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총사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책 읽는 재미, 적어도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누가 있어 알렉상드르 뒤마와 어깨를 견줄까. 아주 오랜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마음과는 달리 선뜻 책을 사게 되지 않아 자꾸 뒤로 미루기만 했던 소설. 당연히 소년시절부터 <삼총사>의 축약본, 만화책, 영화 같은 것들 숱하게 봐왔지만 정작 뒤마가 쓴 소설의 완역본은 처음 읽었다. 다 읽은 다음에, <삼총사>는 당연히 완역본을 읽지 않으면 진짜 제 맛을 알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건이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연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일어난다. 그리고 이걸 축약하여 소년용, 영화 시나리오, (아동용)만화책으로 만들려면, 음모와 악마성과 기타 등등, 성인이 읽기엔 흥미진진할지언정 소년들에게는 선뜻 권하기 힘든 비도덕의 전형이 책을 힘차게 견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로 만들었거나 청소년용으로 다시 쓴 <삼총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 세 권으로 된 이 책의 첫째 에피소드로만 구성된 것이 보통이다. 그야말로 진짜 <삼총사>를 만들어가는 초입만 읽거나 보고 감히 <삼총사>를 읽고 봤네 하는 것이니, 마치 현덕, 운장, 익덕이 분홍빛 복숭아꽃이 만발한 과수원 뜰에서 염소 한 마리 잡아놓고 좋은 술 진탕 때려 마시면서 의형제를 맺는 소위 “도원결의”까지 읽고 나서, 내가 <삼국지연의>를 읽었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면 자기 형 무대를 독살한 형수 반금련과, 혼인의 침상에서 분탕질을 친 푸줏간 주인이자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서문경이를, 무대의 아우 무송이 한 주먹에 때려죽여 복수하는 것까지 읽고, 내가 <수호전>을 읽었네, 하는 것과 같다. 못 믿겠지? <삼총사> 읽어보시라니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세 권에 천 쪽이 넘는 걸 하루에 한 권씩, 그것도 밤마다 소주 한 병씩 마셔도, 사흘에 완파할 수 있을 정도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한 번 손에 들었다하면, 낮엔 소위 “뒤마 폐인” 또는 “삼총사 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거.
 내용이야 뭐 다들 아시는 거니까 여기다 또 주접스럽게 소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완역본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는데, 다르타냥과 세 명의 귀족 출신 총사들의 맞수가 처음엔 추기경과 떨거지들이었다가, 나중엔 상대역이 안느 드 브뢰유, 또는 라 페르 백작 부인, 또는 밀레디 드 윈터, 또는 샤를로트 바크송, 사실 네 명이 다 같은 여자인데, 이 신출귀몰하고 눈부신 금발에다가 글래머, 경국지색의 미인과 떨거지들로 바뀐다. 여기서 미인과 그 ‘떨거지’의 범위 속에 놀랍게도 붉은 모자의 추기경까지 포함된다는 사실. 당연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추기경은 추기경 나름대로 어깨에 힘을 팍팍 주고 있으나, 책의 후반으로 가면 틀림없이 그도 밀레디의 떨거지 가운데 한 명임이 분명하다. (책에서는 목적상 추기경이 국왕 루이 13세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음흉하고 현명한 악당으로 나오지만, 역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왕을 도와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훌륭한 “중세” 권력자였다)
 밀레디. 당연히 영어로 Milady를 일컫는 말일 텐데, 나는 왼쪽 어깨에 백합 문양의 낙인이 찍힌 이 여자만큼 팜 파탈을 본 적이 없다. 앞에서 말했듯 적당한 키에 맑고 흰 피부, 눈부신 금발에 당시 미인의 기준에 딱 맞을 포동포동한 살집과 한 번 봤다, 하면 숨이 넘어갈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빼어난 외모에다가 숨 막히는 말솜씨, 순간순간 능란하게 변신하는 순발력과 상대의 심리상태를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파악하는 안광의 소유자. 웬만한 인간이라면(남자는 당연하고 여자를 포함해도) 이 여자와 5분간의 대화만 했다하면 거의 틀림없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초인간적인 설득력까지, 거의 신 또는 악마의 바로 옆에 그녀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여자가 남자였다면? 그리 잘 생긴 사람이 신 또는 악마, 가운데 거의 대부분 악마의 바로 옆에 있을 정도로 악역을 준 인물은 누구? 이거 퀴즈다. 어느 작가가 또 19세기에 있어서 굉장한 미남을 자기 작품마다에 등장시키는데 하나같이 악당으로 만든 소설가는? 궁금하셔? 바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못생겨서, 잘 생긴 남자한테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랬다고 치고, 뒤마는 왜 절세미인한테 이리 야박한 배역을 줬을까? 뭐라? 별 걸 다 가지고 고민한다고? 그렇다. 그냥 놔두자.
 19세기를 프랑스 문학의 역사로 만들기 시작한 알렉상드르 뒤마. 앞에서 말했듯 다른 건 몰라도 책 읽는 재미, 스토리 하나로 독자를 확 잡아당기는 힘에 관해서는 도무지 이이와 어깨를 견줄 작가가 별로 없다. 죽을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무지막지한 거액의 보물을 손에 넣고 복수를 실행에 옮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완벽한 검정색을 띈 튤립을 만들어낸 <검은 튤립>에서의 펄쩍펄쩍 뛰는 현장감에 이어,

