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에 빛나는 작가 퍼시벌 레너드 애버렛 2세하고 이름이 같은 퍼시벌 레너드 애버렛은 미국 육군 상사 시절에 조지아주에서 도로시를 만나 1956년에 아들을 낳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로 이사 가서, 놀랍게도 치과 의사가 되었다. 미국 육군의 상사가 제대하면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는데 중사도 아니고 상사가 다시 공부를 해서 치과의사? 이 정도면 지역과 커뮤니티에서 입지전적 인물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아들은 작가에다 대학 석좌교수로, 딸은 의사로 키웠으니 거 참, 열심히 살았네. 부러워? 뭐 별로. 뭔가를 이루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거든.

  아버지를 닮았는지 아들 퍼시벌 에버렛 주니어도 마이애미 대학에 진학해 생화학과 수리논리 등을 연구하다가 학위는 철학 학사를 취득했다. 생화학을 위하여 생물학, 물리, 화학, 수학, 통계학을 공부해야 했을 터인데 철학 학위를 받았으니 학문 전반을 싹 훑었다는 얘기다. 졸업하고 브라운 대학 대학원에서는 문학창작으로 석사를 했고, 지금은 L.A.에서 살며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 영문과 석좌교수로 있단다. 아직 생일이 며칠 남아서 예순여덟 살.


  위키피디아를 훑다가 인상 깊은 개인사만 추려 소개했다. 에버렛의 작업 가운데 제일 빛나는 성과가 <제임스>인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으로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단번에 퓰리처 상과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이름을 빛낼 수 있었으며, 미국의 유명 서평 잡지 『커커스 리뷰』에서 수여하는 커커스 상까지 트리플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부커상 최종후보에, 아일랜드의 국제더블린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는데 뭐 그렇다는 거다.

  본문이 4백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 그러나 페이지 수가 많다는 것일 뿐 술술 잘 읽힌다. 글자 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어서 그랬나? 뭐 그랬을 수도 있고. 일단 스토리가 아는 스토리다. 마크 트웨인의 1884년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시 쓴 작품이다. 민음사세계문학 시리즈 6번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자면, 허클베리, 헉이 자기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미시시피강에 떠 있는 잭슨 섬으로 도망가 몸을 숨기는데, 이때 처음 ‘왓츤 부인’ <제임스>에서는 왓슨 부인의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을 만난다. 이 장면이 84페이지 정도에 나온다. 전라도 사투리를 겁나게 쓰는 짐. 아마 재즈 보컬이나 거쉬인이 작곡한 오페라 <페기와 베스>에서 흑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한 것 같다. 웃기지? 주로 이런 경우에는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던데 하여간 김욱동은 1998년에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했다. 이 짐이 오늘 소개하는 퍼시벌 에버렛이 쓴 <제임스>의 주인공, 왓슨 부인의 도망 노예 제임스이다.

  이런 플롯이 낯설지는 않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남주인공 로체스터의 법적 아내 버사 메이슨의 시각으로 다시 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다니엘 디포의 작품 <로빈슨 크루소>를 프라이데이 입장에서 쓴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원작들보다 다시 쓴 진 리스와 미셸 트루니에의 책이 더 좋다. 그럼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제임스>는? 어떨 것 같으셔? 내 의견은 둘 다 별로. 에버렛이 좀 억울하겠다. 원작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그걸 잘 각색했다고 해도 어디 쉽게 좋아할 수 있겠어?


  나는 이 작품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리메이크한 것인 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첫 장면에 두 백인 소년들, 헉과 톰이 제임스, 짐을 장난감 삼아 악당이나 먹잇감으로 설정해두고 일종의 역할놀이를 하는 걸 모른 척하는 걸로 시작한다. 짐은 아내 세이디와의 사이에서 딸 리지를 두고 있다. 왓슨 여사는 적어도 앞부분에서는 괜찮은 주인이다.

  그래도 짐은 모든 백인 앞에서 일부러 엉망인 문법으로 말한다. 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흑인 노예들이 마찬가지. 백인들이 흑인 노예가 특유의 엉망인 말투로 말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백인이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면 괜히 노예만 고통받는다는 것을 세대를 통해 충분히 학습했다. 백인과 이야기할 때는 눈을 맞추지 말아야 하며, 절대 먼저 말하지도 말고, 다른 노예들과 이야기할 때 그 어떤 주제로 절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노예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워하니까.

  근데 노예들끼리 있을 때는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도 정확한 문법으로 된 문장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헉과 짐의 대화를 인용해보자.


  헉: 너는 노새도 다룰 줄 알고 수레바퀴도 고칠 수 있지. 이제는 여기 현관 바닥도 고치고 말이야. 그런 건 다 누가 가르쳐준 거야?

  짐: 필요해서여. 필요하면 사람이 먼가를 하게 대여. 그러지 안으면 기둥으루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거나 강으루 끌려가 팔려버리니까여. 헉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엄는 일이지만여.


  이 책의 역자는 흑인이 백인이 들을 때 지방 사투리가 아니라 뜻을 알 수 있는 비어를 사용했다. 비어卑語 말고 비어非語.

