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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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에 프랑스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에서 출생한 소설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가 영화 관련일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은 이이가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에서 자랐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파리로 올라가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한 다음에 다시 영화계에 뛰어들어 감독도 하고, 시나리오도 쓰다가 소설이 더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설쓰기에 전념해 <나의 여왕>으로 데뷔, 첫 작품부터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이후 오늘 독후감을 쓰는 네 번째 소설 <그녀를 지키다>로 2023년에 모든 프랑스 소설가의 로망인 공쿠르 상을 받기에 이른다.

  앙드레아의 모계가 이탈리아 출신이고,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 그리스, 발레아레스 혈통도 섞인 모양이다. 왜 혈통을 말하느냐 하면, <그녀를 지키다>의 주인공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약칭 ‘미모’가 프랑스 출신 이탈리아 사람이며 작품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86년 가을, 피에몬테의 피르키리아노 산꼭대기에 있는 사크레 디 산미켈레 수도원. 죽음의 침상을 둘러싸고 서른한 명의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유일하게 서원하지 않고 40년을 머물렀다가 이제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려 하는 140센티미터의 왜소증 환자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의 영면을 기다리고 있다. 이 죽어가는 노인의 차마 꺼지지 못하는 영혼은 자신의 일생을 회상한다. 자신이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기억하고 싶은, 그러나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지극한 비밀, 은밀한, 그러나 정결했던 사랑 이야기를.


  미모는 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미모를 낳기 15년 전에 제노바 리구리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터를 잡은 조각공방의 마이스터였다. 1889년의 프랑스는 벨에포크 시절. 물자는 풍부하고 전쟁도 없는 태평시대. 저택과 고급주택, 그리고 성당은 자신의 건물과 분수대와 정원을 꾸미기 위하여 조각 공방에 잔뜩 주문을 해대던 시절이라 비탈리아니 집안은 이탈리아 이민 가족과 달리 전혀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아버지의 출생증명을 10년 젊게 기록하고는 징병 대상에 이름을 올려 버렸다. 아버지는 전사했다.

  갑자기 견디기 힘들 정도의 궁핍을 맞게 된 어머니 안토넬라는 미모를 토리노에서 역시 작은 조각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삼촌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1916년 10월 미모는 아버지의 동료 가운데 마침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술주정뱅이 카르모네와 함께 기차를 타고 토리노로 갔으나, 알베르토 삼촌은 미모를 난쟁이라는 이유로 도제로 받아주지 않으려 한다. 카르모네는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이탈리아 식 의리는 있어서(떼어먹지 않고), 어머니가 미모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했던 봉투의 돈 전부를 삼촌에게 주어 도제로 삼게 한다. 이 돈은 아버지가 번 돈 가운에 남아 있던 거의 모든 재산을 현금으로 만들어 이탈리아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미모의 앞날을 위한 것이었다.

  제네바 항구에서 잘 나가는 매춘부의 아들인 알베르토는 당연스레 미모의 돈을 손에 넣고 단 한 푼도 미모에게 주지 않는다. 말만 도제일 뿐 조각과 관련한 일은 전혀 알려주려 하지도 않고 잡일만 노예 수준으로 하게 만들고. 당연히 보수도 전혀 없다. 일찌감치 조각에 관한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미모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조각에 관한 다양한 시각과 철학을 익혀, 삼촌이 조각가로서 완벽하게 3류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겨우 열두 살의 소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찾을 수는 없었다. 삼촌은 미모와 지내면서 미모가 간혹 보여주는 번쩍이는 조각가로서의 재능에 심각하게 질투하고, 못난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 더욱 미모를 괴롭히게 된다. 이들의 악연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상태로 훗날 삼촌이 제네바 매춘부 출신으로 큰 부자가 된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아 떠날 때까지 이어진다.


  토리노에서 상황이 나빠지자 삼촌은 미모를 데리고 리구리아의 시골 피에트라달바에 있는 공방을 거의 헐값에 인수해 떠난다. 피에트라달바는 오르시니 후작 가문과 부르주아 감발레 가문이 적대적으로 이웃하며 이들 주변으로 농민들이 거주한다. 고도가 높고 샘이 산재한 지역으로 유명한 산피에트로 델레 라크리메 성당이 있으며 갓 부임한 파드레 돈 안셀모가 주임신부이다. 파드레 안셀모가 자랑하는 성당의 보물은 17세기에 이름없는 장인이 만든 조각품 <피에타>. 십자가 아래에서 죽은 자식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어머니는 성 마리아, 죽은 자식은 그리스도이다. <피에타>의 죽은 그리스도는 대개 고귀한 모습을 한 미남 소년으로, 어머니는 역시 고결한 외모의 젊은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에 가서 우연히 돈 안셀모 신부와 이야기하게 된 미모. 신부가 조각을 극찬한다. 미모가 처음엔 수긍하다가 신부가 너무 오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솔직한 품평을 해버린다.

  “이건 엉터리예요. 어머니는 슬퍼 보이지 않아요. 예수의 팔이 너무 길고, 외투 자락도 저렇게 길게 내려오면 성모님이 걷다가 발에 걸릴 거예요.”

  미모는 천부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해부학적 균형에 입각해 볼 줄 아는 시각을 지녔다. 게다가 작품을 놓을 장소에 따라 인체나 사물의 비율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도 아버지한테 배웠다.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 아랫부분에 심하게 찌그러진 시계 기억하시지? 계단에 걸 목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계단 아래에서 보면 정확하게 시계가 보이지만 정면으로 그림을 보면 찌그러진 원반 같이 보일 뿐인 거. 이런 장면은 뒤에서 미모가 피렌체의 필리포 메티 공방에서 일할 때 수석 도제의 조각을 품평하며 적나라하게 나온다. 지붕 꼭대기에 설치할 조각은 사람들이 건물 아래에서 올려다보기 때문에 머리 쪽을 더 과장해야 정상 비율로 보이는 현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그 유명한 작품 <다비드> 상도 이 때문에 해부학적 균형이 맞지 않게 조각한 건 더욱 유명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 성 베드로 성당


  숱한 조각가들이 도전한 작품이 바로 <피에타>. 미모가 눈물의 성 피에트로 성당 신부에게 솔직한 품평을 하니, 신부는 미모가 교만의 죄와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고 가볍게 야단친다. 성모는 기품이지 추함이 아니라면서. 이때 독자는 한방에 알아차린다. 미모가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피에타>를 조각할 것을. 이것을 위해 미모의 이름을 미켈란젤로라고 지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불멸의 <피에타>를 조각했다. 반면에 독자는 결코 미리 알 수 없는 것이 ‘미모’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의 또다른 걸착 <피에타>는 부오나로티를 능가하지만 결코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독특한 가치가 있어서 저 먼먼 산꼭대기 성당의 지하 보관소에 안치하고 있다는 것. 정말이냐고? 순진하기는.