 

 

 한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팜 파탈의 악마적 장악력을 구경하는 일 역시 매우 즐거울 것이다. 물론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등장인물들의 순진성 같은 것이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혹시 알아? 무대가 되는 1620년대의 프랑스에선 사람들이 정말 그리 순진했었는지. 베토벤의 교향곡 악보를 지금 보면 너무 단순해서 깜짝 놀라지만 아직도 감동을 하듯, 우린 알렉상드르 뒤마의 순진한 등장인물들을 보고 여전히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 날 믿으시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시는 분은 아시는 바와 같이, 괴테가 21세기에 와서 저 동아시아 변방의 한 사내로부터 무지막지한 핍박을 받고 있다. 그렇다. 난 괴테가 징글징글하게 싫다. <파우스트>도 싫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긴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읽었다. 나름대로 마지막 괴테일 것이라 짐작한 때문이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 지난 1월의 몹시 추웠던 밤에 맞춤한 가격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토마의 참 아름다운 작품 <미뇽>의 원작이라 읽어보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괴테의 소설이라 차일피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토마스 만이 쓴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어서.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를 쓰고 50년이 지나, 작품의 사실상 주인공 이자 젊은 괴테의 짝사랑 상대 로테가 고문역 장관을 지내고 있는 괴테를 만나러 바이마르에 들른 장면을 상정해서 토마스 만이 참 재미난 소설을 썼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괴테를 한 번 더 읽어보게 된 계기였다.
 읽은 다음에 생각해보니, 내가 싫어해왔던 것이 괴테라기보다 “질풍노도strum und drang"라고 하는 18세기 독일 문학의 장르였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 휠덜린의 <휘페리온> 같은 것들. 그러니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어찌 마음에 들 수 있었겠는가. <파우스트>는 별개로 하자. 그건 운문체로 되어 있고, 기독교의 비의가 잔뜩 들어있어 나로서는 애초부터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장르다. 그럼 <빌헬름....>은 재미있었느냐고? 그걸 한 번에 확 말해버리면 독후감 쓰는 재미가 없지.
 <빌헬름....>은 드디어 괴테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끝내고, 괴테 좋아하시는 분 들으면 기겁을 하겠지만, 즉 괴테의 문학적 사춘기가 끝나고 이제 거의 완전하게 독일 고전문학 시기로 접어든 걸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격정은 온대간대 없다. 대신 무엇이 책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끝도 없는 장광설. 평생 귀족계급에 우호적인 태도를 굽힘없이 견지한 괴테답게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문장이 끝없이 쏟아지지만 못 읽어줄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모르겠다. 그런 문장을 좀 예스럽지만 성실하고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한 안삼환 선생의 노고 덕분으로 글이 빛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발언에서 주목. 안삼환의 번역을 나는 “예스럽다”고 썼다. 즉 내 경우엔 아주 좋게 읽을 수 있었지만, 번역문을 받아들이는 세대 간에 서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예를 들어 두 문단만 읽어보자.


