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또는 유년의 기억 ㅣ 펭귄클래식 110
조르주 페렉 지음, 이재룡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인생 사용법>, <사물들>에 이어 세번째 읽은 조르주 페렉.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 한 번 보자.
나름대로 잘 생긴 유대인 청년이었다. 근데 나중에 이렇게 변한다.
뭐 남자의 변신은 무죄니까. 나도 은퇴하면 턱수염 기르고 나비 넥타이 매고 다닐 거다.
저 사진의 남자가 쓴 <인생 사용법>을 읽고 깜짝 놀랐었다. 햐 거참 재미난 작가네 싶어서. 그 책 때문에 페렉이 눈에 띄는 족족 골라 읽으리라 마음 먹었었다. 굳이 찾아서 읽는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띄면.
<W 또는 유년의 기억>의 W 섬, 남위 몇도 서경 몇도(몇 도인지는 잊었음)에 위치한 작은 섬. 섬나라라고 해두자.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남극 쪽으로 주욱 내려와 있는 익명의 섬. 그러면 W에 대한 설명은 됐고, '유년의 기억'만 남았다. 누구나 다 유년의 기억은 있는 법. 당신이 소설가라면 당신도 역시 적어도 한 작품에선 자신의 유년, 멀고 먼 파편들을 모아 모자이크처럼 맞추고자 해볼 것이다. 페렉도 그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장렬한 최후는 아니고 거의 모든 죽음이 그렇듯 그냥 허무하게 죽어버렸고, 엄마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한 조각의 비누로 변신했다. 이후 고모네 집에서 자란 거 까지가 페렉의 유년시절. 나머지는 픽션.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화자, 가스파르 뱅클레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들, 편편이 끊어져 아무도 이어주지 않는 시간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쓰는 자서전. 이런 회상의 장면들. 쓸쓸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시간에 대한 기억. 나 이런 거 좋아한다. 그것도 페렉이 아주 매력적으로 써놓았음에야. 근데 가스파르 하는 짓 봐라. 점점 나이먹어 나이 먹은 값을 하느라고 군대엘 갔는데, 어쩌면 페렉의 분신이기도 한 가스파르는 (저 위 사진을 보시라. 저딴 사람이 군대 규율에 잘 적응하겠는가) 작전에 나가 그 길로 탈영을 해버리고 만다.
여기까지 좋았다. 탈영을 해 국경 밖에서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독자들은 예상도 못했던 바)……… 이후 주욱 써나갔다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자각을 하곤 몽땅 지웠다. 해설, 작가 연보까지 몽땅 다 합해야 200 쪽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소설의 스토리를 더 이상 얘기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기에. 사실 탈영과 해외망명도 얘기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걸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독후감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내비뒀다.
섬나라 W. 페렉 스스로가 손기정이 금메달과 그리스 투구를 받은 베를린 올림픽의 해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W는 점점 상업화, 세속화되고 있는 올림픽 정신에 실망한 도라이 한 명이 인간들을 이끌고 들어가 세운 나라로,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오직 독하게 스포츠에만 기여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 곳이다. 별 희한한 방식의 스포츠 제일주의. 말도 안 되는 스포츠. 오직 근육과 골격만 인생의 목표로 정해놓고 개인별 특성에 따른 육성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준 집단. 이걸 읽으면서 난 자연스레 페렉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간 집단광기의 나치 치하 독일로 상상했다. 엄마를 비누 한 쪽으로 변신시킨 수용소의 광기로 치환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제는 W 섬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섬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나에겐 확실하게) 지루했다. 한 얘기 비슷하게 또 하고, 비슷하게 한 얘기 한 번 더하고. 페렉이 왜 이래, 했다니깐 글쎄.
이 책을 당신한테 권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앞 부분의 쓸쓸한 유년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W에다 대고 펼치는, 과하게 친절하고 상세하고 조밀한 묘사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