모옌,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에서 작가가 윌리엄 포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기도 하고, 역자 해설에서 역자가 굳이 포크너와 연결시키려고도 한다. 포크너의 작품이 주로 미시시피 주, 요크나파토파 부근 제퍼슨 시라는 미국 남부의 특정 가상지역을 주요 무대로 한 것과, 모옌이 산둥성 가오미현 둥베이향이란 지역에 집중하여 작품을 쓰는 것부터 비슷하기는 하다. 포크너에겐 흑백 갈등과 혼혈의 문제가 있었고, 모옌에겐 해방과 문화혁명의 혼란기가 있었으며, 두 사람 공통적으로는 전해오는 (신화, 전설 같은 거창한 것들 말고) 지역적인 전승 이야기가 있었다. 모옌에겐 포크너 말고도 다른 작가들의 무수한 작품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며, 이 가운데 당연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포함되니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문학적 요소 역시 중국에서 모옌을 통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하여 가끔 지독히 우화적인 소설이 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을 것.
 이 단편집의 머리말에서 모옌은 자신이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은 엽기,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이런 코멘트가 지극하게 타당할 정도로 책에서는 20세기 초중반과 현대의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이 엽기, 괴기가 인간이나 동물, 날씨 등의 외연을 쓰고 나타난다. 전래 이야기라는 건,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어른들끼리 전래 이야기를 하는 경우란, 서로 해당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전제로 일상적 대화나 농담, 약간의 다툼이 벌어질 때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한 기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모옌 역시 1980년대까지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둥베이향에서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시각의 일부가 어린이의 눈으로 향해 있게 되지는 않았을까. 이제 생각해보니, 외갓집에서 유년 시대를 보냈던 나도 어려서 외할머니로부터 유령이나 도깨비, 망태 할아버지 등에 관한 소름 돋는 이야기 깨나 듣고 자랐다. 어둠이 깔린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목 뒤와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야 했던 이유는 저 먼 기억 속, 유년시절의 한 장면이 오롯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듣고 기억했던 옛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지는 못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비디오테이프에서 쏟아지는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면서 유년을 시작하고 끝마치더니, 컴퓨터 게임과 함께 소년, 청소년, 심지어 청춘시절까지 통과해버렸다. 땅따먹기나 전투 시뮬레이션에 관심이 덜한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어린 시절에 더욱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1세기에 접어들어 문학, 그 가운데 창작이란 장르에서 여성 작가가 압도적으로 남성 작가를 능가하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다. 물론 문학만이 그럴까. 남성임을 증명하는 두 가지, 영역확장과 전투에 관한 본능을 컴퓨터 게임이 능률적이고 경제적이며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한, 앞으로도 남성은 완력을 행사하는 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보다 열위에 처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나는 예언한다. 상상력의 빈곤이란 애초에 열위inferiority를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옌이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이 궁벽한 농촌지역에서 들은 귀신, 요괴, 도깨비 이야기가 이 소설집의 원천. 그리하여 비록 무대가 21세기 현대 중국의 대도시일지라도 곳곳에 마르케스 취향의 환상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해방전쟁의 와중에서는 물론 혁명과 반동의 시대에서도 포크너 비슷한(<압살롬, 압살롬>, <8월의 빛> 참조) 괴기스러움도 보인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거창한 인물들인 포크너나 마르케스 보다는 안데르센이나 그림, 특히 그림 형제들의 우화가 더 확 다가오더라는 거. 약간 과장하면, 모옌의 우화집이라고 책의 성격을 확정지어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옌도 일찍이 <풀 먹는 가족들>이란 장편소설을 통해 역시 둥베이 현에서 살던 한 가족들의 엽기발랄한 우화를 만든 적이 있는 바에야 작가가 가진 몇 가지 경향 가운데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근데, 단편소설의 나라에 사는 독자 입장에선 기대에 충족하는 외국 단편 작품을 읽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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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옌의 이런 책이 다 있었네요.

<개구리>부터 읽어야 하는데...

