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톨츠 대산세계문학총서 124
파울 니종 지음, 황승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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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니종은 이름만 몇 번 들어본 작가.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오자마자 보관함에 넣어두었으나 이름이 워낙 비까번쩍해서 감히 주문해 읽어볼 생각을 못하다가 2017년 1월, 이제야 읽은 바, 2014년 7월에 나온 책이 아직도 초판 1쇄다. 첫째는 문지가 문지답게 독자들이 읽건 말건 도대체 광고나 이벤트 같은 걸 멀리하는 저 구름 위의 출판사인 것이 이유일 거고, 둘째가 니종 역시 니종이라서 니종의 작품 중에선 그나마 읽기 쉬운 축에 든다고 해도 도무지 이걸 읽고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라거나 하여간 어떤 종류의 찬사를 가져다 붙이는 인종들이 거의 없어서일 텐데, 사실 문지가 잘난 척하는 거 밥맛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3년 반 동안 아직도 초판 1쇄가 팔리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간한 독자들이라도 찾지 않을 줄 번히 알면서 실험적인 대산 시리즈로 계속 작품을 찍어내는 건, 솔직히 다른 출판사들도 본을 받아야 하며, 독자 역시 좀 사서 읽어줘야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수준이 올라갈 거라는 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책인데 이리 설레발을 늘어놓느냐, 라고 궁금해 하지 마시라. 할 얘긴 벌써 다 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써 놓은 책이다. 근데 이 <슈톨츠>가 니종이 1인칭시점이 아닌 3인칭시점으로 쓴 유일한 소설작품이란다. 책 뒤에 작품해설을 읽어보니, 작품의 주인공 이반 슈톨츠가 거의, 그러니까 전부 다는 아니고 거의 작가 파울 니종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베낀 거더구먼.
 주인공 이름이 책 제목이다. 이건 낯설지 않다. 슈톨츠라는 스물다섯 살 먹은 스윗쩌란트 젊은이가 있었는데 김나지움을 졸업하자 홀어머니가 자신을 더 이상 지원해줄 수 없음을 당연하게 알아듣고 즉각 독립을 해 대학을 가는 대신 노가다 반년을 뛰더니 번 돈을 갖고 이탈리아 반도 장화 코 부분에 해당하는 부둣가 도시 칼라브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기골이 당당하고 근육에 지방질이 풍부하게 붙은 이탈리아 여인네한테 동정을 뗀 슈톨츠. 아줌마한테 위협을 느꼈는지 곧바로 나폴리로 행선지를 바꿔 거기서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머물다가 다시 스위스로 돌아온다. 어느 회사 도서관의 임시직 사서로 취직한 슈톨츠가 여러 명의 아가씨들과의 연애를 경험하다가, 기회가 생겨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해 낮엔 학교에 다니고 밤엔 야간 우체국에서 일을 하던 중, 남부 독일의 목사 따님과 엮여 결혼을 한 다. 고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남부독일의 숲가에 있는 외딴 농가에서 고흐를 연구한다는 핑계로 아내와 갓난 아들은 처가에 보내놓고 자기는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세월 죽이는 이야기. 이게 전부다. 정말이다. 아니, 아직 덜 얘기한 것이 좀 있긴 하다.
 전혀 이야기 감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모아, 주제theme가 만일 있다면 주제와 가까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제란 것도 그리 확실하지 않고 그냥 주인공 이반 슈톨츠가 아무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건조하게 바라보는 것이 다다. 당연히 은유, 직유 같은 수사법도 없고, 형용사도 별로 나오지 않고, 문장을 윤택하게 꾸미려는 시도도 별로 보이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현대성을 확보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거의 완벽하게 외딴 농가에서 보낸 겨울 이야기가 책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그 중의 약 30%는 빈센트와 동생 테오도르(테오) 반 고흐 사이의 편지를 비롯한 주로 초기 그림 이야기로 채워져 있으나, 그래서 뭐 어쨌다고. 대강 그림은 그려지실 것으로 믿는다.
 난 지독하게 평범한 독자 가운데 한 명. 그리하여 이 얇은 책 <슈톨츠>를 읽으며 조금도 감명을 받지도 않았고, 전혀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읽어볼 만하다는 것이 정직한 내 의견이다. 살면서 언제나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만 읽을 수는 없는 거 아냐? 한 번 쯤은 나하고 지독하게 맞지 않지만 읽은 다음에, 흠, 이런 것도 그럴듯한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싶은 책도 일 년에 한 권쯤은 읽어야지. 많이는 말고. 안 그랴?
 오늘의 독후감에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작가 니종과 슈톨츠의 차이점에 관해선 써놓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으시겠지만 혹시 호기심 동하시는 인구, 아니 실례, 독자의 0.1%에 해당하시는 분들에게 행여 실례라도 할까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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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2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이거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본 책인데, 언젠가는 읽겠죠- ㅎㅎ

