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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잎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대표적 간행물인 세계문학전집 170번. 현재까지 350번에 육박하는 시리즈이니 분명 중쇄일 것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그러나 초판 1쇄였다. 원래 170번은 유대인 작가 솔 벨로우의 <오늘을 잡아라>였는데, 역자 또는 판권을 갖고 있는 원작 출판사와 계약문제인지 절판을 시키고 대신 찍어 삽입한 책이다. 좋다 뭐. 그러나 이 책 <썩은 잎>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의 불의에 대한 저항도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겠다는 다짐도 다 개떡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돋보이는 것이라고는 ‘대단한 배짱’. 적어도 백성의 소리, 출판사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란 독자일 텐데, 그러면 독자의 소리를 올곧게 들을 마음은, 창사 50년이 넘는 동안 개가 물어갔고, 이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막 책 만드는 거 같아 안타깝다. 번역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편집위원 가운데 한 명이거나 말거나,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해서 최저 시급 주며 교정 작업을 했으며, 그걸 데스크에서도 검토 안 하고, 번역자도 그냥 패스해 찍지 않으면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 원래부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아주 균일한 정도로 고르게, 불행하게도 타 출판사보다 잦은 빈도로 오탈자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건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한다. 읽다가 100쪽 넘어가니까 그냥 웃음만 나오더라. 제발 출판사를 문화사업이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철저하게 이윤을 내기 위한 회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부탁하는 거야?). 백성을 올곧게 만들 생각은 당신들 아니어도 너무 충분하오니 더 이상 하지 마시고, 책, 그러니까 상품merchandise을 상품처럼 만들기만 하세요.
책 표지를 넘기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첫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서문 대신이다.
비참하게 죽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대해, 어떤 시민도 매장하거나 울어서는 안 되며, 새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주어 먹어 치우게 하라는 포고문이 공포되었다는 말이 있어, 착하디착한 크레온께서 너와 나를 위해, 그러니까 나를 위해 포고문을 발표했고, 아직도 그 명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온다는 거야. 이 포고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감히 금지한 것을 행하는 사람은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테니 말이야. (7쪽)
글쎄,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문은 그냥 서문. 본문으로 넘기는 순간 서문은 기능을 멈춘다. 그러나 이 책은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읽으면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다. 법으로 엄하게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러주는 안티고네. 소설 속에선 한 집단, 소도시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증오를 받아온 자의 시신을 매장하려 하는 늙은 대령. 작품을 맛있게 읽으려면 콜롬비아의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사건 두 가지를 미리 알아두면 좋다. 천일전쟁이라 일컫는 정부군과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자유당 게릴라와의 비정규 내전(1898~1902)과, 1928년 12월에 자행된 식품회사 파업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대학살. 대령의 가족은 천일전쟁을 피해 가상의 도시 마콘도에 정착했으며, 그 해 대령의 첫 번째 아내는 딸을 낳다가 죽는다. 1903년에 우연히 두 인물이 도착하는데 한 명은 마콘도의 신임사제 ‘풋내기’ 다른 한 명은 유럽에서 있었던 모종의 전쟁에 참여했던 의사. 사제 풋내기는 천일전쟁에서 자유당 게릴라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며 희한하게도 의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것을 주인공 대령은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물론 작가가 마르케스 아닌가. 결코 이 두 명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지만.
의사는 대령의 집에 무료로 기숙하며 눈부신 의술을 발휘해 돈을 많이 벌어도 대령의 집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나나 회사가 마콘도에 설립되어 여태 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시민들이 모두 회사의 의료 시스템으로 흡수되는 바람에 환자 한 명 없는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떨어진다. 이러길 몇 년. 그 사이 의사는 대령네 하녀와 눈이 맞아 따로 집을 얻어 나간다. 시계는 쉼 없이 1928년 12월을 향해 달려가고, 도시에 살육이 벌어지는 와중에 문제의 의사를 제외하고 마콘도의 모든 의사는 폭력을 피해 도망한다. 총과 칼에 벌집이 된 무수한 환자를 들것에 싣고 의사의 집 앞에서 치료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의사는 노란 눈알을 굴리면서 문을 굳게 닫고, 이제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고, 그동안 치료법을 다 잊었노라는 말만 되풀이해 무수한 부상자를 방치에 의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월이 또 흐르고, 어느 날, 의사(였던 자)가 목 매 죽었다. 마콘도 주민들은 결코 의사를 매장시켜 영혼에게 안식을 주기 거부한다. 이때 대령은 딸, 외손자와 함께 죽은 이가 침상에 누운 그의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의 본문은 시작한다.
소설의 스토리 소개는 여기까지.
전형적인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보다는 <백년의 고독>에 더 가까운 작품. 숱한 은유와 비의가 얽힌 읽어볼 만한 소설. 특유의 중의적이고 쓸쓸한 문장들. 다 좋은데 그 우라질 오타typo가 봄날 제방에 핀 꽃처럼 눈부시게 만발하고 지랄하는 것이 차라리 예술 수준이다. 다른 책도 아니고 마르케스 책에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