  작품 속 미모의 <피에타>를 본 레너드 B. 윌리엄스 박사는 이렇게 썼다.

  “비탈리아니는 자신의 선배(부오나로티)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후에 발생한 젖산 가득한 육신의 경직 속에서 십자가형의 후유증이 드러난다. (중략) 얼굴의 안도감, 입술에 걸린 희미한 미소와의 대조, 비탈리아니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매끈한 뺨이 임종의 고통으로 움푹 패고, 어머니가 방금 위무의 손길로 두 눈을 감긴 그리스도는 의도와 상관없이 아름답다. (중략) 이러한 대조는 눈부신 마리아의 얼굴에서 절정에 달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다정한 미소로 내려다보는데, 기이하게도 두려움과 고뇌는 찾아볼 길 없어…(후략)” (p. 310~311)

  사후 경직이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라니. 정말 놀랄 만하지 않나? 만일 이런 <피에타> 상이 있어서 세상의 한 큰 성당에 안치한다면 숱한 예술가들은 열광을 할지라도, 더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조각가를 화형에 처하라고 요구하면서 바티칸 광장에 집결할 지도 모른다. 바티칸 여우들도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감안하여 산 꼭대기 수도원의 지하 보관실에 묻어 버린 것이겠지.

  그런데 내가 더 놀란 것은 미모가 훗날 교황 비오12세가 될 파첼리 추기경이 주문한 <천국의 열쇠를받는 성 베드로> 상이었다. 미오는 최후의 만찬을 한 날, 밤이 새기 전에 그리스도를 세 번 모른다고 한 그 양반이며, 최초의 교황이며, 로마에서 도망가려다가 십자가를 다시 지고 로마로 들어가는 그리스도한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었다가 다시 로마로 가서 스스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한 사람을 조각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베드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염 기른 혈색 좋은 현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남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듯이, 살면서 고통스러워했으니까, 1년 내내 세계의 온갖 교회에서 그가 저지른 배신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어 댔으니, 아무도 그가 아픈 과거를 잊고 살게 놔두지 않았다. 또한 그는 다른 성 베드로들이 보여주는 그런 대가연하는 표정으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지도 않았다.” (p.334)

  그래서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어떻게 받느냐 하면,

  “열쇠는 그것을 받으려고 벌린 베드로의 경직된 손과 땅바닥 사이 어딘가의 허공에 걸려 있었다. (중략) 그 효과는 강렬했다. 하느님은 자신의 교회를 올릴 반석으로 자신의 아들을 세 번 부인했던 남자를 골랐다. (중략) 내가 창조한 성 베드로는 법열에 빠진 성인, 이제 은퇴한 건강하고 권태로 가득한 종교인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 앞에서, 그의 늙은 두 손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물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안 그래도 두 손은 그걸 막 놓쳐 버렸다. 어쩌면 혹시 열쇠가 깨지는 건 아닐까, 자신이 벼락을 맞는 것은 아닐까 자문할지도 몰랐고, 그러면서 공포에 질려 열쇠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p.335)


  훗날 교황 비오12세가 될 추기경 파첼리가 주문을 해서, 이 <천국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를 성당에 모시지는 못하고 대신 자기 사비로 비용을 지불해 개인 소장하겠다고 했으니, 미모,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는 조각가로 최고의 명성을 떨치게 된다. 미모의 배경에는 피에트로달바의 오르시니 후작 가문이 있다. 후작은 아들 셋과 막내 딸이 있다. 첫째 바르질리오는 1차 세계대전에 지원해 참전했다가 유명한 열차 사고를 당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죽고, 둘째 스테파노는 일 두체, 무소리니의 파시스트로 맹활약하다가 미모 때문에 오히려 파시스트에 체포된 후 곧바로 해방을 맞는 바람에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며, 셋째 프란체스코는 젊은 나이에 차례대로 사제, 주교, 추기경까지 올라가지만 역시 미모 때문에 교황까지는 가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자줏빛 수단을 몸에 두르고 지낸다.

  막내딸이 비올라. 누군가 그랬지, (현악기)비올라는 여인의 눈물샘 같다고. 이 동네 성당 이름이 “눈물의 성 피에트로.” 비올라는 미모와 생년월이 같다. 미모가 우연히 비올라의 생일을 알고 있어서 둘이 한꺼번에 생일을 말하는데, 22일, 같은 날 태어난 것으로 오해해 둘은 진정한 우정을 나눈다. 우정은 당연히 진정한 사랑이 되지만 신분의 격차는 둘에게 정결한 사랑을 요구하고, 둘은 이에 순응한다.

  하여간 이 집의 셋째 아들이 추기경까지 오르니, 오르시니 가문의 후원을 받는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는 귀족과 바티칸의 후광을 입어 찬란한 꽃길을 갈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집안 사람들과 아들들이 가장 우선하는 것은 가문의 자존을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하여 성직자임에도 더러운 거짓말을 종용하기도 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파시스트가 되기도 하지만, 끝까지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비올라는 20세기 초반의 여성이라는 제약에 걸려 자신의 뜻을 전혀 펴지 못한다.