Falstaff 2018-01-24 10:14   좋아요 0 | URL
^^ 건투를 빕니다.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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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이혼한 아버지와 새엄마하고 같이 살고 있던 열네 살의 소년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이름부터 짚고 넘어가자.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처럼 성family name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 그러니까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라고 하면 성이 케비슈톄르시, 이름이 죄르지. 그런데 임레 케르테스의 경우엔 헝가리 이름을 유럽식 이름으로 바꿔 쓴 것이다. 헝가리 식 이름으로 쓰자면 ‘케르테스 임레’. 내가 알고 있었던 케르테스는 역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음악가, 케르테스 이스트반.
 하여간 1944년 어느 초봄, 죄르지 소년의 아버지가 노동 봉사대에 징집되어 출발해야 하는 전날을 아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해서 조퇴를 허락받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당연히 말이 노동 봉사대일 뿐이고 사실은 노동 수용소라 해야 마땅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죄르지의 아버지 역시 가슴에 노란별을 꿰매 달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목재상의 거의 모든 권리와 귀중품을 선량한 헝가리인 직원 슈퇴 씨에게, “사업에서뿐 아니라 인생의 여러 다른 영역에서도 보장을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증서도 받지 않고 그냥 맡긴 채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역시 우리는 안다. 이날이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임을.
 아버지의 지침에 따라 친엄마 대신 새엄마와 살던 죄르지는 여름이 되자 정유회사에서 노력봉사를 해야 하는 유대인 학생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다. 학교 대신 전차 혹은 버스를 타고 셸 정유회사로 출퇴근하는 신세가 됐지만 승인 없이 시내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유대인 신분에서, 자유롭게 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 생긴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도로 위에서 버스를 세운 헝가리 경찰이 유대인들을 전부 ‘수집’해 기차를 태워 보낸다. 도착한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 아우슈비츠가 악명 높은 수용소인 건 알았지만 그곳이 강제노동을 시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곳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유대인만 추려서 노동 위주의 수용소로 다시 보내고 건강하지 않다는 (불편 혹은 장애를 포함해 노동하는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보낸 ‘중간 정거장’ 같은 곳이란 건 몰랐다. 이곳에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려 열여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가스실 행을 피한 죄르지는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 다시 부헨발트를 거쳐 해방을 맞아 헝가리로 돌아온다. 이 과정이 케르테츠의 소년시대하고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작품 <운명>은 분명히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소설의 스토리. 수용소 내에서 당한 구타와 굶주림 같은 것도 당연히 묘사가 되어 있고, 영양실조에서 시작하는 생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 쉽게 감염되는 전염병 등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심심풀이 사격연습으로 살인을 하거나, 안나 제거스가 쓴 소설 <제7의 십자가>에서 독일 군 장교의 악랄한 고문의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본인이 유대인이기도 하고(이건 풍문이다. 확증할 정도로 정확한 정보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유대인이기에 앞서 흥행에 목숨을 거는 영화제작자이기 때문에 <쉰들러 리스트>에서 붉은 옷을 입은 소녀의 죽음을 상징으로 학살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며, 안나 제거스는 본인이 독일인이라는 부채감을 안고 자국민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인륜적인 범죄를 더욱 강조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스필버그와 제거스의 공통점은, 아무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수용소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 게르테츠는 세 군데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차이츠 수용소를 거쳤고, 작중에선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를 최상의 곳으로 추억하기도 한다. 당연히 차이츠에서 극도의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추억 속에선 수용소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정말이다. 읽어보시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84쪽)