  그런데, 짐의 경우는 놀랍다. 놀랍다 못해 까무러칠 수준이다. 과부인 왓슨 부인의 집안 사정을 잘 보살펴주는 대처 판사. 두 집안끼리 사이가 좋아 서로 사정을 잘 알고 지낸다. 그래서 판사가 순회재판 같은 일로 오래 집을 비우면, 짐이 슬쩍 서재에 침입해 구석 그늘진 곳에서 책을 무한정으로 읽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책을 쌓아 두기만 했지 별로 읽지 않은 판사보다 짐이 훨씬, 훨씬 더 높은 지적 소양을 지녔다는 전제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도 훤히 꿰고 있어서, 뒤에 짐이 방울뱀에 물려 사경을 헤매거나 꿈 속에서 디드로는 아니고, 백과전서파 가운데 풀 네임을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 거의 없는 철학자들, 몽테스키외, 볼테르 같은 사람들과 자유스러운 토론이 가능할 정도이다. 놀랍지? 너무 놀라워 짐이 신적 존재이거나, <제임스>가 초현실주의나 극단적 포스트 모더니즘 작품 같기도 하지? 하다못해 꿈 속에서 <깡디드>의 여주인공 퀴네공데까지 나온다니까. (근데 <깡디드>는 볼테르보다 오페라로 만든 L. 번스타인의 <캔디드>가 더 좋지 않나?) 하여간 책에 등장하는 모든 백인들 가운데 짐을 능가하는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은 하나도 없다. 아니, 백인 가운데 진짜 인간, 선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허클베리, 헉도 그래? 아이쿠, 이걸 말해드려야 하나? 참하, 그것은 차마 가르쳐드릴 수 없다. 미리 알면 재미가 반감될 것이 틀림없어서.

  이제 선한 노예 소유주인 왓슨 아주머니 집에서 도망가게 된 일을 말할 차례다.


  미주리주 해니벌에 봄이 왔다. 시속 60마일로 네 시간을 달려도 그저 밀밭인 평야. 그러나 1861년에는 곳곳에 사람이 들어가면 찾기 쉽지 않은 숲이 있었던 곳이다. 이런 평야는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여름엔 혀가 쭉 빠지게 덥고, 겨울엔 무지하게 춥다. 춥디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런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왓슨 아주머니가 짐에게 장작을 패 쌓아 놓으라고 지시했다.

  짐은 하루 온종일 장작을 패서 창고 가득 쌓았지만 노예들의 오두막에는 장작이 하나도 없어 그저 잔가지를 모아 때우며 추위를 버텨야 했다. 먹을 것도 별거 없고, 노동을 많이 해 일찍 늙은 노인들 한테는 더욱 혹독한 추위였다. 짐은 이를 짐작해서 장작 조금을 몰래 숨겨 두었다가 그걸 밤에 가지고 와서 노인들 사는 오두막에 주고는 했다. 근데 이 꽃샘추위가 갈 생각을 안 하는 거다. 짐은 들키기만 하면 자기 등에 떨어질 채찍 맛이 어떤 줄 뻔히 알면서도 이젠 왓슨 부인을 위한 장작도 훔쳐올 수밖에 없었고, 아뿔싸, 꼬리가 길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늘 인자한 미소를 짓던 부인은 후견인 비슷한 지위의 대처 판사와 뭔가를 속삭이는 것까지 짐이 보기는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부인의 집안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짐의 아내 세이디가 전해주는 말이, 짐을 미시시피강 하류, 일반적으로 뉴올리언스를 말하는 거 같은데, 그곳 농장에 팔려고 한단다. 말이 나왔으면 그건 시간이 문제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모레일 수도 있다. 일단 팔려가면 이제 처자식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건 뻔한 일.

  짐은 당장 그날 밤을 도모해 탈출을 해서, 북쪽 자유주인 일리노어로 간 다음에 돈을 벌어 시이디와 리지를 해방시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말로 떠나버린다. 당장 북쪽으로 가면 추적대에게 발각날 확률이 높으니 일단 조금 남쪽에 있는 미시시피강의 잭슨 섬을 첫 피신처로 정했다.

  이후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일화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자유를 찾아 모험을 감행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백인 가운데 선한 백인은 오직 죽은 백인 뿐이다. 올해 하반기에 유난히 흑인 노예시절 이야기를 많이 읽어서 별로 즐겁지 않았다. 퓰리처 상을 받았다고 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한 책.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5-11-2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라도 사투리를 겁나게 쓰는 짐
웃기지? 웃겨욬ㅋㅋㅋㅋㅋㅋㅋ
주로 이런 경우에는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던데
웃깁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음. 그렇군요. 저도 딱히 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리뷰는 다 읽었습니다! ㅋ

Falstaff 2025-11-28 05:05   좋아요 0 | URL
자냥 님은 이 책에 만족 못 하실 듯. 좋은 선택입니다.
사투리보다 송혜리처럼 비어로 대체하는 게 훨씬 낫더라고요. ㅎㅎ

얄리얄리 2025-11-27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길래 들었다놨다 하다가 결국엔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음.. 다음에 들고 와서 읽어야 할지 갈등되네요. 조금 더 기다려 볼까봐요..

Falstaff 2025-11-28 05:05   좋아요 0 | URL
시민들의 세금으로 사 올 텐데 조금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다 읽으셔야지요. ㅋㅋㅋ
저도 자주 그런답니다.

다락방 2025-11-27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이 책 읽고 싶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 읽었거든요. 그런데 허클베리가 별로더라고요? 그래서 ‘제임스는 무조건 이것보단 좋을것이다!‘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허클베리 에서 짐이 무식한 설정으로 나오는게 되게 걸렸거든요. 그래서, 바로 그 부분에서 ‘짐의 입장에서도 소설이 쓰여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리뷰를 읽어보니, 바로 그 부분에 집중된 것 같아요. 저는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5-11-28 05:09   좋아요 1 | URL
아하, 다락방 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에버릿이 썼군요! 그러면 읽어보셔야겠네요.
저는 오히려 너무 박식한 노예로 만들어 불만이 컸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일을 ˝과하게˝ 21세기 현재 관점에서 보는 것도 몰입에 조금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란한 속삭임 위픽
예소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 머리 속에 예소연은 청소년 로맨스와 SF 작가로 있었다. 그냥 어느 매체에서 한 번 읽은 근거 없는 정보였다. 나는 문학상에 별 관심도 없어서 이이가 올해 데뷔 4년 만에, 가장 적은 나이로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도 이 책 <소란한 속삭임>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검색해보고 나서야 알았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나라 소설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꾸준히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취향상 잠복한 문학적 파르티잔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지. 그저께 예소연의 <소란한 속삭임>을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어제 빌려 오늘 읽었다.


