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미학 1 대산세계문학총서 133
페터 바이스 지음, 탁선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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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 1,450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장편소설. 겨우 세권 가지고 '방대하다'는 형용사를 쓰는 이유는, 바이스가 글을 쓰는 방식 때문이다. 모든 페이지가 빽빽하게 빈틈 없이 채워진다. 쉼표와 마침표를 제외한 어떤 문장부호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대화는 간접화법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읽다가 보면 지금 주인공 '나'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간접대화를 하는 화자의 이야기인지 아리송할 수 있는데, 그건 한 문단이 열 댓 쪽에 이르는 촘촘한 문장들을 읽어내다가 한 순간 긴장의 끈을 놓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쉽게 얘기해서 1,450쪽, 번역한 한글 기준 원고지 6,700매에 이르는 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과 긴장을 놓치지 않고 읽어야 한다는 뜻. 세 권 읽느라 여드레 동안 변비증상을 감수해야 했다.

 집중과 긴장은 읽는 사람의 고충이고, 무엇을 위해 그런 생 고생을 감수하느냐, 즉 돈과 시간과 독자의 긴장과 집중을 봉헌해가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 내 소감은, 당연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재미? 하나도 없다. 1975년에 1권을 발간했다. 당시 유신치하 대한민국에선 번역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번역물이 나왔었으면 정말 대단한 의식화 교재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같은 동쪽 독일 작가로 바이스한텐 이모 뻘 혹은 큰 누나 뻘 안나 제거스는 며칠 전에 독후감 썼던 <제 7의 십자가> 서문에서, "이 책을 작고한, 그리고 생존해 있는 독일의 반(反)파시스트들에게 바친다" 라고 헌정의 말을 붙혔다. <저항의 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37년 부터 1945년 까지 독일과 스페인, 그리고 스웨덴을 무대로 숱한 독일인들이 벌인 반 파시스트 운동, 그것을 겸한 공산주의 운동을 건조한 문장으로 써놓았다. 그러나 독자가 감탄하는 것은 독일의 반 파시스트와 공산주의 운동을 쓰기 위하여 바이스는 부조, 조각, 회화, 문학, 역사를 다 합하여 근본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에 관하여, 억압과 수탈과 불평등과 고문과 처형에 대한 통섭적인 미학을 다 동원했으니 그가 인용한 목록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페르가몬 신전의 부조>, 이 부조를 세 청년이 바라보며 토론하는 과정에 등장한 그리스 신화, 프란시스코 어쩌구저쩌구 고야가 그린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 화가가 누구인지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게르니카>, 단테의 <신곡>, 카프카의 <성>, 거기다가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흔히들 가우디 성당으로 알고 있는 성가족 대성당) 등등.

 정말 감탄하는 건, 바이스만 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유럽의 작가들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길, 즉 심미안이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1권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방을 에워싼 석벽에서 몸뚱이들이 솟구쳐 올랐다. 서로 뒤엉킨 채 혹은 파편으로 조각난 채, 떼 지어 펼쳐지는 몸뚱이들. 홀로 남은 토르소, 치켜든 팔 하나, 찢긴 옆구리, 또 상흔을 담은 한 점 살덩이, 어렴풋이나마 원래의 형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싸우는 몸짓이었다. 잽싸게 몸을 빼고, 공격하고, 몸을 막고…(중략)… 쩍 벌어진 상처, 딱 벌린 입, 퀭하니 응시하는 눈, 곱슬곱슬한 턱수염으로 감싸인 일그러진 얼굴, 휘날리는 주름진 옷자락. 오랜 풍우에 마모되어 곧 사라져버릴 듯, 그러면서도 방금 탄생한 듯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표현력을 간직하고…(후략)…"

 

 이런 세부 묘사, 마치 옆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도록 상상력을 동반하여 세쪽 반에 걸쳐 이어지는 2000년 전의 부조. 기독의 신 이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이교(그리스신화)의 신들의 얼굴은 후대에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무참하게 깎여버린 <페르가몬 신전의 부조>. 읽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부조의 실제 모습에 관한 무한한 궁금증과 작품을 보고 묘사한 놀라운 글솜씨에 매료당하게 하는 것. 난 책을 넘기자마자 그냥, 뻑.갔.다.