 위의 인용문은 독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상당히 중요한 문장이며, 이런 문장이 하나 더 있어서 함께 소개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내가 점점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여기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란 뜻이다.” (282쪽)


 위의 대사를 하는 죄르지. 15세 소년이다. 약 10개월에 이르는 수용소 생활과 부헨발트에서부터 부다페스트까지의 여정으로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문장들은 등장인물, 열다섯 살의 죄르지가 아니고 완전한 성인이고 지식인이자 소설가인 44세의 케르테츠 임레가 한 말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자신이 근현대 세계사 상 가장 극한의 고통이라 일컫는 수용소를 경험해보고 근 30년이 흐른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란 것.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이곳에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곳이 수용소 안이었든 헝가리 경찰과 독일 헌병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부다페스트 게토지역이었든 모든 유대인(혹은 모든 인간)은 자신이 처했던 시기가 가장 어려웠을 것이라는 담담한 독백. 이리하여 이 작품 <운명>은 르포르타주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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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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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운슬러>, 뒤 라스의 <내 사랑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읽는 시나리오. 완전 타임 킬링용.
 민음사의 ‘책 소개’를 소개해볼까?


 “서부 장르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켜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코맥 매카시의 신작”
 “코맥 매카시가 써 내려간 핏빛 서사시”


 책 뒤표지엔 《워싱턴 포스트》가 이렇게 평을 했다고 자랑이다.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 등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처럼, 매카시는 그 어느 책보다 위대하고 깊이 있으며 창조적인 작품들을 써냈다.”


