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3
앙드레 말로 지음, 김웅권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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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읽은 앙드레 말로는 딱 세 권. <인간조건>, <왕도> 그리고 <정복자들>. 두 번째 작품만 인도차이나에서 문화재 약탈한 전력 또는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고 나머지 두 편은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정말 실감나게 쓴 책들이었다. 이 세 권의 책을 흔히 말로의 동양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에 반해 <모멸의 시대>, <희망>, <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를 서양 3부작이라 한단다. 이 중에서 <....호두나무>는 1980년대 중/후반 직장인이 거의 그랬듯 한 달 정도 걸려 억지로 읽은 기억이 난다. 앙드레 말로 전집 가운데 한 권이며 혹시 일어 중역본 아니었을까?(‘혹시’다, 혹시. 그랬다는 게 아니고!) 그리 오래 걸려 꾸역꾸역 읽어치우느라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말로의 <희망>이란 제목을 딱 보았을 때, 이 책을 구입하는데 조금도 망설임도 없었으며, 엉뚱하게도 수수께끼 하나를 떠올리면서 결제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에 환영幻影은 무지개 색으로 날개를 펼쳐 끝이 없이 어두운 인간의 위로 춤추며 날아오른다. 모든 이는 이것을 기원하고 탄원한다. 그러나 환영은 새벽이 되면 사라진다.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밤마다 태어나 아침에 죽는 것! 이것은?”
 결혼하러 온 이국의 왕자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맞히지 못하면 목을 뎅겅 자르는 이색적인 취미를 자랑하던, 스핑크스의 유일한 친구이자 중화의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 이 공주님이 내는 첫 번째 수수께끼를 듣고, 중화에 의해 정복당한 왕국의 왕자 칼라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말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다. 다시 되살아난다! 환영은 나를 유혹해 희열 속으로 들어간다. 투란도트, 그것은 바로 ‘희망’!” La Speranza!
 어떤 장면인지 들어보실까?

 

 

