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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 만세 ㅣ 민음의 시 194
박강 지음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시집을 어떻게 고르느냐. 온라인으로 책을 사기 시작한 다음부터 생긴 고민이다. 오프라인이면 서가에 삐딱하게 기댄 채 심하면 그냥 시집 한 권을 다 읽어 치워버릴 수도 있고, 몇 권의 시집을 그렇게 해치우고 나서 책방 주인의 눈 고리가 찢어질 거 같을 찰나,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 골라 구입하면 그만이었다. 온라인에선? 아, 참 고민이다.
요즘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이와 똑같은 엄살은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인구대비 시집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라나? 아무리 세계 최고의 시집 소비국가면 뭘 하는가. 시인들의 평균 연 수입이 200만원이라는데. 500만원이었던가? 200만과 500만이 비록 2.5배 차이가 나지만 이거나 저거나 진짜 그게 수입의 전부라면 다만 시간이 문제지, 굶어죽는데 적당한 수입이다. 그러니 시인들이 시간만 나면, 초대만 받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강연회니 교양강좌니, 낭독회니, 독자와의 모임이니를 하는 거다. 불쌍하진 않다. 다들 지가 좋아 하는데 뭐. 평생 배고프게 살 줄 번히 알면서 택한 스스로의 길인 걸. 배고프지 않으려면 부모한테 빌붙어! 아니면 배우자를 월급 많이 주는 직장으로 내보내! 그런 자리 없으면 그냥 최저시급 받는 알바라도 보내버려! 당장 배고픈데 쪽팔린 게 어디 있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국민들이 왜 시를 읽지 않는지 내가 어찌하여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그래도 이미 말이 이만큼 나왔으니 한 번 쯤 궁리를 해보자. 왜 독자들이 시를 멀리할까? 당연히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니, 나는 왜 시를 잘 읽지 않는지를 이야기해보자.
요즘, 아니, 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에 술과 시간의 낭비에 전력을 다하느라 책을 멀리한 약 스무 해 정도의 공백이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시는 시인들만의 무대가 된 느낌이다. 오직 고매한 표현과 은유와 암호를 나열하는 구름 위 궁전에 거처하는 인간들만이 시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즐기는 듯함. 나같이 하계에서 빌빌거리는 저잣거리 것들은 애초부터 해독이 불가능한 독특한 언어의 사라방드. 어느새 시판이 이렇게 됐더란 말씀. 나는 음악도 매우 좋아하지만 쇤베르크, 힌데미트 등으로 대표하는 현대음악까지 즐기지는 못한다. 대한민국의 시들도 어느새 그런 영역으로 들어간 거 같은 느낌. 거기다 미리 읽어보고 시집을 선택할 수 없는 온라인 쇼핑의 한계점까지. 이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시집 구입을 머뭇거리게 하는 중대한 요인이었다. 하필이면 두 문제점이 동시에 터진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알라딘의 ‘미리보기’ 기능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집 <박카스 만세>도 당연히 미리보기를 통해 책의 앞 쪽에 실려 있는 시 몇 편을 먼저 읽어보고 적어도 난수표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 사게 된 것. 1973년 생 인천 출생 시인 박강이 2013년에 낸 처녀시집이니까, 그의 나이 40세. “처녀시집이라니. 그럼 시집의 처녀막이 찢어졌느냐?”고 묻지 마라. 벌써 30여 년 전에 김모某 시인이 자신의 처녀시집 <반성>에서 써먹은 표현이다. 나이 40이면 짧게 잡아도 15년 동안 쓴 시들을 모은 시집이다. 아, 그 생각을 못했다. 시집이 균질하게 앞에 포진한 시들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말씀. 첫 번째 시 <펭귄>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밤이면 우리는
입술을 꾸욱 깨물어야 할지 모른다
혀끝은 소주로 타고
양손은 백기를 펄럭일 태세
자정이면 좀 급하니까
자정이면 눈 위에 서서
맨발로 걸어야 할 때가 다가오니까
(후략)
얼마나 좋아. 밤이면 입술을 꾸욱 깨물고 혀끝을 소주로 태우며 양손은 애인을 향해 백기를 펄럭인다니. 자정이면 눈 위에 맨발로 서서 새하얀 눈 위로 유유히 오줌을 갈기는 그림이 딱 그려진 거였다. 이 시가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시집을 선택하기 위하여 책방의 ‘미리보기’를 말 그대로 슬쩍 본 소감이 이랬다는 거다. 시를 정확하게 오해했다. 그래서 샀다.
시인이 1973년생 남자. 이거 중요한 사실이다. 이이가 육군을 만기 제대한 대졸자라면 1973 더하기 25 해보자. 그럼 1998년. 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드런 팔자를 타고난 남자들의 연도다. 세계통화기구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나라의 전 부분에서, 검정 곰이 인간 여자로 변한 이후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이 벌어진 시대. 시인은 지랄났다고 딱 그해, 혹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바로 다음 해에 대학을 졸업했을 거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시인 박강은 당시 일부 젊은이가 그랬듯이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서 국문학 박사의 학위까지 계속 가방끈을 늘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였다.