Falstaff 2019-03-04 20:18   좋아요 0 | URL
<개구리>하고는 같은 동네 이야기지만 많이 다른 분위기입니다.
<개구리>에서 올챙이 죽이는 것에 국가적 사명을 어깨에 걺어진 고모와 조금 다릅니다. ㅋㅋㅋ 더 알려드리면 재미 없을 거 같아서요.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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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에 초판 1쇄를 찍은 단편집. 아직도 초판이긴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은 2010년 간행한 5쇄 판. 요즘처럼 문학이 구박받는 시절에 5쇄면 꾸준히 읽힌 작품이란 뜻. 이응준을 읽은 건, 2015년 여름에 이 사람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당시엔 평론가인줄 알았다가, 인터넷 서핑 중에 소설가란 얘기를 듣고 그길로 이름을 검색, 맞춤하게도 헌책이 나와 있기에 한 권 읽어보게 됐다.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단편선. 민음사가 자랑하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오늘의 작가 총서” 스물일곱 번째 책이다. 이응준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당연히 영숙이가 남의 책을 베낀 사연 때문이었다. 지난 세기부터 사적 공간에서 알고 있던 작가 지망생 가운데 한 명이 얼마나 그 여자를 좋아하는지 말도 못해서, 일단 영숙이 데뷔작 <외진 방>을 읽어봤다. 허, 이거 봐라. 영숙이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절세의 단편 가운데 오정희가 쓴 <중국인 거리>가 있던 터. 나도 그 단편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특별하게 마지막 문장, “초조였다.”를 처음 읽은 당시 숨넘어가는 충격을 당할 작품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고 줄창 주장하고 있던 차에 영숙이의 데뷔작이라고 칭하는 <외진 방>의 마지막 문장이, “초경이었다.”로 마감하는 걸 보고는,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나는 데뷔작부터 의도적으로 ‘플롯 표절’을 한 거라고 판정을 내렸으나 그 정도를 가지고 한창 뜨고 있는 작가에게 ‘표절’ 운운 할 수 없었다. 그 후 영숙이가 쓴 책 몇 권을 더 읽었고, <기차는 일곱 시 반에 떠나네>에서 결정적으로 작가적 역량이 완전히 떨어졌음을 확인하고는 (이 책도 그 작가지망생이 영숙이 서명을 받아 내게 선물해서 읽었다) 거들떠도 안 보던 상태였다. <기차는....> 쯤 해서 영숙이는 이제 문학이란 뮤즈가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붓을 놨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다른 작품들을 교묘하게 변형해, 소설을 쓰는 대신 책을 찍어내다가 2015년 이응준에게 ‘기쁨을 아는 몸’이 발각되어 끔찍하지만 정직한 벼락을 맞았고 지금은 위키피디아에서도 뚜렷한 '낙인이 찍힌 몸'이 되어버렸으며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영숙이 책은 전부 다 쓰레기 통으로 쑤셔박혔다. 당시까지 몇몇 출판사에 돈을 벌어다준 영숙이 측근에 무시무시한 문학권력들이 있어 그녀를 비호하던 상황에서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이응준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는가. 뭐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그런 사실이 바로 어제처럼 기억나는 상태에서 책을 한 권 발견했으니 어찌 안 읽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이응준이 70년 개띠. 김지영과 ‘띠 동갑’이다. 단편 소설들 가지고 작품의 스토리를 얘기할 수는 없고, 그냥 읽은 감상 또는 느낌만 몇 가지 이야기하자.
 1.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독자들은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이 작품집이 나온 시기가 2005년. 작가의 나이 서른다섯. 주로 서른 살 내외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건 자연스럽고, 그리하여 10대 후반부터 20대 시절까지 참 감수성 돋게 잘 묘사를 했다.
 2. 20대, 가장 축복받았으나 동시에 가장 저주받은 우울하고 힘겨운 시절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작품 속에 안개가 가득하다.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에서는 두 주인공이 청소년시절을 보낸 장소가 ‘청무靑霧’ 푸른 안개라는 이름을 가진 소도시이기까지 하다. 무진霧津 때와 마찬가지로 우울증 있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멀리 하시라.