 “주인은 평소에 하인을 단지 돈을 주고 부려먹는 노예쯤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변치 않고 추종하는 충성심과 애정이 그 하인을 주인과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덕성들은 단지 낮은 신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은 이런 덕성들이 없어서는 안 되며, 이 덕성들이 그를 훌륭하게 장식해 주는 것이지요.” (4권 2장. 책 1, 324쪽)


 “로타르는 (이것이 그이의 그리운 이름이었습니다) 저에게 독일인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그 용감한 면모부터 설명했으며, 올바른 지도자만 얻는다면 독일인은 이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국민이라는 사실을 저에게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국민의 첫 번째 특성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4권 16장, 책 1, 404쪽)


 어떠셔. 난 위 두 문단을 재미나게 읽었다. 앞의 것은 복종과 충성심이 신분 낮은 사람의 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른 지도자만 만나면 독일인이라는 종족들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릴 수 있다고 웅변하는 모습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이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학살할 수 있는 거. 그걸 수사로 가득한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만일 얼핏 읽는다면, 특히 독일 독자들이라면 그대로 세뇌洗腦될 수 있는 개연성을 이런 꼭지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하고 비슷한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말이지. 이러니 내가 괴테를 좋아할 수 있느냐 이거다.


 상인 마이스터 씨의 외아들 빌헬름이 하는 일이라고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연극배우 마리아네와 연애하는 거 말고 없다. 평소에 연극에 무지 많은 관심을 쏟은 빌헬름. 스스로도 연극에 경도되어 희곡쓰기와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니어서 더욱 마리아네에게 사랑을 느꼈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마리아네가 첫사랑이라는 거. 많은 남자한테 첫사랑이란 프리미엄은 실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환상을 들씌운다는 거. 근데 마리아네는 사실 더블데이트 중이다. 장교 한 명과 깊은 사이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빌헬름에게 마음이 쏠린 상태. 평소와 달리 빌헬름의 대시를 거부한 어느 날, 밤새 끙끙 앓으며 청혼의 편지를 쓰더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아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가 편지를 건네주려 하는 찰나, 한 건장한 남자가 마리아네의 집에서 나오는 걸 그만 목격을 해버리고 만 빌헬름. 기가 팍 꺾여 첫사랑의 꿈이 허공에 산산이 날아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울 목적으로 긴 여행길을 떠난다.
 사실 고전주의 문학, 문학만? 당시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주제는 사랑이었다. 하긴 아직까지 그렇다.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리하여 길 떠난 빌헬름은 착실하게 아버지 사업의 스케줄에 의거하여 수금도 하고, 이자도 받고(유대인도 아닌데 고리대금업도 했나?), 대금 지불시기를 연기해주기도 하다가, 제 버릇 개 못주는 법이라 처음엔 한 떼의 유랑 서커스 집단과 어울린다. 어울리기만 하지 참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만난 소년의 옷을 입은 소녀가 바로 미뇽. 암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미뇽> 1막에 나오는 절창의 메조소프라노 아리아 “Connais-tu le pays 그 나라를 아시나요?” 이 대목에서 한 번 듣고 가자. 

 

 

 


