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원작은 <The night guest: 밤손님>. 그런데 제목을 <밤, 호랑이가 온다>라고 하니 ‘호랑이’에 대하여, 여기서 ‘호랑이’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꽉 차오는데, 이놈의 ‘호랑이’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스포일러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라 어금니 꽉 물고 참을 수밖에.
 일흔다섯 살 자신(잡수신, 드신 : 이것들 다 좋은 단어인데 언어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홀대당하는 느낌이다. 한국인에겐 나이도 음식이다. 한 해에 한 살씩 먹는 거) 할머니 루스. 흠. 내 아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자격증이란 게 있다는 뜻이지 그걸로 돈 벌어온다는 뜻은 절대, 절대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아는데, 요즘엔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부르지 않고 무조건 “어르신”이라고 한단다. 어르신 좋아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좋은 단어냐는 말이지. 나도 좀 있어 완전 늙은이가 되어, 누가 ‘어르신’하고 부르면 별로 기분 좋을 거 같지 않다. 좋은 호칭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를테면 “형”, “오빠”, 너무 남세스러우면 뭐 “아찌” 정도는 포용할 수 있겠지만 ‘어르신’이 뭐야 어르신이, 쪽팔리게.
 하여간 75세의 노파 루스가 밤에 잠을 자는데, 침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다. 복도 넘어 거실에서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가 들리고, 이게 몸집이 거대한 포유류의 소리 가운데서도 틀림없이 고양잇과 동물의 소리다. 자기가 기르는 세 마리의 고양이는 침실 안 자기 발치에서 고요하게 자고 있으니 이 짐승들이 내는 소리는 아니다. 거실에서 킁킁 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자 루스는 분명히 이게 호랑이가 내는 소리라고 단정한다. 동물원에서 탈출을 했든 말레이 반도에서 이곳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헤엄쳐 왔든 하여간 분명한 호랑이임이 확실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루스는 전화기를 들고 자동 입력되어 있는 다이얼을 눌러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첫아들 제프리의 새벽 단잠을 깨우고 만다.
 루스는 선교사이자 의사인 아버지와 훌륭한 간호사이기도 했던 어머니와 함께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가난한 섬나라 영국령 피지 왕국에서 살다가, 영국여왕이 피지를 방문했던 1952년의 (당연히 백인들만 초대받은)무도회에서 젊은 의사 리처드 포터(우연히 우리가 아는 해리 포터의 아빠와 이름이 같다)와 난생 처음으로 키스를 했고, 그와 같은 배를 타고 피지를 떠나 호주로 오던 배에서 리처드에게 약혼자가 있으며, 여태까지 사실을 숨긴 이유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약혼녀가 일본인 과부라는 것을 밝히기 힘들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리하여 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 루스는 사무 변호사 해리 필드와 결혼해 아들만 내리 둘을 낳고 잘 살았다. 첫째가 앞에서 말한 제프리. 처가가 있는 뉴질랜드에서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으며 아들 딸 쑥쑥 낳고 행복한 편이다. 둘째는 둘째답게 매사에 낙천적인 필립. 얜 홍콩에서 영어 강사하면서 역시 결혼해 아이들 낳고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이 정도면 자식농사 대빵이다. 다만 한 가지, 남편 해리. 평생 사무 변호사로 열심히 일만 하던 그는 애초부터 늙어 은퇴하면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어온 인물. 그리하여 젊어서부터 지금 루스가 사는 집을 사놓고 주택구입 대출금을 갚느라고 죽을 똥을 쌌으며, 결과 한때는 심각한 변비에 시달리기도 했는데(구라다, 구라. 내가 지은 허튼 구라), 대출금을 다 갚고 난 다음부터 여름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은퇴를 하고는 정말로 거주지 자체를 바닷가 여름별장으로 옮기고 여태 살던 시드니 집을 팔아버렸다.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노부부가 정원을 가꾸며 남은 생을 여유롭게 지내던 언덕 위의 바닷가 집은, 사구砂丘 지역이 언제나 그렇듯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하루라도 돌봄의 손길이 없으면 순식간에 황폐화되는 아주 취약한(그러나 아름답고 경치도 좋고, 심지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거실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울음소리와 이동하는 모습과 물을 뿜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집이란 거. 게다가, 주택구입 대출금을 몽땅 갚은 상태에서 땅값 비싼 시드니의 집을 팔았으니 해리/루스 필드 부부의 저금통장엔 무지막지하게 많은 돈이 숨 막혀 하고 있다는 거. 