 부조를 감상하며 자연스레 2000년 전 페르가몬의 아탈리드 왕조를 둘러싼 대 갈리아 족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부조라는 역사적 배경으로 넘어가고, 왕조 특권층의 신격화를 위하여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부조를 만들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유로 확장되어 간다.

 작가의 미학적 관점을 만일 1권에 국한한다면 책의 주제와 상관없이 바이스의 미학만을 즐겨도 적어도 책값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학의 궁극점은 앞에서 말한 지배와 피지배, 수탈과 피수탈, 주인과 노예화의 과정을 위한 것이며, 크게는 이런 과정 또는 구조의 해체, 작게는 독일의 파시즘을 타도하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과 도전의 역정을 그리는데 복무한다.

 주인공 '나'는 어떤 면에서 운이 좋은 인간이다. 유대인 출신으로 나치의 지랄발광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부모님과 함께 원적지籍地 체코로 귀국하고 거기서 곧바로 파시스트 프랑코를 타도하기 위해 국제 여단이 있는 스페인으로 떠난다. 스페인에서는 전선이 아니라 후방 병원에서 근무하며 평생 멘토랄 수 있는 '호단'이란 이름의 의사를 만나고 (여기까지 1권), 패전 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평생 잊지 못할 명작 <메두사 호의 뗏목>을 직관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어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나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스웨덴 사정에 따라 체포되지는 않지만 곤고한 시련을 겪으며 불세출의 드라마 작가이기는 하나 비겁한 면이 충만한 극작가 브레히트와 교류한다(여기까지는 2권). 3권은 내내 스웨덴에서 거주하며 드디어 공산당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독일에 스파이로 잠입하여 활동하는 등 지극히 위험한 일은 당에 의하여 거부되어 안전하게 스웨덴에 머무르며 동료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록하는데 전념한다. 이런 사람 어디나 있다. 희한하게 자신한텐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떨어지지 않는데 나중에 희생자들이 쟁취한 열매를 따는 사람. 바이스는 그들의 희생을 기록하는 업적이라도 있지, 그런 것도 없이 날로 먹는 사람, 숱하게 많다. 그게 인생이니까.

 공산주의 운동사에 관하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당 우파에 의한 테러로 뒤통수가 터져 죽어 베를린 시내를 흐르는 운하에 던져진 다음, 죽은지 다섯달 만에 떠오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스파르쿠스 단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바이스를 비롯한 서구 공산주의자들의 고민도 언뜻 드러난다(바이스는 결코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지는 않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방침에 어긋나면, 곧바로, 죽거나, 숙청당하거나, 처형당한다. 세 경우, 죽음, 숙청, 처형은 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숙청과 처형은 지독한 고문이 뒤따를 수 있는 불행한 확률이 그냥 죽음의 경우보다 상당히 높다. 바이스는 레닌과 격렬하게 충돌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언뜻 비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프롤레타리아에 새로이 등장한 지배자가 독재를 한다는 의미일 뿐이란 것.

 이 정도면 얘기 얼추 한 거 같다. 예술품, 문학과 시, 역사를 아우를뿐더러 유럽의 현대사, 그 중에서 공산주의 운동사에 관한 총괄적인 이야기란 것.

 

 

 

 PS 1. 내겐 특별한 즐거움을 준 것이 있었다. 오랜 궁금증 가운데 하나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이 그렇게 무장할 동안, 히틀러란 도라이가 하나 등장해서 막강하게 힘을 기르는 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승전국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눈 뻔히 뜬 채로 모른 척했을까, 하는 거. 바이스의 말이 100% 맞지는 않겠지만 궁금증의 일단은 풀렸다. 매우 타당한 이유를 그가 제시했기 때문에.