  재미있는 책이다. 이런 책은 책꽂이에 꽂아 두어도 좋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한 번 더 읽어볼까, 이런 생각이 들 지. 오늘 독후감을 길게 썼는데, 스토리의 1/10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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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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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아킹 마샤드 지 아시스의 장편소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을 읽은 것이 벌써 11년 전이다. 세월이 무섭다. 다른 건 거의 기억나지 않고 이미 죽은 브라스 꾸바스가 살아생전 겪은 연애 이야기를 중심으로 지난 시절의 회상한 작품이란 것만 어렴풋하다. 책꽂이에서 제목도 독특한 <… 회고록>을 꺼내 갈피를 넘기니 탁 눈에 들어오는 ‘헌사’. 맞아, 이거였어. 지독하게 인상적이어서 늘 머리에 삼삼했던 헌사.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이 <… 회고록>이 당시에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유일한 아시스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경우, 아시스가 1839년생이라는 것을 알고, 에이 설마, 1939년생이겠지, 이렇게 지레짐작했는데, 1939년생은 아니더라도 생년의 숫자가 “아마도 오타”일 거라고 엉뚱하게 믿어버릴 만큼 그럴 듯했었다. 근데 1839년생 맞고, 게다가 해방노예 아버지와 포르투갈 청소부 엄마 사이에서 나온 소위 파르도pardos 출신이면서 어떻게 시와 소설, 희곡까지 썼다는 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르도는 남미에서 유럽,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흑인의 피가 모두 섞인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 예일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헤럴드 블룸(현대 미국의 4대 소설가로, 토마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더불어 ‘코맥 매카시를 꼽아서 내게 미운 털이 박힌’ 인물)은 주아킹 마샤드 지 아시스를 가장 위대한 흑인 작가라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는 단편 넷, 중편 하나를 실은 작품집이며, 중편 <정신과 의사>를 제목으로 땄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세번째 순서로 실린 단편 <자정 미사>가 제일 그럴듯했다. 크리스마스날 밤, 자정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시간을 기다리는 열일곱 살 청년과, 그의 방에 들어온 서른 살 가량의 콘세이상 부인과의 대화를 그렸다. 화자 ‘나’가 머물고 있는 곳은 공증인 메네지스 씨의 집이었는데, 이이는 ‘나’의 사촌 누이와 결혼을 했었다. 사촌 누이가 죽고 다시 결혼한 부인이 바로 콘세이상이며 집에 부부와 부인의 늙어서 귀 밝은 어머니가 살고 있다. 메네지스 씨는 저녁을 먹고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 19세기 돈 많은 공증인답게 집을 나서서 온갖 사교활동을 하느라 영화관, 극장, 콘서트홀, 클럽하우스 등등을 활보하는데, 이게 정말 공증인의 업무상 비즈니스 때문인지, 아니면 기타 등등의 사유, 예컨데 혼외 연애 같은 은밀하고 유혹적이며 동시에 추잡한 문제 때문인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판단해야 하건만, 아무튼 콘세이상 여사와 비슷하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터. 콘세이상 여사도 처음에는 부처님도 돌아 앉을 만큼 질투도 하고, 사립탐정도 붙여보고 별 짓을 다 해봤는데 그래도 눈 하나 껌벅하지 않는 남편 메네지스한테 학을 떼 이제는 그러거니 할 정도의 보살이 된 거다.

  다 좋다. 19세기 중후반이니 다른 문제만 없다면 까짓것, 눈 한 번 질끈 감아줄 수 있는 것이지. 둘 사이에 자식도 하나 생기지 않은 터수에. 그런데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이 크리스마스, 어째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콘세이상은 사람도 아니다. 속으로는 열불이 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해야겠지. 가슴 속에 불이 활활 붙어 ‘나’의 방에 쳐들어온 부인은, 이야기하는 내내 옆방에서 자고 있는 늙어서 귀만 밝은 어머니가 남녀가 유별한데 한 방에 들어 소곤거리는 걸 알아챌까봐,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엄마가 깨겠어요.”를 연발하면서도 정작 대화를 그만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자정 가까이 왔고, 애초에 ‘나’가 친구 집에 가서 그를 깨워 함께 성당에 가려 했으나 거꾸로 친구가 집 밖 창문에서 ‘나’를 부르고, 여사는 ‘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컷.

  그러나, 정작 내가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메모를 한 작품은 표제작 <정신과 의사>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걸 먼저 읽었거든. 제일 마지막에 실렸지만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편이라서 책을 앞에서부터 읽으면 도서관 퇴근시간에 중편을 읽다가 도중에 뚝 끊어야 할 시간이 된다. 그래서 제일 긴 <정신과 의사>를 읽고, 남은 시간에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 앞의 두 작품까지 마치고 퇴근해서, 놀라지 마시라, 장장 “닷새”를 쉬고 쐬주 한 병 깠다.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은, <정신과 의사>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제일 좋은 작품을 고르라면 <자정 미사>를 선택하겠다는 정도.


  주인공은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 아주 오래전의 귀족 집안 자제이며,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을 통틀어 최고 의사였던 사람이다.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수학해 의학박사 학위를 딴 실력자로, 일찍이 포르투갈의 국왕이 직접 코임브라에 머물며 의과대학을 이끌거나 리스본에서 왕실 의학업무를 처리해달라 요청했음에도 서른네 살 때 물리기 어려운 국왕의 청을 극구사양하고 브라질로 귀국한 진짜배기 애국자이기도 하다. 바카마르치 박사가 이때 포르투갈 국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폐하, 과학이야말로 저의 유일한 소망이며 이타구아이는 저에게 우주와 같은 곳입니다.”

  과학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건 아시겠지? 그럼 이타구아이는? 동네 이름이다. 박사의 고향. 이타구아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서쪽으로 거의 붙어있는 도시이다. 근데 이건 교통이 무지막지하게 발달한 지금 이야기고, 19세기 말에도 ‘아주 오래전’이라 했던 당시엔 비록 기차는 다녔지만 그곳 태생이면서도 리우데자네이루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심지어 훗날 바카마르치 박사의 아내가 될 에바리스타도 박사와 혼인하고 한참 후에야 겨우 수도에 한 번 다녀올 정도였다.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의사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 작은 도시 이타구아이에서 의사 개업을 하겠다는 거였다.

  정말로 고향에 돌아와서 5년간 의사로 지내다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지역판사의 아내였던 스물다섯 살 먹은 과부 에바리스타 다 코스타 이 마스카레냐스와 결혼했다. 예쁘지도 않고 매력도 없는 그냥 그런 여자.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에바리스타냐고 물으면, 박사는 아내가 1등급의 생리학적, 해부학적 조건을 가졌으며, 좋은 소화력과 규칙적인 수면습관, 좋은 맥박과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튼튼하고 건강한 2세를 생산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근데 사실 에바리스타는 그리 건강하지 못해서 임신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박사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쉰두 살이 되어버렸다.