 미뇽을 만난 다음부터 빌헬름은 끝까지 미뇽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주도가 되어 다 찌그러진 배우들을 모아 연극단을 만들기도 하고, 도시의 큰 극단에 참가하다가 드디어 연극의 뜻을 접고 귀족들의 집단에 가담하면서 백작부인, 배우 필리네, 귀족 테레즈, 남작 가문의 나탈리에 등과 연애 또는 연애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 역시 기독교와, 언더그라운드의 모임 프리메이슨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셰익스피어 가운데 특히 <햄릿>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을 읽을 각오가 독자에게 필요하다. 책의 제목이 “수업시대”라는 것은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등이 주축이 된 모종의 단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빌헬름의 난봉행각을 예의 주시하며 경험을 교육으로 승화시킨다는 (참으로 웃기고 자빠진) 논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우리나라의 서정주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라고 했다. 맞지? 하여간 이런 내용의, 1천 쪽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근데 18세기라서 그런가? 의술과 위생에 소홀해서인지 정말 사람들 숱하게 죽어나간다. 하긴 그것이 정상인지도 모르겠다. 18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마흔 살은 넘지 않았을 것이니 빌헬름 주위 사람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게 내게 어떤 효과를 주었느냐 하면, 죽음을 한 사건의 종결을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 나처럼 토마의 <미뇽>의 원작임을 감안해 읽기로 마음먹은 독자들은 단단히 다잡은 상태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토마의 <미뇽>보다 4,285배 정도 더 비극이다.
 역시 친 귀족적인 괴테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장편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룩한 술꾼의 전설
요제프 로트 지음, 김재혁 옮김, 파블로 아울라델 그림 / 책세상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요제프 로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당연히 참으로 재미있는 장편소설 <라데츠키 행진곡>을 읽고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마침 헌책방에서 눈에 띄어 망설임 없이 즉각 집어 들었다. 판형이 크다. B5 정도. 파블로 아울라델, 이라는 화백이 삽화를 그려 (한 번 세볼까?) 스물네 쪽을 채웠다. 본문이 총 75쪽이니 삽화를 빼고 글씨만 들어 있는 건 불과 51쪽. 단편소설 한 편을 달랑 싣고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단편. 알코올의존증이 분명한 폴란드 출신의 노숙자 안드레아스. 어느 날 그에게 연속적인 기적이 출현한다. 어느 신사가 200프랑을 주는 것. 명예를 존중하는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돈을 갚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적선을 거부하지만 양심상 견딜 수 없으면 생트 마리 데 바티뇰 성당에 있는 테레즈 성상을 위해, 일요일에 미사를 막 끝낸 신부에게 갚으라는 말을 듣고, 반드시 그럴 것이라 다짐하며 돈을 받았다. 알콜의존증 환자가 주머니에 돈이 생겼으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득달같이 카페에 들어가 술을 퍼마시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만난 뚱뚱한 남자가 자기네 집 이사하는데 도와주면 또 200프랑을 준다고 해서 돈을 더 벌고, 잡화상에 가 지갑을 샀더니 지갑 안에 1,000프랑 지폐가 한 장 들어있고, 하여간 돈벼락이 쏟아지는 기적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1,000프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에서는 1천 프랑을 위해 살인도(그것도 자기 마누라를!) 서슴지 않을 돈이다. 그걸 또 여자와 술에 싹 말아먹고, 희한하게도 바티뇰 성당에 가서 부채를 갚으려고만 하면 그게 어긋나고, 뭐 그게 인생이긴 하지만.
 단편소설의 스토리를 더 이상 소개하면 미친 짓이다.
 작가 요제프 로트 자신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술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애주가였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또 기독교인지 유대교인지 아무튼 그렇고.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에서 나오는 ‘전설’이라는 건 ‘읽을거리’, 그 개념 속에 종교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성자들의 삶을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92쪽). 그러니까 작가 스스로 그의 말년의 작품 <거룩한 술꾼의 전설>은 한국인들이 거의 고정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전설’이 아니라 그냥 종교적 교훈이 조금 담겨 있는 읽을거리라고 여기면 딱이다. 직접 읽어보면 뭘 얘기하는지 아실 것.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의 하위개념인 ‘노벨레’, 일찍이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에서 소개가 된 장르로 규정했다고 한다. 흠. 그럼 노벨레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다는 얘기지? 이런.
 평생 디아스포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제프 로트. 내가 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다해도, 이 책을 단칼로 잘라 얘기하면, 비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즈음 읽은 몇 권의 책 가운데 재미있게, 감명깊게 또는 시간 죽이기 마침하게 읽은 것들만 모아보았습니다. 순서는 읽은 날짜 순입니다.

 

 

1. 주느비에브 빠뜨, <사서 빠뜨>

 유년기 부터 초등학생 까지의 자녀를 둔 부모에게 권하고 싶은 책. 아동 도서관에서 60년이 넘게 사서 직업을 가졌던 전문가가 권하는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 특별히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부모가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란 것.