 3. 주인공 전부가 우울하지만 20대, 심지어 서른 살 넘어서까지 별다른 직업이 없어도 물려받은 재산 가지고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산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거 없어 3포 시대의 주인공이란 생각이 드는 젊은이들은 열 받을 수 있으니 선택에 신중을 기하시라. 당신들이 보기에 주인공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몽땅 다 엄살이나 어리광으로 비칠 수 있다.
 4. 첫 번째 작품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에선 유방암이 폐로 전이되어 죽어가는 엄마와 돈 잘 버는 회계사를 직업으로 가진 꼽추 친구, <그녀에게 경배하시오>에선 한쪽 다리를 저는 키 크고 전직 프로 레슬러였던 아빠를 둔 여성, 기타 등등 장애인을 등장시켜 그들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그들이 자학적으로 ‘병신’이란 말을 자꾸 되뇌는 것이 언짢다.
 5. 제일 중요한 것. 문장이 과도하게 윤문되어 있다. 쉬운 얘기로 너무 멋을 부린 문장들의 연속. 제일 멋있는 건, 하나도 멋을 부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멋있게 보이는 문장이란 만고의 진리를 잠깐 잊은 것이 분명하다. 직유와 은유를 쓰지 않은 문장이 연속해서 네 번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다. 물론 책 전부를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젊은 작가 지망생이 혹시 이응준을 따라 할까봐 걱정이 들 정도. 거꾸로 이야기해서 소위 말해, ‘밑줄 긋기’ 시합이 있다면 단연 일등을 차지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가, 이이가 이젠 소설보다 시를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아시다시피 난 시인이 쓰는 소설, 소설가가 쓰는 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더. 책 뒷날개를 보면 민음사가 찍은 <오늘의 작가 총서> 목록이 죽 나온다. 김동리의 <무녀도·황토기>가 1번, 황순원의 <별>이 2번 이렇게 나가다가 21번이 선우휘 <불꽃>, 22번 최인훈 <웃음소리> 23번 박범신, 24번 윤후명, 25번 박상우, 26번 이승우, 하다가 27번엔 전격적으로 젊은 작가 이응준이 뜬다. 민음사가 이응준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보여주는 목록일 수도 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다. 윤후명과 박상우 사이, 이승우와 이응준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다. 잠깐 시리즈가 쉬었었나?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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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2-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십니다.

Falstaff 2019-03-08 10:23   좋아요 0 | URL
윽, 별말씀을요.
 
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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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중반 프랑스에 알랭 로브그리예, 라는 작가가 나타나 사물이나 인간의 모습에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해서 한 시절을 풍미하는 사조思潮 누보로망이 태어난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프랑스 소설문학 특유의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재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나무 그림자 하나를 묘사한다고 가정하자. 여태까지 프랑스 소설가들은 “석양을 받은 도금양 나무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늘어섰다.” 이 정도였는데, 로브그리예가 쓴 <질투>이던가 <엿보는 자>이던가 <밀회의 집>을 보면 “오후 다섯 시 이십칠 분의 태양빛을 받은 도금양의 그림자는 실제 키 3.5 미터보다 2.3배가 더 큰 모습으로 박공이 전체의 25% 차지하는 총 109 제곱미터의 벽면에 17.9도 기울어 있고……” 이런 식으로 바뀐다. 그냥 흉내만 내본 것이다. 감정이 포함되지 않은 드라이한, 하이퍼레알리즘 적 묘사.