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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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생 저스틴 토레스. 푸에르토리코(부계) 반, 이탈리아 1/4, 아일랜드 1/4 (모계)혈통으로 뉴욕에서 출생했다. 이 가계는 토레스의 작품 속에 계속 노출되고 있는 것 같다. <암전들>에서의 화자 ‘나’도 푸에리토리코 출신이다. 대학원 정도 수준의 창작 스쿨인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소설창작으로 석사를 하고 스탠퍼드의 창작 펠로우십에서 2년간 더 공부 또는 창작을 배웠다는데 뭐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된다. 지금은 UCLA에서 영문학 부교수를 하며 글을 쓴단다. 이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했다고.


  이 작품에서 제일 눈에 가는 건, 1946년에 출간한 동성애자들의 삶과 욕망에 관한 증언을 모은 책 <성적 변종들>이 실재하며, 독자가 몇 페이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그리 특정적이 아니지만, 문제는, 텍스트가 검은 줄로 죽죽 그어져 전체 문장을 다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줄을 그은 사람이 목적으로 한 한두 단어들이 이어져 한 메시지를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34쪽에 사진으로 찍힌 (당연히 우리말 번역이니 출판사에서 다시 편집했겠지만) <성적 변종들>의 “동성애 사례” 섹션. 무려 한 페이지에 서른 행이 담았으나 검은 줄이 그어지지 않아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인용하면 이러하다.


  “호세는 느꼈다 / 호세의 욕망들은 / 호세를 소외시키고 / 호세는 스스로를 해방할 것이다 / 호세는 매력적인 젊은이 / 나긋나긋한 육체 / 라틴계 혈통 / 남자들도 호세에게 구애했다. 어디로 가든 남자들이 그를 (쫓아다녔다) / 호세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호세를 유예) / 호세는 동성애자들에게 추방당했다 / “세상이 미쳐간다.” 호세는 /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낫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늙은 후안은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부분을 일종의 암전, blackout이라고 하고, 암전들 사이에 남은 파편들이 모이면 ‘시 또는 관찰’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34쪽의 서른 행에서 암전을 피해 살아남은 위 인용은 시일까, 관찰일까? 시일 수도 있고 관찰일 수도 있겠지.

  두번째로, 작품 속에 사진(또는 그림, 특히 회화 작품)이 많이 실려 있다. 책 속에 사진을 싣는 것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남성들의 완전한 나신과 여성의 적나라한 외음부 사진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야하지도 않고 눈길을 두 번 끌지도 않는다. 당연하지. 의과대학에서 사용했던 교과서의 도판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니.


  이런 구조가 <암전들>을 색다르게 읽히게 하겠지만 사실 내용은 별로 새롭지 않다. 스물일곱 살 먹은 푸에르토리코 계 뉴욕 출신 미국청년 ‘나’가 대도시에서 직업, 학위, 혈통 등 모든 것을 다 잃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쪽의 소도시 팰리스로 떠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팰리스. 궁전. 한때는 궁전 같았겠지만 지금은 사막 변두리에 황량하게 버려진 황폐한 건물. 이 속에 해골처럼 앙상한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후안 게이라는 노인이 있어,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간병인 노릇을 하러 가는 길이다.

  ‘나’가 열일곱 살이던 약 10년 전에 18일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저런 몸을 한 인간이 내 미래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던 ‘나’는 노년의 인간을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었다. 이들이 만난 곳은 당시에 ‘정신병원’이라 부르던 구치장소. ‘나’는 몇 달 지나면 18세가 될 것이라 청소년 시설로 보내기에는 너무 성숙하다는 이유로 편법을 써 성인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여기서 후안 게이를 만난 것. 그를 본 첫인상은 늙어서 부서질 것 같다는 느낌으로 기억한다.

  후안은 수십년 동안 시설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차례. ‘나’가 그를 보았을 당시 그는 전기치료요볍에 의존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켄 키지가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어보면 전기치료 요법을 강하게 받으면 뇌신경이 죽어 거의 백치 상태가 되던데, 후안은 그 정도는 아니고 40대가 되자 그만 리비도에서 풀려나는 후유증을 겪었다. 리비도야말로 후안에게 남은 최후의 방어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몹시 내성적이고 나이가 훨씬 많았으며, 참 점잖은 노인이었다. 이에 비해 ‘나’는 아무도 모르는 동네 출신의 10대 소년이었고.