 

 

2. 제이디 스미스, <온 뷰티>

흑인과 백인이 결합하여 가정을 꾸린 두 인텔리 가정의 재미난 야단법석. 한 쪽은 남자가 흑인이고 다른 쪽은 여자가 흑인인데 두 집안이 학문적 갈등으로 시작해 범 가족적으로 원수지간. 거기다가 적당한 베드씬까지 겹쳐 흥미로운 한 바탕의 난장판을 벌이는 게, 아주 끝내준다.

 

 

3. 에밀 졸라, <인간짐승>

목로주점의 제르베즈 아줌마가 낳은 둘째 아들. 혈관 속에 끔찍한 범죄 유전자가 흘러 욕정을 일으키는 순간 상대 여성을 살해하고 싶은 갈증으로 부르르 떠는 인간, 자크.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가 늘 그렇듯이 막장을 향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조금도 멈춤없이 질주하는 세기의 혼돈.

 

 

4.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독후감 쓰기 참 막막했던 소설. 읽고나면 가슴 속에 휑뎅그렁한 바람이 스며들만큼 인간이 가슴 속에 쌓아두는 죄책감과 허무한 그리움을 어떻게 이리 잘도 그려놓았는지. 혹시 당신은 손수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5. 존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가 있을 줄 내 몰랐다. 미국 중부의 한 소도시에 대학이 있는데 글쎄 "히틀러 학과"를 개설했단다. 심지어 독일어도 해독하지 못하는 한 인간이 히틀러 학과를 개설하고 학과장 자리에 앉았는데, 다섯번째 결혼으로 구성된 복잡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해서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다. 무조건 웃길 거 같지? 예상외로 문명비판적이기도 하고, 근사할 걸?

 

 

6. 발레리 라르보, <페르미나 마르케스>

세월이 흘러흘러, 저 먼 시절 청춘을 맞아 이제 여성을 향한 갈증이 돋을 무렵을 온전하게 보냈던 생토귀스탱 기숙학교의 기숙사.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학온 학생, 어린 수컷들이 시절을 보내는 풋풋한 일탈과 동경과 성장 이야기.

 

 

7. 카를 차페크, <오른쪽/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짧아서 단편이라기 보다 손바닥 장掌 자를 써서 장편소설이랄 수 있는 각 스물네 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 20세기 초반의 체코를 정말로 손바닥 내려다보듯 훤하게 다 써놓았는데, 범죄 이야기가 많음에도, 숱한 범죄자들의 악하지 않은 한쪽 면에 집중하는 독특한 시전.

 

 

8.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 맨>

죽은 남자 애인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애인은 여간해 생기지 않는 동성애자 교수. 그의 하루를 따라가는 작가의 시선. 도시 이곳저곳에 사랑의 흔적은 남아있고, 풋풋한 젊고 아름다운 청춘들은 눈에 띄는데 이제 그들에게 접근하기는 또 좀 그렇고, 그래, 그것도 인생이지.

 

 

9.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끔찍한 모습으로 목 매달아 죽은 친구, 뇌 헤르메스를 안고 태어난 아들, 알콜 중독 증세에 빠져든 아내.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없고, 이렇게 살 수도 없어 학생운동 출신인 동생과 함께 저 옛날 만엔 원년에 민란을 일으켰던 고향으로 귀향해서, 천만에도 몰랐다, 조선인 거물 백승기와 흥미진진한 한 판 풋볼 게임을 크게 벌이게 될지.

 

 

10. 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모든 것을 잃고 부유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삶. 그들은 여전히 자연의 한 개체로 존재하며, 주술과 의식에 의탁하기도 한다. 한때 백인처럼 군인이었던 시절엔 그들처럼 찬란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인디언으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거대 자연의 부분으로 의식을 치루어야 했으니

 

 

11. 존 치버,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존 치버의 마지막 작품. 비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작가의 겸사에도 불구하고, 존 치버는 그의 마지막 발언으로 사랑과 환경문제를 선택한다. 앞으로 남은 삶은 눈썹 만한 순간. 그가 생의 끝에서 뒤돌아 본 화면은 무엇이었을까.