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나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이런 노력은, <시르트의 바닷가>를 쓴 소설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쥘리앙 그라크에 의하여, ‘과하게 미분화한 시각’이 독자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로브그리예 이후 프랑스 소설문학에서 상당히 많은 작품 속에 어느 정도는 소위 누보로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평소에 주장하던 것이었으며(비슷한 말이 이 책 해설에 적혀 있는 걸 보고 반갑기도 했는데), 미셸 오스트,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평생 단 두 편의 소설만 썼다. 그럴 만하지 뭐)가 쓴 <밤의 노예> 첫 부분부터 다시 비슷한 생각에 잠기게 됐다. 이거, 대단히 부드럽게 묘사한 거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면, 파리와 센 강 구경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 입장에선 지독하게 지겹게 읽었다는 뜻. 아, 앞부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이나 <꿈꿀 권리> 같은 책에서 익숙했던 매우 심오하고 그럴싸하지만 동시에 지루한 미적 관점에다가 누보로망 식의 미분화된 시각을 더한 글을 퇴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 침침해진 눈으로 읽어야 했으니 안 그러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독후감을 읽고 <밤의 노예>를 읽으실 분들이여, 그러나 이 고비만 지나가자. 그러면 참 독특한 부모와, 독특한 부모 덕택에 인생을 지질하게 보내야 하는 중년의 남자가 풀어내는 20세기 식 흥미진진한 테세우스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테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는 이 이야기가 크레타 섬에서 있을 법하다고 말함으로써, 1939년생의 지질한 남자이자 주인공인 필립 아르쉐를 테세우스와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럼 아리아드네는? 필립의 시 쓰는 유대인 여자 친구 폴라 로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중간쯤 읽고 나서 무심코 책 뒤표지에 적힌 문구를 봤다는 것.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선’ 시리즈는 원래 1980년대 중후반에 초판을 찍은 것으로, 나름대로 다양한 구색을 갖추었으나(이 시리즈 가운데 단 한 권을 추천한다면 포드 매덕스 포드가 쓴 <훌륭한 군인>을 꼽겠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절대 뒤표지에 소개해놓은 책의 스토리를 읽지 말아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땅 끝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 마누라를 데리고 올라오는 오르페우스에게 지상에 닿을 때까지 절대로 사랑하는 에우리디체의 얼굴을 바라보지 말라고 치사한 조건을 다는 것처럼. 물론 오르페우스는 다시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윤회해야 하는 에우리디체를 불쌍하게 여겼기도 하고, 조잘대는 에우리디체의 잔소리를 듣다가 또다시 복잡한 가정생활로 진입해야 하는 게 염증이 나기도 해서, 에잇, 여기서 끝내고 말자, 휙 뒤를 돌아 에우리디체를 영원히 하계로 떨어지게 했겠지만, 하여간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주문처럼 뒤표지를 안 보고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다. 나도 유혹을 이기지 못해 중간쯤 읽다가 뒤표지를 봤으며, 그걸로 김샜다.
 <밤의 노예>는 모두 4부로 되어 있다. 1부의 소제목은 “평범한 소년.”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쓰자면 이렇다.

 “엄마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그 불친절한 행성(行星:집)에 막 상륙한 정찰자(얼마 후 엄마의 정부가 될 남자)는 우리 두 사람의 난폭한 관계에 틀림없이 깜짝 놀랄 것이다.”  (23쪽: 괄호는 필자.)
 엄마는 필립이 어려서부터 아들,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라 외아들인데, 아들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사납게 반대하고, 비아냥거리고, 무시하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 같은 피드백만 쏟아 부어 단기적으로 필립에게 발작을 일으키는 현상을 만들어냈고, 중장기적으로는 사회 부적응자, 무능력자, 의기소침한 인물, 완벽한 실업자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래 지금 마흔 살이 됐는데도 예순이 넘은 엄마와 한 아파트에서 동전 한 푼 없이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존하며 산다. 엄마는 완전한 폭군이기도 하고, 아들에겐 적극적인 압제자이자 모든 기회의 박탈자로 존재하며, 유일하게 현재 연애하고 있는 유대인 시인 아가씨하고의 연애에만 만족한다.
