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양장)
아서 밀러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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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면 일단 읽을 욕심이 생기는 (극)작가 리스트 가운데 20세기 중엽 미국 사람 세 명이 있다. 유진 오닐, 아서 밀러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 이 가운데 윌리엄스는 미국 남부의 크지 않은 도시를 무대로 남부 전통의 몰락이나 가족 간의 갈등을 습하고 더운 남부 날씨를 닮은 우울한 비극을 그린 반면, 밀러는 뉴욕을 중심으로 무너져가는 가족 또는 커뮤니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섬뜩하게 그려냈다. 정말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은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밀러의 희곡집은 이제 겨우 네 권을 읽었을 뿐이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거의 모든 이들이 밀러의 대표작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꼽는 반면, 나는 <모두가 나의 아이들>을 더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이제 1번 밀러 작품을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감안해야 할 점.

  극의 주인공 에디 카본은 아니더라도, 에디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이탈리아에서도 일찍이 알 카포네와 프랭키 예일을 배출한 시칠리아 출신이다. 에디 역시 이탈리아 문화권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 주로 이탈리아 이민으로 구성된 뉴욕 항구 하역 노동일에 종사하면서 이들과 같은 의식을 공유한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아내와 아이들을 외부로부터 지켜야 하며, 무엇보다 명예를 우선한다. 이들에게는 미국 법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습법이 존재하니, 바로 남자는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추한 행위는 고자질. 겨우 열네 살에 불과한 꼬마 남자 아이가 이탈리아에서 온 불법이민자를 이민국에 고발한 일이 있었을 때, 이곳, 뉴욕항을 면한 동네의 남자들은 아이를 일단 때려눕힌 다음 발목을 잡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계단 한 단을 내려올 때마다 열네 살 꼬마의 뒤통수가 시멘트 계단에 텅, 텅 부딪힌 건 당연하다. 이후 꼬마는 동네에서 사라져 다시는 주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게 극의 초입에 에디를 포함한 동네 남자들이 맥주 한잔하면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한 소절.

  남자는 또한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기상 상황이나 불경기 때문에 뉴욕 항에 접안하는 화물선이 없다면 절반에 불과한 일당을 받더라도 다른 항구에 가서 노동을 하고, 알량한 돈으로 만든 음식을 자기는 굶더라도 가족들 입에 들여보내야 한다. 여자는 대신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남자는 먹이를 구해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을 어떤 위협/위험에서도 보호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다가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의 조건을 지키려면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야수 비슷한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작품을 읽었다면 어떤 방식인지 대강 짐작하실 수 있을 것. 만일 누군가 이런 정당한 비합법적인 불문율을 깨뜨리려 하거나 깨뜨려버렸다면, 이에 대한 복수 역시 비합법적으로 정당할 수밖에. 물론 이후에 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문제이고. 만일 복수를 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비겁한 일이다. 이렇게 벤데타의 단검을 이 사람들은 품고 살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 가족 비어트리스와 에디 카본. 1956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아마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뉴욕이 무대일 것 같다. 카본 부부한테는 아쉽게도 아이가 없다. 대신 비어트리스의 죽은 언니가 낳은 어여쁜 딸 캐서린을 자기 아이처럼 살뜰하게 키워 이제 열일곱 살의 청춘으로 만들어 놓았다. 키우는 내내, 적어도 극 안에서는 자기 아이보다 더 정성을 들여 애지중지한 것처럼 보인다.

  막이 올라가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에디나 비어트리스, 또는 캐서린이 아니라 역시 이탈리아 이민 출신인 50대 변호사 엘피에리 씨. 엘피에리는 이 할렘가 구성원들의 출신, 성향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어서 에디 카본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말한다. 어디서 본 것 같지? 그렇다. 그리스 고전극의 코러스가 하는 일을 그대로 맡아 극의 진행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있다. 특정 상황에서 등장인물이 왜 이런 식으로 행위할 수밖에 없는지, 이후에 사건이 어떻게 진행했는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관객은 이를 통해 극의 스토리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건 아서 밀러만 사용한 기법이 아니라 그리스 고전극 이후에도 그리 드물지 않게 채용한 수법이라 특별할 건 없다.