 

 

1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집과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켜내는 일. 하우스 키핑. 그러면서 사라진 가족 구성원을, 꼭 그런다는 의식도 없이,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는 일. 한 고아 소녀 루스와 그의 이모 루실이 만들어가는 가족. 그리고 기다림. 미국 북서부 지역의 황량하게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배경으로 깔려 있고 책을 읽으며 그걸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

 

 

13. 토니 모리슨, <재즈>

이런 책을 흔히 필독서라고 부른다. 하지만 읽기가 쉬운 수준은 아니다. 재즈의 진정한 맛은 즉흥 연주라고 하는데, 그걸 본따 토니 모리슨이 그냥 즉흥적으로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흑인 문학이며, 첫 장면부터 쉰 살이 넘은 조 트레이스 씨가 열일곱 살의 아가씨 도카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질투에 못이겨 총으로 쏴 죽였으며, 그의 아내도 역시 질투에 못이겨 이미 죽은 도카스 양의 시신을 훼손하려 했던 충격적인 장면을 아예 내놓고 시작한다. 어때 혹 하시지?

 

 

1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새엄마 찬양> 후속편이라고도 한다. 마누라 죽고 장가든 리고베르토 씨가 새마누라 쫓아내고 독수공방을 지키며 비밀노트에 온갖 성적 판타지를 적기 시작했고, 동시에 열 살 먹은 아들놈은 새엄마를 찾아가 화가 에곤 실레를 핑계로 이제 갓 돋기 시작한 은밀한 에로티시즘을 톡,톡 건드리기 시작하는데 하여간 바르가스 요사, 요사스럽기는 하다.

 

 

15.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시간 죽이는데 장땡이다.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도시의 외딴 골목 한 구석에 비밀의 문이 있어서 허락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곳은 이른바 책의 무덤. 책의 무덤이 있다는 건 극한의 비밀. 그곳에서 발견한 책 한 권 때문에 벌어지는 사달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시대는 프랑코 개자식의 엄혹한 독재시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는 나날과 사건들.

 

 

16. 프랑크 틸리에, <뫼비우스의 띠>

역시 스릴러. 이건 스릴러인지 모르고 선택했던 책. 놀랍게도 과거와 미래가 소통을 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과거를 조정해서 한때 미래였던 현재를 바꾸려 하는데, 과거와 미래가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왔다 갔다 하기를 몇 차례였을까. 노약자와 임산부는 책을 읽지 마시라. 살인 장면이 끔찍 itself이며,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

 

 

17.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아 어쩜 좋아. 어쩌자고 이리 쓸쓸하고 사람 마음을 텅 비워버리는 진공의 상태로 몰아갈 수 있을까. 트레버가 여든한 살에 쓴 책. 그리 노년임에도 이런 감성이 충만했을 수 있었다니 놀라움 자체다. 읽는 내내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동감의 감정으로 절절매게 만드는 대단한 문장들. 그러나 (언제나 매력적인)불륜 이야기.

 

 

18. 알렉시 제니, <프랑스 식 전쟁술>

해설까지 800쪽이 넘는 길고 긴 장편소설. 인도 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 거기다가 항독 레지스탕스 전력까지 있는 노인의 회고록을 써주는 '나'. 강한 인간이 약한 동족에게 벌이는 잔혹한 학살.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저지르지 않는 무차별적 공포와 살육. 기계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인간에 대한 죽임. 이 모든 것을 알렉시 제니는 한때 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자국민들에게 또박또박 짚어간다.

 

 