 그럼 아버지는? 어려운 문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레지스탕스를 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사업체를 발전시켜 독일군대에 물자를 대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독일군이 가까운 시일 내에 벌일 극비 작전을 빼내 레지스탕스와 영국군에게 전송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엔 이런 역할을 하는 저항군도 많았고, 그 가운데엔 고급 창녀들도 포함한단다. 독일군 장교들이 단골로 다니는 유곽 건물의 꼭대기 층에 최신식 모르스 무선송수화기를 장착 하고나서 임시 독일 대사관에서 벌어진 무도회나 유곽의 비밀스런 방에서 얻은 고급 작전을 미리 포착해 런던 폭격, 파리 시내 유대인 일제 검색 같은 걸 미리 알려줌으로 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 친 독일 경제행위의 죄목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일순간에 사라져야 했으며, 독일 장교와의 빈번한 잠자리를 이유로 머리카락을 박박 깎인 채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단다. 스파이 역할은 대놓고 할 수 없는 성격이었을 테니. 게다가 드골 정부가 친독인사들에게 얼마나 엄정했던가. 전쟁 중 엄격한 통행금지 하에도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버지는 구하기 힘든 음식들을 한 보따리 안고 들어와 잠깐의 안부를 전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냥 구둣발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기억이 남아있다. 조용한 밤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만 정적으로 깨던 시절. 그리 키가 크지 않았으나 어떤 거인보다도 찬란한 진정한 거인의 풍모를 필립은 가슴에 담고 살았다.


 “과거. 우리가 끊임없이 눈치를 채지만 어쩔 수가 없는 그 모든 자기 분열. 나는 조금도 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미래보다는 과거나 자기 분열 쪽으로 향해 있다. 많은 동시대인들과 어떤 부패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부패라는 것이 더 유쾌하거나 기분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온몸이 습진에 걸린 한 마리 개다. 나는 나의 오래된 흉터, 추억들을 맹렬히 긁어댄다. 나의 추억은 불바다, 피바다로 변했다.” (64~65쪽)


 아무 사회생활도 하지 않는 필립 아르쉐에게 남은 것은 레지스탕스를 위한 스파이였던 자랑스런 아버지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와 생각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만 일삼는 어머니, 전쟁 후 아버지가 사라지자 아버지 대신 회사를 경영하고 집안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똑똑한 경영인 토니 소앙에 의하여 만들어진 과거라는 틀 속에 갇혀 있다. 전형적으로 불행한 사람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 1부에선 주인공 필립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담이다. 2부는 엄마 지네트가 필립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과거를 통해 아들과 엄마가 함께 겪은 외조부모가 어떻게 다른 추억을 만들었는지, 기억과 시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 전율하게 만든다. 3부는 애인 폴라 로펜과 함께 했던 며칠을 중심으로 폴라의 아버지를 통해 오래 전에 사라진 자신의 친부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게 되고, 드디어 아리아드네 역할을 하는 폴라를 버리고 아버지를 찾아 미노스의 미궁으로 잠입하는 4부에 관해서는, 안 알려줌. 다만, 책이 4부에 접어들었는데, 지금 책을 펼친 장소가 버스나 지하철이라면 이젠 덮을 시간이 됐다는 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읽지 못할 정도로 야한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만 찔끔, 알려드린다.