  속삭임. 나는 속삭이지 않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야기를 속삭이면 듣는 사람이 말을 신중하고 호소력 있게 듣는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도 하고, 귓속말 또는 속삭이거나, 그냥 보통의 성량으로 평범하게 말하거나, 아니면 광장에 서서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웅변을 하거나 어차피 이야기를 들을, 또는 전해 들을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게 될 것이고,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관심 없어서 잊을 사람은 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귓속말로 “너만 알고 있어.” 할 때 이미 세상이 다 알게 될 것임을 각오해야 하는 법이더라. 그래서 속삭여야 하는 말이 있으면, 나는 아예 입 밖에 꺼내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끝내 꺼내지 못했던 말들.

  속삭임은 내게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 단어이다. 시작은 엉뚱하게 유신시대까지 소환한다. 국가 원수와 정부 시책을 비난하는 말만 해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가 정보과 취조실에서 반죽음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징역을 살리던 시절. 그 드런 꼴이 보기 싫어 숱한 사람들은 서둘러 서류를 만들어 L.A로 이민을 감행, 음식점 설거지 알바에서 시작해 택시회사 스페어 운전수를 거쳐 세탁소와 편의점을 차려 재미동포 기업가라는 명함을 박고 다녔다. 그래도 나라를 뜨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특히 자기 자식새끼들이 듣지 못하도록 유신정부를 비난하는 말을 자기들 어렸을 시절엔 모국어인 줄 알았던 일본말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급한 김에 나온 우리말이었다면 즉각 아이들한테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아라, 잘못하면 집안 거덜난다고 마치 머리통에 조각칼로 새겨 넣듯 한 번 파고, 두 번 파고, n번 다짐받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서 나는 속삭임 또는 귓속말에 관한 감정이 아직도 좋지 않다. 남들 알면 크으으으으은 일 난다, 알았니? 알았어? 알겠냐고 이 새끼야!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속삭임이 치유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예소연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비밀이 아니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일 때 듣는 사람이 더욱 집중한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사소한 부끄러움을 차츰차츰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다가 진짜 비밀, 다른 사람한테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말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그동안 입 밖에 절대 내지 못하거나 않고 살아왔던 내밀한 사실을 토해낼 지경에 다다르는데, 이 순간, 화자는 해방된다.

  아하, 그렇구나.

  예소연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찾았을까? <소란한 속삭임>의 등장인물들처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만드는 일에 특별한 곤란을 느끼는 타입이었을까? 자신만 알고 있는 성격적 장애가 있다고 여기는 타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는 게 아니고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말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그렇게 등장인물들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긴. 등장인물1 모아의 말대로 요즘 세상에 정상인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만.

  등장인물1, 모아는 소심하다. 낭비 또는 소비벽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엄마한테 이혼당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짱박혀 산다. 자취를 감추기 전에 모아가 갑상선암에 걸려 진단비 명목으로 받은 천만원까지 들고 튀었다. 모아는 남의 일에 간섭 않고, 자기 일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등장인물2, 시내는 강박이 있는 거 같다. 시끄러운 걸 참지 못하는 예민한 성격이다. 조금 나 같다. 사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여전히 아파트 위층에서 미어캣이 벌레 잡아먹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거 같다. 시내는 그래서 작은 클럽을 만든다. 속삭임, 속삭임 클럽. 이야기를 속삭이는 사람들.

  등장인물3, 수자는 명동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50대 여사님. 강남은 아니지만 특별한 직업 없이 월세를 받아 살고 있으니 중산층 수준은 되는데, 세상이 하도 어질어질해서 집구석에 앉아 댓글만 쓰면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아 우매한 대중에게 외치기 위하여 황야, 명동에 나와 있다. 개중 제일 ‘정상적’과 비슷하고 오지랖이 무척이나 넓은 여사님이다.

  등장인물4, 두리. 하필이면 2번 시내의 바로 위집에서 사는 바람에 저장장애가 있는 히키코모리이면서도 소음을 낸다는 항의를 계속해서 받다가 빡이 쳐 따지려 내려왔다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모아와 시내, 수자와, 즉 사람과 대화하는 기회를 얻는다. 등장인물 1, 2, 3 그리고 자신의 해방을 맞게 하는 전기를 마련하는데 그게 어떤 식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재미있다.


  네 명의 등장인물, 모아, 시내, 수자 그리고 두리. 탁 보니까 이 사람들한테 공통점이 있지? 이들을 부를 때 ‘숙’아, 대신, ‘자’야, 라고 해야 한다. 즉 이름에 받침자가 한 명도, 하나도 없다. 예소연은 의도적으로 인물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아니면 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까? 실없는 농담으로 해본 이야기다, 신경 끄시라. 근데 혹시 알아, 정말 무슨 뜻이 있을 지도? 아휴, 나도 내가 지겹다. 살면서 궁금한 게 뭐 이렇게 많아, 살기 피곤하게. 그지? 나도 이 클럽에 들어야 하나?

  이 사람들 전부 스스로,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나 능률능률 흘러가는 사회시스템 때문에 피곤한 삶을 사는, 또는 살아야 하는, 두리 같은 경우엔 억지로, 힘들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처럼 속삭이지 않은 채 가슴 속에 내밀한, 숨기고 싶은 것을 가지고 살며, 그게 무엇인지, 왜 생겼는지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드디어 하느님 같은 작가가 등장해 속삭여, 속삭이면 돼, 알려주고, 이들은 속삭임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지난 시절의 한 장면으로부터, 내밀한 비밀로부터 드디어 해방된다. 예소연의 아이디어가 기막히다.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5-11-26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했어요.
‘속삭임‘이라는 단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작가가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더라고요.

