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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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완 소설가 천쉐. 중국의 소설가 찬쉐와 다른 사람이다. 천쉐(陳雪)는 1970년에 타이완에서 출생한 퀴어 소설가이고, 찬쉐(殘雪)는 1953년 후난성에서 출생한 중국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한 끗 차이로 같은 사람인 줄 알고 읽으면 깜짝 놀랄 수 있다. 선택할 때 조심하실 사.

  타이완 작품이라면, 물론 최근에 읽은 작품에 국한해 보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유난히 퀴어 소설이 많다. 바이센융의 <서자>,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과 <63번째 천산갑>, 궈창성이 쓴 <피아노 조율사> 등등. 탕푸루이의 <바츠먼의 변호사>에서 게이 커플이 나오나, 안 나오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타이완 국회는 2019년에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게 쉽게 됐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듯.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적지 않은 기간 동안에 외쳤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이 외침 가운데 앞 줄에 섰던 것이 1995년에 발표한 천쉐의 대표 저작 《악녀서》이었다. 《악녀서》가 출판되자 타이완 정부가 책을 읽어보고 “동성간의 사랑(행위)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금서 지정을 했는지, 하여튼 금방 절판을 시켜, 책을 쓴 천쉐마저 자기 책의 초판본을 한 권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거장의 클래식”이라는 시리즈를 2023년부터 3년간 여섯 권을 냈는데, 어째 《악녀서》는 읽어볼 생각을 안 했다. 이 시리즈는 중국과 타이완의 소설에 집중하고 있다. 1번이 위에서 말한 바이센융의 작품 <서자>. 이어서 찬쉐의 <신세기 사랑 이야기>, 츠쯔젠 소설집 《가장 짧은 낮》, 옌롄커 작 <해가 죽던 날>, 5번이 《악녀서》이고, 6번이 며칠 전에 읽은 티베트 회족 출신의 젊은 작가 딩옌이 쓴 《설산의 사랑》이다. 바이센융부터 옌롄커까지는 거장 소리를 들어도 마땅하다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70년 개띠 천쉐와 젊은 작가 딩옌에게 거장의 칭호를 가져다 바친 건 좀 심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인데, 글항아리의 “거장의 클래식” 시리즈는 참 괜찮다. 딱 한 권 빼고. 바로 이 《악녀서》. 물론 당연하게 내 취향에 입각해 그렇다는 말씀. 여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이 시리즈 목록에 오른 책들은 꼬박꼬박 읽어야겠다.


  《악녀서》가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느냐 하면, 퀴어 소설이라거나, 여성간 사랑의 행위를 과하게 적나라한 묘사로 그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 책에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는데, 모든 작품이 너무 우울해서 그랬다. 동성애를 하겠다면 그건 그 사람들 문제니까 내가 알 거 없고 그냥 사랑하는 마음과, 몸과, 행위를 읽으면 되지만 과하게 우울한 문장은 독자를 질리게 한다. 아울러, 심하게 우울한 작품은 간혹 참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는 악마의 가면을 쓴 천사를 보았다. 비틀비틀 더러운 진흙탕 위에서 몸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문자의 긴 사다리를 향해 파리하게 마른 두 팔을 뻗었다. 그렇게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p. 27)


  번역시를 좋아하지 않아 거의 읽은 게 없지만, 뭐 보들레르나 로트레아몽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렇다. 아, 랭보도 읽어봤다, 크. 위 인용이 제일…, 에잇, 솔직하게 메모한 대로 이야기하자, 따옴표 속 문장이 제일 유치해서 인용한 것이 아니고 이제 겨우 27페이지인데 벌써 이런 과장된 은유가 지겨워 눈에 띄는 대로 그냥 한 귀절을 가져온 것뿐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두 작품 속에서 우울한 겨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심정. 나중에는 천쉐가 소설을 쓰는 대신 신경정신과에 일차 왕림하여 우울증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까지 든다. 물론 고루한 사회에서 여성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 그것을 구태여 커밍아웃하고, 극복 또는 사회를 바꿀 목소리로의 창작을 하는 것의 스트레스가 이런 우울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하여간 읽는 독자 입장에서 그러했다는 말이다.