 <카운슬러>를 읽고 작가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종자들일까? 워싱턴 포스트 문화부 문학담당자는 어떤 새끼라서, 매카시한테 얼마나 뇌물을 받았으면 이 책이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그 어느 책보다”라고 했으니까)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것들이 다 미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민음사 광고 담당 팀장과 워싱턴 포스트 문학평론 담당자라고 하는 인간들은 한 권의 셰익스피어도, 한 권의 멜빌이나 도스토옙스키나 포크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정신 나간 인류가 이렇게 많아서 어찌 세계 평화가 오겠느냐 말이지.
 직접 읽어보니 위의 허망한 찬사 가운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수사는 오직 하나 “핏빛 서사시”라는 거. 그냥 마구 총 쏘고, 신체 절단하고 그런 것에 ‘서사시’라는 헌사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면. 하긴 <일리아드>나 <삼국지연의>를 보더라도 인간의 모가지들은 추풍의 낙엽처럼 날리니까 마음 넓은 내가 그러려니 하겠다. 좋다, 핏빛 서사시. 광고 카피니까 이 정도는 수긍을 해 줘야 속 좁다는 말은 안 들을 테니.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 은막에 빛이 비치면 어떤 영상이 나올까,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생각해보라. 동양인 남자와 프랑스 국적의 백인 여자가 길고 긴 섹스를 나누고 있는데 그 위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터져 버섯구름이 뭉실 솟는 흑백 장면이 오버랩 되는 거. 마치 희곡을 읽을 때처럼, 시나리오를 읽는 독자는 자신만의 화면을 연출할 권리가 있다. 영화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의 시나리오 혹은 희곡을 읽는 진짜 재미는 각자가 다 다른 화면이나 무대를 만든다는 거 아닐까. 사실 시청각이라고 하지만 (음악을 듣는 행위는 별개로 하고) 인류에게 상상력을 촉발해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시청각을 제외한 평면 위의 문자들, 인쇄물을 읽는 거라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절대 <카운슬러>를 읽지 마시라.
 <카운슬러>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시나리오가 그럼 개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런 종류는 영화로 만든 다음 정신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은막의 화려한 빛을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거 같다. 나 같은 일반인, 거기다가 동양인들은 생각하기 힘든 마약 제조 판매상들의 잔혹하기 비할 데 없는 무협지 드라마를 어떻게 동감하면서 읽을 수 있겠나. 킬링 타임 목적으로 영화관에 가서 팝콘 집어 먹으며 두 시간 동안 멍하니 즐기다가 나오는 것이 장땡이지.
 멕시코 후아레스라는 절대 무법 지대에서 분뇨차 윗부분을 절단해 마약을 가득 들은 드럼통 세 개와, 바야흐로 제대로 숙성되기 시작한 사람의 시체를 담은 드럼통 하나를 실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분뇨통을 용접한 차량을 타고 무려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이 미국 땅으로 들어온다. 시신을 담은 드럼통은 무슨 역할을 할까. 궁금하시지? 그건 마약 조제, 공급상들의 유머란다. 이런 위험한 일을 할 때는 유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의 ‘유머’. 돈을 위해 범죄 집단에 의하여 대도시 한 가운데에서 목이 절단당하는 이야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모든 인류에게는 이 책은 말 그대로,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갈채하다가 급기야 매카시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계관을 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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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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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대표적 간행물인 세계문학전집 170번. 현재까지 350번에 육박하는 시리즈이니 분명 중쇄일 것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그러나 초판 1쇄였다. 원래 170번은 유대인 작가 솔 벨로우의 <오늘을 잡아라>였는데, 역자 또는 판권을 갖고 있는 원작 출판사와 계약문제인지 절판을 시키고 대신 찍어 삽입한 책이다. 좋다 뭐. 그러나 이 책 <썩은 잎>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의 불의에 대한 저항도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겠다는 다짐도 다 개떡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돋보이는 것이라고는 ‘대단한 배짱’. 적어도 백성의 소리, 출판사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란 독자일 텐데, 그러면 독자의 소리를 올곧게 들을 마음은, 창사 50년이 넘는 동안 개가 물어갔고, 이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막 책 만드는 거 같아 안타깝다. 번역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편집위원 가운데 한 명이거나 말거나,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해서 최저 시급 주며 교정 작업을 했으며, 그걸 데스크에서도 검토 안 하고, 번역자도 그냥 패스해 찍지 않으면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 원래부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아주 균일한 정도로 고르게, 불행하게도 타 출판사보다 잦은 빈도로 오탈자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건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한다. 읽다가 100쪽 넘어가니까 그냥 웃음만 나오더라. 제발 출판사를 문화사업이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철저하게 이윤을 내기 위한 회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부탁하는 거야?). 백성을 올곧게 만들 생각은 당신들 아니어도 너무 충분하오니 더 이상 하지 마시고, 책, 그러니까 상품merchandise을 상품처럼 만들기만 하세요.



 책 표지를 넘기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첫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서문 대신이다.


 비참하게 죽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대해, 어떤 시민도 매장하거나 울어서는 안 되며, 새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주어 먹어 치우게 하라는 포고문이 공포되었다는 말이 있어, 착하디착한 크레온께서 너와 나를 위해, 그러니까 나를 위해 포고문을 발표했고, 아직도 그 명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온다는 거야. 이 포고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감히 금지한 것을 행하는 사람은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테니 말이야. (7쪽)