Falstaff 2025-11-26 15:28   좋아요 1 | URL
정말 그랬습니다. 아, 속삭임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ㅎㅎ

자목련 2025-11-26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
 
상실의 기도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5
샬럿 우드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 뉴사우스웨일주 쿠마에서 출생한 1965년생 작가. 호주 소재 대학에서 박사까지 공부했고 작년까지 위키피디아 노출 기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상을 받거나 최종후보까지 올랐는데 지금 독후감을 쓰는 <상실의 기도 Stone Yard Devotion>도 2024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가 그냥 내려왔다. 부커상이 떠그르르한 건 맞는 모양이다. 최종심에만 올라도 전세계적으로 번역 출판하는 걸 보니.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23번에 빛나는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도 2015년 최종심에 올랐다가 벌컥벌컥 미역국을 먹은 작품이었으니. 하여튼 작가 샬럿 우드는 지금 시드니에 살고 있고 호주예술위원회에서 문학분과 의장을 역임하는 등 호주 문학예술계에서는 실세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상실의 기도> 한 권 밖에 없지만서도.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상실의 기도>는 일인칭 소설. 책을 덮을 때까지 화자 ‘나’의 이름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참 독하다. 한 번 정도는 나와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나’의 최근 직장은 멸종위기종 센터. ‘나’는 결국 법적으로 갈라서기로 확정한 전남편 알렉스와 무자식이 상팔자인 결혼생활을 누렸는지, 아이가 있긴 했는데 이미 다 커서 더 이상 아이들이 ‘나’의 인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이유가 없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수십년 동안 살다가 헤어졌다. 헤어진 김에 알렉스는 영국 런던으로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 그나마 원수처럼 헤어지지 않은 모양이라 히스로 국제공항에 내려서 ‘나’한테 잘 도착했으며 새 동료들이 마중 나왔다고 문자로 보낼 정도의, 사랑을 친분 또는 가까운 우정으로 대신해 이어가고 있다. ‘나’도 떠났다. 호주의 평원으로.

  호주의 평원. 탁 떠오르는 에세 시리즈의 작품이 있다. 에세 시리즈 최초의 남성작가 작품, 제럴드 머네인이 쓴 <평원>. 민음사에서 낸 머네인의 소설집 《소중한 저주》와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 ‘나’가 그동안 잊었던 호주, 자기가 태를 묻은 고향 인근의 지명들. 차콜라, 오리알라, 브레드보, 번얀, 제랭글, 보번다라 그리고 캘턴 평원, 로키 평원, 드라이 평원. 끝도 없는 황량한 벌판과 띄엄띄엄 흩어진 목초지와 소, 양, 말, 그리고 가축에서 야생화한 생명체들. 예컨대 들개, 들고양이 등등. ‘나’는 이 지명들 속의 한 군데로 보이는 장소에 외따로 떨어진 수도원에 들어간다. 닷새 일정으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미 신앙을 버렸음에도.


  영국 이민 2세인 ‘나’가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지역의 외곽. 이곳을 떠나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겨울날 오후 세시에, 도착했다. 열 시간이 넘게 운전해 피곤하고 온몸이 쑤신다. 그때는 안 그랬던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1970년대 요양지나 친환경공동체 같은 느낌이 든다. 35년만에 처음으로 부모 묘지를 찾는 ‘나’. 좋은 기억만 남기고 먼저 세상을 뜬 부모의 무덤가에는 어느 자선단체가 꽂아둔 플라스틱 조화가 이제 낡아 초라하게 보인다.

  북어포와 청주를 올려놓고 재배한 다음 새삼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진 장례식장 장면을 잠시 떠올리다 애초의 목적지인 수도원으로 향한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세금 없이 신자들의 헌금을 수금해 호사를 누리는 바티칸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늘 허덕이는 호주 벌판의 가난한 비구니들의 수도원. 아참, 수녀를 비구니와 함부로 섞어 썼다가 가톨릭 환자들 눈에 띄면 두드려 맞아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바꾸고 싶지는 않고. 하여간 어떤 수도원인지 짐작이 가시리라. 이제 돈이 들어올 곳이 없어서 옛 수도원 시절에 다른 용도로 쓰던 작은 나무 오두막들을 게스트하우스 비슷하게 개조해서 신자들에게 피정 숙소로 제공하고 약간의, 성의껏 돈을 받아 가계에 보탬을 하는.

  ‘나’가 이곳으로 피정 아닌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건 이유가 있어서이다. 방문객이 완전한 고독을 원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예배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원한다면 작은 싸구려 플라스틱 바구니와 폐쇄용기 두 개를 식당에 가져가 음식을 받아 오두막에서 혼자 먹을 수 있고 ‘나’는 정말 몇 번 그렇게 한다. 다만 다른 방문객에게도 완전한 고독을 허락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독을 방해할 수 있는 소음을 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말이 완전한 고독이지, 정말로 완전한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수녀들과 함께하는 저녁 기도에 참석한다. 겁나게 추운 작은 석조 예배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봉헌성당’이라 부른다. 참석한 수녀는 여덟 명. 휠체어를 타고 온 수녀와 보행기에 의존하는 수녀 포함해 적어도 절반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다. 다른 여성 방문객이 두 명 있고, 다음날엔 멋진 바리톤 음색을 가진 남성 방문객도 한 명 있다. 주로 수녀들에 의한 기도문 낭송이 들린다. 일종의 읊조림. 레치타티보 같기도 하고, 틀림없이 가톨릭 장례식 때 단체로 중얼대는 위령기도 즉 연도 같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저 중세 시절의 그레고리안 성가 비슷하겠지. 이게 ‘나’의 관심을 끈다.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들을수록 끌리기도 하고, 그러다 끝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팔자라면 팔자다.