 초입에 얘기했듯이 현미경적 묘사가 가끔 신경줄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 책을 써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공쿠르 상 수상작품에 대해 조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공감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며, 흥미를 자아낼 만큼 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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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영미 옮김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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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엘 도르프만이 <우리집에 불났어>도 썼다는 건 책을 다 읽은 후 역자 해설을 슬쩍 훑어보면서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는 전혀 감도 잡지 못했는데, 그건 작품의 무대가 <우리집...>은 피노체트 독재 하의 칠레였던 반면, <블레이크 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친환경 제품을 만드는 한 공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품의 내용이나 성격도 완전히 다르기도 했다. 도르프만, 이 작가의 삶 자체가 참 파란만장했는데,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UN이 있는 뉴욕 근방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또 열두 살 때 부모를 따라 칠레 산티아고에 정착한다. 머리가 커져 성인이 되고, 대학 교수가 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비민주적인 체제에 대한 인식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으로 아옌데를 지지하게 되고, 피노체트 일당이 기관총으로 대통령 궁 옥상에서 아옌데를 쏘아 죽인 이후 또다시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세계인의 삶을 살게 되는 유대인의 후예. 우린 이런 이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물론 하나 주워들은 거 가지고 잘난 척하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도르프만이 이 작품을 책으로 낸 것이 2001년. 유일하고 결코 만만하지 않은 적敵이었던 공산주의를 지난 세기 말까지 깔끔하게 제거하고 바야흐로 새롭게 21세기의 눈을 뜬 자본주의는 새로운 이익창출을 위해 극한 경쟁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익의 증대를 위하여 자본주의는 합리적 구조조정이란 미명 아래 사정없는 해고를 감행하여 가진 것 없는 무산자無産者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대가로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기 시작했다. 책의 주인공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는 친환경 상품과 윤리 경영을 모토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회사의 대표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다. 첫 장면에서 이이는 극한 경쟁을 하며 생긴 불안 증세와 회사 경영의 도덕성 등에 대한 갈등으로 심한 불면증을 호소한다. 그리하여 정신과 치료를 한 달 동안 받게 되는데, 이름도 어여쁜 ‘록산나’라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아가씨의 가족이 사는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이들에 대한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전능한 권력을 갖게 된다. 이 치료법이 책의 한국어 제목인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이 되는 것.
 한 가족이 사는 모습을 전부 생방송을 통해 관찰하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록산나 아가씨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래 당연히 질투심도 발동해 록산나의 애인 ‘조니’를 날조된 죄목으로 감방에 집어 넣어버린다. 말 그대로 전능한 권력을 쥐게 된 것. 대가代價는 좀 비싸다. 기업의 CEO로서 치룰 수 있는 대가로 돈밖에 더 있는가. 가비얍게 3백만 달러. 33억원 조금 넘는 돈이다. 그러나 아무리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한 가족의 삶을, 심지어 화장실에서 배변하는 모습까지 다 관찰할 수 있고, 죄 없는 한 인간 개체에게 누명을 씌워 감방으로 보내버리면, 돈이 많아 33억 원을 치료비로 낼 수 있는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 말고, 완전하게 관찰 당하면서 한 인간의 오락가락하는 변덕 때문에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가족들은 그럼 뭐가 되는가 말이지. 실제로 록산나의 애인 조니는 감방 안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생명이 끊어진 채 발견되기에 이른다.
 짧은 소설이라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을 맺자. 당연히 난 그저 시작 부분만 맛보기로 운을 뗐을 뿐이다. 정말 위에 소개한 내용으로 흘러가는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그런데, 만일 이런 치료법을 시행하는 정신과 의사와 정신병원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33억 원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대기업 총수 정도 되는 환자들만 고객으로 받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 평소 건강에 이상이 있는 총수나 직계 가족 정도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관찰해 이들이 만일 자기 환자로 올 경우를 대비해 적절한 가족이나 인물을 수배해 집안 곳곳에 소형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아야 할 것이다. 총수의 기분에 따라 한 명 정도는 죽일 수도 있는 만만한 가족을 고르는 것도 필수겠고.