그것도 현금으로. 이해가시지?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 산 루스. 근데, 어쨌든 남자 먼저 가는 게 거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남은 인생 이제 바닷가 집에서 여유를 즐기려고 하는 찰라, 시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매일 오전에 근처 시내까지 걸어가 신문을 사오던 남편 해리가, 어느 날 아침, 열라 걷던 도중에 그만 심근경색이 왔는지 길가에서 가슴을 부여안고 죽어버렸다. 남편한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루스야말로 정말 하늘의 복을 타고난 여자.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해안가 벽촌에서 남편 병수발 하루도 안 하고 순간에 보낼 수 있는 복이 아무한테나 오늘 줄 알아? 그래, 그래. 그래도 남편 죽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하여간 병구완 안 하게 해준 서방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이런 ‘냉정한 행운’을 알려준 사람이 누군가하면, 일흔다섯 살 먹어 이젠 거동이 불편해진 루스를 하루에 한 시간씩 도와주라고 정부에서 보냈다고 주장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의 요양보호사. 프리다가 보기엔 루스의 상태가 절대로 좋은 수준이 아니고, 게다가 안 좋아지는 속도가 심각하게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정부의 허가를 받아 네 시간으로 늘리기에 이른다. 프리다에게 오빠가 있어 개인택시를 운전하는데, 어머니가 물려준 집(건물)이 도시에 있어서 루스와 합의 하에, 도시에서 바닷가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느니, 도시에 있는 자기 방은 세를 주고 루스의 집에 있는 빈 방에서 살기로 정해, 이젠 늘 두 여인이 함께 살게 된다.
 프리다의 헌신적인 봉사에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지고, 마치 친 자식 또는 조카 비슷한 정도 들어(아, 그놈의 염병할 정情. 일찍이 심수봉이 노래했다. 사랑보다 더 드런 것이 정이라고) 이젠 둘이 떨어져 사는 건 생각도 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다. 루스의 회상 속에 잘 생긴 한 남자가 밀려들어오니 바로 첫사랑 리처드 포터. 루스는 과감하게, 이젠 홀아비가 된 리처드를 해안가 집으로 초대를 하고, 리처드 역시 겸손하게 초대에 응해 둘은 무려 오십 년 만에 상봉하는데, 어떻게 되냐고? 리처드의 나이 벌써 여든 살. 여든 살의 남자 노인과 일흔다섯 살의 여자 노인이 가능한 수준에서 모든 걸 다 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궁금하시지?
 이 책의 스토리에 관해 더 이야기하면 정말로 책 사서 읽으실 분은 김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면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글을 마치는 셈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독후감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보여드리지 않겠다.
 그냥 늙은이들의 사는 모습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아, 확 이야기해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다.) 일흔다섯 살의 노파의 눈으로 쓴 소설. 이런 작품도 별로 없었거니와, 있더라도 책의 주인공 ‘루스’ 같은 독특한, 그러나 너도 나도 가능하여 충분하게 개연성이 있는 주인공의 시각으로 쓴 책은 처음이다. 그리하여 내 경우엔 책을 열고 중간에 쉴 틈 없이 책에 몰입해갔다. 도무지 중간에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궁금함.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경에 대해 한 걸음쯤 물러서서 작가 시점으로 서술한 시선. 팔팔한 청춘이라서 자신의 젊음은 결코 떨어져나갈 것 같지 않은 독자에겐 흥미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나 삶을 살 만큼은 살아내, 이젠 인생의 석양을 생각할 정도면 심각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흠뻑 몰입하여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힌트를 드리자면, 역자해설에서 이 책을 ‘심리 스릴러물’이라는 얘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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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석양‘에 이른자들에게 추천하시니 저도 일독해보겠습니다.
재미를 끌어내는 글이세요. 잘보고 갑니다~

Falstaff 2018-04-05 12:39   좋아요 0 | URL
윽, 필리아figlia는 이태리 말로 ˝딸˝이란 뜻으로 알고 있는데, 인생의 석양이라시니 재미있고 놀랬습니다.
흥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의 진짜 알맹이는 독후감엔 하나도 써놓지 않았습니다. 직접 읽으실 분을 위해서요. 즐겁게 책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