  방문객을 위한 기도서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눈에 뜨인 작은 팜플렛에 기도문이 적혀 있다. ‘나’는 꽤 큰 호기심으로 기도문을 읽는다. 이 악마와, 저 하느님의 적들을 비난하고 멸하자는 내용이다. 내용을 알고나서 들으니 읊조림의 섬세한 리듬이 더 이상 매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수녀들의 읊조림일 뿐이다. 섬세한 리듬 이상이 아니며 온전히 육신과 무의식에 관한 것 이상이 아닌. 저녁기도가 끝나고 ‘나’는 제일 나중에 성당에서 나온다. 어둠. 충격적일 정도로 평화스럽다. 저녁은 오두막 찬장에 넣어둔 땅콩 두 종지와 와인 석 잔으로 때운다. 이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다음날은 선잠 끝에 다섯시 반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휴대폰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는 저 먼 평원지대의 수도원. 알렉스 한테 짧고 확실한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답장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일곱시 반에 아침기도가 있다. 무엇을 할까? 잠? 결정하기? 알렉스와 내일에 관해서? 울기? 숨기? 독자인 나는 여기까지 와서야 아직 알렉스와의 정식 이혼이 완전히 결정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런 형광들 같으니라고. 울기도 싫고 숨기도 싫어 ‘나’는 아침기도에 참석하기로 한다.

  이어서 아홉 시에 성체성사. 이 사람들, 즉 수녀들은 도대체 언제 일을 끝내는 걸까? 두 시간마다 하는 일을 멈추고 성당으로 달려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문 중얼거리고, 하루에 한 번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의 잔”과 “몸”을 먹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야 하니 언제 일을 마치는 걸까? 그러다가 깨닫는다. 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을. 일의 행함 그 자체. 그러자 기이한 평온에 빠진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고요함이 오히려 급진적, 불법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간 ‘나’의 삶이 어째서였을까?

  중간기도. 두 시간마다 한 번이라 했으니 한 열한 시 정도일까? 여전히 같은 곡조의 성가를 노래하고, 비슷한 음색, 비슷한 중얼거림. ‘나’는 피로를 느낀다. 엄습한다. 깨어있기 힘들다. 중세 느낌의 소리가 이곳 높고 건조한 모나로 평원, 세상 어느 곳과도 동떨어진 장소를 채운다. 여기 있는 일이 마치 어린 시절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너무 길고,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이 너무 많다. 내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스러워진다.

  이렇게 드디어 5일차. ‘나’는 가방을 꾸리고, 차에 싣고, 떠나, 다시 열 몇 시간을 운전해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제 숙소를 방문객 오두막에서 수녀들이 사는 울타리 두른 길고 낮은 다른 건물로 옮기고 수녀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다. 이미 책은 2부로 들어섰다.


  이렇게 무신앙의 나이든 ‘나’는 수도원에서 보살로 살기로 마음먹어, 자리를 잡고 세상을 털어버리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만나고 새롭게 자각하는 기회를 얻는다.

  호주 북쪽은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건조해져서 그곳에 살던 쥐들이 엄청난 기세로 남쪽 호주로 밀려 내려온다. 차를 몰고 가다가 마치 갈색의 바다처럼 아스팔트를 길게 메우고 있는 작은 털뭉치들. 이것들이 수도원 수녀들의 모든 장소를 메운다. 수녀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쥐를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없앨 수 없는 정도로 몰려온다.

  다른 하나는 이 수도원 출신의 제니 수녀가 태국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사업에 전력하다 그곳을 찾은 신부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부는 곧바로 자살해버리고 제니는 행불자 처리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강력한 태풍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자 나무 뿌리에 걸린 백골로 발견된다. DNA 검사 결과 제니 수녀인 것을 알게 되어 COVID-19의 어려운 환경에서 호주의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백골의 제니. 유해를 인도하고 수도원에 도착한 평복 수녀 헬렌 패리. 패리 수녀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나’와 친구들에게 심하게 따돌림을 받고, 얻어 맞은 후에 학교를 그만둔 과거가 있다. 백골의 제니 수녀와 수도원의 보나벤처 수녀. 그리고 헬렌 패리와 ‘나’ 사이의 과거 해소를 위한 용서 문제. 용서라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용서한 다음엔 용서받은 행위 이전 시절처럼 스스럼없을 수 있을까? 정말? 나는 안 되던데. 읽어보시라. 특히 당신이 가톨릭 신자라면 후회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60년에 오키나와 나키진에서 태어난 소설가, 단편 작가, 수필가, 활동가. 활동가? 오키나와는 그냥 우리가 일본의 영토라고 알고 있는 섬이지만, 원래는 ‘류큐국’이란 이름의 독립국이었는데 1879년에 메이지 정부가 강제로 오키나와 현에 편입시켜버린 지역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섬 사람들은 자기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을 징병해 전쟁에 투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도민들도 대거 제국군으로 징발해 13세에서 15세까지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간호병’으로 남학생들은 ‘철혈근황대원’이라 하고, 유일하게 세계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연합군 상륙전쟁에 투입했다. 군부는 간호병에게, 만일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다면 너희들은 미국 병사들에게 집단으로 능욕을 당한 후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니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을 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게 죽는 방법이라 가르쳤다. 정말로 히메유리 간호병들이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히스테리에 빠져 한 자리에서 수십명씩 자살을 감행해 죽어가기도 했다.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된 소년병들은 정규 전투병력이 아닌 자폭소년단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작품 속에 묘사되었다. 아마 군수품 운반이나 식량 확보, 식수 보급 등 주로 전투외 작업에 투입하지 않았나 싶다. 이외에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근대사, 현대사를 거치면서 일본 본토인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계급으로 인식 받았으며 주로 하층민이 하는 일에 종사하는 등 불만이 깊다. 패전 후에는 오키나와 섬에 대규모 미군 기지가 설치되어 갈등이 더욱 깊어졌는데, 마지막 작품 <오키나와 북 리뷰>에도 나오듯이 류큐국의 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치를 주장하는 그룹과, 픽션인지 팩션인지 헛갈리기는 한데 ‘황태자를 오키나와의 사위로’ 만들자는 구호를 통해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그룹으로 의견이 갈렸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이 정도만 미리 알고 시작하면 읽기가 훨씬 편할 듯하다.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뒤편에 실은 “부록”을 먼저 읽으면 더욱 좋겠다.