 글쎄,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문은 그냥 서문. 본문으로 넘기는 순간 서문은 기능을 멈춘다. 그러나 이 책은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읽으면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다. 법으로 엄하게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러주는 안티고네. 소설 속에선 한 집단, 소도시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증오를 받아온 자의 시신을 매장하려 하는 늙은 대령. 작품을 맛있게 읽으려면 콜롬비아의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사건 두 가지를 미리 알아두면 좋다. 천일전쟁이라 일컫는 정부군과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자유당 게릴라와의 비정규 내전(1898~1902)과, 1928년 12월에 자행된 식품회사 파업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대학살. 대령의 가족은 천일전쟁을 피해 가상의 도시 마콘도에 정착했으며, 그 해 대령의 첫 번째 아내는 딸을 낳다가 죽는다. 1903년에 우연히 두 인물이 도착하는데 한 명은 마콘도의 신임사제 ‘풋내기’ 다른 한 명은 유럽에서 있었던 모종의 전쟁에 참여했던 의사. 사제 풋내기는 천일전쟁에서 자유당 게릴라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며 희한하게도 의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것을 주인공 대령은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물론 작가가 마르케스 아닌가. 결코 이 두 명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지만.
 의사는 대령의 집에 무료로 기숙하며 눈부신 의술을 발휘해 돈을 많이 벌어도 대령의 집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나나 회사가 마콘도에 설립되어 여태 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시민들이 모두 회사의 의료 시스템으로 흡수되는 바람에 환자 한 명 없는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떨어진다. 이러길 몇 년. 그 사이 의사는 대령네 하녀와 눈이 맞아 따로 집을 얻어 나간다. 시계는 쉼 없이 1928년 12월을 향해 달려가고, 도시에 살육이 벌어지는 와중에 문제의 의사를 제외하고 마콘도의 모든 의사는 폭력을 피해 도망한다. 총과 칼에 벌집이 된 무수한 환자를 들것에 싣고 의사의 집 앞에서 치료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의사는 노란 눈알을 굴리면서 문을 굳게 닫고, 이제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고, 그동안 치료법을 다 잊었노라는 말만 되풀이해 무수한 부상자를 방치에 의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월이 또 흐르고, 어느 날, 의사(였던 자)가 목 매 죽었다. 마콘도 주민들은 결코 의사를 매장시켜 영혼에게 안식을 주기 거부한다. 이때 대령은 딸, 외손자와 함께 죽은 이가 침상에 누운 그의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의 본문은 시작한다.
 소설의 스토리 소개는 여기까지.
 전형적인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보다는 <백년의 고독>에 더 가까운 작품. 숱한 은유와 비의가 얽힌 읽어볼 만한 소설. 특유의 중의적이고 쓸쓸한 문장들. 다 좋은데 그 우라질 오타typo가 봄날 제방에 핀 꽃처럼 눈부시게 만발하고 지랄하는 것이 차라리 예술 수준이다. 다른 책도 아니고 마르케스 책에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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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30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고 하는데 오타가 굉장히 심하군요...ㅠ.ㅠ 한가지 여쭤볼게요. 백년의 고독을 읽기 전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별2개는 이 소설이 아닌 민음사에 주신거죠? ㅎㅎ

Falstaff 2021-04-30 20:20   좋아요 0 | URL
아, 답글 달았다가 다 지워졌네요. ㅜㅜ
걍 먼저 백년고독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백년하고 이 책하고 아무도 대령이 같은 마르케스의 마음의 고향인 마콘도를 배경으로 한 거거든요. (씨, 지우기 전엔 더 잘 썼는데, 아........)
콜레라 사랑도 잊지 마세요.
별점은 당연히 민음사한테 준 겁지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답변 감사합니다. 폴스타프님 옛날 글들은 북플에서 안들어가집니다. ㅠ 알라딘 어플로 들어와야 읽을 수 있네요. 지난번 오류 생기고 후유증인가 봅니다 ㅎ아! 콜레라도 잊지않겠습니다.

Falstaff 2021-04-30 22:12   좋아요 0 | URL
옙. 저번에 한 번 폭파 당한 이후로 북플 데이터, 접속 다 망가졌습니다. 북플 자료에 의하면 제가 소장하고 (소장? 웃기죠? 갖고)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고 나온답니다. ㅋㅋㅋ 알라딘 전산 수준이 아직은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알라딘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맨입에? 그랬더니 적립금 만원 주더라고요.
음하하하하.... 그게 어디예요!!!!
 