 하지만 책을 정말로 읽으면 지금 하고 있는 걱정보다 더 와서 닿는 것이 있으니, 첫 번째로 독백체로 쓴 능란한 문장의 흐름이다.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열 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다른 인물이 독백을 한다. 그래 마치 누군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듣는 느낌이며, 독백들이 매우 유려하면서도 간혹 쇼킹하기도 하고, 심지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미궁에 빠뜨리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심리치료 당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아름다운 록산나와 실생활에서의 콜럼비아 출신의 또 다른 아름다운 아가씨와 그 가족을 통해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가 어떻게 혼동을 하는지도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블레이크 사장님은 비정하기도 한 이런 심리치료법을 통해 경쟁과 이익 증대의 살벌한 정글에서 아직도 20세기적 미덕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작가 도르프만이 에필로그에서 이런 화두의 결론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만큼 친절하지는 않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출판사 창비의 책 소개나 광고가 작가의 일생과 책의 내용에 국한하는 것이 불만일 정도로 교묘한 구성이 돋보이며, 이에 못하지 않는 것으로 도르프만 또는 김영미의 번역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유려한 문장이란 점을 기어이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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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작년에 한참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에
빠져 살 때, 산 책이네요. 미처 못 읽고 다른
책만 읽었네요 :>

도르프만, 좀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9-02-25 15: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이 사람한테 좀 더 관심을 둬야겠습니다. ^^
 
독립기념일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9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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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황하는, 그러나 방황을 거의 끝내가는, 책에선 ‘존재의 시기’라고 일컬을 시절을 맞은 40대 이혼남이자 부동산 중개업자 프랭크 배스컴 이야기. 전처 ‘앤’은 부르주아 건축가 찰리와 재혼을 했다. 찰리의 자녀들은 다 커서 독립해 나갔고, 이제 앤의 아들 폴과 딸 클래리사, 이렇게 넷이, 잘 살 거 같지? 그럼 그게 인생인가. 당연히 지지고 볶는 현상이 ‘또’ 벌어진다. 어느 날 폴이 슈퍼마켓에서 콘돔을 한 통 훔치려다 발각이 나 베트남 출신 여자 경비원하고 치고 박고 엎어졌다 메쳤다, 난리를 부린 후 검거된다. 몸싸움 중 열다섯 살 폴이, 몸집은 작지만 분명히 동양 무술 하나 정도는 해결했을 베트남 출신 경비원의 얼굴에,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이제 법원의 심판을 기다리는 상태다. 잠깐 딴 얘기. 한국 남자들아, 우리나라 여자들 고마운 줄 알고나 살자. 폴이 훔치려 한 콘돔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 4XL. 쉽게 풀어쓰면 XXXXL. 세상에 그만한 걸 달고 다니는 인간 종족들도 쌔고 쌨다.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어울릴 사이즈는 잘 봐줘도 XS, ‘엑스트라 스몰.’ 이거 하나, XS에 만족하는 척하면서 같이 살아주는 거 가지고도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한없는 존경을 바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지.
 에잇, 그래. 콘돔 얘기 나온 김에 무려 40년 전에 정여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방 쾅. 냉전 시절에 잠깐 인디언 섬머가 온 적이 있었나보다. 1970년대 초반이었던가 그랬다고 한다. 당시 소련이 사이가 좋아진 미국에게 물품 구매를 위해 샘플 요청을 했단다. 그게 바로 콘돔. 사이즈는 30cm. 지금 재보니까 내 손목부터 팔꿈치 선, 헌혈 할 때 피 뽑는 자리까지가 대략 25cm. 그러니까 내 ‘하박’보다도 5cm가 더 긴 콘돔을 주문한 거다. 그리곤 크렘린 궁에서 킬킬거리고 있었겠지. 한 달이 지나고 미국 항공운송 전문 비행사 플라잉 타이거 FT204기에 실린 샘플이 도착했다. 표준 수출 포장, 영어로 하면 standard export packing을 뜯고 드디어 콘돔 박스를 보니 이렇게 썼더란다. “Small." 진짠지 아닌지 정여사가 너무 높이 계셔서 확인 불가.