  단편 세 편이 실린 소설집. 차례로 <물방울>, <바람 소리> 그리고 <오키나와 북 리뷰>. 세 편 전부 색다른 플롯으로 썼다. 내가 읽기로는 표제작인 <물방울>이 단연 좋았다.

  주인공 도쿠쇼는 오키나와의 나와 지역 시골에서 출신의 청소년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를 통과했고, 미군이 오키나와를 침공할 당시에는 벌써 철혈황근대원으로 징집되어 전투원이 아니라 전령병 임무를 맡았다. 하긴 전령병이라고 해도 명령과 상황보고를 위해 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지역에 오키나와 사람으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막강한 화력의 미군 함포사격이 펑펑 터지는 골짜기를 뛰어다녀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건 아니었다. 철혈황근대. 말이 좋다. 황제의 용맹한 근위대라는 뜻. 그럼 천황은 무슨 천황. 일본 왕이 당시 근위대를 옆에 두고 오키나와 전투를 진두지휘라도 했나? 카미카제처럼 그냥 이름만 멋있게 지어주고 폭탄 하나 들고 가서 적군과 함께 폭사하라는 뜻이다.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왕? 그저 얼굴마담으로만 있었다. 실제 모든 전쟁은 왕이 아니라 군부 엘리트의 오판으로 진행해서 무참하게 깨져버린 희대의 코미디로 끝났다.

  하여간 도쿠쇼의 부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사보다 이미 죽은 병사가 월등하게 많아졌고, 생존자 가운데서도 이젠 부상자가 혼자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더 많아졌다. 이 가운데 내지 즉 본토에서 온 마흔 정도 되는 노병도 있었으며, 비슷한 나이의 섬 아저씨도 있었고, 젊디젊은 도쿠쇼 또래의 동네 친구 이시미네도 있었다. 미군은 섬에 상륙하기 전에 진지를 만들고자 하는 곳과 부근의 적군을 싹쓸이하기 위하여 당연히 완벽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함포사격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 일본군이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채 숨어 있는 골짜기까지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상을 당해 심한 갈증으로 물을 달라는 병사들을 위하여 물을 가지러 냇가로 간 도쿠쇼와 이시미네 한테도 폭탄에 눈이 달린 게 아니어서 큼직한 폭탄이 떨어져, 도쿠쇼는 괜찮았는데 이시미네의 배에서는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면 튀어나오던 것과 비슷한 뭉글뭉글한 느낌의 무엇이 쏟아졌다. 도큐쇼는 급하게 자기 각반을 벗어 임시로 이시미네의 배에 둘러주고 그를 데리고 피신처로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더욱 깊은 골짜기의 굴로 피신하라는 명령뿐.

  짧게 하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도쿠쇼는 이시미네를 지금 있는 동굴에 두고 자기만 다음 집결지로 향해야 했다. 근데 이게 나머지 평생의 큰 짐이 될 줄 그때는 몰랐지. 이때 자기한테 다음 피난지를 알려준 히메유리 여성 간호병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에 집단 자살에 동참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 소설하고 비슷하다. 도쿠쇼는 이후 술이 늘어갔고, 삼선이라는 오키나와 전통 악기를 사 만날 음주가무에 날 새는 줄 모르는 파락호 생활을 하다가 세 살 많은 우시라는 왈가닥 살림꾼을 만나 결혼하고, 하늘이 도왔는지 무자식 상팔자의 행운을 누리며 늙어왔다.

  그런데,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이게 문제였다. 이제 시작이냐고? 그럼 여태까지는 뭐냐고? 에라, 그냥 간다. 작품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도쿠쇼의 다리가 탱탱 붓는다. 동과처럼 부었다고 하는데, 동과, 박 종류. 그냥 길게 둥그런 큰 박을 생각하시면 된다. 동과처럼 크고 탱탱하게 부은 다리는 색깔까지 동과처럼 초록 비슷하게 변하고, 엄지발가락 끝에서는 물이 똑, 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점점 악화되어 이젠 움직일 수도 없다. 의사들도 원인을 모른다. 발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채취해 가져가 조사를 해봤더니 그냥 물이란다.

  며칠 후, 자정이 되면, 새벽 다섯 시, 해가 뜨는 시간까지, 놀랍게도 수십년 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이 험한 모습을 한 채 방에 들어와 도쿠쇼의 발가락을 쪽쪽 빨아먹는다. 발가락을 먹는 게 아니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고 있는 것. 알고 보니 그게 치유의 액체였던 모양이다. 사촌동생이자 천하의 파락호인 세이유라고 있었는데, 이이가 우연히 발가락 물을 찍어 먹었다. 그랬더니 몸이 좋아지고 십여년 간 내내 6시 반을 유지하던 그것도 불쑥 11시 5분 정도는 되는 거다. 머리에 발라보니 5분도 되지 않아 솜털이 진한 흑발로 변한다. 이 정도면 왜 이미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은 병사들이 밤마다 몰려드는 지 아시겠지? 세이유는 물을 모아 비싼 값에 팔아 수백만 엔을 모으고, 병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도쿠쇼의 방에 몰려와 인당 2분 정도 도쿠쇼의 발가락과 발바닥을 물고 빤다.

  이 과정에서 병상의 도쿠쇼는 앞에서 설명한 전투 장면을 연상하고, 그때 동굴에 두고 혼자 죽게 했던 이시메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할 기회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 그럼 어떻게 됐을까? 이제 병사들도 거의 정상적으로 치유된 모습으로 변했고, 드디어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날로 도쿠쇼 역시 벌떡 일어나 “차카게 살자!”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날마다 술타령과 음주가무에 전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고, 신비의 물을 사 마시고 젊음을 되찾았던 사람들은 한 순간에 원 위치, 떼로 몰려가 파락호 세이유를 두드려 패버린다.