마사 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2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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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은근히 레싱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다섯째 아이>, <풀잎은 노래한다>, <런던 스케치>, <황금 노트북>에 이어 이번에 <마사 퀘스트>까지. 이이는 페르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나서, 짐바브웨를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에서 서른 살까지 살다가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다. 제도권 교육은 열세 살까지밖에 받지 않았고 독학을 했다는데, 당시 남부 아프리카의 여성 거의 다가 이러했던 모양이다. 작가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대문을 박차고 나가 타이피스트, 전화교환원 등의 잡일을 하며 두 번의 결혼까지 겪은 것을, 이 책의 주인공 마사 퀘스트가 열여덟 살이 되어 법률사무소의 타이피스트로 취직하면서 집을 나와 몇 번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는 걸 보고, 굳이 이 책을, 출판사가 광고를 하듯이,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 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의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그것이 뭐가 됐듯이 자기의 내밀한 한 모습을 투영(“거울 속의 나”)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두 명만 대보세요. 만일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겠다.
 한 영국 남자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소한 부상을 입어 후송된 바로 그 기간 중에 자신이 속한 부대가 악명 높은 솜 전투에 투입되어 아주 깡그리 몰살을 당했다. 그것도 장교가. 어쨌건 간에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퀘스트 선생은 전쟁 후 제대를 하고, 다시 생업인 사무직으로 복귀했으나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 이제 우리는 이런 경우를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긴 병명으로 부르지만 1920년대 제국의 땅 런던에선 그냥 실패자일 뿐이었다. 남자는 이런 주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설명회에 참가했다가, 1~2년만 제대로 옥수수 농사를 지어도 투자금액을 몽땅 뽑고도 많이 남길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젊은 아내를 데리고 남부 아프리카의 저 깡촌에 있는 넓고 넓지만 말 그대로 황무지에 농장을 마련한다. 이집의 열다섯 살 먹은 딸내미가 바로 책의 주인공 마사 퀘스트.
 아프리카 식민지로 떠난 식민모국 출신의 지주 모두가 다 행복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았다는 건 레싱의 처녀작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재미있고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그러나 행복하지도 않고 부유하지 않은 영국 이민자들의 삶조차도 흑인 원주민이자 거의 노예 비슷한 참혹한 지경에 처한 원주민이 평생 뼈가 빠지고 혀가 빠지게 일을 한다 해도 결코 이들과 비슷한 환경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걸, 열여덟 살의 마사 퀘스트는 알아낸다. 고향 비슷한 아프리카 농장에서의 삶에서도 마사는 질식할 것 같고, 그리하여 탈출한 도시에서도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는 진퇴양난. 이 책이 출판된 다음 꼭 10년 후에 발표한 그녀의 최고작 <황금 노트북>에선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역 이주한 아이 딸린 두 이혼녀를 중심으로 지역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공산주의운동, 성소수자 차별 등등에 대한 발제를 했지만, 이 책에서는 인종주의와 성차별, 그리고 사회주의에 관해 약간의 문제 제기만 할 뿐, 적극적인 이슈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엔 조금 더 시간적 성숙이 필요했었나보다. 그리하여 책을 읽으면, 신경이 날카로워 주변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생각으로이거나 실제로이거나 날선 말과 대화, 선언을 일삼는 십대 후반, 하이틴의 예민한,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매우 피곤한, 정말 피곤해서 상대도 하고 싶지 않을 만한 성격을 주인공에게 부여했는데(당연히 많은 부분이 도리스 레싱이 젊었을 때 이랬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여기서 주목, 내가 읽은 레싱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그리하여 도시생활을 꾸려나가다가, 당연히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 농장 사모님의 자리에 오르면 <풀잎은 노래한다>가 되는 것이고, 아이까지 낳고도 만족을 못해 결혼을 물린 다음 유럽으로 날아가 동성의 애인을 만나면 <황금 노트북>이 되는 것이고,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구속이라는 마사 퀘스트의 신념을 그대로 지녀 돈을 모아 스스로 아프리카 내의 지방주의적 활동을 위해 자기 자신이 농장을 건설해 농장 사장님이 되면 또 다른 남아프리카 출신의 소설가 존 맥스웰 쿳시가 쓴 <추락>이 되는 거다. <황금 노트북>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이 대부분일 테니, 비록 지금은 절판이지만 다시 팔기 시작하면 꼭 읽어보시란 말씀으로 대신하고, <풀잎은 노래한다>에선 흑인 하인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며, <추락>에선 늙고 더럽고 음흉한 흑인의 첩 가운데 한 명이 될 상황으로 처해질 텐데, 과연 마사 퀘스트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도리스 레싱이 이 소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 무대는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을 시작할 무렵인 1930년대 후반의 시간 공간이다. 벽촌의 농장. 영국인 부부는 이웃한 보어인, 즉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 부부와 친한 이웃으로 지내다가 서서히 서로 보이지 않는 잉글랜드-보어인 사이의 벽이 생기는 것을 목격하고,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시내 유대인 남자형제들과도 부모의 반유대적 성향으로 멀리하면서 책을 빌려보곤 했던 취미까지 잃어버린 절정의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녀, 스스로는 민족 간은 물론이고 피부색에 따른 인종 간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저 깊은 마음속에서는 뭔지 모르는 거리감이 있는 상태. 이런 상태가 어떻게 발전되어 사건을 극적으로 만들어낼 것인지는, 책을 먼저 읽어본 사람 입장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식민지 지배계급으로 식민 모국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혹은 꿀림이랄까, 하여간 점수를 몇 점 잃고 시작하는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 이런 거 아시지? 더해서 식민지 젊은이들 사이에 결코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스포츠클럽에서 생기는 일종의 합법적 일탈, 한없이 불량하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이 사회의 정점에서 사회를 이끌고 갈 백인들과 그들의 아내가 될 아가씨들의 방종,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의 미래를 흩어놓을 2차 세계대전, 전쟁의 그림자. 이런 불확실 속에서 마사 퀘스트는 지켜지지 않는 다짐과 보이지 않는 미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줄 인식과 독서를 통해 의식이 성장하지만, 집을 나와 시내에서의 독립까지를 도와준 조스 코언, 유일한 조언자이자 후원자이지만 언제까지 가까이 하지 못할 유대인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도, 한 발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그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젊음의 낭비. 언제가 됐든 지금은 한낱 꿈일망정 그것 하나, 남프랑스에서 포도농사를 짓겠다는 꿈 하나를 간직한 채, 마사 퀘스트와 이들은 오늘도 함부로…….