  이 동안 박사는 새로운 장르인 정신분석과 뇌 병리검사에 특별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전혀 개척되지 않은 분야에 용맹정진하겠다는 학자적 탐험심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는 “정신의 건강이야말로 의사의 가장 고귀한 책무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기 위하여 시의회에 강력하게 정신병원 건립을 요구했다. 이때까지 이타구아이 시의 중증 미치광이는 집에서 거의 감금한 상태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경증의 조현병 환자들은 별로 구애받지 않고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말이 그렇지 엄연히 방치하는 수준이었던 거다.

  그리하여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바가街에 50개의 창문이 있고 수많은 작은 방이 달린 흰 집이 들어섰다. 브라질 각지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병원 개원 축하 파티를 일주일에 걸쳐 성대하게 치룬 다음 본격적으로 환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환자들 역시 이타구아이 시에서뿐만 아니라 브라질 전국에서 쏟아져 몰려들어 병원은 개원하자마자 다시 증축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병원의 이름은 “카자 베르치” 녹색의 집이라는 뜻이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병원의 행정업무를 약제사 크리스핑 소아리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연구에 매진해, 환자를 심한 광기와 유순한 환자로 나누고, 하위 분류로 편집, 망상, 다양한 환각 증세로 구분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이상한 상태를 누가 판정하느냐, 하는 것. 누가 하기는 누가 하나? 당연히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바카마르치 박사가 하는 것이지. 이제 그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와 관찰을 했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상이 아니면 즉각 그를 강제로 카자 베르치에 입원을 시켜버리는 권한을 저절로 갖게 된다. 상대가 누가 됐든 상관없다. 하다못해 시 의회 의원이라도. 바카마르치 박사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제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전부 조현병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절대 권력을 쥐게 되고, 언제나 내가 부르짖듯이, 권력이 문제가 아니었던 적은 인류사에 한 번도 없어서, 박사는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되어간다. 독재가 따로 있나? 뭐 그게 인생이다. 근데 독재의 끝이 뭐야? 폭동이고, 반란이고, 혁명.

  그렇다고 주아킨 마샤드 이 아시스를 혁명가 비슷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이이는 가난한 유색인 출신의 반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브라질의 오히려 알아주는 군주제, 즉 왕정주의자라서 작품 속의 저항을 체제 전복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봐도 안 될 것 같다. 작품은 재미있다. 이이의 반동적 사상 때문에 작품까지 멀리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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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7
나탈리 사로트 지음, 위효정 옮김 / 민음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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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의 소설. 생각만 해도 멀미난다. 그러나 이 책은 1939년 작품. 책이 나오자마자 독일이 폴란드 국경 너머로 탱크를 몰아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나탈리 사로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의 누보 로망의 대표선수. 그러나 1939년에는 누보 로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으며, 누보 로망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알랭 로브그리예는 열일곱 살, 미셸 뷔토르가 열세 살이었다. 내가 읽은 사로트의 소설은 <황금열매>와 <어린 시절>. 각각 63년과 83년 작품이다. 사로트가 1900년생이라 작품을 썼을 때의 나이도 금방 계산이 된다. <황금열매>는 예순세 살, <어린 시절>은 무려 여든세 살에 썼다. 두 작품 다 진땡 누보 로망 작품이며 이때는 특히 로브그리예처럼 미분적 묘사를 사용하는데, 로브그리예보다 훨씬 강력한 배율의 현미경으로 사물과 현장을 탐색하는 바람에 그걸 읽는 독자는 (못 믿으시겠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니 믿으시라) 까무러친다.

  나도 사로트의 소설을 읽는 중에 멀미를 하다가 까무러쳐서 그냥 홱 내팽개치고는 몇 해가 지난 다음에 아무래도 책값 본전이 생각나 다시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멀미 나는 건 여전했다. 근데 사로트나 로브그리예나 하여간 이 누보 로망 작가들이 낸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면 읽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나, 언젠가 흉내까지 내보고 만다니까 글쎄. 이게 말이 되느냐는 말이지. (희곡은 빼고) 사로트의 소설도 그렇게 죽을 똥을 싸며 읽었으면서도 또 다른 번역서가 나오기 무섭게 얼른 찾아 읽는 것을 보시라. 뭐 내가 이쪽 방면으로 병이 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읽고 나서도 내 입에서 결코, 재미있게 잘 읽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번히 알면서 또 읽게 되는 거. 이게 누보 로망이고 나탈리 사로트다.


  이번에도 멀미 났다. 근데 저번보다는 덜했다. 아무래도 작품을 쓴 시대가 본격적으로 현미경 관찰을 시작하기 전이라서 그랬던가 보다. 실제로 물체의 미분적 분쇄는 없다. 그래도 누보 로망의 누군가와 닮았다. 누보 로망이란 건 어떤 특별한 작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로 로망이라는 기치 아래 모여 쓴 반소설적 전위적 작품을 일컫는 것으로, 꼭 물체의 미분적 분쇄만 말하는 것은 아닐 것. 훗날 중국의 찬쉐도 <오향거리>의 주인공 X여사가 사물을 거울에 반사된 모습이나, 현미경을 통해 보는 것이 이 전위적 표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향성>에는 적어도 이런 ‘봄watching’은 존재하지 않아 덜 피곤했다는 말이다. 이들과 같은 패거리로 불리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후기 작품에 더 가깝다고 할까?

  그래서 이해하기 좋았느냐고? 천만의 말씀. 이번에도 나는 사로트를 제대로 오해했다.

  처음에 좀 헷갈리더니, 읽어가다 보니 한 여성의 시각으로 가족 구성원을 묘사한 것으로 읽혀, 아무리 사로트라도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1939년에 사람 뇌 저리게 만들 수 있었겠어? 이렇게 자만하려고 할 즈음부터 또다시 오리무중의 첩첩산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알아서 이런 책을 고르는 (나 같은)인간이 문제다.


