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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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는 분은 아시는 바와 같이, 괴테가 21세기에 와서 저 동아시아 변방의 한 사내로부터 무지막지한 핍박을 받고 있다. 그렇다. 난 괴테가 징글징글하게 싫다. <파우스트>도 싫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긴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읽었다. 나름대로 마지막 괴테일 것이라 짐작한 때문이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 지난 1월의 몹시 추웠던 밤에 맞춤한 가격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토마의 참 아름다운 작품 <미뇽>의 원작이라 읽어보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괴테의 소설이라 차일피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토마스 만이 쓴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어서.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를 쓰고 50년이 지나, 작품의 사실상 주인공 이자 젊은 괴테의 짝사랑 상대 로테가 고문역 장관을 지내고 있는 괴테를 만나러 바이마르에 들른 장면을 상정해서 토마스 만이 참 재미난 소설을 썼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괴테를 한 번 더 읽어보게 된 계기였다.
 읽은 다음에 생각해보니, 내가 싫어해왔던 것이 괴테라기보다 “질풍노도strum und drang"라고 하는 18세기 독일 문학의 장르였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 휠덜린의 <휘페리온> 같은 것들. 그러니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어찌 마음에 들 수 있었겠는가. <파우스트>는 별개로 하자. 그건 운문체로 되어 있고, 기독교의 비의가 잔뜩 들어있어 나로서는 애초부터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장르다. 그럼 <빌헬름....>은 재미있었느냐고? 그걸 한 번에 확 말해버리면 독후감 쓰는 재미가 없지.
 <빌헬름....>은 드디어 괴테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끝내고, 괴테 좋아하시는 분 들으면 기겁을 하겠지만, 즉 괴테의 문학적 사춘기가 끝나고 이제 거의 완전하게 독일 고전문학 시기로 접어든 걸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격정은 온대간대 없다. 대신 무엇이 책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끝도 없는 장광설. 평생 귀족계급에 우호적인 태도를 굽힘없이 견지한 괴테답게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문장이 끝없이 쏟아지지만 못 읽어줄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모르겠다. 그런 문장을 좀 예스럽지만 성실하고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한 안삼환 선생의 노고 덕분으로 글이 빛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발언에서 주목. 안삼환의 번역을 나는 “예스럽다”고 썼다. 즉 내 경우엔 아주 좋게 읽을 수 있었지만, 번역문을 받아들이는 세대 간에 서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예를 들어 두 문단만 읽어보자.


 “주인은 평소에 하인을 단지 돈을 주고 부려먹는 노예쯤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변치 않고 추종하는 충성심과 애정이 그 하인을 주인과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덕성들은 단지 낮은 신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은 이런 덕성들이 없어서는 안 되며, 이 덕성들이 그를 훌륭하게 장식해 주는 것이지요.” (4권 2장. 책 1, 324쪽)


 “로타르는 (이것이 그이의 그리운 이름이었습니다) 저에게 독일인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그 용감한 면모부터 설명했으며, 올바른 지도자만 얻는다면 독일인은 이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국민이라는 사실을 저에게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국민의 첫 번째 특성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4권 16장, 책 1, 404쪽)


 어떠셔. 난 위 두 문단을 재미나게 읽었다. 앞의 것은 복종과 충성심이 신분 낮은 사람의 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올바른 지도자만 만나면 독일인이라는 종족들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버릴 수 있다고 웅변하는 모습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이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학살할 수 있는 거. 그걸 수사로 가득한 문장으로 포장하고 있어서 독자들이 만일 얼핏 읽는다면, 특히 독일 독자들이라면 그대로 세뇌洗腦될 수 있는 개연성을 이런 꼭지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하고 비슷한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말이지. 이러니 내가 괴테를 좋아할 수 있느냐 이거다.


 상인 마이스터 씨의 외아들 빌헬름이 하는 일이라고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연극배우 마리아네와 연애하는 거 말고 없다. 평소에 연극에 무지 많은 관심을 쏟은 빌헬름. 스스로도 연극에 경도되어 희곡쓰기와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니어서 더욱 마리아네에게 사랑을 느꼈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마리아네가 첫사랑이라는 거. 많은 남자한테 첫사랑이란 프리미엄은 실제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환상을 들씌운다는 거. 근데 마리아네는 사실 더블데이트 중이다. 장교 한 명과 깊은 사이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빌헬름에게 마음이 쏠린 상태. 평소와 달리 빌헬름의 대시를 거부한 어느 날, 밤새 끙끙 앓으며 청혼의 편지를 쓰더니 아직 날도 밝지 않아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가 편지를 건네주려 하는 찰나, 한 건장한 남자가 마리아네의 집에서 나오는 걸 그만 목격을 해버리고 만 빌헬름. 기가 팍 꺾여 첫사랑의 꿈이 허공에 산산이 날아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울 목적으로 긴 여행길을 떠난다.
 사실 고전주의 문학, 문학만? 당시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주제는 사랑이었다. 하긴 아직까지 그렇다.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리하여 길 떠난 빌헬름은 착실하게 아버지 사업의 스케줄에 의거하여 수금도 하고, 이자도 받고(유대인도 아닌데 고리대금업도 했나?), 대금 지불시기를 연기해주기도 하다가, 제 버릇 개 못주는 법이라 처음엔 한 떼의 유랑 서커스 집단과 어울린다. 어울리기만 하지 참가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만난 소년의 옷을 입은 소녀가 바로 미뇽. 암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미뇽> 1막에 나오는 절창의 메조소프라노 아리아 “Connais-tu le pays 그 나라를 아시나요?” 이 대목에서 한 번 듣고 가자. 

 

 

 


 미뇽을 만난 다음부터 빌헬름은 끝까지 미뇽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주도가 되어 다 찌그러진 배우들을 모아 연극단을 만들기도 하고, 도시의 큰 극단에 참가하다가 드디어 연극의 뜻을 접고 귀족들의 집단에 가담하면서 백작부인, 배우 필리네, 귀족 테레즈, 남작 가문의 나탈리에 등과 연애 또는 연애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 역시 기독교와, 언더그라운드의 모임 프리메이슨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셰익스피어 가운데 특히 <햄릿>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을 읽을 각오가 독자에게 필요하다. 책의 제목이 “수업시대”라는 것은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등이 주축이 된 모종의 단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빌헬름의 난봉행각을 예의 주시하며 경험을 교육으로 승화시킨다는 (참으로 웃기고 자빠진) 논리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우리나라의 서정주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이라고 했다. 맞지? 하여간 이런 내용의, 1천 쪽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근데 18세기라서 그런가? 의술과 위생에 소홀해서인지 정말 사람들 숱하게 죽어나간다. 하긴 그것이 정상인지도 모르겠다. 18세기 유럽의 평균수명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마흔 살은 넘지 않았을 것이니 빌헬름 주위 사람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게 내게 어떤 효과를 주었느냐 하면, 죽음을 한 사건의 종결을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 나처럼 토마의 <미뇽>의 원작임을 감안해 읽기로 마음먹은 독자들은 단단히 다잡은 상태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토마의 <미뇽>보다 4,285배 정도 더 비극이다.
 역시 친 귀족적인 괴테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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