  내가 옮기기를 번잡하게 옮겨서 그렇지, 단편일지라도 이렇게 우화적인 플롯으로 쓴 작품은 실로 오랜만에 읽는다. 심지어 마지막에 실은 <오키나와 북 리뷰>는 독자의 서평을 싣는 잡지의 리뷰를 선별해 옮긴 플롯인데, 진짜 책을 읽은 서평이 아니라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스타니스와프 렘의 《절대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서 벌써 경험해본 플롯이다. 그러나 메도루마의 가상 서평은 오키나와의 극단적 두 주장의 충돌과 진행을 묘사하기 위하여 각 분량이 짧아서 더욱 쉽게 읽힌다. 뭐 그렇다고 큰 재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고. 오히려 두번째로 실린 <바람소리>가 더 내 취향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 읽어보실 만하다. 직접 돈 주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5-11-2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엄마가 사둔게 있네요!!!!!!

Falstaff 2025-11-24 15:37   좋아요 1 | URL
이크, 그러면 얼른 읽어보셔요. 열반 쌛도 나쁘지 않게 읽으실 듯.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11-24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엄마가 이번에 지와 사랑을 다시 좋게 읽으셨다고 해서 제가 골드문트란 고전 뽀개기 전문가 할아버지가 계신데요 하고 소개해드렸습니다 ㅋㅋㅋ
 
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

  벌써 지난 달이다. 크리스토프 하인의 <처음부터>를 생각 밖으로 재미있게 읽어 곧바로 도서관 관심도서 목록에 넣었다가 읽은 책. 아뿔싸. 근데 서간체 소설이다. 나는 서간체 소설 싫어한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 없다. 저 멀리 몽테스키외의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부터 새무얼 리차드슨의 <파멜라> 그리고 추밀고문관 괴테가 쓴 불후의 명작이라 일컫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까지 뭐 재미있게 읽은 책이 책/작품이 없다. <나폴레옹 놀이>도 마찬가지. 처음엔 그것 참 서간체라도 괜찮네, 싶었는데, 이 책이 2008년에 나온 것이라 요즘 책과 비교하면 글씨가 빽빽하게 박혀 있고, 서간체라서 A가 B한테만 늘어놓는 독백이라 흔한 대사 한 마디 없는 상태로 본문이 263쪽까지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일지언정, 이게 백페이지를 넘어 화자의 과거 소년 시절부터 변호사로 번창하기까지 과정이 끝나고, 자신이 저지른 나폴레옹 놀이에 관한 변설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니까, 아무리 말빨 좋은 크리스토프 하인의 문장이라도 이건 뭐 숨이 턱턱 막히는 건 물론이고, 도대체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주장을 하는 지, 앞뒤 따져볼 엄두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안다, 알아. 20세기 문명에 관한 독특한 문명/문화 비평이란 건.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다. 삶은 놀이, 독일어로 Spiel, 영어로 하면 game을 그냥 ‘게임’이라 번역하지 않고 내나 ‘놀이’라 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게임, 이라고 할 때보다 조금 가벼운 느낌의 우스개 장난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임과 편지를 쓰는 변호사 ‘나’도 삶은 게임이라고 여긴다. 삶이 게임? 돈 또는 돈과 비슷한 무엇을 걸고 하는 게임. 또는 놀이.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이면 도박? 인생은 도박. 인생이 도박이라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섰다 도박을 하는 꼬마 여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외수의 단편 제목이 뭐였더라? <고수>? 아마 그 작품에서 나오는 말일 거다. 인생이 도박이라고? 인생을 도박만큼 진지하게 열중해서 살면 실패할 인생이라곤 없을 거라고. 딱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이 비슷한 취지로 쓰여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거 읽을 때가 대학 다닐 때였나 그랬는데, 그럴듯하네 싶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오직 돈을 따기 위하여 놀이, 즉 게임을 하면 그건 하수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나폴레옹.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하여간 바다 건너 영국 빼고 유럽 대부분을 포식한 나폴레옹은 쳐들어가면 깨질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다고 단정한다. 지겠지만 이길 수도 있다. 다만 확률이 무지하게 적을 뿐. 수하 장군들조차 적극 만류했던 러시아 침공. 거의 최초로 파리를 향해 대포를 쏴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 자신도 알았으면서도 러시아로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인생 자체가 놀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건데, 그래도 그렇지, 아군 적군 합해서 무려 40만 명을 귀신으로 만들었던 전쟁광을 세상 사람들은 너무 과하게 칭송해왔던 건 아냐?


  주인공이자 살인죄 피의자로 법률적인 심리 절차를 밟고 있으며, 당연히 유치장에 구속 중인 ‘나’가 자신의 변호인 피아르테스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이 작품의 전부이다. 첫번째 편지 한 통이 무려 245페이지에서 끝난다. 그러니 얼마나 지긋지긋하겠어? 에필로그로 볼 수 있는 두번째 편지는 20페이지 분량에 미치지 못하니까 껌이고.

  하여간 ‘나’가 기억하는 첫번째 놀이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프리더 뵈를레 사탕공장’에서 시작했다. 공장엔 사장인 아버지를 빼고 18명의 종업원이 있었고, 이 가운데 16명이 여자였다. ‘나’는 외동아들. 엄마는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슈테틴 사교계에서 깃발을 날리는 귀부인으로만 지내고 싶어해 ‘나’를 하녀, 유모에게 맡겨 놓아 ‘나’는 자동적으로 응석받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기보다 공장의 후계자로 대하고자 하는 눈치여서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수요일마다 공장을 방문했다가, 생산 현장도 순시하는 척했다.