  나는 가끔 만들기 쉬운 순두부 계란탕이나 아욱국, 콩나물국, 매운탕 같은 것을 끓인다. 대개 아침 5시 경부터 멸치, 다시마를 끓여 육수를 내는 것부터 시작해 나름대로 ‘제대로’ 끓이려고 한다. 이렇게 그나마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밥을 퍼 먹으려는데, 마누라쟁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럼 기분이 어떻겠어? 예전에 어머니가 식탁을 차리면 할머니는 걸레들고 마당의 수돗가로 나간다. 어머니는 입이 댓발 나와서 밥상 차리면 꼭 저렇다고(아마도 속으로는, 저 지랄이라고) 지청구를 넣고. 이거 우리나라만 그러는 게 아니다.

  “방에서 방으로 다니며, 부엌을 뒤지며,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 욕실 문을 맹렬하게 두드리면서, 그녀는 간섭하고, 지도하고, 닦달하고, 내처 한 시간을 거기서 있을 작정인지 그들에게 묻고, 혹은 늦었다고, 전차나 기차를 놓치게 되리라고, 너무 늦었다고, 되는 대로 무신경하게 있던 그들이 뭔가를 놓쳤다고, 혹은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식었다고, 두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다 얼어붙었다고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후략)”  (p.21)

  위 인용문을 읽어보면, 아직 한 문장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가정주부가 일찍부터 아침식사를 마련해 식탁에 차려 놓았건만 자식새끼들과 남편이란 작자는 내쳐 자빠져 있다가 다 늦어서 허겁지겁 세수하고, 면도하고, 개인위생 처리하는 바람에, 엄마가 열이 빡세게 돈 모습으로 보인다. 나도 소설책 읽은 세월이 있고 페이지 수가 있는데 이런 정도라면 뭐 껌이지, 안 그래? 이런 마음이, 자만심이 들었다는 말씀. 그럴 만하지? 내가 지금 읽어도 그럴 만하다.

  게다가 이런 문장이라니. 가족 가운데 누가 욕실에서 물을 틀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팽팽한 침묵 속의 돌연한 물소리,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신호, 그것들을 향해 울릴 호출, 막대기 끝으로 건드린 해파리를 역겨워하면서 그게 불현듯이 소스라치며 곤두섰다가 다시 움츠러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리라. / 그녀는 그것들을 그렇게 느꼈다. 벽 뒤에, 늘어앉아, 부동 상태로, 소스라칠 태세를, 요동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p.19)


  사로트는 남성들의 행위에 관한 묘사도 좋다. 그는 어린 아이와 산책을 간다.

  “그는 길을 건널 때마다 자신의 뜨겁고 끈적한 손으로 그들의 작은 손을 꽉 붙들면서, 그러나 그 작디 작은 손가락들을 짓뭉개지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한없이 신중하게 왼쪽 그다음에는 오른쪽을 살피면서 그들이 지나갈 겨를이 있는지 확인했고, 자동차가 오지 않는지 잘 보았고, 그의 작은 보물, 귀여운 그의 어린애, 그가 책임진 그 살아있고 보드랍고 순순한 작은 것이 짓뭉개지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p.27~28)

  문장 속에 지시대명사 ‘그’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 읽기 불편하고, 한 문장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줄줄이 인용할 수도 없어서 그렇지 이 챕터 역시 괜찮다. 나는 당연히 아빠가 두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줄 알았다. 앞 챕터, 밥 차려 놓았는데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별 짓을 다 하던 식구들일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읽었으나, 아이고, 갑자기 이 남자 어른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이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그’와 ‘그녀’는 누구를 특정하는 그와 그녀가 아니라 단순하게 챕터를 쓸 때 작가가 떠올린 여자와 남자에 관한 소묘라고 생각해 마땅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뇌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아오, 내가 지금 틀림없이 오독하고 있는 중이야. 오독오독한 오독뼈 씹는 게 아니라고. 또다시 죽을 똥을 싸며 오리무중의 첩첩산중으로 자진해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탈리 사로트는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소설이라는 픽션의 형식을 통해서 말하기 때문에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 독자는 판별할 수는 없지만 사로트의 소설을 읽기 위하여 큰 힌트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클리셰들, 복제품들, 발자크,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로 말하자면, 오, 그들은 아주 잘 알았고, 그 모든 것에 훤했고, 하지만 그들은 겁내지 않았고 ― 그들은 그녀를 상냥하게 바라보았고, 그들은 미소 지었고, 그녀 곁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또 그들은 그 점을 아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하략)”  (p.69)

  사로트는 여태까지 지속해온 소설을 답습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신 소설을 쓰겠다는 선언이다. 아무도 겁내지 않고 무심결에 쓰는 저 왕년의 거장 발자크, 플로베르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탄생하는 작가군을 그들은 누보 로망이라 불렀던 거디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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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5-16 0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그 모든 것, 클리셰들, 복제품들, 발자크,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로 말하자면, 오, 그들은 아주 잘 알았고, 그 모든 것에 훤했고, 하지만 그들은 겁내지 않았고 ― 그들은 그녀를 상냥하게 바라보았고, 그들은 미소 지었고, 그녀 곁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또 그들은 그 점을 아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하략)” (p.69)

이것을:

“그리고 모든 것, 클리셰들, 복제품들, 발자크,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로 말하자면, 오, 그들은 아주 잘 알았고, 모든 것에 훤했고, 하지만 겁내지 않았고 ― 그녀를 상냥하게 바라보았고, 미소 지었고, 그녀 곁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또 그 점을 아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하략)” (p.69)

이렇게 교정correction 했으면 어땠을까?
 