  코러스 역의 엘피에리 씨는 종종 극 속에 변호사라는 특정인의 신분으로 직접 등장해 주인공 에디가 스토리를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연하겠지만 엘피에리 씨는 코러스가 진화한 등장인물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패전국 이탈리아에서는 일자리가 없다. 산업기반이 없는 시칠리아는 더 심각하다. 비어트리스의 사촌 마르코는 이 와중에 세 아이 가운데 하나가 결핵에 걸려 고통받고 있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 치료도, 약도 먹이지 못하는 지경이다. 도움의 손길도 찾을 수 없다. <표범>을 쓴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공작 같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 역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장들 한테는 아이들 목구멍이 범의 아가리 같이 무서운 형국이라서. 그리하여 마르코는 금발의 잘생긴 동생 로돌포와 함께 뉴욕에 사는 사촌누이 비어트리스를 찾아 불법 이민, 불법 취업하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이것이 또다른 시련의 시작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마르코는 가난하지만 거구의 힘센 장사. 로돌포는 아담한 체구에 잘생기고 하이 테너로 노래도 수준급에, 여자 의상을 재단하는 솜씨마저 뛰어나다. 그러나 로돌포도 뉴욕에 가면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해야 한다. 주급 30~40 달러면 그게 얼마냐. 뉴욕에선 푼돈일지 모르지만 시칠리아에 보내면 한 식구 잘 먹고, 병든 아이 약도 사 먹여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충분한 돈인 것을. 이렇게 마르코와 로돌포는 뉴욕에 도착해 비어트리스와 에디의 작은 집에 몇 달 기한으로 머물기로 한다. 빈 손으로 와 뉴욕의 불법이민 브로커에게 빚을 갚으려면 비싼 월세를 주고 방을 얻기 곤란해서 폐를 끼치는 일인 줄 알지만 이 또한 시칠리아 식 사고방식으로는 친척으로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에디 역시 기꺼이 자기 집에 공간을 마련해주기로 동의한다. 부부 침실의 침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침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 집주인인 자신이 결코 (자기 침대는 손님에게 주고) 맨바닥에 자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땅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속으로는 그렇겠다.


  에디의 또다른 고민.

  정말 애지중지, 아예 눈꺼풀 안에 넣고 키우던 캐서린이 벌써 열일곱 살. 몇 달 지나면 열여덟 살의 성인이 되는 데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는 더 시키지 못했지만 밖으로 내돌리기 싫어 속기학원 또는 직업학교에 보내는데, 여기서도 특출난 재주를 보여 타자와 속기의 최우등 실력을 보였다. 그래 속기학원 원장이 때마침 직원을 뽑아야 하는 배관회사에 주급 50달러 자리를 마련해준다. 실력이 이미 졸업생을 능가하는지라 아직 졸업이 1년 남았지만 1년 후에 학교에서 졸업시험만 보면 학력을 인정해주겠다는 특별 배려 수준이다.

  그러나 에디는 마땅하지 않다. 에디 눈에는 아직도 아이 같다. 저 여린 것이. 게다가 배관회사가 있는 곳이 브루클린의 험한 부두노동자가 득시글거리는 항구 근처, 그것도 모자라 해군기지 바로 앞에 있으니 가히 늑대굴 바로 코앞이다.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캐서린은 그것도 모르고 벌써 짧은 치마를 입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다닌다.


  드디어 시칠리아에서 마르코와 로돌포가 도착했는데, 마르코는 그렇다고 치고, 하나도 유감이 없지만, 젊고 잘생긴 로돌포는 노래도 잘해, 금발이기도 하고 게다가 캐서린의 옷도 기막히게 수선해준다. 이것만 가지고도 열불이 나건만 둘이 데이트를 하는 눈치. 2막으로 가면 아이쿠, 집에 들어오니까 비어트리스가 시장에 간 사이 옷차림이 어수선한 캐서린의 방에서 로돌포가 나오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아직 캐서린을 품에서 풀어줄 마음이 없는 에디 카본. 그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방향으로 이들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개나 있나. 오히려 이들과 이 골목 사람들이 에디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가게 되는데, 그리스 고전 비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차마 내가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이제부터 내게 제일 중요한 아서 밀러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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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2-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여기서 말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다리...>이 그만큼 좋으셨군요! 암
튼 엄청난 비극이긴 합니다....

yamoo 2026-02-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나머지 작가의 작품들은 한 권씩 읽어 봤으요~~
읽고 드는 생각이...희곡은 정말 나와 안 맞는다는 거였습니다. 재미도 없고, 인상적이지도 않고..
주제도 좀 구태의연하고...뭐, 그렇습니다..희곡 중에서 그래도 가장 재밌었던건 이강백의 <파수꾼> 정도.. 걍 제가 희곡을 정말 안 좋아하는 듯합니다..ㅎㅎ
근데 별 5개!! 궁금증이 일긴 하지만 희곡이라서 패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