결과, 적어도 시집의 1부에선 독자가 알아듣기 쉬운 노래, 본격적으로 88만원 세대들의 우울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비록 제목은 남극의 <펭귄>, <폭설>, ‘쥐라기 공원’을 통해 포악성이 과대 포장된 육식공룡 <벨로시랩터 철학>, <히스테리아나 시베리아나> 등 광활하거나 거창하지만. 좀 궁상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시 한 수 읽어보자.
너와 나의 국토대장정
모든 길은 확정적으로 주어졌다
깃발은 19세기식 수염을 휘날리면서
쁩쁘쁘 트럼펫을 부는 구름의 입술들
귓전에서 따갑게 손뼉 치는 가로수 가지들
사흘째부터 우리는 서로 말을 잃었다
사흘째부터 취침 시간에는 어머니 사랑해
소감문에 적어야 할 명단만 늘어났다
잘했어 이제부터 너희는 빛나는 청춘이야
이마에 도장을 꽝꽝 찍으며
아침부터 태양은 머리 위에서 홍알거렸고
이력서 한 줄처럼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고 묵묵히 걸어간 동안
아, 국토대장정! 시집 제목에 나온 “박카스” 만드는 동아제약에서 주최했던 행사로, 대학생들을 추첨 선발해 (200명이던가? 300명? 에잇, 몰라!) 한 여름에 걸어서 한반도의 남쪽 반을 행군하던 거. 포장도로를 걷는 일이 쉬울 거 같지? 천만의 말씀. 발바닥 물집 말고도, 도로 자체가 비가 내리면 중앙 부분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길가가 약간 낮게(중앙선 쪽이 약간 높게) 설계되어 있다. 즉, 한 달 동안 ‘삐딱한 자세’라는 건강상 문제를 안고 걸어야 한다는 말씀. 정형외과 적的으로 가비얍지 않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약간 위험한 일. 이걸 애국적인 행사로,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신을 이길 극한 경험, 뭐 이 비슷한 일종의 “스펙”으로 변질시키고자 국토대장정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이력서 한 줄을 위해 서로 말을 잃고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걸어야 했던 것이다.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지? 이걸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당시엔 정확하진 않지만 마치 “인간극장” 이딴 종류의 다큐멘터리 비슷하게 방송도 해주고 그랬다. 슬픈 조국의 현대사지 뭐.
어찌 취직을 해도 별 수 없던 시기. 하필 (박카스 만드는 회사는 아니더라도) 제약회사에 취직해 대리직급까지 승차한 박 대리는, <박 대리는 어디에>라는 시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삼거리 약국 유리문에 파리가 붙어 떨고 있다
고무줄로 묶은 전표 다발처럼
신신파스 냄새를 돌돌 말아 뱉는 에어컨 앞
말일이면 한 번 찾아오는
백 대리가 다가와 배시시 인사한다
황 약사의 구겨진 눈꼬리가 바둑판에 꽂힌다
깨진 알을 만지작대며 불계승 위치를 계산 중이다
출시된 신약이라며 박 씨는
발기부전제 카탈로그를 슬쩍 들이민다
복날 먹은 보신탕을 선전하듯
생수통을 번쩍 들어 갈아준다, 땀을 닦는다
(중략)
약사가 만기어음을 끊는 동안
그는 위층 속편한내과의 처방전을 훔쳐본다, 한 달 새
진통제는 타이레놀 혈압제는 노바스크로 바뀌었다
뒤에서 결제를 기다리는
다국적 제약사 직원의 가방은 선물로 두툼하다
박 씨가 받은 골판지 박스엔
반품 처리된 약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후략)
박 대리가 삼거리 약국에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정기 방문을 한다. 한 달간 판 약 대금을, 그게 얼마나 된다고 치사한 황 약사가 약속어음으로 결제를 해주는 동안, 박 대리는 약국에 있는 빈 생수통을 새 통으로 갈아주고 발기부전제 카탈로그도 슬쩍 건네준다. 그러면서 보니까 박 대리네 회사의 진통제와 혈압제는 이미 다른 회사의 약으로 바뀌어버렸다. 바뀐 약을 생산하는 회사로 짐작되는 다국적 제약사 직원이 마침 박 대리 뒤에 섰는데 가방이 약사에게 줄 선물로 두툼한데, 자신의 앞엔 반품 처리된 약들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 살기 쉽지 않던 시절. 제약사의 리베이트나 선물은 아마 그 후에도 일정기간 계속되었을 걸?
한 마디로 살기 쉽지 않아, 결혼도 아이도, 직업도 포기한 최초의 삼포시대를 개막한 세대의 시들. 이쯤이면 이 시집, 감잡히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