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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영미 옮김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아리엘 도르프만이 <우리집에 불났어>도 썼다는 건 책을 다 읽은 후 역자 해설을 슬쩍 훑어보면서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는 전혀 감도 잡지 못했는데, 그건 작품의 무대가 <우리집...>은 피노체트 독재 하의 칠레였던 반면, <블레이크 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친환경 제품을 만드는 한 공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품의 내용이나 성격도 완전히 다르기도 했다. 도르프만, 이 작가의 삶 자체가 참 파란만장했는데,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UN이 있는 뉴욕 근방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또 열두 살 때 부모를 따라 칠레 산티아고에 정착한다. 머리가 커져 성인이 되고, 대학 교수가 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비민주적인 체제에 대한 인식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으로 아옌데를 지지하게 되고, 피노체트 일당이 기관총으로 대통령 궁 옥상에서 아옌데를 쏘아 죽인 이후 또다시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세계인의 삶을 살게 되는 유대인의 후예. 우린 이런 이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물론 하나 주워들은 거 가지고 잘난 척하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도르프만이 이 작품을 책으로 낸 것이 2001년. 유일하고 결코 만만하지 않은 적敵이었던 공산주의를 지난 세기 말까지 깔끔하게 제거하고 바야흐로 새롭게 21세기의 눈을 뜬 자본주의는 새로운 이익창출을 위해 극한 경쟁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익의 증대를 위하여 자본주의는 합리적 구조조정이란 미명 아래 사정없는 해고를 감행하여 가진 것 없는 무산자無産者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대가로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기 시작했다. 책의 주인공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는 친환경 상품과 윤리 경영을 모토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회사의 대표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다. 첫 장면에서 이이는 극한 경쟁을 하며 생긴 불안 증세와 회사 경영의 도덕성 등에 대한 갈등으로 심한 불면증을 호소한다. 그리하여 정신과 치료를 한 달 동안 받게 되는데, 이름도 어여쁜 ‘록산나’라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아가씨의 가족이 사는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이들에 대한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전능한 권력을 갖게 된다. 이 치료법이 책의 한국어 제목인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이 되는 것.
한 가족이 사는 모습을 전부 생방송을 통해 관찰하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록산나 아가씨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래 당연히 질투심도 발동해 록산나의 애인 ‘조니’를 날조된 죄목으로 감방에 집어 넣어버린다. 말 그대로 전능한 권력을 쥐게 된 것. 대가代價는 좀 비싸다. 기업의 CEO로서 치룰 수 있는 대가로 돈밖에 더 있는가. 가비얍게 3백만 달러. 33억원 조금 넘는 돈이다. 그러나 아무리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한 가족의 삶을, 심지어 화장실에서 배변하는 모습까지 다 관찰할 수 있고, 죄 없는 한 인간 개체에게 누명을 씌워 감방으로 보내버리면, 돈이 많아 33억 원을 치료비로 낼 수 있는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 말고, 완전하게 관찰 당하면서 한 인간의 오락가락하는 변덕 때문에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가족들은 그럼 뭐가 되는가 말이지. 실제로 록산나의 애인 조니는 감방 안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생명이 끊어진 채 발견되기에 이른다.
짧은 소설이라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을 맺자. 당연히 난 그저 시작 부분만 맛보기로 운을 뗐을 뿐이다. 정말 위에 소개한 내용으로 흘러가는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그런데, 만일 이런 치료법을 시행하는 정신과 의사와 정신병원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33억 원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대기업 총수 정도 되는 환자들만 고객으로 받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 평소 건강에 이상이 있는 총수나 직계 가족 정도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관찰해 이들이 만일 자기 환자로 올 경우를 대비해 적절한 가족이나 인물을 수배해 집안 곳곳에 소형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아야 할 것이다. 총수의 기분에 따라 한 명 정도는 죽일 수도 있는 만만한 가족을 고르는 것도 필수겠고.
하지만 책을 정말로 읽으면 지금 하고 있는 걱정보다 더 와서 닿는 것이 있으니, 첫 번째로 독백체로 쓴 능란한 문장의 흐름이다.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열 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다른 인물이 독백을 한다. 그래 마치 누군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듣는 느낌이며, 독백들이 매우 유려하면서도 간혹 쇼킹하기도 하고, 심지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미궁에 빠뜨리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심리치료 당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아름다운 록산나와 실생활에서의 콜럼비아 출신의 또 다른 아름다운 아가씨와 그 가족을 통해 그레이엄 블레이크 씨가 어떻게 혼동을 하는지도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블레이크 사장님은 비정하기도 한 이런 심리치료법을 통해 경쟁과 이익 증대의 살벌한 정글에서 아직도 20세기적 미덕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작가 도르프만이 에필로그에서 이런 화두의 결론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만큼 친절하지는 않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출판사 창비의 책 소개나 광고가 작가의 일생과 책의 내용에 국한하는 것이 불만일 정도로 교묘한 구성이 돋보이며, 이에 못하지 않는 것으로 도르프만 또는 김영미의 번역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유려한 문장이란 점을 기어이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