  ‘나’와 후안이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된 이유는 정신병이었다. 정신병의 일종인 동성애자라는 병명으로. 당시에 동성애는 전복적이며 변종적인 문화가 만든 하나의 병적 유산이었다. 숱한 정신의학과 의과학자들과 심리학자 등은 우생학적 입장에서, 동성애라는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나 약물을 알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던 모양이다.


  시절을 저 앞으로 넘기면 두 여성이 있다. 앨리너 바인스와 헬렌 라이트먼. 1927년에 둘이 만난다. 이 해에 후안도 태어났다. 앨리너와 헬렌은 짧게 연애했고, 비밀스럽게 결혼했다. 이들은 잠시동안 라이트먼이라는 성姓을 사용했다가 급진적인 이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 각기 제냐 게이와 잰 게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 동성부부는 카리브해와 중남미를 여행하며 함께 어린이 책을 썼는데 이때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길을 잃은 소년을 만나 자신들의 호적으로 입양했다. 섬의 진짜 부모는 뉴욕에 사는 친척에게 보내기로 했다가 하여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의 양아들이 되었다.

  후안의 부모 또는 모모 가운데 잰 또는 얀, 또는 헬렌. 이 은총의 어머니가 1930년대에 동성애자 수백명과 인터뷰하고, 그들의 진술을 모아 두 권의 책, 한 권의 제목은 ‘남자’ 다른 한 권의 제목은 당연히 ‘여자’인 책을 준비한 것이 <성의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연구 및/또는 출판을 계속 진행하기가 어려워져 책은 1940년대에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제냐와 잰 게이 부부가 후안의 양어머니들로 계속 지내기는 쉽지 않았을 터. 머지않아 파양을 하고 후안은 뉴욕의 친척 집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고, 자랐으며, 동성애자로 성장하는 바람에 자신의 이름을 양어머니들의 이름을 따 ‘후안 게이’라고 고쳤다.

  후안이 <성적 변종들>을 발견한 곳은 이곳, 팰리스의 로비, 계단 발치에 내놓은 안 쓰는 물건이 담긴 종이상자 안에서였다. 상자 날개에 “이제 전 당신 겁니다”라고 쓰인 종이박스. 박스보다 이 문장의 캠피함campiness 때문에 후안이 쿡쿡 웃으며 이 문장을 쓴 사람의 외로운 영혼이 그려져 상자를 열었고, 책을 발견했던 거였다. 책은 검정색으로 죽죽 그어져 원문을 일아 볼 수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나’가 후안의 죽음을 지키기 위하여 팰리스에 도착해 그를 만나고, 후안과 ‘나’의 첫만남을 회상한다. 이어 ‘나’의 27년 동안의 삶에 대한 보고가 있을 것이며, 후안의 삶도 밝혀져야 하리라.

  그리고 어쩌면 제일 중요한 작업. 한때 엘리너와 헬렌이라고 불렸던 여성들의 삶과 헬렌의 책 <성적 변종들>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려야 할 것이며, 현재의 ‘나’와 후안의 죽음으로 작품은 끝을 맺을 것이다.

  퀴어 소설을 은근히 많이 읽었다. 최근에도 엊그제 타이완의 천쉐를 읽었는데 이틀만에 또 퀴어 소설의 독후감을 쓰니 조금 야릇한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들이 비율로 치면 이성애자들보다 다른 장르는 모르겠고 소설을 (훨씬)더 많이 쓰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제는 퀴어 소설 읽는 눈도 높아져 ‘퀴어’라는 장르 때문에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가 쉽지 않다. 저스틴 토레스는 그럼에도 독특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서사보다 구성 방식이 더 눈에 띄지만 스토리라인도 매력있다. 사실과 허구가 적절하게 섞여 독자에게 조금의 헛갈림을 주는 매력.

  그래도 퀴어 소설 가운데 나는 엘런 홀링허스트가 아직까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좋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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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1-22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하지도 않고 눈길을 두 번 끌지도 않는다˝ ㅋㅋㅋㅋ 저도 딱 한 번만 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맞습니다. 이 책은 구성이 독특해서 새롭지 내용은 여느 퀴어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근데 그 구성이 한몫하죠...
갑자기 앨런 홀링허스트으로 대동단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인간 참 잘 쓰긴 해요. 인정! 퀴어소설에서 최고봉급?

Falstaff 2026-01-22 20:41   좋아요 0 | URL
소문보다는 먹을 건 그리 많지 않았던 잔치음식.... 같았습지요. ㅋㅋㅋ
이쪽은 홀링허스트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거구먼요. 뭘 알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기초 근육을 워낙 빵빵하게 다져놓았지 않나 싶어서 말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