 

 PS 2. 할 말 이제 정말 다 했다. 이 책이 내가 2017년에 읽은 매우 기념할 만한 작품이 되겠지만 당신한테 권하지는 않겠다. 집중해서 끝까지 다 읽느라고 죽을 똥을 쌌는데 당신도 그 고생을 한 번 당해보라고 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읽겠다면 그건 팔자다. 만일 이 'PS 2'를 읽고도 책을 선택하신다면, 절대로 날 원망하지 마실 것.

 

 

 

 

 

 

부록

 

 

페르가몬 신전의 부조

아, 이 도둑놈 새끼들. 아예 신전을 통째로 뜯어왔다.

 

 

메두사 호의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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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5-1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실 저는 세 권을 모두 한꺼번에 구입해놓고는...... 1권을 읽다가 포기....... 이게 잠깐 잠깐 짬을내어서 읽어낼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정말 긴 여유시간이 주어진면 내쳐 읽어야지 하고 고이 책장 한켠에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
오죽했으면 이런 책이 있다고 하길래 이것마저 사서 이것부터 읽어야 하나..고민아닌 고민을..^^;;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649409
<페르세우스의 방패> 부제가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 읽기˝ 더라구요.
어쨌든 저도 완독에 의미를 두며 읽어보려구요! ^^

Falstaff 2017-05-18 11:12   좋아요 1 | URL
1970년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지던 동독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라고요. 인민들 읽기 쉽게 좀 쓰지 말입니다. ㅎㅎ
내용이 어려운 건 아닌데 참 거, 뭐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읽기 쉽지 않은 건 맞더라고요.
에휴, 이미 저지르셨으니 고생하십시요. ^^;
 
W 또는 유년의 기억 펭귄클래식 110
조르주 페렉 지음, 이재룡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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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에 이어 세번째 읽은 조르주 페렉.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 한 번 보자.

나름대로 잘 생긴 유대인 청년이었다. 근데 나중에 이렇게 변한다.

 

 

 뭐 남자의 변신은 무죄니까. 나도 은퇴하면 턱수염 기르고 나비 넥타이 매고 다닐 거다.

 

 저 사진의 남자가 쓴 <인생 사용법>을 읽고 깜짝 놀랐었다. 햐 거참 재미난 작가네 싶어서. 그 책 때문에 페렉이 눈에 띄는 족족 골라 읽으리라 마음 먹었었다. 굳이 찾아서 읽는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띄면.

 <W 또는 유년의 기억>의 W 섬, 남위 몇도 서경 몇도(몇 도인지는 잊었음)에 위치한 작은 섬. 섬나라라고 해두자.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남극 쪽으로 주욱 내려와 있는 익명의 섬. 그러면 W에 대한 설명은 됐고, '유년의 기억'만 남았다. 누구나 다 유년의 기억은 있는 법. 당신이 소설가라면 당신도 역시 적어도 한 작품에선 자신의 유년, 멀고 먼 파편들을 모아 모자이크처럼 맞추고자 해볼 것이다. 페렉도 그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장렬한 최후는 아니고 거의 모든 죽음이 그렇듯 그냥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엄마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한 조각의 비누로 변신했다. 이후 고모네 집에서 자란 거 까지가 페렉의 유년시절. 나머지는 픽션.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화자, 가스파르 뱅클레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들, 편편이 끊어져 아무도 이어주지 않는 시간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쓰는 자서전. 이런 회상의 장면들. 쓸쓸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시간에 대한 기억. 나 이런 거 좋아한다. 그것도 페렉이 아주 매력적으로 써놓았음에야. 근데 가스파르 하는 짓 봐라. 점점 나이먹어 나이 먹은 값을 하느라고 군대엘 갔는데, 어쩌면 페렉의 분신이기도 한 가스파르는 (저 위 사진을 보시라. 저딴 사람이 군대 규율에 잘 적응하겠는가) 작전에 나가 그 길로 탈영을 해버리고 만다.