아이스링크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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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라뇨의 초기작. 이전에 시집은 몇 권 출간했지만 이 작품 이전의 소설은 친구 안토니 가르시아 포르타와 함께 쓴 것 하나만 볼라뇨의 연표에 나와있다. 물론 그렇다고 자기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이 내가 읽은 몇 번째 볼라노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꽤 읽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눈에 힘주고 이이의 연표를 들여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내가 이전에 읽은 책을 보면 작품의 주인공들이 멕시코시티에서 10대 후반의 나이로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전위 문학, 특히 시 장르에 깊이 빠져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북아메리카와 유럽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범죄에 연루되는 스토리가 이이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명이 길어 라틴 아메리카에 잠입해 살아남은 나치 잔당과 하여간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이 되는 작품들. 이 두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 설킨 것도 있었겠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볼라뇨는1953년에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작품 속에서 칠레 출신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작가 또래의 칠레 사람들이 항용 그러했듯이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 전후로 멕시코를 거쳐 유럽 각지에서 살다가 같은 언어를 쓰는 스페인에 정착한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968년, 열다섯 살 때 가족 전부 멕시코시티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후 다시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는 한편 이 또래들이 왕왕 그러하듯이 입에서 젖내가 가시지 않은 전위시를 지었나 보다. 1973년에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건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조국 칠레에 갔다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생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빵에 들어갔는데 어릴 적 친구를 만나 74년에 풀려났다고. 이후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운동에 가담했다. 이런 경험들이 볼라뇨의 책 속에 다 들어가 있다. 책을 웬만큼 읽은 다음에 연보를 읽는 것도 재미있구나. 아, 볼라뇨가 이런 경험이 있어서 <야만스러운 탐정들>, <칠레의 밤> 같은 걸 썼구나, 이런 걸 알아채는 재미.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를 어느 정도 읽은 후에 첫번째 작품 <루공가의 치부>를 읽을 때 각 등장인물의 족보가 눈에 훤하게 들어오는 것과 유사한 잔재미가 있다.


  <아이스링크>는 한 건의 살인사건을 놓고 세 명의 화자 ‘나’가 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플롯이다. ‘나’의 서술이 아니라 ‘나’의 내레이션.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나’가 아니라 ‘저’이고 따라서 존칭을 사용한다.

  레오 모란, 가스파르 에레디아, 그리고 엔리크 로스켈리스.

  레오 모란과 가스파르 에레디아는 각각 열아홉 살과 스무 살 때 멕시코시티 부카렐리가街에서 패기 넘치는 시인들이 상주하던 모호하고 수상쩍은 청춘의 공간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전위 시를 써서 서로 돌려 읽고 비평하는, 요새 말로 합평이란 걸 했던 동아리 멤버였다. 모두 새파란 청춘이었고 겁 없는 십대 시인이었으며 전부 자기들이 천재인 줄 알았던 시기.

  레오는 일찌감치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시작해 스페인으로 건너와 팜플로나, 사라고사, 바르셀로나에서 노점상으로 푼돈을 벌다가 우연찮게 Z시로 굴러왔다. 해변 관광도시 Z시에서 장신구 가게를 열고 수완을 발휘해 돈을 조금 모아, 이어서 ‘카르타고’라는 옥호의 술집을 인수하고, ‘델 마르’ 호텔,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 그리고 다섯 개에 이르는 상점도 접수하는 수완을 보여, Z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과 불 같은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3년만에 점잖게, 여전히 우정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갈라섰다.

  레오가 사업차 바르셀로나에 가서 피로를 풀려고 불타는 돼지 껍데기에 쐬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우연히 노점상을 하는 칠레 여자 모니카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젊은 시절, 아니, 어린 시절에 같이 전위시를 쓰던 가스파르 에레디아가 바르셀로나에서 거지꼴을 못 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럼 Z시로 와서 자기를 찾으라고 말하고는 잊어버렸다. 근데 정말로 모니카가 가스파르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 Z시에 도착해, 사람 사이에 척지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업가답게 가르시아에게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5월부터 9월까지 일하라고 했다. 반년 일하면 멕시코시티로 돌아가 몇 달 버틸 수 있게 괜찮은 급여를 주고 밥도 하루 세끼 먹을 수 있게 해줄 터이라고. 가스파르는 만족한다. 스페인 체류 허가증도, 취업 허가서도 없는 외국인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 이건 실제로 로베르토 볼라뇨가 야간 경비원으로 일했던 캠핑장 “에스트레야 델 마르”의 라틴어 식 이름이라고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세번째 화자 엔리크 로스켈러스는 163센티미터의 키에 뚱뚱한 몸집의 카탈루냐 남자이며 사회주의자다. 노동과 정의와 진보를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노동, 정의, 진보가 한 뭉텅이로 다 옳은 거 같지? 착시 현상이다. 이에 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다. 세상에 “다 옳은 건 하나도 없는 법이다.”라는 한 마디로 넘어가자. 전직 사회당 Z 시장 필라르 빌라마르 여사의 최측근으로 Z시의 사실상 최고 권한을 휘둘렀다. 22세에 대학에서 심리학 학위를 취득하고 한때 부적응 아동시설에서 심리상담원으로 일한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회당 동지 필라르가 불러 진취적 열정과 야망, 그리고 인생의 목표를 위하여 Z시로 와서 지난 2년 동안 시청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근육이요 두뇌였다고 자부한다. 이런 인간이 꼭 당하는 것이 있다. 다른 직원들의 질투와 원한을 샀다.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알 수밖에 없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마르고 비관적인 인간이 된 것 같다. 이이의 사무실 벽을 차지하고 있는 수료증 액자의 종류를 쓰려 해도 A4 반 장은 너끈히 채울 듯하여 여기에 옮기지 못할 정도.

  그런데 한 행사에서 누리아를 만난 것이 사달을 만들었다. 누리아 마르티. 코펜하겐에서 열린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스페인의 위상을 높인 스타. 스타인 것도 모자라 여태 엔리크가 본 여자 가운데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엔리크는 누리아를 만나서 친분을 쌓기 위하여 시청 관광축제과에 작업을 해 낙농업 박람회에 홍보대사직을 만들고 초대 홍보대사로 누리아 마르티를 위촉하려 시도했다. 당연히 거절할 것임을 알면서도. 예상대로 누리아는 난색을 표했고, 그래도 홍보대사 건을 계기로 저녁 식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간혹 만나 식사를 하고, 점점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엄마와 여동생이 사는 누리아의 집에도 자주 들르는 관계로 발전했다. 당연히 엔리크는 누리아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의 정도도 점점 증가했다. 사랑이란 것이 점점 증가해? 웃기네. 사랑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폭발적으로 사랑의 농도가 커져버렸다.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불평등이랄 수도 있을까, 싶게 누리아는 어처구니없게 국가대표에 포함되지 않는 불상사를 만났고, 따라서 코치와 연습장 및 장비 대여 같은 온갖 혜택이 하루 아침에 물 건너 가버렸다. 누리아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걸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엔리크 로스켈레스.

