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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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이혼한 아버지와 새엄마하고 같이 살고 있던 열네 살의 소년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이름부터 짚고 넘어가자.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처럼 성family name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 그러니까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라고 하면 성이 케비슈톄르시, 이름이 죄르지. 그런데 임레 케르테스의 경우엔 헝가리 이름을 유럽식 이름으로 바꿔 쓴 것이다. 헝가리 식 이름으로 쓰자면 ‘케르테스 임레’. 내가 알고 있었던 케르테스는 역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음악가, 케르테스 이스트반.
 하여간 1944년 어느 초봄, 죄르지 소년의 아버지가 노동 봉사대에 징집되어 출발해야 하는 전날을 아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해서 조퇴를 허락받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당연히 말이 노동 봉사대일 뿐이고 사실은 노동 수용소라 해야 마땅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죄르지의 아버지 역시 가슴에 노란별을 꿰매 달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목재상의 거의 모든 권리와 귀중품을 선량한 헝가리인 직원 슈퇴 씨에게, “사업에서뿐 아니라 인생의 여러 다른 영역에서도 보장을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증서도 받지 않고 그냥 맡긴 채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역시 우리는 안다. 이날이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임을.
 아버지의 지침에 따라 친엄마 대신 새엄마와 살던 죄르지는 여름이 되자 정유회사에서 노력봉사를 해야 하는 유대인 학생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다. 학교 대신 전차 혹은 버스를 타고 셸 정유회사로 출퇴근하는 신세가 됐지만 승인 없이 시내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유대인 신분에서, 자유롭게 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 생긴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도로 위에서 버스를 세운 헝가리 경찰이 유대인들을 전부 ‘수집’해 기차를 태워 보낸다. 도착한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 아우슈비츠가 악명 높은 수용소인 건 알았지만 그곳이 강제노동을 시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곳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유대인만 추려서 노동 위주의 수용소로 다시 보내고 건강하지 않다는 (불편 혹은 장애를 포함해 노동하는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보낸 ‘중간 정거장’ 같은 곳이란 건 몰랐다. 이곳에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려 열여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가스실 행을 피한 죄르지는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 다시 부헨발트를 거쳐 해방을 맞아 헝가리로 돌아온다. 이 과정이 케르테츠의 소년시대하고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작품 <운명>은 분명히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소설의 스토리. 수용소 내에서 당한 구타와 굶주림 같은 것도 당연히 묘사가 되어 있고, 영양실조에서 시작하는 생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 쉽게 감염되는 전염병 등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심심풀이 사격연습으로 살인을 하거나, 안나 제거스가 쓴 소설 <제7의 십자가>에서 독일 군 장교의 악랄한 고문의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본인이 유대인이기도 하고(이건 풍문이다. 확증할 정도로 정확한 정보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유대인이기에 앞서 흥행에 목숨을 거는 영화제작자이기 때문에 <쉰들러 리스트>에서 붉은 옷을 입은 소녀의 죽음을 상징으로 학살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며, 안나 제거스는 본인이 독일인이라는 부채감을 안고 자국민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인륜적인 범죄를 더욱 강조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스필버그와 제거스의 공통점은, 아무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수용소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 게르테츠는 세 군데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차이츠 수용소를 거쳤고, 작중에선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를 최상의 곳으로 추억하기도 한다. 당연히 차이츠에서 극도의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추억 속에선 수용소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정말이다. 읽어보시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84쪽)


 위의 인용문은 독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상당히 중요한 문장이며, 이런 문장이 하나 더 있어서 함께 소개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내가 점점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여기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란 뜻이다.” (282쪽)


 위의 대사를 하는 죄르지. 15세 소년이다. 약 10개월에 이르는 수용소 생활과 부헨발트에서부터 부다페스트까지의 여정으로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문장들은 등장인물, 열다섯 살의 죄르지가 아니고 완전한 성인이고 지식인이자 소설가인 44세의 케르테츠 임레가 한 말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자신이 근현대 세계사 상 가장 극한의 고통이라 일컫는 수용소를 경험해보고 근 30년이 흐른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란 것.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이곳에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곳이 수용소 안이었든 헝가리 경찰과 독일 헌병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부다페스트 게토지역이었든 모든 유대인(혹은 모든 인간)은 자신이 처했던 시기가 가장 어려웠을 것이라는 담담한 독백. 이리하여 이 작품 <운명>은 르포르타주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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