 여기까지 좋았다. 탈영을 해 국경 밖에서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독자들은 예상도 못했던 바)……… 이후 주욱 써나갔다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자각을 하곤 몽땅 지웠다. 해설, 작가 연보까지 몽땅 다 합해야 200 쪽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소설의 스토리를 더 이상 얘기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기에. 사실 탈영과 해외망명도 얘기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걸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독후감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내비뒀다.

 섬나라 W. 페렉 스스로가 손기정이 금메달과 그리스 투구를 받은 베를린 올림픽의 해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W는 점점 상업화, 세속화되고 있는 올림픽 정신에 실망한 도라이 한 명이 인간들을 이끌고 들어가 세운 나라로,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오직 독하게 스포츠에만 기여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 곳이다. 별 희한한 방식의 스포츠 제일주의.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오직 근육과 골격만 인생의 목표로 정해놓고 개인별 특성에 따른 육성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준 집단. 이걸 읽으면서 난 자연스레 페렉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간 집단광기의 나치 치하 독일로 상상했다. 엄마를 비누 한 쪽으로 변신시킨 수용소의 광기로 치환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제는 W 섬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섬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나에겐 확실하게) 지루했다. 한 얘기 비슷하게 또 하고, 비슷하게 한 얘기 한 번 더하고. 페렉이 왜 이래, 했다니깐 글쎄.

 이 책을 당신한테 권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앞 부분의 쓸쓸한 유년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W에다 대고 펼치는, 과하게 친절하고 상세하고 조밀한 묘사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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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우크 - 막스 프리쉬 소설 서양문학의 향기 8
막스 프리쉬 지음, 이정린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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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 작가 막스 프리쉬. 이름도 처음 들었지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란다. 특히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잉에보르크 바흐만 등의 47그룹 멤버들과 특별한 교류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정말로 책 속에 47그룹 멤버들의 실명이 쏟아져나온다. 프리쉬가 늙어서 그런지 한때 자신과 짙은 사랑을 만들어가던 고故 잉에보르크 바흐만과의 연애와 동거 같은 것들도, 그리고 결혼이란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면 특히 더 심하게 과장되는 행복, 광포하게 폭발할 거 같은 질투, 상대를 향한 끈질긴 소유욕 이런 것들, 그냥 담담하게 막 (고인을 생각하면)조금 과하다 싶게 얘기한다.

 실제로 평생 자기 집을 가져보지 않은 막스 프리쉬. 말 그대로 방황하는 스위스 인. 이이가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몬타우크, 뉴욕의 복동쪽 제일 끝 바닷가에 '린'이란 이름의 아가씨와 도착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린' 그러니까 트롯 잘 부르는 여자 가수 생각나는데(있잖아, 노래 잘하는 '이수'의 아내), 이 책에서의 린도 노래를 잘 하는지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프리쉬와 하루 밤을 보내며 서른 살이나 더 먹은 프리쉬로 하여금 예전의 구체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인들에 관한 상념을 이끌어낸다. 첫번째 아내. 두번째 아내. 그리고 잉에보르크 바흐만. 그이의 책을 읽어내기만 하는대도 독자를 질리게 만드는 바흐만과의 연정까지 그의 기억은 확장하는데, 프리쉬를 읽어본 독자들은 분명히, 소설의 스토리보다는 그의 독특한 문장과, 본인이 관찰자가 되고, 동시에 피관찰자가 되기도 하는 방식의 표현방법, 뉴욕의 롱 아일랜드를 멀리서 조망하는 동시에 한 장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도 하는 독특한 문장들의 연결방법에 더욱 방점을 찍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마치 프랑스 소설, 특히 누보 로망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나고, 아니, 더 잘난 척을 하자면 포스트 누보 로망 같다고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가 곤혹스럽다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듣기 심히 난해하다든지 하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몬타우크> 하나를 읽고 <몬타우크>를 포함해 이이가 쓴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좀 캥긴다. 그리하여 얼른 그의 다른 작품, 무려 두 권짜리 책(뭐 문고판 비슷하지만)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를 보관함에 집어 넣었다가, 내 보관함에 60권이 넘는 책들이 구매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거 다 뒤로 물리고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를 먼저 사버렸다. 올해 늦가을 쯤에 읽을 거 같고, 그때야 돼야 프리쉬와 그의 작품에 대하여 얘기할 거리가 조금이나마 생기지 않겠나 싶다.

