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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카운슬러>, 뒤 라스의 <내 사랑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읽는 시나리오. 완전 타임 킬링용.
민음사의 ‘책 소개’를 소개해볼까?
“서부 장르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켜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코맥 매카시의 신작”
“코맥 매카시가 써 내려간 핏빛 서사시”
책 뒤표지엔 《워싱턴 포스트》가 이렇게 평을 했다고 자랑이다.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 등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처럼, 매카시는 그 어느 책보다 위대하고 깊이 있으며 창조적인 작품들을 써냈다.”
<카운슬러>를 읽고 작가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종자들일까? 워싱턴 포스트 문화부 문학담당자는 어떤 새끼라서, 매카시한테 얼마나 뇌물을 받았으면 이 책이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그 어느 책보다”라고 했으니까)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것들이 다 미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민음사 광고 담당 팀장과 워싱턴 포스트 문학평론 담당자라고 하는 인간들은 한 권의 셰익스피어도, 한 권의 멜빌이나 도스토옙스키나 포크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정신 나간 인류가 이렇게 많아서 어찌 세계 평화가 오겠느냐 말이지.
직접 읽어보니 위의 허망한 찬사 가운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수사는 오직 하나 “핏빛 서사시”라는 거. 그냥 마구 총 쏘고, 신체 절단하고 그런 것에 ‘서사시’라는 헌사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면. 하긴 <일리아드>나 <삼국지연의>를 보더라도 인간의 모가지들은 추풍의 낙엽처럼 날리니까 마음 넓은 내가 그러려니 하겠다. 좋다, 핏빛 서사시. 광고 카피니까 이 정도는 수긍을 해 줘야 속 좁다는 말은 안 들을 테니.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 은막에 빛이 비치면 어떤 영상이 나올까,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생각해보라. 동양인 남자와 프랑스 국적의 백인 여자가 길고 긴 섹스를 나누고 있는데 그 위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터져 버섯구름이 뭉실 솟는 흑백 장면이 오버랩 되는 거. 마치 희곡을 읽을 때처럼, 시나리오를 읽는 독자는 자신만의 화면을 연출할 권리가 있다. 영화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의 시나리오 혹은 희곡을 읽는 진짜 재미는 각자가 다 다른 화면이나 무대를 만든다는 거 아닐까. 사실 시청각이라고 하지만 (음악을 듣는 행위는 별개로 하고) 인류에게 상상력을 촉발해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시청각을 제외한 평면 위의 문자들, 인쇄물을 읽는 거라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절대 <카운슬러>를 읽지 마시라.
<카운슬러>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시나리오가 그럼 개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런 종류는 영화로 만든 다음 정신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은막의 화려한 빛을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거 같다. 나 같은 일반인, 거기다가 동양인들은 생각하기 힘든 마약 제조 판매상들의 잔혹하기 비할 데 없는 무협지 드라마를 어떻게 동감하면서 읽을 수 있겠나. 킬링 타임 목적으로 영화관에 가서 팝콘 집어 먹으며 두 시간 동안 멍하니 즐기다가 나오는 것이 장땡이지.
멕시코 후아레스라는 절대 무법 지대에서 분뇨차 윗부분을 절단해 마약을 가득 들은 드럼통 세 개와, 바야흐로 제대로 숙성되기 시작한 사람의 시체를 담은 드럼통 하나를 실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분뇨통을 용접한 차량을 타고 무려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이 미국 땅으로 들어온다. 시신을 담은 드럼통은 무슨 역할을 할까. 궁금하시지? 그건 마약 조제, 공급상들의 유머란다. 이런 위험한 일을 할 때는 유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의 ‘유머’. 돈을 위해 범죄 집단에 의하여 대도시 한 가운데에서 목이 절단당하는 이야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모든 인류에게는 이 책은 말 그대로,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갈채하다가 급기야 매카시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계관을 씌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