 하여간 슈퍼마켓에서의 좀도둑질로 폴은 본격적인 아동심리학적 분석과정에 들어서고, 이미 프랭크 배스컴의 둘째 아들이자 이젠 외아들이 된 폴이 이전부터 뇌에 무슨 신호가 오면 ‘이이이크크크’라고 신음을 하던지, 살아 있으면 열세 살이 됐겠지만 일찌감치 교통사고를 당해 정원에 묻힌 반려견 흉내를 내 컹컹, 멍멍 짖는 일이 있었으며, 아직도 이런 버릇은 뇌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화학작용이 벌어질 때마다 계속되고 있는 상태. 프랭크는 마침 월요일이 독립기념일이어서 폴과 일요일, 월요일을 함께 지내며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둘러볼 예정이다. 천생 신사로 품위 있는 삶과 취미와 직업을 영유하는 엑스 와이프의 남편 찰리, 이이가 정말 불쌍한 남자인데, 폴이 자신과 잘 어울리기만 하면 아내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줄 수 있는 아량과 양식과 도덕과 윤리의식과 책임감과, 남의 눈치를 볼 줄 아는 인간이지만, 아이들은 도무지 찰리와 잘 지내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착한 남편 찰리와 앤, 앤이 데려온 ‘딸린 새끼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눈치 채게 되고, 그건 앤의 전남편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눈에 뭐가 씌워서 두 번째 결혼을 저지르고 만 찰리가 반편이지, 반편이야. 어느 정도냐 하면 프랭크가 폴을 데리러 오기 바로 전에 폴과 늙은 찰리가 거친 몸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 폴이 보트의 무쇠 놋좆으로 의붓아버지의 얼굴을 내리쳤던 것. 여기서 또 한 가지.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약 중인 박영원은 은어도 아니고, 비어도 아니고, 속어도 아닌 ‘놋좆’이란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걸 풀이해 ‘노걸이’로 밀고 나간다. 왜 놋좆을 놋좆이라고 하지 못할까. 음.
 기본 줄거리는 위와 같다. 근데, 작가 리처드 포드의 연표를 보니까 스물네 살에 (미시건)대학동창인 크리스티나 헨슬리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 살았다. 뭐 이들이라고 행복했겠어? 다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우여곡절을 겪었겠지. 심지어 아내 크리스티나가 뉴올리언스 도시계획위원회의 이사로 임명이 되자 기꺼이(진짜로 기껍진 않았더라도) 아내와 함께 뉴올리언스로 이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듯 이혼한 사십대 남자의 심리상태를 기막히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참 대단하다할밖에. 아울러 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직업인으로 매도인과 매수인의 심리상태, 진상 고객들이 차례대로 부리는 변덕의 오묘함,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번히 아는 고단수 중개업자의 이해심 같은 것도 참 맛나게 잘 썼다. 이혼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 아직도 삶의 지뢰는 곳곳에서 펑펑 터지고 있는 중이라, 어려서 학대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작은 짐승을 죽이는데 쾌감을 얻지도 않았으며 야뇨증도 없는 걸 보니 연쇄살인범으로 진화할 거 같지는 않은 아들 폴은 분열증을 겪고 있어 개처럼 짖으며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과격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받고 싶어 하고, 이혼하면 그것으로 딱 줄을 긋듯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던 전처 앤이 다른 놈과 잘 사는 걸 보자마자 화산 폭발 같은 질투가 솟구치기도 하고, 베트남전 참전 후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잊으려 하는 셸리라는 이름의 유부녀와의 관계가 이게 정말 사랑인지 아닌지, 결혼이란 걸 한 번 더 해야 하는지 아닌지 헛갈리기만 하며, 자신이 투자한 집에 세든 건장하고 권총을 가진 남자로부터는 도무지 월세를 지불하고 싶은 마음을 확인할 수도 없는 딱 이런 순간에 감행해야 하는 독립기념일의 아들과의 명예의 전당 방문.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전형적인 미국 현대소설. 모든 것은 지나가리니. 그것도 순간순간 미국식 유머라는 소스를 얹은 만찬으로 리처드 포드는 당신을 인도할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그냥 글이 쓰여 있는 대로 읽어나가기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고, 한숨도 쉬고, 긴박하기도 하고, 아주 간혹 조금 지루할 수도 있고, 또다시 웃으면서, 책을 덮을 즈음, 오랜만에 괜찮은 책 하나 읽었다, 하고, 리처드 포드, 이이가 쓴 다른 책 또 없나, 뒤져보려 인터넷을 켤지도 모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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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2-23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Falstaff 2019-02-23 10:37   좋아요 0 | URL
별거 없는 감상문을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