 내게 또 한 번의 유별난 호기심을 준 막스 프리쉬란 작가를 읽게 해준 출판사에게, 이럴 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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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 을유세계문학전집 36
베네딕트 예로페예프 지음, 박종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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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처음부터 끝까지 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올해 목표로 (물론 맥주, 탁주, 청주, 위스키, 브랜디 기타 등등은 싹 빼고) 오직 소주 마신 것만 술이라고 쳐서 작년의 절반, 200병만 마시자고 결심했었던 거. 일주일에 소주 네 병씩으로 쳐서 208병으로 조금 목표를 수정했다. 결과, 4월 말까지 소주 딱 70병. 어제 5월 14일까지 78병 마셔 조졌다. 목표달성을 위해 일주일에 네 병 이하로만 마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줄은 정말 몰랐었다. 아무래도 목표가 너무 도전적이었나보다. 한 300병으로 해놓을 것을. 하긴 마흔 다섯 까진 일년에 한 600~700병은 마셨을 테니 줄이긴 많이 줄였는데 솔직히 얘기하자면 체력이 떨어져 전처럼 못마신 결과 자연스레 거같다. 더 젊어서? 에이,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셔. 삼국지 두 편은 썼을 겁니다.

 근데 이 책 읽어보시라. 내 술 경력은 책의 주인공한테 비하면 이도 나지 않았다. 한 술 한다고 자부하는 내가 읽어도 아주 징글징글하다.

 짧게 쓰자.

 술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 당신. 이 책 읽을 필요 없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술하고 친한 당신. 이 책 읽을 필요 없다. 다 아는 거니까.

 나? 돈 버렸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의 매력이 바로 이거다. 모 아니면 도. 그만큼 용감하다는 의미. 이래서 오늘도 난 이 시리즈의 다른 책을 보관함에 한 권 집어넣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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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5-1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읽어볼까말까 했었는데..... 저는 술하고 친하니까..... ㅋㅋㅋ 패스

Falstaff 2017-05-15 10:31   좋아요 0 | URL
술 이야기는 맬컴 로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 빼면 좋은 게 거의 없더라고요.
<목로주점>이나 <면도날>은 술 얘기라고 하기엔 술 자체가 너무 지엽적이라 술 책(주책?)에선 당연히 빼야 하고요. ㅋㅋㅋ

잠자냥 2017-05-1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폴스타프 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존 치버 <팔코너> 다시 판매하기 시작했더군요.

Falstaff 2017-05-16 10:11   좋아요 0 | URL
옙! 고맙습니다.
<팔코너>, 오역 시비로 들끓었던 책으로 알고 있는데, 중쇄하면서 교정을 많이 했을지 궁금하네요.
(지금 책 보고 왔습니다)
아, 우라질. 왜 표지를 바꾸지 않았을까요? 진짜 드러운데 말이죠. ㅋㅋㅋ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민음의 시 162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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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 전에.