  Z시에는 몇 십년 전 미국에 이민가서 떼돈을 벌고 돌아온 거부가 저택을 짓고 산 적이 있다. 이제는 시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로 변해버린 괴상하게 생긴 저택을 눈여겨보던 엔리크, 그는 실제로 저택에 가보고, 거대하게 지은 실내 수영장을 유심히 살피더니 시청으로 돌아가 엽기적 기안을 쓰기에 이른다. 이 저택을 대대적으로 수선해 관광시설로 쓰자는 제안. Z시의 실력자요 시장의 최측근에 정말로 능력도 막강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일사천리로 작업을 시작했고, 엉뚱하게 지하실의 실내 수영장을 아이스링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제목이 <아이스링크>가 되는 것. 그리고 공사는 1~2년 후에야 끝난다고 보고한다. 그동안 누리아가 연습에 매진하면 다시 국가대표로 발탁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누리아의 키스 한 번 받지도 못하는 엔리크는 그렇게 불법을 저지른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여전히 폐허이며, 유령이 나올 거 같은 삭막한 장소의 깊고 깊은 곳. 그곳의 아이스링크. 거기에도 두 발 달린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다. 다만 엔리크와 누리아가 모를 뿐이지. 누군가가 피겨 스케이팅을 연습하고, 다른 누군가는 음악이 든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주고 동시에 자기 업무를 위해 서류를 검토하는 장면. 그것을 보는 눈이 있는 것.

  날들이 지난 어느 날 밤. 우연히 전처의 심부름으로 저택에 가서 사람을 찾으러 건 레오 모란은, 그날따라 찾는 사람이 없어 아직 포장 박스가 널려 있는 저택을 훑다가, 아이스링크를 발견하고, 아이스링크 위에 백여 군데 칼에 찔린 여인의 시체를 발견해 단박에 일이 커지는데….

  죽은 여인이 누구냐 하면, 안 알려줌. 그러면 누가 죽였냐고? 그것도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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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05-15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가 죽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기억이 날랑말랑.. 엔리크 다시
보니 참 안쓰럽군요.

Falstaff 2025-05-15 16:02   좋아요 1 | URL
살인범은 본문에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시면서.... ㅋㅋㅋㅋ
 
사이버리아드 - 심너울의 사이버리아드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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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두 권의 스타니스와프 렘을 읽었다.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 내가 SF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솔라리스>를 읽고 뻑, 넘어갔다. 그리고 <우주 순양함 무적호>로 이어진다. 짧은 독서력에 한정해 말하면, 렘은 외계 생명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존재”에 대한 인간식 사고방식의 진지한 전환을 요구하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제시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진지한 작가. 이런 등식이 고정관념 비슷하게, 두 권밖에 읽지 않았으니까 아직 정식 고정관념이 아니고 고정관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사이버리아드>를 읽었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 행성의 거대 바다가 통째로 한 생명체이며 이 생명체가 우주선에 탑승한 인간의 뇌에 환상이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솔라리스>, 인간이 아닌 유기물 생명체가 한 행성에 두고 온 기계의 부품들이 자체 번식을 통해 진화한다는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런 발상을 한 1960년대의 폴란드의 천재가 이런 코미디 메들리, 희극 연속작품도 썼다는 말이지?

  아주 오래 전에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순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러시아 오페라는 무겁기만 하고 코미디도 재미없어.”라고 썼다가 (지금은 오페라 평론가 또는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 모 씨한테 심각한 유감의 글을 받은 이후 찍소리도 못한 적이 있는데(앗다, 드럽게 지랄하데), 이 기억이 불쑥 되살아났다. 정말 SF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진지한 작가”라는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유사 고정관념을 들었으면 그 양반처럼 나하고 온라인 상에서 절교했을 수도 있겠다. 당시엔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수도원에서의 약혼>을 듣고 보기 전이었고, 지금은 <사이버리아드>를 읽기 전이었으니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이들은 조금 어엿비 봐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뭐,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


  스타니슬라프 렘이 보는 세상은 인간보다 기계로 이루어진 세상이 훨씬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과 기계의 탄생을 알아보자. 이오니드 왕좌의 계승자 펠릭스 왕자에게 이오니드 왕이 말한다. 이오니드는 금속 이온의 세계를 뜻하고, 펠릭스는 행운Felix가 아니라 철Fe, ferric을 변형시킨 고유명사이다.

  “우주의 종족 창백얼굴(인간)은 역겨운 만큼이나 신비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니, 어떤 천체가 통째로 오염된 결과 그 종이 생겨난 까닭이니라. 유독한 휘발성 기체와 고약한 이상 생성물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창백얼굴이라 알려진 종이 나왔다. 태초에 그들은 태양에서 육지로 주르륵 올라온 기어 다니는 흙덩어리였고,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갔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수록 더 늘어났고, 그런 다음 질척한 삶(살)을 석회질 골격(뼈)으로 받치며 일어났으며, 마침내 기계를 만들었다. 이 원형原型 기계로부터 지능이 있는 기계가 나왔고, 그것을 지적 기계를 낳았는데, 지적 기계는 완벽한 기계를 고안했다.” (p.468~469)

  이오니드 왕은 아들 펠릭스한테 지구상 생명체의 기원에서 시작해 수중생물의 육지 상륙에 이어 인간까지 진화를 간단하게 설명한 다음에, 인간이 만든 기계가 최상의 생명체라고 단언한다. 이 기계는 급기야 지능을 갖게 발전하고, 이후 기계적 진화를 거쳐 완벽한 기계 상태가 등장하니 이를 “가가발단” 족이라 한다.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단계.” 이 가가발단의 구성원들이 뭐할 거 같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모래밭처럼 보이는 곳에 누워 몸을 긁거나 코를 후빌 뿐. 그러나 사실 이들은 신의 경지까지 도달한 ‘생명체’이다. 이들은 안다. 다른 지성체 로봇을 억압하는 불행과 불운을 사라지게 하여 모든 로봇을 행복하게 만들어봤자 아무 간섭을 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100배에서 많게는 800배까지 더 큰 고통을 주게 된다는 것을. (p.441)

  하기야 인간 등의 유기물을 만든 조물주가 특히 에덴 동산에 인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놓자마자 곧바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들들 볶아댈 뿐이었지 않은가. 그것 보다 그냥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코나 후비고 있는 것이 훨씬 낫기는 낫다.