19. 피오나 맥팔레인, <밤, 호랑이가 온다>

재미있는 책. 읽기 시작하면 손을 뗄 수가 없다. 호랑이가 뭔지 결코 미리 알려줄 수 없다. 정체를 밝히는 것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할머니과 노인복지사. 그리고 저 먼 먼 첫사랑. 사구지역 언덕받이의 집에선 향유고래의 울음소리와 물을 뿜는 모습도 거실의 통창문을 통해 보이는데, 일흔다섯 살의 노파한테는 하필 밤마다 호랑이가 오는 거였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원작은 <The night guest: 밤손님>. 그런데 제목을 <밤, 호랑이가 온다>라고 하니 ‘호랑이’에 대하여, 여기서 ‘호랑이’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꽉 차오는데, 이놈의 ‘호랑이’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어금니 꽉 물고 참을 수밖에.
 일흔다섯 살 자신(잡수신, 드신 : 이것들 다 좋은 단어인데 언어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홀대당하는 느낌이다. 한국인에겐 나이도 음식이다. 한 해에 한 살씩 먹는 거) 할머니 루스. 흠. 내 아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자격증이란 게 있다는 뜻이지 그걸로 돈 벌어온다는 뜻은 절대, 절대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아는데, 요즘엔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부르지 않고 무조건 “어르신”이라고 한단다. 어르신 좋아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좋은 단어냐는 말이지. 나도 좀 있어 완전 늙은이가 되어, 누가 ‘어르신’하고 부르면 별로 기분 좋을 거 같지 않다. 좋은 호칭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를테면 “형”, “오빠”, 너무 남세스러우면 뭐 “아찌” 정도는 포용할 수 있겠지만 ‘어르신’이 뭐야 어르신이, 쪽팔리게.
 하여간 75세의 노파 루스가 밤에 잠을 자는데, 침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다. 복도 넘어 거실에서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가 들리고, 이게 몸집이 거대한 포유류의 소리 가운데서도 틀림없이 고양잇과 동물의 소리다. 자기가 기르는 세 마리의 고양이는 침실 안 자기 발치에서 고요하게 자고 있으니 이 짐승들이 내는 소리는 아니다. 거실에서 킁킁 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자 루스는 분명히 이게 호랑이가 내는 소리라고 단정한다. 동물원에서 탈출을 했든 말레이 반도에서 이곳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헤엄쳐 왔든 하여간 분명한 호랑이임이 확실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루스는 전화기를 들고 자동 입력되어 있는 다이얼을 눌러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첫아들 제프리의 새벽 단잠을 깨우고 만다.
 루스는 선교사이자 의사인 아버지와 훌륭한 간호사이기도 했던 어머니와 함께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가난한 섬나라 영국령 피지 왕국에서 살다가, 영국여왕이 피지를 방문했던 1952년의 (당연히 백인들만 초대받은)무도회에서 젊은 의사 리처드 포터(우연히 우리가 아는 해리 포터의 아빠와 이름이 같다)와 난생 처음으로 키스를 했고, 그와 같은 배를 타고 피지를 떠나 호주로 오던 배에서 리처드에게 약혼자가 있으며, 여태까지 사실을 숨긴 이유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약혼녀가 일본인 과부라는 것을 밝히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리하여 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 루스는 사무 변호사 해리 필드와 결혼해 아들만 내리 둘을 낳고 잘 살았다. 첫째가 앞에서 말한 제프리. 처가가 있는 뉴질랜드에서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으며 아들 딸 쑥쑥 낳고 행복한 편이다. 둘째는 둘째답게 매사에 낙천적인 필립. 얜 홍콩에서 영어 강사하면서 역시 결혼해 아이들 낳고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이 정도면 자식농사 대빵이다. 다만 한 가지, 남편 해리. 평생 사무 변호사로 열심히 일만 하던 그는 애초부터 늙어 은퇴하면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어온 인물. 그리하여 젊어서부터 지금 루스가 사는 집을 사놓고 주택구입 대출금을 갚느라고 죽을 똥을 쌌으며, 결과 한때는 심각한 변비에 시달리기도 했는데(구라다, 구라. 내가 지은 허튼 구라), 대출금을 다 갚고 난 다음부터 여름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은퇴를 하고는 정말로 거주지 자체를 바닷가 여름별장으로 옮기고 여태 살던 시드니 집을 팔아버렸다.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노부부가 정원을 가꾸며 남은 생을 여유롭게 지내던 언덕 위의 바닷가 집은, 사구砂丘 지역이 언제나 그렇듯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하루라도 돌봄의 손길이 없으면 순식간에 황폐화되는 아주 취약한(그러나 아름답고 경치도 좋고, 심지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거실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울음소리와 이동하는 모습과 물을 뿜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집이란 거. 