 원래대로 쓰자면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라고 쓰고 이 책에 나오는 시의 제목을 예를 들면 <개똥아 사랑해> 이렇게 써야 하는데, 그딴거 다 관두고 그냥 <은하가...> 및 <개똥아...>로 쓰겠다.  》기호 찾아 쓰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물론 내 맘이다)

 

 

 강기원. 등단해서 시인이 된 시점이 1997년. 깜짝이야. 처음에 1977년 등단인줄 알았지만 결코 1977년이 아니었다. 마흔 살에 등단했단다. 닭띠 아줌마. 그래서 그런지 거침이 없다(절대 아줌마 비하 아니다. 나이 들면 남자나 여자나 성호르몬의 증가/감소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성별 차이가 거의 없어지니 사실 아줌마 비하는 아저씨 비하하고 같은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아저씨가 아줌마를 비하할 수 있겠는가). 시는, 시야말로 해석은 읽는 사람 맘대로다. 언제나 주장하듯 <사미인곡> <관동별곡> 같은 걸 쓴 정철이 우리 국문학사상 최고의 연애시 전문가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뜻에서 강기원의 시는 지금 시대의 뛰어난 에로티시즘 작품들이다.

 책을 열면 자서自序가 제일 먼저 나온다. 우리나라 시집에 자서, 스스로 쓰는 서문이란 걸 싣는 게 보통이 된 이후부터 자서는 시인이 어떻게 하면 최고로 잘난 척하느냐, 하는 경쟁이라도 하는 거 같고, 강기원도 예외가 아니라 도대체 뭘 주장하는지 알아먹지 못할 애매모호한 이상한 시 비슷한 게 나오고, 그걸 넘겨 드디어 본문에 등장하는 첫번째 시가 등장하는데, (좋은 뜻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맹랑한 시인이 책의 첫 시로 올린 것의 제목이 <독자에게>다. 이렇게 써놓으니 후덜덜. 강기원 시인이 어느날 지금 내가 쓴 글을 읽고 야 새꺄 너 뭐야, 이렇게 따지면 어쩌나싶어 오금이 다 떨린다. 한 번 더 언급하노니 위에 건방지다, 맹랑하다는 건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쓴 거다. 원래 글이란 게 서로 바라보고 하는 얘기와 달라 지독한 오해를 왕왕 일으키기 때문에 확실히 밝혀두는 게 일신상 건강(혹은 보신, 또는 만수무강)에 좋다.

 얘기한 시집의 첫번째 시 <독자에게>는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해서 전문을 올린다.

 

 

  독자에게

- 만나게 될 때까지

 

 

 결합의 순간에 디스데라 벨리아(Dysdera velia)는 수컷과 암컷이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줄 하나씩을 내쏜다. 30cm 가량의 길이에 수평으로 늘어진 이 졸은 일종의 다리가 되고 그 양 끝에서 두 곤충은 마주 보게 된다. 신호가 내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동시에 양 끝에서 출발하여 빠른 종종걸음으로 다리를 건너지만, 서로 스치지도 못하고 엇갈린 채 각작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수컷과 암컷이 결국 만나게 될 때까지 이 장면은 되풀이된다.

- 이자벨 로시뇰, 『작은 죽음』 중에서

 

 

 이 시를 읽고 처음엔 다른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분을 그냥 발췌해놓은 것도 시가 된다는, 그것도 멋있는 시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페이지를 넘기면서는, 시집의 첫 시로 이 작품을, 그것도 제목을 <독자에게>라고 해놓은 건 앞으로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란 시집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디스데라 벨리아 라는 곤충의 교미 과정처럼 남녀가 교통하여 섹스에 이르기도 하고 이르지 못하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절차에 대하여, 그리고 섹스 자체에 관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제목,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이란 것도 남자가 여자를 관통하는 밤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프로이트에서 그랬던가? 관통하고 관통당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인간의 본성에 잠복하고 있다고. 하긴 프로이트 본인이 좀 도착증 환자인 듯도 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두번째로 실린 <흡혈>. 으시으시 하시지? 하필이면 어제 케이블 TV로 본 영화가(케이블 TV 영화를 보려면 진심 인격수양이 필요하다. 영화 도중에 광고가 무지막지하게 나오고, 심지어 중간에 한 20분 동안 광고만 나오기도 한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드라큘라>로 극장에서 본 것은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이었고, 역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만든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이 최고였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즉 흡혈의 제왕은 매우매우 에로틱하기도 하다. 강기원의 흡혈은? 역시 에로티시즘.