 말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조건>과 <정복자들>의 무대가 중국이었으니 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정작 작품의 무대는 1936년 7월 프랑코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정부 쿠데타가 터지고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진입한 다음 초기 여덟 달. 물론 쿠데타는 1939년 3월에 파시스트 군부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말로는 1936년에 조종사로 참전해 직접 국제비행대國際飛行隊 “에스카드리유 에스파냐(이후 ‘앙드레 말로 비행대’로 다시 명명)”을 조직하고 무려 65회의 출격을 감행하다 부상을 당해 귀국, 이듬해인 1937년에 작품 <희망>을 썼다(책 뒤의 작가 연표 참고했음). 나중에 전세가 역전이 되어 프랑코 개자식이 쿠데타에 성공할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의 제목을 <희망>, 즉 앞날에 대한 밝은 전망이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읽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이 있는 책들로는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가 대표적이다. 아, 페터 바이스가 쓴 <저항의 미학>에서도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국제여단에 참가하기 위해 내전 중인 스페인으로 떠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조지 오웰의 찬가에서 그(라고 추정할 수 있는 주인공 ‘나’)는 시에라 산맥 중턱의 참호에 몇 달 동안이나 하는 일 없이 지루해 미치려고 하다가, 하루는 어디서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총알에 목을 맞아 귀국해야 하는데, 스페인에 있던 내내 공산주의 안의 권력투쟁, 즉 코민테른에 의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차별과 탄압을 불평하는 게 다이며,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선 내전 말기 포로로 잡히는 순간 파시스트 병사의 선처를 받아 무사히 살아서 프랑스로 넘어온 사람의 이야기인 반면, <희망>은 정말로 말로답게 치열한 전투장면과 전투 속에서 유독 빛나는 영웅의 모습까지 묘사하는 진짜 “전쟁소설”이다. 자신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적진에 침투해 공중전 및 폭격을 감행해봤기 때문에(그것도 65회나!) 실감나는 장면의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썼다. 그러나 그에게는 바르셀로나 호텔 바에서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고 코냑을 홀짝거리며 소설을 쓰는 이미지가 더 와닿는 건, 왜? 헤밍웨이는 내전이 끝난 다음에 작품을 써서? (아, 난 왜 헤밍웨이와 궁합이 맞지 않는 걸까!)
 내가 읽은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의 공통점,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 당대 세계의 파시즘 국가/정부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일 히틀러, 중국의 장제스, 일본 군부와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도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극동, 동남아시아에서 세기가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등장한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하는 유럽의 맹주와 미국은 왜 스페인 정부를 지원해 프랑코를 초장에 박살내지 않았을까, 하는 점. 프랑코 군부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정부로부터 전차와 전투기 등을 지원받아 당시 수준으로 거의 완벽하게 기계화에 성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강철조각을 인간의 몸에 박아 넣거나 관통시킬 수 있었던 반면, 정부군(공화군)은 거의 재래식 무기로 힘겹게 파시스트들과 겨룰 수밖에 없었으니, 공화군의 패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작가도 입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스페인 정부군을 위해 전투기를 지원한 나라는 소련밖에 없었다. 난 스페인 내전에 관해 공부한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책을 읽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니, 스페인 내전에서 과반 이상을 공산당원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차지하는 국제여단이 공화군에 속해 전쟁을 하고 있고, 거기에다가 세계 공산주의의 어머니국가 소련이 지원을 하고 있었으니,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들은 오히려 프랑코를 밀어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차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너희 내전에 함부로 우리가 참전할 수 없다며 손을 딱 떼는 것으로 프랑코를 간접 지원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작품 속에서 부르주아 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강박과 경원은 심각한 수준이라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프랑스 언론인, 그래봤자 요즘 말로 프리랜서인 나달이란 작자가 등장하여 스페인의 상황을 조국에 전하는 걸로 먹고 사는데, 나달과 프랑스 인의 스페인 내전을 보는 시각은 이랬다.
 “그(나달)의 신문은 100만 명 이상의 무산자들이 읽고 있었다. 따라서 사장을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와 이들 호감 가는 (특히 프랑스인) 비행사들에 대한 찬사이고, 용병들에 대한 특이한 이야기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분이고, 죽은 자들과 중상자들(유감스럽게도 하이메는…… 결국 그는 스페인 사람에 불과했다)에 대한 감동적인 눈물이지―공산주의가 아니었고 정치적 신념 같은 것도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했다.”  (380~381쪽)
 프랑스 인들이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낭만적 전쟁이 바로 스페인 내전 아니었을까. 어떤 정치적 신념도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직 전투 중 극히 드물게 등장하는 인간애와 영웅담만이 필요했던 마지막 전쟁. 이 인용은 나중에 드골 정권 하에서 무려 10년 동안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는 앙드레 말로 자신이 청춘시대 때 객관적으로 바라본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들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정의는 어디로 가든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상태. 그리하여 내전이 끝나자마자 프랑코의 절친이 된 히틀러는 그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다음해 1940년 6월엔 무참하게도 프랑스 파리를 함락해버렸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과할까? 열강들 스스로가 빌미를 준 거라고?
 그건 그렇고, 이 책 <희망>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그걸 간단하게 몇 문장으로 이 자리에서 쓸 수는 없고, 공중전 중 눈에 부상을 당한 병사의 아버지이자 고미술학자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학자 지원병 스칼리에게 하는 대사로 각자 이 책에서 말하는 “희망”이 무엇일까를 짐작하시기 바랄 뿐이다.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희망이 있습니다…… 부당하게 단죄당한 자, 어리석음이나 배은망덕 혹은 비겁함을 너무도 많이 만났던 자는 희망을 미루어야 하지요…… 혁명이란 무엇보다 예전에 영원한 삶이 맡았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혁명의 많은 특징들을 설명해줍니다. 각자가 오늘날 정부의 형태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3분의 1만 자기 자신에게 기울인다면, 스페인에서도 살 만해질 겁니다.”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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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9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우짜 이럴 수가 !~

<그랜드 호텔>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제가
읽다 만 책들만 그렇게 딱딱 골라서 리뷰를
해주시는지 깜딱 놀랐습니다.

Falstaff 2018-07-19 15:1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 그랬습니까?
그럼 놀라지 않으시게 다음 독후감을 예고해야겠습니다.
담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고요, 그 담엔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 코트 마돈나>입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7-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읽으셨어요? ㅋㅋㅋ 전 두꺼워서 일단 모셔만 두고... ㅋㅋㅋ(모셔만 둔 책이 쌓입니다.) 저 위에 레샥매냐 님은 읽다가 그만 두기라도 하셨지, 전 첫 장 들추지도 않은 ㅋㅋㅋㅋ 독후감 예고제 좋네요. 윌리엄 샤로안 작품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인간 희극>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문예출판사 책을 사두고 아직 안 읽... ㅋㅋㅋ (읽지 않은 책을 다 읽고 책을 사야 할 텐데 말이죠)

Falstaff 2018-07-20 08: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책인데요,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아서 걍 <휴먼 코미디>라고 썼답니다. ㅎㅎㅎ