  첫번째로 실린 작품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의 주인공 차오차오. 차오차오의 아버지는 오래 전에 죽었다. 이제 과부가 된 아름답고 젊은 엄마는 자신의 앞날도 구만리 같지만, 자기만큼 예쁘고, 자기보다 훨씬 공부 잘하고, 자기보다는 조금 덜 아름다운 딸 차오차오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고급 창녀였다. 뛰어난 학생들만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열일곱 살 때, 차오차오는 아마도 아무 남자를 골라 처음 섹스를 했다. 아래가 발갛게 부을 정도였지만 아무 감정도 나지 않았다.

  “맙소사! 넌 어째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이 태연할 수 있는 거니?”

  처음부터 남자하고의 관계는 느낌은커녕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몸으로 태어난 차오차오. 이 아이의 첫 남자는 차오차오의 생식기에 가위가 하나 있어서 자신의 음경을 자르고 사랑도 매장해버린다고 주절거렸다는 건 그렇다고 쳐도, “얼마 후 그는 무능자가 되었다”라니. 스물다섯 살 이전의 젊은 여성이 쓴 글이라서 그랬는지 좀 웃겼다. 웃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이것도 은유로 읽어야 할지, 정말 하필이면 그런 27세의 청년이 걸렸는지, 아니면 책상 위에서 뇌로만 쓴 글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엄마가 고급 창녀로 많은 돈을 벌어 차오차오는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으며, 밤마다 바에 가서 칵테일 블러디메리를 벌컥벌컥 마실 수 있었는데, 블러디메리를 여섯 잔 마신 날 바에서 만난 진정한 연인 아쑤. 차오차오는 엄마와의 애증 관계를 겪다가 동성 연인 아쑤를 통해 진실한 사랑과 삶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


  두번째 작품 <이상한 집>은 여성 야설 작가, 세번째 <밤의 미궁>에서는 난지 아홉 달 만에 죽은 딸을 둔 젊은 엄마, 마지막 <고양이가 죽은 뒤>는 엄마, 외할머니, 외삼촌이 몽땅 죽어 혼자 남은 어린 여자가 등장하고, 모두 여성간 동성애를 그렸다.

  하도 농도가 짙어 정부가 나서서 책을 절판시킬 정도였다는 동성간 섹스 장면을 웬만하면 좀 옮겨볼까 했다가, 관두었다. 진하기는 진하다. 야설에 조금 못 미칠 정도의 수준. 점잖은 이웃분들 보시라고 인용했다가 여차하면 귀싸대기 두어방 얻어 터질 것 같아서.

  그래도 괜찮으니 조금만 옮겨 보라고?

  에이, 왜 그러셔. 진짜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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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1-20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타이완에서 정말 유독 퀴어 작품이 많이 소개되는 것 같기는 해요. 이 작가 말고도 누구더라? 구묘진인가 이 작가 책 읽다가도 우울해서 질려버렸.... 으으.

전 이 책 처음 나왔을 때 궁금해서 미리보기로 직접 읽어봤다가 으윽 하고 그냥 안 읽기로 햇었는데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귀싸대기는 그냥 접어두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1-20 15:57   좋아요 0 | URL
아하, 미리보기의 효용이 이럴 경우에 딱이구먼요! 저도 과한 우울은 정말, 정말 싫어요.

얄리얄리 2026-01-20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천대루> 보았는데, 사람마다 호불호는 있겠지만 제게는 좋았습니다.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으로 찍어두었던 게 <악녀서>였는데..
저 요즘 우울한 작품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 좀 더 줄에 세워둬야 하나 봅니다.

Falstaff 2026-01-20 16:00   좋아요 0 | URL
아휴, 제 말 믿으실 필요 없습니다. 완전 아마추어인 걸요. 그냥 팍팍 지르시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더구나 전작을 좋게 읽으셨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