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일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9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황하는, 그러나 방황을 거의 끝내가는, 책에선 ‘존재의 시기’라고 일컬을 시절을 맞은 40대 이혼남이자 부동산 중개업자 프랭크 배스컴 이야기. 전처 ‘앤’은 부르주아 건축가 찰리와 재혼을 했다. 찰리의 자녀들은 다 커서 독립해 나갔고, 이제 앤의 아들 폴과 딸 클래리사, 이렇게 넷이, 잘 살 거 같지? 그럼 그게 인생인가. 당연히 지지고 볶는 현상이 ‘또’ 벌어진다. 어느 날 폴이 슈퍼마켓에서 콘돔을 한 통 훔치려다 발각이 나 베트남 출신 여자 경비원하고 치고 박고 엎어졌다 메쳤다, 난리를 부린 후 검거된다. 몸싸움 중 열다섯 살 폴이, 몸집은 작지만 분명히 동양 무술 하나 정도는 해결했을 베트남 출신 경비원의 얼굴에,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이제 법원의 심판을 기다리는 상태다. 잠깐 딴 얘기. 한국 남자들아, 우리나라 여자들 고마운 줄 알고나 살자. 폴이 훔치려 한 콘돔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 4XL. 쉽게 풀어쓰면 XXXXL. 세상에 그만한 걸 달고 다니는 인간 종족들도 쌔고 쌨다.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어울릴 사이즈는 잘 봐줘도 XS, ‘엑스트라 스몰.’ 이거 하나, XS에 만족하는 척하면서 같이 살아주는 거 가지고도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한없는 존경을 바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지.
 에잇, 그래. 콘돔 얘기 나온 김에 무려 40년 전에 정여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방 쾅. 냉전 시절에 잠깐 인디언 섬머가 온 적이 있었나보다. 1970년대 초반이었던가 그랬다고 한다. 당시 소련이 사이가 좋아진 미국에게 물품 구매를 위해 샘플 요청을 했단다. 그게 바로 콘돔. 사이즈는 30cm. 지금 재보니까 내 손목부터 팔꿈치 선, 헌혈 할 때 피 뽑는 자리까지가 대략 25cm. 그러니까 내 ‘하박’보다도 5cm가 더 긴 콘돔을 주문한 거다. 그리곤 크렘린 궁에서 킬킬거리고 있었겠지. 한 달이 지나고 미국 항공운송 전문 비행사 플라잉 타이거 FT204기에 실린 샘플이 도착했다. 표준 수출 포장, 영어로 하면 standard export packing을 뜯고 드디어 콘돔 박스를 보니 이렇게 썼더란다. “Small." 진짠지 아닌지 정여사가 너무 높이 계셔서 확인 불가.
 하여간 슈퍼마켓에서의 좀도둑질로 폴은 본격적인 아동심리학적 분석과정에 들어서고, 이미 프랭크 배스컴의 둘째 아들이자 이젠 외아들이 된 폴이 이전부터 뇌에 무슨 신호가 오면 ‘이이이크크크’라고 신음을 하던지, 살아 있으면 열세 살이 됐겠지만 일찌감치 교통사고를 당해 정원에 묻힌 반려견 흉내를 내 컹컹, 멍멍 짖는 일이 있었으며, 아직도 이런 버릇은 뇌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화학작용이 벌어질 때마다 계속되고 있는 상태. 프랭크는 마침 월요일이 독립기념일이어서 폴과 일요일, 월요일을 함께 지내며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둘러볼 예정이다. 천생 신사로 품위 있는 삶과 취미와 직업을 영유하는 엑스 와이프의 남편 찰리, 이이가 정말 불쌍한 남자인데, 폴이 자신과 잘 어울리기만 하면 아내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줄 수 있는 아량과 양식과 도덕과 윤리의식과 책임감과, 남의 눈치를 볼 줄 아는 인간이지만, 아이들은 도무지 찰리와 잘 지내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착한 남편 찰리와 앤, 앤이 데려온 ‘딸린 새끼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눈치 채게 되고, 그건 앤의 전남편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눈에 뭐가 씌워서 두 번째 결혼을 저지르고 만 찰리가 반편이지, 반편이야. 어느 정도냐 하면 프랭크가 폴을 데리러 오기 바로 전에 폴과 늙은 찰리가 거친 몸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 폴이 보트의 무쇠 놋좆으로 의붓아버지의 얼굴을 내리쳤던 것. 여기서 또 한 가지.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약 중인 박영원은 은어도 아니고, 비어도 아니고, 속어도 아닌 ‘놋좆’이란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걸 풀이해 ‘노걸이’로 밀고 나간다. 왜 놋좆을 놋좆이라고 하지 못할까. 음.
 기본 줄거리는 위와 같다. 근데, 작가 리처드 포드의 연표를 보니까 스물네 살에 (미시건)대학동창인 크리스티나 헨슬리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 살았다. 뭐 이들이라고 행복했겠어? 다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우여곡절을 겪었겠지. 심지어 아내 크리스티나가 뉴올리언스 도시계획위원회의 이사로 임명이 되자 기꺼이(진짜로 기껍진 않았더라도) 아내와 함께 뉴올리언스로 이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듯 이혼한 사십대 남자의 심리상태를 기막히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참 대단하다할밖에. 아울러 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직업인으로 매도인과 매수인의 심리상태, 진상 고객들이 차례대로 부리는 변덕의 오묘함,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번히 아는 고단수 중개업자의 이해심 같은 것도 참 맛나게 잘 썼다. 이혼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 아직도 삶의 지뢰는 곳곳에서 펑펑 터지고 있는 중이라, 어려서 학대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작은 짐승을 죽이는데 쾌감을 얻지도 않았으며 야뇨증도 없는 걸 보니 연쇄살인범으로 진화할 거 같지는 않은 아들 폴은 분열증을 겪고 있어 개처럼 짖으며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과격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받고 싶어 하고, 이혼하면 그것으로 딱 줄을 긋듯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던 전처 앤이 다른 놈과 잘 사는 걸 보자마자 화산 폭발 같은 질투가 솟구치기도 하고, 베트남전 참전 후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잊으려 하는 셸리라는 이름의 유부녀와의 관계가 이게 정말 사랑인지 아닌지, 결혼이란 걸 한 번 더 해야 하는지 아닌지 헛갈리기만 하며, 자신이 투자한 집에 세든 건장하고 권총을 가진 남자로부터는 도무지 월세를 지불하고 싶은 마음을 확인할 수도 없는 딱 이런 순간에 감행해야 하는 독립기념일의 아들과의 명예의 전당 방문.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전형적인 미국 현대소설. 모든 것은 지나가리니. 그것도 순간순간 미국식 유머라는 소스를 얹은 만찬으로 리처드 포드는 당신을 인도할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그냥 글이 쓰여 있는 대로 읽어나가기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고, 한숨도 쉬고, 긴박하기도 하고, 아주 간혹 조금 지루할 수도 있고, 또다시 웃으면서, 책을 덮을 즈음, 오랜만에 괜찮은 책 하나 읽었다, 하고, 리처드 포드, 이이가 쓴 다른 책 또 없나, 뒤져보려 인터넷을 켤지도 모를 터이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19-02-23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Falstaff 2019-02-23 10:37   좋아요 0 | URL
별거 없는 감상문을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