 생산직원 여자들은 ‘나’를 사장의 외아들이라 ‘아기씨’라고 불렀는데, 11살, 12살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12살이지 우리나이로 하면 열셋, 열넷 정도. 중학교에 입학해 배꼽 12cm 아래엔 벌써 솜털이 빠지고 짙고 검은 털이 돋을 때다. 시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원들 대부분은 전쟁 과부이거나, 남편이 참전했다가 지금 다시 독일로 터덜터덜 걸어서 퇴각 중이거나, 벌써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노동 수용소에서 노역 중이거나, 다 자랐지만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 노처녀였는데, 1년 안에 슈테틴을 점령할 소련군에게 아마도 대다수가 강제 능욕을 당할 운명이었을 걸?

  ‘나’가 생산실에 들어가 짐짓 어떻게 일을 하고 있나 ‘참관’하는 시늉을 하면 제일 먼저 소피아 여사가 아기씨, 하고 ‘나’를 불러 무릎 위에 앉힌다. 말만 아기씨고 정말 기회만 있으면 진짜 아기의 씨를 뿌릴 수도 있을 법한 총각 놈을 무릎에 앉히면, ‘나’는 처음엔 무릎 끝에 엉덩이만 댄 것처럼 앉아 있다가 조금씩 뒤로, 뒤로, 즉 소피아의 몸 쪽으로 밀착해, 여자의 숨결과 냄새와 말랑말랑한 살의 감촉을 만끽하는 거였다. ‘나’가 1932년 8월생이고 1945년 3월 이전의 일이니까 만 12세, 거의 다 큰 ‘사내새끼’인 걸 여공들은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 그렇게 소피아의 무릎에서 비비적거리고 있으면, 조금 지나 옆에서 컨베이어를 타고 흘러오는 초코릿을 포장하던 테레제가, 아기씨 이제 이리 오세요, 하고 인터셉트를 한다. 이어서 마리아. 마리아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유일한 직원이어서 유난히 말랑말랑해 ‘나’의 입장에서 제일 죽여줬고, 4번타자인 게르티는 절대 몸을 기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아 다 큰 애하고 몸을 비비적거리기 싫었던 모양이다. 브리기테, 힐데, 요제피네, 요한나… 일과가 끝나면 지하실에 있던 목욕실에 함께 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욕탕으로 들어가던 그녀들. ‘나’도 욕탕 안까지 들어가거나 커튼 사이로 훔쳐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나? 이것이 ‘나’가 기억하는 첫번째 놀이, 장난, 게임, Spiel이었다.


  여기까지는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으로 여길 수 있겠지.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른 나라의 땅이 된 슈테틴을 떠나 1945년 튀빙겐의 티펜오르트에 도착한 후에는 달라진다. 7월, 한 시절 사교계의 잘 나가는 마담이었던 어머니는 이곳에서 심근경색으로 한 많은 세상 하직하고, 목재공장 지배인으로 취직했던 아버지마저 생계형 범죄로 해고당한 후, 전에 튀링겐 우표 판매소를 하던 남자의 과부댁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한 이후 이제는 장난이 아니다. 계모에겐 아들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나’보다 두 살이 적지만 덩치도 크고 완력도 만만하지 않아 상대를 겨룰 만했다. 근데 얘가 머리도 좀 있어서 (나중에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정도로) ‘나’를 골탕 먹이고 곧바로 계모한테 달려가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리하여 열을 잔뜩 받은 ‘나’는 아버지의 넥타이 세 개를 가위로 조각조각 내 나무에 걸어 놓고 시침을 뚝 뗀다. 누가 봐도 ‘후레자식’이라 칭하는 계모의 아들이 잘라놓고 죄를 ‘나’에게 덮어 씌우는 것처럼 연기 또는 놀이에 성공한 ‘나’. 후레자식은 밥 먹다 아버지한테 오지게 귀싸대기를 얻어 맞고, 이어서 계모한테도 야물딱지게 귀싸대기를 파박, 얻어 터지고 이후 집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어서 동쪽 독일에서는 대학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아 서쪽 베를린에 가서 대학에 입학해 법을 전공해 법학박사와 변호사 자격을 따는 일. 서쪽으로 넘어온 아버지와 계모가 사는 촌동네에 가서 변호사 개업을 하는 일, 다시 베를린으로 와서 크게 성공을 하는 일. 이건 모두 생략. 딱 여기까지가 재미있다.


  변호사인 ‘나’는 백만 마르크를 초과하는 부를 이루었다. 변호사 직을 유지한 채 정치에 뛰어들어 이젠 거국적인 놀이를 펼쳐 언제나는 아니지만 줄곧 이기는 편이었다. 더 올라갈 곳이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리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숙명적으로 질 것임을 감지하면서도 러시아를 침공하는 나폴레옹처럼 이기지 못할 놀이에 도전하는 것. ‘나’는 수년동안 놀이의 상대를 물색해, 드디어 찾아냈고, 그를 지하철 동베를린 지역에서 죽여버린다. 이래서 책을 열면 변호사 ‘나’가 변호사 피아르테스에게 자신의 살인이 결코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정당방위라는 걸 설명하기 시작한다. “정당방위란 외부의 위협과 내면의 위기로 유발된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 놀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살인도 정당방위라는 거.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차마 못하겠다. 그게 결론이라서. 서간체 소설을 좋아하기만 하면 대박일 텐데, 하여간 나는 앞에서 말한 딱 거기까지만 재미있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5-11-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뽈스타프님두 싫어하는 장르가 있군요! ㅎㅎ 것두 서간체 소설...ㅎㅎ
저두 별루이긴하지만 유르스나르의 알렉시는 정말 인상깊게 봤습니다..ㅎㅎ
크리스토프 하인의 <처음부터>를 찾아봐애 겠군요! 그게 더 제 취향일 듯합니다. ^^

Falstaff 2025-11-21 15: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알렉시>는 서간체라기보다 2인칭 소설로 보심이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