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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2005년에 초판 1쇄를 찍은 단편집. 아직도 초판이긴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은 2010년 간행한 5쇄 판. 요즘처럼 문학이 구박받는 시절에 5쇄면 꾸준히 읽힌 작품이란 뜻. 이응준을 읽은 건, 2015년 여름에 이 사람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당시엔 평론가인줄 알았다가, 인터넷 서핑 중에 소설가란 얘기를 듣고 그길로 이름을 검색, 맞춤하게도 헌책이 나와 있기에 한 권 읽어보게 됐다.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단편선. 민음사가 자랑하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오늘의 작가 총서” 스물일곱 번째 책이다. 이응준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당연히 영숙이가 남의 책을 베낀 사연 때문이었다. 지난 세기부터 사적 공간에서 알고 있던 작가 지망생 가운데 한 명이 얼마나 그 여자를 좋아하는지 말도 못해서, 일단 영숙이 데뷔작 <외진 방>을 읽어봤다. 허, 이거 봐라. 영숙이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절세의 단편 가운데 오정희가 쓴 <중국인 거리>가 있던 터. 나도 그 단편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특별하게 마지막 문장, “초조였다.”를 처음 읽은 당시 숨넘어가는 충격을 당할 작품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고 줄창 주장하고 있던 차에 영숙이의 데뷔작이라고 칭하는 <외진 방>의 마지막 문장이, “초경이었다.”로 마감하는 걸 보고는,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나는 데뷔작부터 의도적으로 ‘플롯 표절’을 한 거라고 판정을 내렸으나 그 정도를 가지고 한창 뜨고 있는 작가에게 ‘표절’ 운운 할 수 없었다. 그 후 영숙이가 쓴 책 몇 권을 더 읽었고, <기차는 일곱 시 반에 떠나네>에서 결정적으로 작가적 역량이 완전히 떨어졌음을 확인하고는 (이 책도 그 작가지망생이 영숙이 서명을 받아 내게 선물해서 읽었다) 거들떠도 안 보던 상태였다. <기차는....> 쯤 해서 영숙이는 이제 문학이란 뮤즈가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붓을 놨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다른 작품들을 교묘하게 변형해, 소설을 쓰는 대신 책을 찍어내다가 2015년 이응준에게 ‘기쁨을 아는 몸’이 발각되어 끔찍하지만 정직한 벼락을 맞았고 지금은 위키피디아에서도 뚜렷한 '낙인이 찍힌 몸'이 되어버렸으며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영숙이 책은 전부 다 쓰레기 통으로 쑤셔박혔다. 당시까지 몇몇 출판사에 돈을 벌어다준 영숙이 측근에 무시무시한 문학권력들이 있어 그녀를 비호하던 상황에서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이응준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는가. 뭐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그런 사실이 바로 어제처럼 기억나는 상태에서 책을 한 권 발견했으니 어찌 안 읽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이응준이 70년 개띠. 김지영과 ‘띠 동갑’이다. 단편 소설들 가지고 작품의 스토리를 얘기할 수는 없고, 그냥 읽은 감상 또는 느낌만 몇 가지 이야기하자.
1.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독자들은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이 작품집이 나온 시기가 2005년. 작가의 나이 서른다섯. 주로 서른 살 내외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건 자연스럽고, 그리하여 10대 후반부터 20대 시절까지 참 감수성 돋게 잘 묘사를 했다.
2. 20대, 가장 축복받았으나 동시에 가장 저주받은 우울하고 힘겨운 시절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작품 속에 안개가 가득하다.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에서는 두 주인공이 청소년시절을 보낸 장소가 ‘청무靑霧’ 푸른 안개라는 이름을 가진 소도시이기까지 하다. 무진霧津 때와 마찬가지로 우울증 있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멀리 하시라.
3. 주인공 전부가 우울하지만 20대, 심지어 서른 살 넘어서까지 별다른 직업이 없어도 물려받은 재산 가지고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산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거 없어 3포 시대의 주인공이란 생각이 드는 젊은이들은 열 받을 수 있으니 선택에 신중을 기하시라. 당신들이 보기에 주인공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몽땅 다 엄살이나 어리광으로 비칠 수 있다.
4. 첫 번째 작품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에선 유방암이 폐로 전이되어 죽어가는 엄마와 돈 잘 버는 회계사를 직업으로 가진 꼽추 친구, <그녀에게 경배하시오>에선 한쪽 다리를 저는 키 크고 전직 프로 레슬러였던 아빠를 둔 여성, 기타 등등 장애인을 등장시켜 그들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그들이 자학적으로 ‘병신’이란 말을 자꾸 되뇌는 것이 언짢다.
5. 제일 중요한 것. 문장이 과도하게 윤문되어 있다. 쉬운 얘기로 너무 멋을 부린 문장들의 연속. 제일 멋있는 건, 하나도 멋을 부리지 않아서 오히려 더 멋있게 보이는 문장이란 만고의 진리를 잠깐 잊은 것이 분명하다. 직유와 은유를 쓰지 않은 문장이 연속해서 네 번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다. 물론 책 전부를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젊은 작가 지망생이 혹시 이응준을 따라 할까봐 걱정이 들 정도. 거꾸로 이야기해서 소위 말해, ‘밑줄 긋기’ 시합이 있다면 단연 일등을 차지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가, 이이가 이젠 소설보다 시를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아시다시피 난 시인이 쓰는 소설, 소설가가 쓰는 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더. 책 뒷날개를 보면 민음사가 찍은 <오늘의 작가 총서> 목록이 죽 나온다. 김동리의 <무녀도·황토기>가 1번, 황순원의 <별>이 2번 이렇게 나가다가 21번이 선우휘 <불꽃>, 22번 최인훈 <웃음소리> 23번 박범신, 24번 윤후명, 25번 박상우, 26번 이승우, 하다가 27번엔 전격적으로 젊은 작가 이응준이 뜬다. 민음사가 이응준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보여주는 목록일 수도 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다. 윤후명과 박상우 사이, 이승우와 이응준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다. 잠깐 시리즈가 쉬었었나? 뭐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