  어쨌거나 <우주 순양함 무적호>에서 한 번 소개했던 기계의 진화가 이 책에 와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의 첫번째 주인공은 트루를, 트루를보다 등장 횟수가 약간 못미치는 또다른 주인공이 클라파우치우시. 이들은 로봇이다.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이자 우주 전체로 봐도 막강한 지능을 소유한 라이벌 ‘제작자’이다. 항성과 행성을 재배치해 우주 광고판을 만드는 일도 밥 먹듯 해치우고, N으로 시작하는 것은 뭐든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지만 이것 때문에 세계를 파멸시키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 있는 정보를 그러모으는 ‘제2종 악마’를 창조해내고, 적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진 왕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슈퍼 에로티즘 증폭기 ‘팜므파탈라트론’을 만들기도 한다. (p.7 “들어가기에 앞서” 요약) 이런 능력이 있는 우주 최고의 AI를 장착한 로봇을 ‘제작자’라고 칭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AI는 어쩌면 사람보다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서, 둘이 서로에게 귀여운 수준으로 실패를 맛보게 하기 위해 예민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한 에피소드만 소개한다. 앞 문단에서 소개한 N 기계.

  제작자 트루를이 어느 날 N으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시험적으로 만든 것이 바늘needle, 난징산産 무명바지nankeens와 네글리제를 만들라고 명령하니까 기계는 탁, 만들어냈다. 이어서 좀 더 어려운 과제로 주문하기를 “슬픔을 잊게 하는 약nepenthe, 다른 마취제narcotics들로 채운 물담뱃대narghile에 그 물건들을 전부 처넣고 못질해버리라고nail 했다.” (p.42) 나는 이게 잘 해석이 되지 않는데, 물담뱃대의 작은 사이펀 같은 곳에 바늘과 무명바지를 다른 것과 함께 쑤셔 넣으란 얘기인가 싶다.

  하여간 명령을 착실하게 다 완수하니까 이번엔 후광nimbuses, 국수noodles, 핵nuclei, 중성자neutrons, 나프타naphtha, 코nose, 님프nymph, 물의 요정naiad, 나트륨을 만들게 했더니, 다 만들어내고 마지막 나트륨은 만들지 못하겠다고 딱 거절을 해버렸던 거다. 열을 받은 트루를은 왜 소금을 못 만드느냐고 타박을 하니, 기계가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나트륨은 모르고 소듐sodium만 아는데, 하여간 자기 기준으로 영어로 N에 화학기호 Na, Sodium은 능력 밖이란다. 그냥 넘어간 트루를. 그럼 밤night을 만들어보라고 하니 정말 세상에 밤이 깔리는 거 아닌가 말이지.

  기분이 좋아진 트루를은 친구이지만 경쟁자인 클라파우치우시를 부른다. 트루를이 친구 앞에서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은근히 심통이 나버린 클라파우치우시가 허락을 받아 기계한테 명령을 하기를, 자연nature을 만들어봐. 스타니스와프 렘이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무신론자이다. 그래서 기계가 만들어 낸 것은? 순식간에 자연사학자naturalists들로 가득 차서 자기가 출판한 책을 흔들며 남의 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먼 곳에서는 불타는 장작더미가 보이는데 그 위에는 조물주Nature에 대한 순교자들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천둥이 치고, 이상한 버섯구름 기둥이 피어올랐다. 모두 동시에 떠들어대고 아무도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온갖 계약서, 항소장, 소환장 같은 문서들이 날아다니는데 이런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한다.

  열받은 클라파우치우시. 이제 또 명령을 하기를 부정negative를 만들어보란다. 그러니까 기계는 반전자, 반중성자, 반중성미자 등등을 만들었다. 이제 꼭지가 돈 클라파우치우시는 그러면 무nothing을 만들어 보란다. 어,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 트루를. 도대체 뭘 만들라는 거야? 말 그대로 무無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지워야 하는 것. 그리하여 기계는 세상의 것들을 차근차근 사라지게, 멸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없어진 것들이 곤심, 포각, 타갈뱀, 슈뻥, 타타품, 이거뜰, 쇗불과 냥자 등등. 도대체 이것들이 뭐냐고? 없어진 것이니 내가 알 수 있나. 그러나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는 없어진 것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온화했던 것인지 안다. 그런 것들이 없어져버렸다.

  이들은 N으로 시작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기계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는 이미 없어진 것들을 통탄하게 아쉬워하고, 그렇게 넋이 나가 서 있는 동안 먼저 정신이 슬며시 돌아온 클라파우치우시는 슬쩍 트루를의 집을 나와 그길로 뺑소니 쳐버린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스타니슬라프 렘은 1964년부터 1979년까지 15년 동안 썼다. 모두 15 편으로 되어 있으며, 전부 독립적이라 단편집/작품집 읽는 기분으로 한 편씩 즐길 수 있다. 책 소개에는 ‘사이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합쳐 <사이버리아드>라고 제목을 지었다고 했으나, 읽어보니 ‘사이버리아드’보다는 <사이버라자드> 즉 ‘사이버’에 ‘세헤라자드’를 합친 것에 더 가깝다.

  하여간 스타니스와프 렘은 천재 맞다. 머리 속의 뇌활동이 인간과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 공간과 모든 생명 그리고 생명 수준에 근접하거나 초월한 기계까지 확장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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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5-14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에스에프 안 좋아하는데 백작님 영업에 넘어가서 그 연두색 책 솔라리스 손 닿는 회전 책장에 소장중이란 말이지요...(살아있다면 팔백작님 연세되어 읽을지도?!?!ㅋㅋㅋㅋ)

Falstaff 2025-05-15 05:19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셔요. 언젠가는 읽으실 겁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5-05-16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사랑하는 스타니스와프 렘!!!! 느낌표 백만개요. ㅎㅎ
근데 이 책 저는 구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너무 힘들었어요. 번역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을 지경... ㅠ.ㅠ 새 번역이 나왔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사이버리아드를 좋아하신다면 저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를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진짜 웃다가 죽는줄 알았어요. ㅎㅎ 저는 사이버리아드보다 이연 티히가 더 좋았거든요. 물론 새 번역본 읽고 다시 판단해야겠지만요. ㅎㅎ

Falstaff 2025-05-16 15:51   좋아요 1 | URL
렘을 좋아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넵. 저도 이욘 티히, 목록에 올려 놓았습니다. 기대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