*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번역을 한 나영균의 글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애써서 영어를 한국말로 옮기긴 했는데, 같은 문장을 몇 번 읽어야 할 때가 많았다. 국내 초역이라 참고할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들이 나타나자마자 남자들 목소리는 전에 없던 활기를 띠며 커졌다. 그리고 그들은 마사 자신도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꺼림칙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이 가정적인 정경에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야단스럽게 법석대는 여자들을 지켜보았는데, 마치 눈빛이 거센 두려움 속에 그들에게 들러붙은 듯했다. 그녀는 다짐했다. ‘절대절대 저렇겐 안 될 거야.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녀는 침착을 가장하며 태연한 표정으로 접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215~216쪽)


 전체적으로 무지 헷갈리는 문단인데 특히 위 붉은 글씨의 문장이 과연 무슨 뜻인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주어가 분명히 "눈빛"인데 그게 '그녀의 눈빛'인지 '여자들의 눈빛'인지 모르겠다. 혹시 (숨은)주어가 "그녀" 또는 "여자들" 아냐? 예컨데,

 "그녀가(혹은 여자들이), 눈빛이 거센 두려움 속에서, 그들에게 들러붙은……"

 이라고,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눈빛이 하도 거세 생긴 두려움 속에서, 라고 읽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 하여간 애매한 문장인 건 맞다.


 아울러, 대명사 ‘그들’ ‘그녀’ ‘그’ ‘이’ 같은 것들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독자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수렴한다는 걸, 번역하시는 분들은 제발 유념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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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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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