게다가, 주택구입 대출금을 몽땅 갚은 상태에서 땅값 비싼 시드니의 집을 팔았으니 해리/루스 필드 부부의 저금통장엔 무지막지하게 많은 돈이 숨 막혀 하고 있다는 거. 그것도 현금으로. 이해가시지?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 산 루스. 근데, 어쨌든 남자 먼저 가는 게 거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남은 인생 이제 바닷가 집에서 여유를 즐기려고 하는 찰라, 시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매일 오전에 근처 시내까지 걸어가 신문을 사오던 남편 해리가, 어느 날 아침, 열라 걷던 도중에 그만 심근경색이 왔는지 길가에서 가슴을 부여안고 죽어버렸다. 남편한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루스야말로 정말 하늘의 복을 타고난 여자.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해안가 벽촌에서 남편 병수발 하루도 안 하고 순간에 보낼 수 있는 복이 아무한테나 오늘 줄 알아? 그래, 그래. 그래도 남편 죽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하여간 병구완 안 하게 해준 서방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이런 ‘냉정한 행운’을 알려준 사람이 누군가하면, 일흔다섯 살 먹어 이젠 거동이 불편해진 루스를 하루에 한 시간씩 도와주라고 정부에서 보냈다고 주장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의 요양보호사. 프리다가 보기엔 루스의 상태가 절대로 좋은 수준이 아니고, 게다가 안 좋아지는 속도가 심각하게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네 시간으로 늘리기에 이른다. 프리다에게 오빠가 있어 개인택시를 운전하는데, 어머니가 물려준 집(건물)이 도시에 있어서 루스와 합의 하에, 도시에서 바닷가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느니, 도시에 있는 자기 방은 세를 주고 루스의 집에 있는 빈 방에서 살기로 정해, 이젠 늘 두 여인이 함께 살게 된다.
 프리다의 헌신적인 봉사에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지고, 마치 친 자식 또는 조카 비슷한 정도 들어(아, 그놈의 염병할 정情. 일찍이 심수봉이 노래했다. 사랑보다 더 드런 것이 정이라고) 이젠 둘이 떨어져 사는 건 생각도 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다. 루스의 회상 속에 잘 생긴 한 남자가 밀려들어오니 바로 첫사랑 리처드 포터. 루스는 과감하게, 이젠 홀아비가 된 리처드를 해안가 집으로 초대를 하고, 리처드 역시 겸손하게 초대에 응해 둘은 무려 오십 년 만에 상봉하는데, 어떻게 되냐고? 리처드의 나이 벌써 여든 살. 여든 살의 남자 노인과 일흔다섯 살의 여자 노인이 가능한 수준에서 모든 걸 다 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궁금하시지?
 이 책의 스토리에 관해 더 이야기하면 정말로 책 사서 읽으실 분은 김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글을 마치는 셈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독후감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보여드리지 않겠다.
 그냥 늙은이들의 사는 모습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아, 확 이야기해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다.) 일흔다섯 살의 노파의 눈으로 쓴 소설. 이런 작품도 별로 없었거니와, 있더라도 책의 주인공 ‘루스’ 같은 독특한, 그러나 너도 나도 가능하여 충분하게 개연성이 있는 주인공의 시각으로 쓴 책은 처음이다. 그리하여 내 경우엔 책을 열고 중간에 쉴 틈 없이 책에 몰입해갔다. 도무지 중간에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궁금함.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경에 대해 한 걸음쯤 물러서서 작가 시점으로 서술한 시선. 팔팔한 청춘이라서 자신의 젊음은 결코 떨어져나갈 것 같지 않은 독자에겐 흥미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나 삶을 살 만큼은 살아내, 이젠 인생의 석양을 생각할 정도면 심각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흠뻑 몰입하여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힌트를 드리자면, 역자해설에서 이 책을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얘기도 한다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리아 2018-04-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석양‘에 이른자들에게 추천하시니 저도 일독해보겠습니다.
재미를 끌어내는 글이세요. 잘보고 갑니다~

Falstaff 2018-04-05 12:39   좋아요 0 | URL
윽, 필리아figlia는 이태리 말로 ˝딸˝이란 뜻으로 알고 있는데, 인생의 석양이라시니 재미있고 놀랬습니다.
흥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의 진짜 알맹이는 독후감엔 하나도 써놓지 않았습니다. 직접 읽으실 분을 위해서요. 즐겁게 책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