 

 나는 뺄셈이고

 너는 덧셈이다

 또한, 너는 뺄셈이고

 나는 덧셈이다

 내가 네게로 흘러간다

 네가 내게로 흘러든다

 (중략)

 날 받아들인 네 영혼에

 널 받아들인 내 영혼에

 알레르기 같은 열꽃이 돋는다

 ……(중략)………

 이 빈번한 삼투압

 (중략)

 진하고 단, 쓴 피

 피의 러브 샷

 

 너의 피를 내가 빨아먹는 것. 그거 자체가 성적 판타지를 제공하는 행위로 되어버렸다. 간혹 후천적 면역결핍증의 매개가 되는 '수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흡혈. 생명의 전이 과정이며 그것을 위헤선 생식과 비슷한 절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의도?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내가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게 대빵이고 그게 결론이다. 안 그랴? 저거 봐. 빈번한 '삼투압'이라잖아.

 내 주장의 근거를 위하여, 강기원은 "나를 찌르던 바늘로 / 너를 찔러 / 네가 다시 내가 되었는데 말이다 / 내가 다시 네가 되었"(인형)고,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 아버진 휘늘어진 덩굴 밑동에 /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 나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으며(장미의 나날), "가진 거라곤 / 벌거벗은 가슴 / 뿐입니다 / 희지도 않습니다 / 부드럽지도 않습니다 / (중략) / 제 위에 / 당신의 비밀을 적으"라고(로제타석) 말한다, 라고 쓴다면 아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게 평론가 흉내를 내는 거 같지? 그래서 관두겠다.

 하여간 강기원의 성적 판타지가 어디까지 뻗느냐 하면 예를 들어 큰 집을 등에 지고 새벽마다 나팔꽃 이파리 위에 점액질을 묻히며 기어가는 불쌍한 미물을 보고도 이렇게 노래한다.

 

 

 

 달팽이

 

여자들처럼 남자들도 여자들이다

-그루초 마르크스

 

 

 그러나

 늘 홀로였어

 최초의 창조물이 그랬듯이

 

 그 안의 수컷은

 그 안의 암컷을 외면하고

 

 그 안의 암컷은

 그 안의 수컷을 증오하지

 

 심장도 하나 위장도 하나

 머리도 하나

 그러나 질료 다른 두 영혼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웅동체

 

 두 개의 더듬이는

 합쳐지는 법이 없지

 있는 힘껏

 다른 곳을 향해 뻗는 촉수

 

 한 마리 달팽이

 속의 두 알몸

 자기가 자기에게 침을 뱉으며

 끈적한 길 그으며

 느릿느릿 기어간다   (전문)

 

 

 드디어 시인의 판타지는 아예 한 몸에 양성이 다 있는 곳까지 왔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인간으로 한 몸에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어지자지>. 일종의 자웅동체. 한 몸에 양성이 다 있다고 해도 번식을 위하여는 다른 개체와의 섹스를 해야만 하는 개체.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같은 몸의 두 성은 서로를 외면하고 증오한다. 어떤 경우라도 다른 개체와의 소통, 공감의 의미로 섹스가 필요한 필멸의 존재들. 그 비극성. (아, 너무 나갔다!) 하여간 그렇다는 얘기.

 

 또 하나의 주제가 있으니 바로 둔황 지역을 둘러보고 쓴 기행시편들. 그건 책 사 읽으실 분을 위해 노코멘트. 

 시집의 제목으로 오른 타이틀 시 <은하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이거 어떤 시인지 궁금하시지? 궁금하시면 요새 시인들 배고프다던데(언제는 뭐 안 그랬나?), 왠만하면 사 읽으시라고,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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